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381년, the Nicaeno-Constantinopolitanum)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세개의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그리고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파로 나누어졌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그반대편에 서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는 소수였다. 다수파는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끌었는데, 그는 문제가 된 쟁점에 대하여 별로 깊은 이해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후에도 문제가 된 어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가 동방에서 일어났다. 패배한 아리우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중립파에게도 이것은 그다지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들에게는 니케아 신조가 사벨리우스적 요소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 그러는 동안 니케아 신앙의 영웅적인 변호자가 역사의 무대에 입장하였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295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리우스 논쟁 초기에 부제(副祭, Deacon)로서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하였다. 328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373년 죽을 때까지 47년간 봉직하였다. 그 기간에 5번의 추방으로 총 17년을 유배지에 보내면서도 타협이 없는 불굴의 용기로 진리를 수호하였다.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은 사변적인 철학논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구원론에서 출발하였다. 동방교회의 구원론은 번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는 신화(神化, deification)구원론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신화로 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하기 위하여 구원개념으로 신화사상을 사용하여 발전시킨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아니면 구원은 성취될 수 없다.
니케아신조의 서명을 거부하여 면직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감독으로 복직되자 유세비우스 일파는 아타나시우스를 꺽고 아리우스를 복귀시킬 것을 획책하였다. 이들의 설득에 넘어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2년 아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 복직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를 확실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과 위협을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 독일의 트리어(Trier)로 추방되었다. 트리어를 오가는 중에 아타나시우스는 서방 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면서 니케아 신조에서 확인된 정통 삼위일체교리를 공감하게 한다. 또 아타나시우스는 서방교회에게 이집트 사막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기독교 은둔 수도사들을 소개했다. 그가 가장 흠모했던 사막의 수도자 의 삶을 그린 "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hony)"는 제국 전체에 수도원운동이 일어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2세(Constantius II)는 아타나시우스의 복귀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2세는 교회의 평화를 명목으로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 를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유사본질)"로 교체하려고 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극렬히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위대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자 니코데미아의 감독이었다가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승진한 유세비우스의 영향력에 의해 온갖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 씌고 339년 로마로 추방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아리우스 일파의 감독인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Capadocia)가 군대를 동원하여 취임하였다. 후에 유세비우스와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콘스탄티우스2세는 347년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재정유용과 권력남용이라는 날조된 혐의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2세의 형제인 서방의 콘스탄스1세(Constans I, 재위337-350)황제가 살해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3년의 전쟁 끝에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로마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2세는 동서방 로마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획득하자 교회의 논쟁을 종식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이 일에 가장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353년과 355년에 열린 교회회의에서 서방교회가 아타나시우스를 버릴 것과 동방교회의 강제적인 연합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로마감독 리베리우스(Liberius)와 당대 최고의 지성인 고올 감독 힐라리우스(Hilarius of Potiers)와 노령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Hosius of Cordoba)가 추방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356년 무력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세 번째 쫓겨나 이후 6년 동안 대부분 이집트의 수도사들에게서 피난처를 구하였다.
콘스탄티우스2세가 죽고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줄리안(Julian)이 로마의 새 황제가 되자 362년 유배되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줄리안은 기독교를 몹시 싫어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대량으로 학살되는 틈에 여섯 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쥴리안은 콘스탄티우스2세를 아버지의 살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죽음의 공포에서 떨며 성장했고, 외적인 교회의 규례들을 엄격히 지킬 것을 강요당했던 그는 콘스탄티우스2세가 주장하는 어떤 것이라도 증오하였으며, 옛 헬레니즘의 문학과 생활, 철학을 예찬하였다. 그가 황제가 되자 기독교 성직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교회를 혼란케 할 목적으로 이전에 유배형에 처해졌던 모든 감독들을 복권시켰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도 유배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는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아타나시우스는 쥴리안의 예상과는 반대로 교회를 결집하였다. 362년 아타나시우스가 소집한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간주되지 않지만, 이 회의가 381년 다가올 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위한 징검다리역할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용어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호모이우시오스 (homoiousios, 유사본질)"를 정죄하였다. 또 그의 친구들인 카파도키아 교부(바실리우스와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들의 도움을 받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을 공유한 세 위격(位格, hypostase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비록 한 본질(호모우시오스)일지라도 같은 동일한 위격(位格)이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도 분명히 반박하였다.
쥴리안은 아타나시우스가 교회를 결집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아프리카의 사막으로 도피했다. 363년 쥴리안이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로 네 번째의 망명에서 돌아왔다.
그후 동방을 다스린 발렌스(Valens,재위 364-378)는 콘스탄티노플의 아리우스파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마지막 다섯 번째의 추방을 당하나, 발렌스의 동정으로 곧 돌아와 7년 간 평화롭고 조용하게 감독직을 수행하다가 373년 사망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0?-390?)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란은 325년 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단락되었으나, 예수님이 완전한 신성(神性)을 가졌다면 그가 가진 인성(人性)은 어떤 것이며, 그 인성은 신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시리아의 라이디케아[1]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그가 비록 안디옥 근처에서 살고 있었고 그 도시에서 신학을 가르쳤지만 늘 자신의 뿌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안디옥 학파는 역사적인 예수, 즉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관심이 많은 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와 친구로서 함께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약화시킨 아리우스주의와 싸웠다. 니케아에의 승리로 니케아 신조를 따라 예수님의 신성을 굳게 믿었지만 인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면서도 완전한 사람일 때 그에게 있었을 두 의지의 조화를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육적 욕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예수의 마음에는 로고스(logos)가 들어오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로고스는 하나님이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가졌지만 인간의 마음(혹은 정신,nous)은 갖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외모만 인간이었지 내면은 완전히 하나님인 셈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카파도키아 교부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인간의 여러 본성을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만일 예수가 몸만 인간이고 마음은 신이라면, 어떻게 그런 예수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예수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히4:15).”
카파도키아 교부들 삼위일체의 토대는 아타나시우스가 놓았지만, 성령의 역할이나 삼위의 위격(位格)에 관한 본질과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일치를 포함한 완전한 삼위일체 교리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완성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4세기 내내 있었던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 이단들을 둘러싼 삼위일체 논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랴의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 330-379)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330-390), 그리고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335-395?)는 위대한 카파도키아 교부 (Capadocian Fathers)라 불린다. 카파도키아는 현재 터키의 중부지역이다.
4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와 추종자들은 성자의 신성은 인정했지만, 성령은 단지 봉사하는 영, 하나님의 해석자, 천사 중의 왕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이위일체(二位一體, binity)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예배하는 반면 성령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바실리우스는 성령은 "진실로 하나님"이시며,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한 하나님으로서 삼위 가운데 세 번째 위격(位格) 혹은 본체 (hypostasis)임을 주장했다.
그들은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인 인격 (individual person)이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성(humanity)을 공유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빌어서 사용했다. 바실리우스는 "하나님은 한 본질 (ousia)이지만 그 안에서 개별적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격(hypostasis)이 구별 된다"고 했다. "한 본질(ousia)과 세 위격(hypostases)"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특징적인 공식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381년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의 소집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 모인 150명의 감독들은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확정하였다. 모든 형태의 아리우스적인 종속론과 사벨리우스적인 양태론을,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다. 1차 니케아 신조를 개정하여 성령과 교회에 대한 "제3항"을 포함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탄생하였다. 이 신조는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재차 확인되며, 동방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교회들에서 발표된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 신조는 명실상부한 최초의 보편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
381년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the Nicaeno-Constantinopolitanum)
전능하시어, 하늘과 땅과, 볼 수 있는 것이나,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나는 믿습니다. 온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외 아들,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나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한 본질에 속하시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음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하시고, 사람이 되시고, 또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믿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임을 믿습니다. 주(主)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나는 믿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나는 믿습니다. 나는 죄 없이 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를 인정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바라봅니다. 아멘. --
I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Spiri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e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A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oke by the Prophets. And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I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