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식 경영은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의 화두였다. 삼성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10여 년 주기로 새로운 경영 화두를 던지며 지속적인 변화를 해 왔으며, 결과는 항상 성공적이었다. 삼성은 이제 한국 제일의 기업을 넘어 세계 전자업계를 이끄는 반열에 올랐다. 삼성의 성공은 여타의 많은 기업 문화에도 상당한 자극이 됐으며, 동부 역시 김준기 회장이 직접 나서 삼성 따라 하기에 박차를 가하는 등 삼성식 경영 스타일 접목에 노력했다. 특히 김 회장은 삼성 출신 임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동부의 삼성화(化)에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 동부그룹은 10여 년간 이어온 삼성 따라 하기에 의문이 제기되며 제동이 걸린 상태다.
동부그룹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동부화재는 지난달 대표이사인 김순환 부회장의 징계수위 완화 재심의가 금융감독원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김순환 부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인데, 김순환 부회장의 퇴진은 단순히 전문 CEO의 경영퇴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명환 전 ㈜동부 부회장을 시작으로 지난 2001년부터 이어져온 동부그룹의 삼성 경영 스타일 따라 하기가 종결됐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삼성화재 출신인 김순환 부회장은 이명환 전 부회장, 임동일 전 동부건설 대표이사 부회장과 함께 동부에 스카우트된 대표적 삼성 출신 임원이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삼성 출신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처럼 동부그룹의 체질 변화를 꾀한 바 있으며, 실제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며 김준기 회장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룹 내부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데, 무엇보다 토종 동부맨들에게 이들 삼성 출신 임원들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동부에 무리하게 삼성식 마인드를 이식하려 한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조직 내에 암묵적인 권력암투를 비롯해 삼성 출신 임원들에 대한 불만이 외부로도 여러 차례 전해진 것이다. 삼성처럼 그룹의 7대 사업을 세계적 브랜드로 육성하고자 했던 김준기 회장으로서는 우선시 되어야 할 내부 결속에 문제가 나타나자, 결국 방향 선회를 선택했다. 부회장들이 각 사업을 총괄 책임지는 삼성식 책임경영 대신 지난해부터 경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김 회장이 직접 그룹 경영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 일부에서는 동부그룹이 무리한 삼성 따라 하기로 조직 자체에 과부화가 걸려 현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순환 부회장 퇴진
김순환 부회장은 여타의 삼성 출신 CEO 중에서도 특히 경영진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던 CEO다. 김준기 회장 역시 평소 “외부 전문가로서 혁신을 성공시킨 모범 사례는 김순환 부회장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실적 역시 우수해 지난 2004년 그가 대표이사에 오른 이후 동부화재 주가는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지난해 매출은 5조9804억원으로 취임 당시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순익 규모 역시 경쟁사인 현대해상이나 LIG손해보험보다 많게는 두 배 격차를 벌였다. 지난 1월4일에는 이 같은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대표이사 사장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순환 부회장이 실손의료보험 불완전 판매로 인해 금감원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으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금융회사 CEO가 금융당국으로부터 문책경고를 받으면 3년간 연임이 불가능하며, 다른 회사 임원으로도 갈 수 없다. 김 부회장은 이에 대해 재심 신청을 낸 바 있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이에 업계에서는 김 부회장이 동부그룹의 비금융 계열사로 자리를 옮길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김 부회장 후임은 김정남 전 부사장으로, 신임 김정남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1979년 동부에 입사한 ‘토종 동부맨’이다.
화려한 등장과 쓸쓸한 퇴장
동부에 삼성 임원이 영입된 시기는 지난 2001년으로 당시 김준기 회장은 이명환 전 부회장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하며 동부에 삼성식 시스템 경영을 구축해 주길 당부했다. 이 전 부회장은 삼성 출신 임원들을 대거 끌어들이며 동부와 삼성이 접목된 새로운 동부그룹을 만들어 갔다. 실제 이 전 부회장 영입 이후 동부그룹 10여 개 주력 계열사 중 삼성 출신 CEO는 8명에 달했으며, 지난 2006년 말에는 계열사 임원 240여 명 중 100명이 삼성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부그룹 내부에서는 삼성 출신 외부인이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조직을 흔든다며 불만이 터져 나왔고, 삼성 출신들의 맹목적 삼성 따라 하기가 도를 넘어 동부 고유의 기업문화를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6년 말 이명환 전 부회장의 이탈 전후 그룹 안팎의 시각도 달라져, 당시 8명에 달하던 계열사 CEO 중 현재 남아 있는 인사는 단 한 명도 없다. 대신 그 자리는 현대차나 포스코 출신 및 동부그룹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김순환 부회장이 데려온 김병태 부사장과 손재권 부사장, 황의주 감사 등 역시 김 부회장의 퇴진과 함께 사표를 제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삼성 출신들의 연이은 퇴진에 대해 동부그룹 출신 인사들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김준기 회장 아래 재집결
지난 1969년 설립된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이 모태인 동부그룹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관계로 외부인사 수혈이 필요불가결한 구조이다. 김준기 회장은 이에 삼성을 벤치마킹 모델로 삼아 그룹의 체질 변화를 모색했으며, 삼성식 개혁 모델은 동부그룹의 경영 지배구조를 변모시켰다. 이전까지 김준기 회장이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던 동부그룹에 책임경영이 도입된 것이다. 지난 2001년 이후 동부그룹은 소재, 화학, 건설·물류, 금융 등 4대 핵심 사업별로 부회장을 내세우고 자율경영을 하게 했다. 소재 부분은 윤대근 부회장이, 화학은 최성래 사장이, 건설·물류는 임동일 부회장이, 금융은 장기제 부회장이 맡았다. 그 정점에는 이명환 부회장이 있었다. 그는 지주회사 격인 ㈜동부를 맡으면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고, 김준기 회장은 이들이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는 삼성식 경영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명환, 임동일 등 삼성 출신 인재들이 나가면서 부회장 중심의 책임경영은 사실상 막을 내렸으며, 동부그룹의 경영전략 역시 대폭 바뀌었다. 삼성식 ‘시스템 경영’ 대신 성과를 중시하는 전략이 수립됐으며, 인재 영입도 삼성 출신 핵심 인재 영입에서 성과 창출이 가능한 실무형 인재 수혈로 바뀐 것이다.
현재는 삼성식 모델 구축에 따른 시행착오 때문에 과거와 달리 김준기 회장이
직접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