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누리보듬주간보호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energycho
특수교육을 지배하는 패러다임 이동
특수교육의 변화는 사회과학 패러다임(paradigm) 변화에서 연유하였고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변환는 인류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틀에서 도출된 것이다. 과학 철학가인 Tomas Kuhn(1962)은 이런 변화를 정리하여 패러다임 이동에 관한 명저를 간행하였다.
후기 산업혁명기인 1980년대 이후 주요한 패러다임 이동은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이동이며, 미시적-보수적 사회학에서 거시적-진보적 사회학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김정권, 1997, 233-241). 이런 변화는 양적인데서 질적인 것으로의 변화이고, 결과주의에서 과정주의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경쟁 체제에서 협력체제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이동은 특수교육에서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전통적으로 기능주의적 입장에 서 있던 특수교육이 해석주의 더 아나가 인간주의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런 변화가 특수교육 현장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패러다임 이동은 교육제도에서 열린 교육으로 가게 하였고 그 운영은 완전 질적 운영 체제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특수학생 교육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고 심․신의 손상을 입은 학생이 일반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게 된 것이다.
1. 변하고 있는 세계
근세기 후반의 변화는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 내에서의 변화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패러다임 간의 변화는 대변혁 즉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패러다임 이동
사회과학에서 주장되는 다중 패러다임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쿤(Kuhn)식의 패러다임 이동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현대 사회과학에서 폐기되어야 할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패러다임이 나타나는 방식에 비해 사회과학의 네 가지 패러다임은 현대에 얼마간 서로 공존하게 된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개념상으로 그럴듯하고 지적으로 사회실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식이며, 각각은 독자적인 추종 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에서 비록 패러다임 이동이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과학에서와 같은 쿤(Kuhn)식 단일 패러다임 이동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자연과학에서의 패러다임 이동은 낡고, 위기에 선 패러다임의 페기와 과학계 전체에 의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채택을 뜻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의 패러다임의 이동은 단지 사회과학계 일부에서 또는 일부 사람들에 의한 패러다임적 약속의 변화만을 뜻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천은 단지 신조를 바꾼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또한 그 변천은 다른 패러다임의 전체적인 폐기 또는 그 패러다임을 위해 계속 성실히 남아 있는 사회과학계 구성원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변하고 있듯이 신조는 역사를 통해서 변천해 왔고, 다른 패러다임들은 지구상의 특정 지역들을 지배해 왔지만, 사회과학적 사고의 네 가지 패러다임은 계속 존재한다. 각 패러다임은 그것에 동의하는 사회과학계 일부의 지도적인 틀로서 사용되어진다(Bernstein, 1976; Burrell & Moragan, 1979; Ritzer, 1980). 사회과학에서 다중의 패러다임 상태는 사회과학에서의 쿤(Kuhn)식 의미의 혁명적 과학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정상과학을 더욱 어렵게 해왔는데, 그 이유는 Ritzer(1980)가 지적하듯이 다수의 패러다임 상태는 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경쟁자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여 자기 패러다임을 방어하고, 논쟁에서 이기려는 역학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서의 변천
서구에서는 기능주의자 패러다임이 사회과학의 틀로서 선호되어 왔으므로 사회과학에서의 대부분의 연구는 미시-객관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지난 30년간 사회과학계에서 세 번의 패러다임의 이동이 있었다(Bernstein, 1976; Burrell & Morgan, 1979; Rorty, 1979).
첫 번째는 1960년대에 객관주의 내에서의 변천으로, 질서 또는 미시적 수준에서 갈등 또는 거시적 수준으로의 변천이다. 기능주의자 패러다임에서 급진적 구조주의자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은 정치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의 재등장(예: Marcuse, 1964; Althusser, 1969)만이 아니라 방법론적 접근으로서 구조주의의 등장과 관계되는 것이다(예: Chomsky, 1959; Levi-Strauss, 1963).
1970년대와 80년대의 두 가지 유사한 이동은 모두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일반적인 이동이다. 하나의 변천은 질서 또는 분석의 미시적 수준 내에서의 이동으로 기능주의로부터 해석주의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이며, 사회과학에서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의 고조와 다양한 형태의 이상주의에 대한 관심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Bernstein, 1976). 다른 하나는 거시적 수준으로의 이동으로, 거시-객관적 또는 급진적 구조주의 패러다임으로부터 거시-주관적 또는 급진적 인간주의자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이며, 이것은 마르크스(Marx) 또는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Habermas, 1973, 1975;Jay, 1973 참조).
(2)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도약
이러한 변천의 첫 번째 효과는 기능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달되지 않았던 특히 미국에서 빛을 보지 못한 다른 세 가지의 패러다임에 실질적인 발전과 방법론상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Burrell & Morgan, 1979). 두 번째 효과는 훨씬 더 혁명적인 것으로서 사회학 분야의 패러다임 이동과 관련된 발전은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으로의 도약을 가져 왔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사회과학 지식의 네 가지 패러다임의 영역밖에 있는 사회적 분석을 위한 준거의 틀이다(Bernstein, 1983; Lyotard, 1984; Rorty, 1979 참조). 포스트모더니즘의 더욱 큰 중요성은 이것이 지식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재개념화이다.
현대에 지식의 일반적인 재개념화는 기초적(foundational)이었다. 즉, 모든 지적 주장이 판단되어 질 수 있는 고정적 기본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적 관점은 독백적(monological)이며, 이것은 지식이나 진실은 단일한 패러다임 즉, 단일한 준거들의 목소리로 말하는 독백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 지식의 개념화는 반기초적이며(antifoundational) 대화적(dialogical)이다. 그것은 지적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본 근거는 없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진실」은 많은 목소리 또는 관점들 사이의 대화 또는 토론으로 더울 잘 이해되어진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Bernstein, 1979)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추구하는 사회적 탐구는 가장 좋은 최대의 방법론, 이론 또는 사회분석을 위한 단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독백적인 열망으로까지 이르러 왔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학 분야에서의 학자들은 대화적인 사회학 분석을 추구하고 있다. 가능한 다양한 여러 방법론, 이론 및 사회적 삶을 해석하는 다양한 패러다임에 대한 반기초적이며, 심사숙고한 담화,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Bernstein, 1976; Rorty, 1979).
현재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과학에서는 비교적 애매모호한 개념이지만, Antonio(1989)는 두 가지의 중요한 형태를 확인하였다. 보다 급진적인 또는 대륙적인 형태는 사회적 지식을 명백히 거부한다. 그것은 패러다임 그 자체를 쉽사리 믿지 않으며, 패러다임을 단순히 철학의 형식으로 기록된 사회에 대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초회화적(meta-narratives)인 것이라고 간주한다(Lyotard, 1979, 1984).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형태는 진보주의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 또는 미국적 입장에서는 미국 실용주의의 재활용이 된다((Bernstein, 1976; Rorty, 1979). 원칙적으로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사상에 뿌리를 둔 미국 포스트모더니즘들은 사회분석의 중요하고도 해방적인 형태의 시발점으로서의 현대의 사회과학 지식의 네 가지 패러다임을 조건부로 수용하고 있다(Antonio, 1989; Kloppenberg, 1986). 본래의 실용주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회생활의 급진적 개방과 참여의 관점에서, 즉 급진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질서-갈등, 그리고 주관주의-객관주의간의 미디어를 통해서 현대 지식을 실용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한다(Rorty, 1979; Kloppenberg, 1986).
마르크스주의(Msrxism)와 여러 형태의 신 마르크수주의(neo-Marxism), 가장 비판적인 이론과 같은 다른 형태들의 해방의 사회분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철학적 실용주의가 반기초적이고 초현대적인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 급진적 구조주의와 인간주의 각각의 현대사회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 지식의 네 가지 패러다임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 현대의 몇 가지 속성
현대 사회는 새로운 패러다임 때문에 제1차 산업혁명기와 다른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속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양적 사회를 지양하고 질적 사회로 전향한 것이다.
질은 각자에게 또 모든 사람에게서 최선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최고 수준의 학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계속해서 자기 개선을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비록 적더라도 더 좋은 일을 수행하고 더 높은 표준을 설정하고 성취하고, 더불어 일하면서 먼 미래까지 조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은 정보제작소나 학생 머리에다 어떤 사실을 수동적으로 쏟아붓고 그것을 다시 분출시키도록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 질이란 경쟁에서 협력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 결과보다는 과정(process)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 교육내용 보다는 학습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 학생은 고객이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초점을 학생에게 둔다.
◦ 교사는 교실에서 질을 제고하는 촉진자이다.
삶의 질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토대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한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경험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견해를 갖고 그들의 생활과 상황에 관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이다.
삶의 질은 삶 속에서 갖는 사람의 안전감.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에 대한 내적 만족감이나 성취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주관적 경험이나 감정으로서 삶의 질은 사람이 고려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째, 열린 사회가 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화․세계화를 추구하는 오늘의 사회는 공간적 및 시간적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가상 공간에서 교육이 가능해진 오늘을 상기해야 한다.
공간적으로 우리 사회는 열려 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란 기본 개념은 재음미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교육받는 것은 공교육이 아니라든지, 학교에 반드시 출석해야 하는 것이라든지, 학교 교육에는 반드시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인습적 개념이 재음미되고 재개념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Crook, Pakulski, & Waters, 1992).
시간 개념은 교육의 여건과 학생의 능력이나 그들의 흥미, 자아 정체감, 학습에 대한 열정 등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간은 개인의 문제이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50명의 학생이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수업해 가는 인습적 방법은 무의미한 것이다.
열린 사회는 누구에게나 기회는 동일하게 부여되지만 그들의 진보는 개인의 문제이고 개인의 최적한 발전이 가능하도록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는 제도나 틀 때문에 개인의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된다. 20세기 후반 후기 산업혁명 시기의 특색을 질적 사회라고 한다. 질적 사회는 모든 것이 열려져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제도나 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셋째, 경쟁적 사화가 아니고 협력적 사회이다.
기능주의의 대표적 경향성은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적 사회의 특성은 협력체제이다. 양에 가치를 부여하던 시대에는 경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량생산 체제에서 같은 물건을 여러 사람이 생산할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다품종 소량 생산에서는 여러 사람이 협력하는 것이 제품의 질을 제고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이 된다. 경쟁에서는 상대가 적이고 무쩔러야 하고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협력체제에서는 상대가 이웃이고 역할 분담과 수행을 해야하고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구성원이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이다. 장애학생은 경쟁체제에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낙오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협력체제에서는 우리 사회의 자연스런 일원이 될 수 있고 완전사회통합의 기초가 될 것이다.
2. 통합교육 패러다임 이동
통합교육에 대한 요청은 60년대 시작되어서 분리 교육이 비판의 대상이었고 주류화 교육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80년대는 주류화 교육에 대해 심각한 비판이 일어났고 그 대안은 완전통합교육이었다.
1)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
특수교육계는 최근 두 번째 자기를 비판하는 국면에 들어서 있다. 첫 번째 비판은 20세기 초반기부터 특수교육의 전통적 모형이 되어 왔던 분리특수학급에 대한 1960년대의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Howe & Miramontes, 1992, p.70), 1975년에 미국장애아교육법(PL 94-14: The Education for All Hacdicapped Children Act; EHA)의 제정과 주류화 교육의 도입으로 이 비판이 가라앉았고, 특수교육에 수반된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1975년 후 곧 두 번째 자기 비판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 그것은 미국장애아교육법과 주류화를 거부하고 또 다른 접근방법으로 EHA와 주류화에 수반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으로서 완전통합교육(Regular Education Initiative : REI)을 요청하게 되었다. 첫 번째 자기 비판이 궁극적으로는 전문분야의 확실성을 증가시켰던 반면에 제2의 국면은 반대효과를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장애아교육법과 주류화 운동이 일어난지 15년 후에 특수교육계는 이전보다 교육실제에 대해 확신이 부족하게 되었다.
장애학생은 1950년대까지 분리된 특수교육기관에서 교육받아 왔으며 이런 조치가 당연한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 지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은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분리교육에 대한 비판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고 1970년대에 새로운 통합교육의 형태를 갖추고 다시 1980년대 후반에 새로운 비판과 그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장애학생을 일반학교에 취학시키는 것으로 통합교육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물리적 통합은 교육의 포기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통합이란 모든 학생이 학교체제 내에서 각자의 독특한 교육적 욕구(unique educational needs)에 부응한 적절한 교육을 보장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2) 통합교육에 대한 논의
장애아 부모와 장애아 권리주창단체는 장애아의 교육권, 노동권, 복지권 등이 법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1940년대 미국에서 창립된 정신지체부모회(ARC: Association for Retarded Citizens)를 위시하여 1950년대 뇌성마비 부모회, 1960년대 학습장애아 부모회가 만들어지고 이들에 의해 장애아 교육권에 관한 수없이 많은 판례가 만들어졌으며, 특히 1960년대에 분리교육에 대한 도덕성과 윤리성에 대한 비판으로 통합교육(integrated education)에 대한 논의가 고조되어 왔다.
장애아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 격리․수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 왔었다. 이런 문제의 제기를 전문가나 학부모는 의문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결실이 1975년의 미국장애아교육법(PL 94-142)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적어도 아동을 교육배치 할 때 제한적 환경(분리되고 고립된 환경)에 배치하는 것을 극소화하고 열린 환경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리를 채택하게 되었다(Schulz & Turnbull, 1884). 이것이 주류화(mainstream)의 원리이고 이 법이 제정된지 10년이 지난 1986년에는 이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원리를 강조하게 되었는데 새로 강조하게 된 원리는 REI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의 주류화 논쟁과 1980년대의 REI 논쟁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서 새로운 특수교육의 형태를 살펴봄으로 앞으로 개정해야 할 특수교육과정의 시사점을 탐색하고자 한다.
3)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REI) 논쟁의 유사점
완전통합교육(REI) 논쟁은 네 가지 면에서 주류화와 비교가 된다.
첫째로 특수교육 실천의 윤리적 측면과 효과에 대한 비평과 새로운 접근법의 제안이다. 1960년대에 비평의 목표는 분리된 특수학급의 모델이고 주류화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Howe & Miramontes, 1992). 오늘날에는 주류화는 비난을 받고 있고 완전통합교육(REI)은 문제해결방법으로서 제안되고 있다. Lloyd Dunn은 1960년대에 특수교육이 민주적 편견, 교육적 비능률, 심리적․사회적 손상으로 정당하게 수행되지 못한다고 주장해 왔다. 장애아교육법과 주류화가 새로운 문제로 소개되고, 완전통합교육 논쟁에서 확인된 기초적 문제는 교수의 비능률성, 심리적․사회적 장애 등인데 이는 1960년대 문제와 같은 것이다(Heller, Holtzman, & Messick, 1982; Wang, Reynolds, & Walberg, 1987).
둘째로 두 가지 새로운 접근은 반대에 부딪히고 현장에서는 분열이 일어났다. 주류화에 대한 반대(예: Keogh & Levitt, 1976, MacMillan & Semmel, 1977)가 있기는 했었어도 완전통합교육에 대한 반대보다는 가벼운 것이었다. 더욱이 주류화로 인해 1960년대에 잃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완전통합교육 논쟁은 현장에서 지지자들과 반대자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아주 최근에는 완전통합교육 논쟁은 완전통합교육 지지자들까지도 학생들이 새로운 개혁에 포함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쟁점에 대해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셋째,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은 일반교육에서 명백한 개혁의 시기에 발생한다. 1960년대에 Dunn(1968)은 주류화는 미국교육의 개혁이라고 보았고 그 실현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하였다. 즉, 이 때 학교교육에 나타난 개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 학교조직(예: 팀티칭, 무학년제, 열린 학급, 융통성있는 집단구성)
② 교육과정(더욱 강력한 교수공학)
③ 직원의 역할과 실천(더욱 보조적 직원의 활용과 개별화교수)
④ 교육지자재(예: 컴퓨터, 학습기계, 교육용 TV)
Dunn(1968)은 이런 개혁이 주류화와 일치한다고 보았는데 이런 개혁은 일반교육제도가 학생들의 개인차에 부응할 수 있도록 개편되기 때문으로 보았다(p.10). 비록 개혁이 아주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Dunn은 특수교육현장에서 적합하다고 인정받은 교육실제를 일반교육에서도 적절하게 이용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수월성 운동 초기에 더 높은 학력성취(표준화 점수)를 강조하는 것이 완전통합교육이나 주류화에 부정적이라고 보았지만(Pugach & Sapon-Shevin, 1987; Sapon-Shevin, 1987; Shepard 1987), 최근 수월성 운동 안에서 학교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완전통합교육의 개념과 일치한다고 믿고 있다(예: Pugach & Lilly 1984; Wang, Reynolds, & Walberg, 1985, 1986; Lipsky & Gartner, 1989, 1977). 뿐만 아니라 Dunn과 같은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이 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① 더욱 강력한 교수기법(적응교수, 협력학습, 또래끼리 지도하는 교육), ② 전문적인 실천(교육과정 중심평가, 협력적 자문, 사전평가)이 완전통합교육을 실현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 앞에 논의한 첫째와 셋째의 유사점을 설명하는 문제인데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은 순수 실용주의 분석양식을 취한다. 이것은 특수교육 배후에 놓여있는 가정을 합리적으로 검토하여 수용하지 못한 분석양식이며 문제해결방법이다. 이런 순수 실용주의는 사회적 재생산, 도구적이고 기능적으로 수용된 의미와 편리한 조직, 교육기관, 선․악에 대한 행동방법을 재창출하는 것이다(Cherryholmes, 1988, p.151).
미국장애아교육법(EHA)과 주류화와 연관되어 1960년대 특수교육 실제에서 생긴 문제를 1980년대에 단순히 다시 제기한 것에 불과하다(Skrtic, 1987, 1988). 완전통합교육은 이들 가정을 주류화보다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긴 하지만 특수교육 실제와 가정의 관계를 명백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1980년대의 문제를 1990년대 이후에 다시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Skrtic, 1988, 1995).
사회문제해결은 항상 실용주의적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단순한 재 산출이나 본래의 문제를 단순히 확장하는 방법이 아닌 비판적 실용적 양식을 필요로 하며 가정 자체를 평가하고 재사정하고자 하는 탐구 양식인 것이다(Cherryholmes, 1988). 오늘의 장점은 혁명적 사회과학의 학문적 발전으로 기초가정의 배경에서 사회 실제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및 방법론적 통찰을 찾아내는 것이다.
4)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의 차이점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 사이에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는 주류화 교육에서의 관계자들은 일반교육 프로그램 혹은 전통학교조직의 적합성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관계자들은 다만 학교의 전통적 조직적 배치 내에서 일반교육에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완전통합교육의 지지자들은 장애학생의 학습상 문제를 일반교육 프로그램과 전통적 학교조직에 연계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완전통합교육 반대자도 동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문제가 교육의 조직적 맥락에서 보면 대부분이 학생 외의 것이라고 본다. 완전통합교육은 특수교육 기본 가설에 내포되어 있는 비평이다.
주류화와 완전통합교육 논쟁의 두 번째 차이는 1960년대에 특수교육 전문가 집단이 윤리적 문제와 특수교육의 실제적 효율성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설명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서 특수학급 모형과 관계된 문제를 개념화하지 못하였다. 주류화와 장애아교육법(실제와 도구)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개념적으로 정립되어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정치적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Ballard-Compell & Semmel, 1981;Biklen, 1985; Skrtic, 1986).
그러나, 오늘날 교육적 문제를 개념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윤리성과 특수교육의 효율성을 설명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대안적 이론에 관한 논의는 현장에 적용되는 사회과학이론을 통찰하는 것과 특수교육 문제해결에 그것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예: Bogdan & Knoll, 1988; Poplin, 1984, 1987; Sigmon, 1987; Skrtic, 1986, 1988, 1995). REI 논쟁은 실천되고 있는 특수교육 현장에 대한 경험적 비판을 하는 것이고 대안적 논의는 기본 가정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된다(Bogdan & Knoll, 1988; Ferguson, 1987).
결국,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나 반대자 모두 특수교육에서의 진보가 합리적이고 기술적인가, 즉 현행 체제가 연구와 개발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개선될 것인가 또는 기본적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는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현행 특수교육 체제가 대체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네 번째, 즉 「현행 체제는 합리적이고 기술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거부하는 반면에 반대자들은 현행 체제는 개선될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완전통합교육 옹호자가 세 번째 및 네 번째의 가설을 거부하는 것은 특수교육의 조직적인 면에서의 합리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첫 번째의 두 개의 가설, 즉 인간병리학의 이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기능주의적 입장도 거부한다. 이와 같이 완전통합교육과 주류화 모델과 관련된 진단 및 교수적 실제를 거부하기 때문에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특수교육에 대한 논의와 실제를 유도해 왔던 모든 전제조건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현행 특수교육 체제에 대한 비판적․임상적 분석을 토대로 완전통합교육 옹호자들은 기능주의적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된다.
3. 학교 교육의 질적 운영
질적 운영이란 전체 학교가 한 덩어리로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한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최선의 것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외적 수요자인 학생이나 내적 수요자인 교직원 누구에게라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질이란 양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양은 비교적 분명한 개념이지만 질이란 개인(each person)에게나 누구에게나(every person) 최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Aspin, Chapman, & Wilkinson, 1994). 학교 교육은 집단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최적한 교육을 받도록 재구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질적 운영에 대한 논의
객관주의의 특성은 양적, 과학적, 법칙 정립적, 실증적이다. 주관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질적, 비과학적, 개체 기술적, 반실증주의의 색체를 띠는 것이다. 질이란 양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제1차 산업혁명기에 인류는 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해 왔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후기 산업혁명기에는 양적 충족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교육 대상자가 학교에 취학하고 있다는 것은 양적 문제이지만 그들이 학교에서 그들의 능력 수준에 알맞게 그들이 원하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질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현대 학교가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가. 인습적 학교의 조직인 학년제도나 학급제도는 양적 충족은 시킬 수 있지만 질적 충족은 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학생과 교직원이 모두 쾌적한 환경에서 만족스러운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모든 학생을 다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학교로 재구조화 된다면 심․신의 손상이 있는 학생이라도 지역 학교에서 그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게 될 것이다. 영국은 국가적 수준의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1988년 처음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교육과정이 시도하는 것은 모든 아동을 위한 교육과정(national curriculum for all children)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Coulby, & Ward, 1996; Helsby, & McCulloch, 1997).
질에 대한 정의가 인습적 조직에서는 생산품이나 서비스에서 나왔지만 완전질적운영(TQM)에서는 수요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질의 개념이 객관적인데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80년대 이후의 커다란 변화인 것이다(Fields, 1994, 19).
잘못에 대한 수정에서 완전질적운영(TQM)은 계속적 개선 또는 예방에 치중하지만 인습적 조직에서는 잘못되었을 때 고치는 것이다. 결과의 잘못도 노동자에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완전질적운영(TQM)에서는 체제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에 대한 책무성도 구성원 전체에게 있다고 본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권위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팀으로 하는 것이다(Davies, & West-Burnhan, 1997, 9-11; Field, 1994; Townsend, 1997).
2) 수요자 중심의 교육
인습적으로 교육이 공급자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육 내용, 교육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공급자라는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은 교육의 내용을 포함한 모든 것의 의사결정을 본인이 하는 것이다. 수요자의 의사결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수요자의 능력과 그들의 요청이 교육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의 능력을 고려해야만 학생은 자신의 과제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학교에 능력이 같은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학생은 각기 다른 교육 내용을 선택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계속적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다.
학생의 계속적 진보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학교의 체제와 운영 방식을 바꾸어야 하리라 본다. 학생의 계속적 진보를 막고 있는 것은 학교 조직의 경직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의 능력과 그들의 요구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학교 체제는 열려져 있어야 하며 언제나 학생의 선택에 의해서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고 시간과 공간이 열려져서 융통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은 계속적 진보를 보장해야 하고 학교는 계속적 개선이 보장되어야 한다. 계속적 진보의 보장은 모든 교육 체제가 유연해야 하고 교육과정 운영이 완전 질적 운영 체제로 변해야 한다. 학교의 학년은 무학년제로 이동해야 하며 학급구성은 필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교육과정의 운영을 학생의 능력과 요구가 고려되어 학생이나 학부모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질적 운영 체제란 구성원(수요자)의 최대의 만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수요자 중심으로 그 운영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학교를 재편성하려는 것이 최근의 과제이며 완전질적학교로 전환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학교야말로 모든 학생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통합교육이론의 전개는 단순한 실제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논제는 패러다임적이고 고도의 비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이동과 통합교육 패러다임 이동은 동시에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이동은 1960, 70, 80년대 계속해서 일어났고 60년대는 객관주의적 입장 내에서 기능주의에서 구조주의로의 이동이 있었고 70, 80년대의 이동은 모두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이동이었다. 70년대 기능주의에서 해석주의로의 이동, 80년대 구조주의에서 인간주의로의 이동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변화가 장애학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쉐마를 다르게 한 것이다. 기능주의에서는 장애학생은 병리적 존재이고 그래서 진단은 합리적이고 유용하다고 보았으며 이들에게 특수교육기관은 합리적 조직이며 여기서 학생은 합리적, 기술적 진보를 할 수 있다고 보아온 것이다. 완전통합교육(REI) 주창자는 위의 네 가지 가정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학생의 심․신 손상은 사회환경과 전체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진단-처방은 너무 단순도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학생이 유익을 얻고 바람직한 진보를 한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초현대적 경향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탈구조적 경향이다. 또 하나는 반기초적이다. 초현대주의(post modernism)는 현존하는 사회과학 패러다임을 뛰어 넘는 것이다. 완전통합교육은 일반교육과 특수교육이 하나되는 것이며 특수교육의 이상, 원리, 방법이 일반교육에도 적용되게 하는 것이다. 특수교육은 장애학생용이 아니라 모든 학생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일반교육의 개혁은 필수요소이다. 일반 교육이 재구조화되지 못하면 우리 학생은 일반 학교에 완전 통합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의 한 방안이 완전질적운영학교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의 체제, 운영 특히 교육과정운영과 학습방법이 모든 학생에게 다 적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학교는 열려야 하고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모든 직원은 협력 체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정권(1995). 통합교육 패러다임 이동과 효율성 제고를 위한 대안적 전략. 특수교육학회지, 16(2), 5-32.
김정권(1997). 완전통합교육과 학교교육의 재구조화. 서울 : 도서출판 특수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