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9일, 맑음.
설사기운이 있어 새벽에 화장실 두 번 다녀오고 설사약을 먹다. 아침에 오기로 한 가이드가 안 오고 그제 밤 다녀간 지렐이 다시 나타나더니 가이드가 바뀌었고 새 가이드가 11시에 올거란다. 그래서 베이스캠프로의 출발도 점심 후로 늦춰진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제 온 캐나다 여성 트레커 중 한 명이 밤 10시경 급히 하산했단다. 어제 아침에도 헬기가 와서 환자를 실어갔다. 4750미터인지라 고소증 환자가 심심찮게 생긴다.
이틀치 먹고 자는데 8545루피를 계산하다. 그안에 세탁비 1200루피, 어제 점심도시락값 2천루피, 오늘아침 홈사장에게 전화한 비용 300루피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고지대라 그런지 뭐든지 비싸다.
드디어 나를 도와줄 클라이밍가이드가 왔다. 이름은 파상 누루 쉐르파. 10살짜리 아들과 딸을 둔 젊은 아빠다. 근데 와이프랑은 이혼했단다.
오늘은 오전부터 롯지에 사람이 북적인다. 스웨덴 임자체팀 4명, 그리고 14명의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훈련등반 차 임자체를 오르기 위해 방금 도착. 그 팀의 클라이밍가이드에 포터까지 합치니 수십 명이다. 에베레스트 원정 등반기간도 총 2달을 잡는단다. 휴.. 기간도 엄청나구만.
점심 먹고 오후 1시 마침내 BC를 향해 출발하다. 나와 총바가 먼저 가고 파상은 발이 빠르니 나중에 오겠단다. 길은 임자체에서 흘러내린 빙퇴석지대의 우측 능선을 따라간다. 그러다 얕고 넓은 개울이 나오면 그 왼쪽으로 따라간다. 간간이 언덕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완만한 길이다. 3시경 오른쪽 높은 언덕 너머에 임자초 호수가 있는 곳에 오다. 멀리 노란 텐트 한 동이 보인다. 이제 한 시간이면 도착한단다. 3시 반. BC쪽에서 누가 손을 흔들며 내려온다. 파상이다. 헐! 어찌된 일이지? 나보다 뒤에 있어야 할 친구가 앞에서 내려오다니.. 파상이 웃으며 자기는 지름길로 더 빨리 왔단다.
3시 50분 BC 도착. 총바는 내 짐을 놓고 다시 추쿵으로 내려간다. 시즌이라선지 텐트가 50동은 되는 것 같다. 내 텐트는 상태가 너무 안 좋다. 낡고 먼지투성이인데다 바닥에 작은 구멍까지 나 있어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가만 보니 밑바닥에 시트도 안 깔고 텐트를 쳤다. 키친보이를 불러 시트를 깔도록 하다. 구멍은 이따 테이프로 막아야겠다. 다른 상업등반대에 비해 준비가 소홀해 보인다. 저녁식사로 스파게티가 들어오는데 국수가 입안에서 깔깔하여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럴 때를 대비해 가져간 불로비빔밥을 들고 키친텐트로 가서 끓인 물을 달래서 붓고 기다리다 먹다. 앞에 다녀간 클라이머들 후기를 읽어보면 고소에서 입맛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인스탄트 비빔밥 2개, 누룽지 2봉지, 미수가루 1인분씩 포장된 것 2봉지, 그리고 된장국 1포를 BC에 가져왔다. 이것들은 모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것들이다. 오늘부터 하산 때까지 나를 지켜줄 비상식이다. 저녁 먹고 있는데 파상이 들어오더니 자기는 내일아침 일찍 루트 살피러 가겠다고 한다. 하이캠프 가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내일 점심 후 나랑 키친보이랑 올라가란다.
된장국에 비빔밥을 먹고 나니 한결 낫다. 잘 먹고 나니 간간이 찾아오는 두통도 없어지는 것 같다. BC는 바람이 제법 분다. 이를 닦고 뜨거운 물을 수통에 담아 침낭에 넣고 나니 하루가 끝나는 것같다. 등반 제 1일차가 무사히 간다. 내일은 하이캠프 오르는 날이다. 내일도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마음이 편하다.
(붐비는 추쿵리조트 앞마당)
(베이스캠프 가는 길)
(베이스캠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
4월 10일. 구름
어 제 밤 자리에 눕자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인해 이대로는 감기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상대책 강구하다. 매트리스와 침낭사이에 고어텍스 방풍의를 깔았더니 올라오는 냉기를 상당히 차단할 수 있었다. 가끔씩 두통으로 깨기는 해도 1-2분 정도 심호흡을 하면 괜찮아져 다시 잠이 들었다. 6시경 밝아지자 꽁마(뇌조)들의 구구소리에 잠이 깨다. 이 녀석들은 마치 닭처럼 돌아다니며 인간이 흘린 것들을 주워 먹느라 바쁘다. 바야흐로 꽁마들에게도 지금은 피크시즌이다. 아침식사로 포리지, 토스트, 그리고 계란이 나왔는데 토스트는 다 말라서 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포리지가 먹을 만해서 포리지와 달걀로 아침은 오케이다.
어제까지는 구름 한 점 없이 맑더니 오늘은 구름이 꽤 끼었다. 자주 햇빛을 가린다. 은근히 걱정이 된다. 점심 먹고 하이캠프 오를 일 말고 오전에는 할 일이 없다. 원래 주마링 등 간단한 등반연습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파상 왈 ‘우리 둘만 독립적으로 등반할 것이니 따로 연습할 필요 없단다’ 그래? 그래두...
11시에 예정된 점심을 10시에 가져온다. 기름에 튀긴 감자와 티벳 빵이다. 저걸 잘못 먹으면 기름 때문에 또 배탈날 수도 있겠다. 점심을 되가져가라 이르고 대신 감자를 삶아달라고 하다. 그리고 야크치즈 약간만 달라고 하다. 감자는 씨알이 작아도 달고 맛있다. 5개를 금새 다 먹다. 근데 치즈는 딱딱하다. 며칠 전 추쿵리에서 먹던 말랑말랑한 치즈가 아니다. 딱딱한 치즈를 씹으며 그래도 정상을 가겠다고 버티는 내가 대견하다.
점심 후 하이캠프로 출발하려는데 두 키친보이가 내 카고 짐을 지려하지 않는다. 자기들 짐도 무겁다는 것이다. 그러면 포터를 부르던지 해야지 이 친구들아.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더니 둘이서 내 짐을 나눠진다. 어제오늘 겪어보니 Jvill이 일을 맡긴 이 상업등반대 회사는 관리시스템이 없다. 다들 멋대로다. 당연히 있어야 할 쿡도 없고 키친보이가 요리를 한다.
12시 6분 출발. 잔뜩 찌뿌린 하늘에서 후두둑 뭔가 떨어진다. 우박이다. 아뿔사.. 하이캠프 올라가는 길에 바람불고 우박이라니.. 가이드가 있어야 이럴 때 계속 진행해도 되는 것인지 의논을 하지..
길은 BC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가다가 빙하가 오른쪽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꺽어 북쪽 가파른 산등성이로 붙는다. 어휴, 경사도가 만만치 않다. 비스따리 비스따리 천천히 돌길을 오른다. 키친보이 두 녀석이 무거운 짐을 지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누구는 돈벌려고 저리 힘들게 가고 누구는 돈써가면서 이리 힘들게 가는구나. 이것이 인생인가?
맞은편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무리의 등정팀이 내려온다. 에스토니아 팀이고 모두 등정에 성공하였단다. 이들이 내려가고 좀 있다 파상이 내려온다. 직감적으로 파상이 이들 에스토니아 팀과 오늘 함께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녀석 나한테는 루트정찰 간다고 둘러대고 이 팀 당일가이드로 아르바이트했구나. 쉽게 말해 ‘더블 뛴 것’이다. 나를 만나고도 같이 있지 않고 BC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겠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괘씸하지만 내일 등정에 무리만 없다면 눈감아줄 수도 있다.
언덕을 오르니 저 앞에서 키친보이 둘이서 텐트를 펼치고 있다. 벌써 하이캠프에 다 왔나? 여기까지 1시간 30분밖에 안 걸렸다. 고도계를 보니 5470이 나온다. 어? 지도상의 하이캠프는 5640미터인데? 이상하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키친보이를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 받아들이기로 한다. 낮은데서 자면 잠은 더 잘 자겠지. 그 대신 내일 새벽에 더 많이 걸어야겠지. 텐트는 BC에 있던 것보다는 튼튼해 보이지만 입구가 찢어져 여전히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짐 정리하고 블랙티에 비스킷 몇 조각 먹고 나니 좀 낫다. 이제 남은 것은 날씨의 도움, 그리고 내 몸이 잘 적응해 주는 것이다.
텐트 안에 가만히 있으려니 무료하다. 내일 준비 차 밧데리를 전부 새 것으로 교환하다. 헤드랜턴, GPS, 카메라, 그리고 핸드폰 밧데리도 새 것으로 갈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밖으로 나오니 꽁마 한 쌍이 금슬좋게 돌아다닌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1미터 앞까지 온다.
6시에 김병장 비빔밥에 끓인 물을 부어 저녁식사하다. 소화도 잘되고 기운도 나는 것같다. 하이캠프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저녁이 되니 더 심해지고 기온도 내려간다. 실내도 영하다. 양치질하러 밖에 나가기가 싫다. 궁리 끝에 텐트 안에서 양치질을 하다. 양치물은 어떻게 할까? 다 먹은 김병장 비빔밥 봉지에 버리고 딱 봉하니 문제없다. 깔끔하다. 이제 남은 건 고소약 먹고 자는 것이다. 내일 아침 2시 반 기상, 3시 출발하기로 했으니까. 내 고소약은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같다. 다이아목스 250mg의 반 알, 징코민 80mg 한 알, 아스피린 한 알 씩을 하루 2회 먹는다. 이건 카트만두에서부터 먹는다. 그리고 D-day 전날 밤에는 다이아목스 반 알을 빼고 대신 자이데나 100mg, 또는 비아그라 작은 알 한 알을 넣는다. 단 비아그라는 매우 딱딱하므로 소화에 주의해야 한다. 2년 전 파키스탄 곤도고롤라 넘기 직전 비아그라에 체해서 엄청 고생한 적이 있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하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키친보이들)
(키친보이들이 하이캠프 텐트치고 있다)
(하이캠프에 구름이 잔뜩..)
(금슬좋게 모이를 찾는 꽁마 한 쌍)
|
첫댓글 꽁마가 뇌조를 얘기하는군요. 고소처방 소개 고맙습니다. Peak 등반니라니 다시한번 대단하시네요!
네, 우리는 뇌조라고 하는데 걔네들은 꽁마라고 부른다 하더라고요..
대범님도 peak 등반 생각하고 계시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