개념어 : 문학과 언어
1. 언어의 특별한 사용으로서의 문학
문학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데 일단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어란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사물이 존재하고 그것을 대신해서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언어는 사물을 표현하는 투명한 존재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올바른 언어라는 생각도 일반적이다. 마치 숫자처럼 언어는 명확한 어떤 것을 표현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실 그렇다면 언어는 필요 없다. 사물을 가지고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말하고 싶으면 나무를 가리키면 되고 물을 표현하고 싶으면 흐르는 물을 손으로 퍼담아서 상대방 얼굴에 냅다 끼얹으면 될 것이다.
반대로 언어는 있는 사물을 표현하기보다는 없는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원시인들이 불이라는 말이 필요했던 것은 타오르는 산불을 보고 놀람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보다는 불이 필요한데 불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언어는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문에 언어는 환기적 ・ 마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언어의 성격을 프로이드는 다음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어느 날 자기 손자가 실패를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손자가 실패를 가지고 놀면서 실패가 멀리갈 때 ‘포르(fort)’, 가까이 올 때는 ‘다(da)’라고 혼자 말하는 것이었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보고 손자의 실패 놀이는 자기 어머니가 가고 없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갔네’, ‘오네’ 이것을 표현하는 말과 동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어린이는 어머니의 부재라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말이라는 것은 부재하는 인간의 욕망을 대신해서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언어의 특성이 가장 살 살아있는 것이 문학에서의 언어일 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언어의 효과처럼 부재하는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지칭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김소월의 시 금잔디를 생각해보자.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핀 금잔디
이 시에 쓰여진 금잔디를 주목해보자. 금잔디가 있다는 사실, 금잔디가 아름답게 피어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 금잔디는 현실에 존재하는 금잔디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가고 없는 부재하는 님에 대한 사랑과 욕망의 표현이다. 이처럼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환기하는 이러한 언어의 마술적 ・ 환기적 성격이 가장 잘 살아있는 것이 바로 문학의 언어이다.
이렇듯 문학의 언어는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언어일 것이다. 있는 사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설명하면 그것은 자연과학의 언어이고,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설명하면 사회과학의 언어이다. 문학의 언어는 이러한 것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있어야 할 것 그러나 없는 것, 작가나 시인이 느끼기에 있었으면 좋을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문학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을 넘어서는 더 나은 현실을 꿈꾸고, 지금의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보다 바람직한 가치를 열망하고 추구해 가는 정신이 바로 문학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문학의 언어가 가진 특성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외연과 내포
언어의 과학적 사용(일상적 언어)의 최극단에 가장 근접한 것은 수학 공식일 것이다. 말이 단 하나의 정확한 의미만을 지시하는 철저한 투명한 언어가 바로 과학적 사용이다. 이때 말은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이고 사물과 언어는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말의 사용을 지시적 용법(denotation), 말의 외연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국화’라고 했을 때, “국화과에 딸린 관상용으로 심는 다년생의 풀”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바로 말의 지시적(표시적) 용법에 의한 것이다. 이때 국화의 의미는 국화라는 말의 외연을 지칭하게 된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만 쓰지는 않는다. 서정주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라고 말했을 때 국화꽃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지시적 의미 이상이 된다. 젊었을 때의 정열을 다스리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중년 여인의 품위 있는 모습이 주는 아름다움을 국화에서 서정주는 발견한 것이다. 이때 국화의 의미는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이런 것을 말의 내연 또는 내포적 의미, 또는 함축적 의미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포적 의미는 왜 생겨날까?
첫째로는, 개인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다. 각자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한 단어에서 연상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자기 집에 불이 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불이라는 단어에서 공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불은 ‘즐거움’, ‘축제’, ‘화사함’ 등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문학은 특히 이런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에 의존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회적・시대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의미의 차이이다. 똑같은 단어이지만 사회적, 시대적 환경에 따라 거기에 부여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햄버거’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똑 같이 간편한 먹을거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미국 사람에게 햄버거는 값싼 식사 대용물 정도의 의미를 갖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밥이나 떡볶이들과는 다른 좀 더 세련된 패스트푸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빠른 속도로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문화적 환경에서부터 나온 내포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원형적 의미, 즉 집단 무의식에서부터 기인하는 내포적 의미를 들 수 있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심상에서 나온 의미로 인간 존재 자체가 만들어낸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초록색은 안정을 느끼게 하고, 빨간색은 흥분을 느끼게 한다. 피나 불도 마찬가지이다. 피나 불 모두 특별한 인간의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전쟁이거나 사고이거나 아니면 화려한 축제와 함께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서로 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특히 원형적 심상이라고 하는데 문학의 언어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의 원천이다.
이런 식의 내포적 언어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문학적 언어이다. 왜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을 사용해야 하는 걸까?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낯설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의 일상적 사용, 지시적 사용을 낯설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관념과 질서, 상투적 사고에 묻힌 우리의 의식을 깨워서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시어의 의미 파악
시어를 해석할 때 단어의 지시적 의미에만 주목하면 시인의 의도나 시어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시에 나타난 상황을 고려하여 시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올바르게 시를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시어라 하더라도 어떤 요소에 중점을 두고 감상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① 내적 요소에 의한 의미 파악 : 화자, 상황, 어조, 표현 기법 등 시의 내적 요소와 표현 효과 등을 고려하여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
② 외적 요소에 의한 의미 파악 : 시가 창작된 시대적 배경이나 시인이 처한 현실적 상황 등 시의 외적 요소를 고려하여 시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泡)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
⇒ 시적 상황 : 시적 화자는 청포도가 열리는 자신의 고향을 생각하며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 내적 요소에 의한 해석 : 시의 중심 소재인 ‘청포도’는 시적 화자의 순수한 꿈과 소망을 상징하고 있고, ‘손님’은 그러한 화자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누군가로 내가 간절히 기다리는 대상이다. ‘청포도’와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 모두 푸른색의 시각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어 화자의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 외적 요소에 의한 해석 : 시인 이육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시절이었다. 시인은 조국을 상실한 현실에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광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