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더 3장 1~6절>
서론: 무엇에 무릎 꿇고 계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무릎 꿇기를 강요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의 권력 앞에, 세상의 성공 방정식 앞에, 그리고 트렌드라는 이름의 거대한 문화적 압박 앞에 세상은 우리에게 "절하라, 타협하라"고 속삭입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우리 한국교회 앞에도 이 거대한 시험이 찾아왔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신사참배라는 이름으로 우상 앞에 무릎 꿇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 의식일 뿐"이라며 타협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그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주기철 목사님과 평양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세상의 거대한 권력 앞에 홀로 서서 무릎 꿇기를 거부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모르드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신앙의 야성이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1. 세상에 꿇어 절하지 않는 '일사각오'
하만이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자, 모든 사람이 왕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꿇어 절했습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여기서 '꿇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카라(כָּרַע)'이고, '절하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샤하(שָׁחָה)'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카라와 샤하를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각 사람(아말렉 족속)이었던 하만은 하나님의 대적이었고, 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곧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이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샤하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 말씀하시며 단칼에 거절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神社)라는 거대한 세상 권력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했던 이유도 바로 이 '카라'와 '샤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께만 드릴 수 있는 영적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눈앞의 유익을 위해, 교회의 생존을 위해 세상의 맘몬(돈)과 권력 앞에 교묘하게 '카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절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거룩한 고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유혹과 타협을 듣지않는 믿음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동료 신하들이 날마다 권면했습니다.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한 번만 고개 숙이면 편한데 왜 일을 크게 만드느냐?" 그러나 모르드개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여기서 '듣지 아니하고'에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 동사가 바로. '로 샤마, (לֹא־שָׁמַע)'입니다. 이는 단순히 안 들렸다는 뜻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거절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것도 '날마다' 찾아오는 집요한 유혹과 압박 속에서 끝까지, 지속적으로 '로 샤마'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거절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갇히셨을 때, 일본 순사들만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료 목회자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찾아와 "목사님, 목숨은 살아야지요. 속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겉으로는 고개 한 번만 숙입시다"라며 날마다 애원하고 권면했습니다. 그것은 피를 말리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그 달콤하고도 집요한 타협의 목소리를 '로 샤마(단호히 거절)'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우리에게 한 번의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다들 그렇게 살아." 그러나 믿음은 날마다 찾아오는 세상의 유혹을 향해 단호하게 "아니오(No)"라고 말하는 거룩한 '로 샤마'의 연속입니다.
3. 세상의 멸시를 이기는 십자가의 능력
모르드개가 끝까지 절하지 않자 하만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유다 민족 전체를 전멸시킬 음모를 꾸밉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자(בָּזָה)'입니다. 이 단어의 진짜 뜻은 "업신여기다, 멸시하다, 가치 없게 보다"입니다. 하만의 눈에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은 아주 하찮고 멸시받아 마땅한 존재,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짓눌러 죽일 수 있는 파리 목숨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세상 권력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이처럼 '바자(멸시)' 합니다.
이 '바자(בָּזָה)'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 이사야 53장 3절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바자)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바로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하신 멸시를 뜻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하찮게 여겼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형무소에서 붉은 피를 쏟으며 못 박힌 틀 위를 걸어가실 때, 일본 권력자들은 그를 미련한 자라고 '바자(멸시)' 했습니다. 산정현교회가 폐쇄당할 때 세상은 교회가 끝났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던 그 십자가의 길이 결국 승리했습니다. 일본 제국은 무너졌지만, 주 목사님이 흘린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거룩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신앙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려는 성도들을 향해 "융통성 없다"며 '바자(멸시)' 합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멸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영광스러운 증거입니다.
결론: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며 영적 야성을 깨우라
본문의 하만은 무서운 권력으로 유다 민족을 다 지워버릴 것처럼 기세를 부렸지만, 결국 그가 세운 장대에 자신이 매달리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세상 권력의 기세는 잠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권력과 유혹, 멸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믿음의 선조인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하시기 전 마지막 설교였던 '5가지 나의 기원'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더러워지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앞에 구걸하듯 무릎 꿇는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나님만 예배하는 푸른 소나무 같은 성도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에 무릎 굻어(카라, כָּרַע) 절하지(사하, שָׁחָה) 않는 '일사각오'를 다집시다.
세상의 유혹과 타협의 속삭임을 듣지 않는 (로 샤마, לֹא־שָׁמַע) 믿음을 가집시다.
세상의 멸시(바자, בָּזָה)'를 이겨내는 십자가의 능력을 붙듭시다.
우리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에 절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만 절하는 참된 성도, 참된 한국교회로 다시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