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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나의 쉼표
해가시선ㆍ28
바다는 나의 쉼표
인쇄 | 2021. 6. 1.
발행 | 2021. 6. 7.
지은이 | 정순란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47-4 (03800)
값 10,000원
ⓒ2021 정순란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해가시선ㆍ28
정 순 란 鄭順蘭
시인의 말
고단했던 발걸음에 쉼표를 찍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너무 급하지 않게
너무 서두르지 않고
편안한 느낌으로 쉼표처럼
쉬다보면 힐링이 된다
쉼표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2021년 5월
한재공원에서
정 순 란
차례----------
시인의 말 / 11
제1편 꽃잎편지
18 / 강풍이 분다
20 / 구두밑창
21 / 긴잎느티나무
22 / 꽃들의 웃음소리
23 / 꽃이 되다
24 / 꽃잎편지
25 / 꽃집 앞을 거닐며
26 / 동백섬
27 / 두타산의 여정
29 / 들풀이 그네를 탄다
30 / 목련
31 / 몰래 부르는 봄봄
32 / 벚꽃을 보며
33 / 벚꽃터널
34 / 분홍빛 봄바다
35 / 불청객
36 / 세월ㆍ2
37 / 세월ㆍ3
38 / 손톱 속의 반달
39 / 아카시꽃 산책길
40 / 웃음 주는 친구
42 / 축제의 흥겨움
제2편 바다는 나의 쉼표
44 / 4월 어느날
46 / 7월 오후
47 / 갈매기
48 / 너와 나의 바다
50 / 너와 함께한 하루
51 / 동해역
52 / 도리끄테
54 / 바다는 나의 쉼표
55 / 바다와 마주 앉다
56 / 반가운 빗소리
57 / 부재
58 / 삼척의 여름바다
60 / 슬프고 분노하다
61 / 신호등에서
62 / 어느 노동자의 시낭송회
63 / 엄마의 여름휴가
65 / 여름
66 / 여름의 잔해
67 / 오십천ㆍ4
68 / 제등 행렬
69 / 지루한 장마
71 / 호박잎
제3편 그리운 모습 하나
74 / 가을 닮은 남자
75 / 가을 산책
76 / 가을 소리
77 / 가을 청문회
78 / 가을바람 이야기
79 / 가을의 길목
80 / 가장 멋진 숲 길
81 / 그녀의 옛집
82 / 그대와 영원히
84 / 그리운 모습 하나
85 / 길 위엔 바람이 드세다
86 / 닮아가는 두 사람
87 / 돌아온 오후
88 / 만산에 홍화
89 / 몸살
90 / 민둥산을 오르며
91 / 병실의 사람들
92 / 시월은
93 / 시월의 끝자락
94 / 오후의 마술
95 / 준경묘
96 / 천문산
제4편 먹방 문화
100 / 12월ㆍ2
101 / 가슴에 묻은 사랑
102 / 건망증과의 전쟁
103 / 겨울연가
104 / 기억을 상실한 남자
105 / 달빛 속의 산책
106 / 덫
107 / 먹방 문화
108 / 무거운 나이
109 / 물안개
110 / 미역국
112 / 바다의 음계
113 / 밤길이 멀어도 찾아갈 그대가 있다면
114 / 보름달
115 / 슬픔의 질량
116 / 엄마부대
117 / 저녁밥상
118 / 정월대보름제
119 / 촛불, 성탄전야
120 / 한가위
121 / 향香
122 / 호박
124 / 해설 | 박종화
생명의 숨결과 맑고 따뜻한 공명
제1편 꽃잎편지
강풍이 분다
— 코로나19
햇빛은 구름발을 파도처럼
갈기갈기 찢어 부수고
한껏 반항을 담은 안전안내문자
“코로나 확진자 발생,
코로나19 확산방지로
휴일예배 법회, 미사 등 모임 자제,
약국에서 마스크 구매 5부제 시행,
강풍경보 발령에 외출 자제.”
거친 호흡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차창 밖으로 묘하게 어울리는 소리들
모래밭을 핥는 파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한다
들끓는 코로나191)
라디오 볼륨을 최고로 올려두고
환호성을 지른다
한마디로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렵고 무섭다
도시의 번잡함이 싫다
시골의 한가함도 싫다
바람은 점점 더 거칠다
하늘 찢고 강풍이 분다
어긋난 시간이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거리는 불협화음으로 섞이고
몰려간 바람이 내게 말한다
살얼음판은 멈추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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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호북성 우한시에서 발생한 감염성 높은 감염병
(코로나19 바이러스)
구두밑창
나무데크 위에 올려진
너는 소낙비에 흠뻑 젖어
무한 긍정의 골짜기가 되었다
주름살처럼
곰보빵처럼
파먹힌 얼굴
누에고치 번데기 마냥
웅크리고 살았을 너는
뼈 마디마디 도려낸 듯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얼마전 뉴스 보도에
뇌물 국장급 공무원 아무개
구두 밑창이 금고였다는데
미처 새 밑창으로 갈아주지 못한 짝꿍은
몸에 물파스를 바른 것같이 싸해온다
긴 세월 외로움에 짓밟힌
상처를 꾹꾹 눌러본다
끈적끈적한 너의 삶이
미루나무 잎처럼 떨어진다
긴잎느티나무
분홍치마 손짓하는 철쭉 산
소슬바람 알갱이 들이키며
너에게로 왔던 길
재잘거리는 오월
꽃 같은 미소
분수처럼 쏟아진다
기억 속의 긴잎느티나무1) 아래
도시락 펼쳐놓고 그리는 추억
저 결고운 청색바람
푸른 옷 입고 달려와 빗질한다
그리움 담아낸 하늘
감싸 안을 수 없어
내밀한 씨앗 하나 묻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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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도계 느티로 36에서 관리하는 천연기념물
꽃들의 웃음소리
— 장미공원1)
천만 송이 꽃 속에 숨어
푸른 하늘을 부른다
내 몸의 꽃은
한 번 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데
자연이 가진 힘은
유혹의 저녁 빛에
즐거운 웃음소리로 다시 피어난다
꽃잎 물고 꽃바람에 살랑대며
떨고 있는 소리
내 마음에도 즐거운 소리 전해진다
꽃향기에 붉은 꽃은
햇살 아래 과식한다
오가는 사람소리 보다
꽃들의 웃음소리에 발걸음 멈춘다
꽃빛 바람은 왈츠를 추고
찔레꽃 피듯 모두 한바탕 뛰어나와
꽃들의 색깔로 웃는다
조율되지 못한 꽃이 아프다 한다
일기예보에 불안한 소식
소리 반 공기 반으로
두터운 비바람이 왈칵 쏟아진다고
천만 송이 꽃들이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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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정상동 232
꽃이 되다
호프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곳에서
늘 낮에만 본 사나이의 가슴을
꽃이 되어 마주 한다
술 한 잔의 평화
지친 마음 달래며 머무르다
갈 수 있는 간이역쯤 되는 곳
사나이 가슴은
흔들리는 세상과 이야기하는데
귓속에 갇힌 소리는
꽃 속의 기막힌 울림을 듣고
시장 안 골목길은 깊어만 간다
네가 서성이는 골목이 어디쯤인지
밤새 숨어 지낸 꽃밭
홀로 향기로운 꽃그늘 속을 서성이다
무채색 창가에 피어오른 능소화
밤에 본 꽃은 술이 되어
헐벗은 무게로 침묵하고
쾌락의 군상들 깊어만 간다
꽃잎편지
서둘러 봄이 와
간밤 빗줄기에
숨어버린 봄의 전령
창가엔 오만한 장미
붉은 미소 흘린다
황사에 갇혀 웅크린 산
꽃샘추위는 세상을
겨울로 다시 품고 가지만
햇살은 온기 모아
삼월의 반란을 진압한다
진눈깨비 속에도
의연한 갯버들
문턱을 뛰어넘어
후박나무 잎새치며
연두빛 미소 짓는다
비 내리고 봄빛 한껏 부풀면
초록의 예감 안고 다가올 그대
봄날
우체국 종이편지도
꽃잎된다
꽃집 앞을 거닐며
봄볕 머리에 이고 산책하는데
발그레 물오른 딸아이의 가슴처럼
사랑의 에로스 화살을 쏘며
푸른 식물의 싱그러움
그윽한 별빛 되어 밀어를 속삭인다
매화꽃 사이 봄이 웃는
곱던 청춘 앗아간 세월
짓궂은 하늘 삼월 나뭇가지에
정나미로 빚어 술부터 따른다
상처뿐인 여인에 대한 마지막
청춘과 열정의 첫사랑
그 사랑 떠났을 때
한 송이 장미 건네던
어지럼과 현란함이 숨겨졌다
어머니 품 속 같이 포근한 계절
꽃향기에 마음 빼앗겨
수 만 가지 색깔로 물들어 갈 때
한 다발 꽃은 화려한 봄옷을 입는다
동백섬
그리웠다, 너의 향기
다홍빛 꽃봉오리 반기는 동백섬에
한 뼘 파도도 일으키지 못한
아늑하고 평화로운 물결
산뜻한 바다공기 슬며시 와 닿는데
해운대 영화의 거리에서
빈 가슴 채워주던 산책로
진한 숭늉 같은 여운이 떠오른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욕망의 빈손들
지친 모습으로 일어나
어깨를 맞대고 웃음꽃을 터트린다
해묵은 갈등 속에서
깃발 같은 잎들이
그림처럼 바쁘게 지나가고
철없이 피어난 동백꽃
그녀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두타산의 여정餘情
이슬처럼 깨어난 앙상한 나무사이로
흘러간 가요 읊어대며 오르던 산행
연분홍 진달래 계절을 거부한 채
수줍은 듯 감추어져 날름대고
추위에 결박당해
뿜어져 나오는 달디단 공기
길섶 철쭉나무 그녀의 목덜미를 껴안는다
낙엽 지는 산엔 바람이 살고
붉은 손 흔든 태백산맥의 줄기는
파도치듯 움틀거린다
온몸 녹아 서걱대는 가슴 한 자락
내려오는 가파른 길에 서 보니
배꽃같이 웃던 그녀
공처럼 움츠려 한 발짝 한 발짝
살얼음판 위를 기는 세 살배기 걸음마
구겨진 아픔 배낭 속에 담아
길 잃은 철새 마냥
마지막 내딛는 산행길
길은 능금처럼 어둠으로 지는데
앞서 기다려준 길동무들
지친 육신 산자락에 눕고 싶은 건
어디 나무들뿐이랴
담배연기처럼 헝클어진 몸짓되어
빨간 색종이가 된 그녀
오늘 두타산을 다녀왔다
들풀이 그네를 탄다
꽃바람 먼저와
제 이름값 하는데
봄소식 밟고 가는
끝없는 미로 속
추억들은
들풀 속에 숨어
요란하게 웃는다
3월 차가운 바람과
입을 맞추니
봄을 멘 그대
숨이 차다
키 작은 네가
어떻게 꽃 피울
생각을 다 했을까
목련
겨울 터널 지나온 그대
가지마다 눈뜨는 봄
숨가쁘게 소근거린다
막힌 가슴 활짝 펴고
내 몸 열어 뒤돌아보니
연한 속살 드러낸 어린 신부
스멀스멀 겨드랑 가려운 것이
봄 마중 나간다
그대 사이에 나누어 먹던 오렌지들
세포 구석구석 스며들면서
한낮의 웃음소리로 흔들린다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기웃거리며 지워지지 않는 필름되어
그대 속살 더듬어
흰 손 벗어 푸른 잎 피워 낼 때까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끌림이다
몰래 부르는 봄봄
봄은 그대 가슴으로 번진다
한동안 잊혀졌던 꽃들
외출 준비하고
꽃잎 연 개나리
산허리 감고 도는 버들개지 사이로
그냥 걸어도 좋은 오후
햇살에 누운 오십천
나의 외로움 문득 깨워내어
그대 안에 나를 품고
아름다운 노래 부르다
봄 내려앉은 강물
가까이 있어 더욱 좋은 한나절
꽃들은 저마다 이야기로
행복 쑥쑥 사랑 듬뿍 콧노래 벗삼아
얼마나 세련되게 활짝 피는지
힘없이 지나치는 나를 흥분시킨다
바람에 실려온 매화꽃 향기
잠들었던 후각을 깨워
상큼한 연분홍 옷 입고
그대와 떠나는 낭만의 추억만들기
꾸밈없는 들꽃, 고향을 담아
몰래 부르는 봄봄
벚꽃을 보며
동해의 하얀 파도소리
한반도 정강이까지 올라온 꽃바람
화들짝 놀라 마중 나가니
오십천 강물은 양반걸음처럼
느릿느릿 소리 없이 흐르네
봄빛 만나러 가는 길
가로수 위에 피어오른 그대
꽃잎에 배어 나오는 꽃받침
그리움 꽃눈 되어 별이 되지요
길 양 켠 말없는 역사
하루를 짓던 문화의 향기
세월도 지우지 못한 분노는 격동에 날려
물방울 같은 멜로디 또로록 떨어지네
그대의 귓전으로 몰래 부르는 노래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봄
차 한잔 마시고
벚꽃길 걷는 맛이
깊어지는 부부 情 같지요
벚꽃터널
봄의 연주가 시작된다
꿈결 같은 꽃 세상
느림의 아름다운 자연은
고양이처럼 그대를 훔쳐보는데
저 홀로 예뻐지는 꽃들 사이에
골목길 담 언저리에도
하얀 소복자락 스치는
분홍빛 꽃물이 콧잔등에 내려앉는다
요란한 벚꽃 내음과
하얀 꽃잎은 꽃비가 되어
햇살 받아 빛나는 물길로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와락 덮칠 것만 같다
낮엔 꽃의 바다
밤엔 빛의 바다
노을진 벚꽃터널은
와인처럼 감미롭다
분홍빛 봄바다
K지인이 물미역을 줬다
짐작하건대 민박집 냉동실에서
어렴풋이 4박5일은 머무르다 어제 밤늦게
우리 집 싱크대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밤새 바다냄새는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겨우내 갇혀 있었던 바다는
휴식을 위해 나들이 나와서
소박한 식탁 위에 흥건히 누워
시큼한 초장에 숨 막히는 절정
짠맛 느껴지는 바다를 풀어헤쳐 놓았다
어둡고 흐릿한 세월에 주름을 업고
부대끼며 살았던 삶도 소중하다며
숱한 시간이 낙엽으로 누워
하늘을 덮고 있다
술꾼이 토악질하듯 바다는
물거품을 길게 토해냈고
입안에서는 단맛이 돌았다
추억의 오후
얇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분홍빛 봄 바다
마법에 걸렸던 시간이
푸른 소리로 스며든다
불청객
답답한 봄날
하루가 멀다
미세먼지 주의보가 문자로
전송되는데 심히 불편하다
공포스러운 상황이
마음까지 우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향하는
발암물질인 미세먼지는
정치도 경제도 숨 막히게 한다
누렇고 뿌연 하늘을
자주 만나게 되는 요즘
미간에 주름 잡히고
삶을 답답하게 한다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먼지들이 숨기고 있는 위험한 진실
달갑지 않은 황사와 미세먼지는
내 음성을 너무 아프게 한다
세월ㆍ2
처마 밑에 곶감이
늦가을 햇살에
꾸들꾸들 말라가고
볕 좋을 때마다 말려둔
우거지가 소쿠리에 가지런하다
서리꽃 피는
차가워진 바람에
노란 잎을 다 떨구었고
초겨울 바람이 그림처럼 걸려 있을 때
주홍빛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무렵
하얀 입김 토해내며
추억의 장작 난로를 때 본다
삶이 골목골목 배어 있는 겨울 향기
한 입 베어 문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늦가을 호박잎 빛깔의 서러움
세월ㆍ3
오밀조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어린 날 향수 같은 일기장에
너의 하루로 행복했던 별 밤
낯익은 포스터처럼 사라진
여름바다를 닮은 동무야
빨간 잇몸 드러내며 씨익 웃던
뚝배기처럼 구수한
오래된 우정 지켜주던 아이
눈물 흐르도록 그리워
마음속 나무 심어본다
지치고 고단한 삶 속에
크고 작은 이야기
오랜 방황에서 돌아와
꽃처럼 맘도 붉어져
주름진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 하나
보라빛 그늘 아래 앉아
연분홍 벚꽃이 시샘한 봄바람에
아쉬움 남겼던 사연들은
찔레 꽃잎 속에 쏟아
엽서로 띄워 보련다
손톱 속의 반달
힘없이 매달린 꽃잎 서너 장
봉숭아를 보았습니다
유년의 뜰을 들락이던 시절
봉숭아꽃잎 따다 백반 넣어 찧었습니다
열 손톱에 가지런히 무명실로 칭칭 동여매
다시 소녀가 되던 날…
“세 번들이면 저승길 밝히라”
하시던 어머니의 소담笑談 그립습니다
손톱 발톱 가을 누렁 잎까지
올리고 했던 날
풋내 나는 추억 물들이던 밤
밤새 얼마나 아렸을까
자고나면 발그레진 열 손가락
꽃물처럼 지워지지 않던 아련한 추억
한 자락 남아 있습니다
오래 된 편지처럼 탈색된 기억
손톱 위에 빨갛게 되살아
손톱 속의 반달
오늘밤 둥글게
살 오릅니다
아카시꽃 산책길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아카시꽃이 초록물결 이룬
보리밭 위로 향기를 풀어놓는다
들에는 앵두나무 산에는 찔레꽃
나비가 예쁜 날개 접은 채 졸고
잉잉대는 3色의 꽃들
싱그럽고 풋풋한 생기
시골의 삶을 누린다
사람의 냄새가 살가운 마을
들꽃과 바람이 친구되어
까르르 웃음꽃 피우고
산책길에 들뜬 나는
밭둑 길 따라
옷도 마음도 젖어 돌아오는 길
아카시 향기가
내 사랑을 흔들어
봉숭아 꽃물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행복한 오후 산책길
웃음 주는 친구
아카시꽃이 산골마을에 찾아와
꽃향기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
그리운 것들의 안부를 물을 때면
기쁨의 시냇물이
한 번은 꼭 올 것 같아
비워 놓은 마음자리
추억을 부르는 그 이름 친구야!
나이가 들수록 자네가
좋은 친구란 걸
고맙게 생각 한다
산소도시 태백에 살지만
따뜻한 감동과 의리를 가진
햇살 같은 존재
육십 고개 넘어보니
숨도 차겠지
자네의 열정은
여름 볕 보다 더 뜨겁지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인생의 봄날
너는 친구들에게 웃음꽃이다
아카시 향기에 기별 담아
멀리 타향에 있는 친구들까지
고향으로 끄집고 와 반기는
수다 꽃이 오늘도 행복하다
우리 모두의 짐을 진 친구야!
친구가 웃으면
온 세상이 꽃이다
축제의 흥겨움
정월 대보름제 전야제 날
유명한 가수가 온다기에
보름달 속에서 엄마와 나는
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만났다
오케스트라 선율에 실려
그리운 추억을 소환시키며
지나간 추억과
새로운 추억이
겨울 호빵처럼 부풀고
벚꽃놀이 같았던 인생살이와
벚꽃놀이 같이 즐기는 울 엄마
바람 같은 세월도 음악을 타고
잃어버린 시간 속을 웅성거린다
중년 가수의 차분한 목소리는
엄마의 한숨도 트이게 한다
구름처럼 보낸 시간은
엄마의 박수 소리와
행복 에너지로 함께한
정월 대보름제 축제는
여름처럼 뜨거웠다
제2편 바다는 나의 쉼표
4월 어느 날
오늘 난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를 내 본다
내 친구 은숙의 남편은
거동이 불편한 장애우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친구 부부는
아픔과 시련을 극복하고
35년 넘은 여정을 달려왔다
오늘 꽃 한 송이 피워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경기도 의정부로 향한다
애틋한 마음의 한 자락
너의 시간 안에 하루를 살아본다
친구의 땀방울이 소리 없이 내리고
신부의 눈물로
하객 모두는 눈시울을 적시며
축복과 행복을 소원한다
봄 햇살에 반기는
사람들 틈을 잠시 빠져나와
친구에게 삶의 훈장을 준다
진정한 승리, 세상을 향한 외침
기쁘고 슬픈 날
햇빛이 있기에
생긴 그림자까지도 사랑하리라 은숙아!
이렇게 또 한 번
너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교훈을 준다
이제 활짝 핀 꽃길만 걸으면 참 좋겠다
7월 오후
수다와 함께 비벼지는 일상은
짠맛 느껴지는 땀과
며칠째 배불렀던 세탁기 속
내용물을 가동시키고
화단에 쓰러져 누워있는
꽃들을 세워준다
얼음이 둥둥 뜬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며
선풍기 풍향을
허리께에 맞춰 고정 시켜 놓고
피로를 쓸어 내린다
라디오에선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올드팝이 흘러나온다
노래를 낮게 따라 불렀다
한때 나도 가수를 꿈꾸었기에
오십을 넘긴 내 목소리는
갑상성 저하증으로
건조하고 파삭파삭하다
음표들이 거실 천장에서 날개를 폈지만
미끄러지며 멀리 달아난다
언제부턴가
미로 같은 거미집이 생겼다
갈매기
겨울 바다에 발 담그고
허우적거리는 그대를 발견한다
오랜 세월
삶에 지친 이들
둥지를 찾아온 비행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우리의 인생역정이라 말한다
바다는 지친 그대를
아득하게 감싸고
나, 숨 쉬고 숨는 곳
독한 감기에 게워내는 기침소리
후드득 튀어 오르는 갈매기 떼
저물녘
붉은 햇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넉넉한 바다에
눈부시게 비상한다
너와 나의 바다
아침이면 색色으로 태어나
희망을 던져주는 바다
안개처럼 가는 비에
파도가 한 겹 두 겹 겹쳐지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각가지 색깔로 상처 입은 나날이
그리움 묻고 사연을 게워낸다
모래밭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광 또한 이색적이다
빨랫줄처럼 흔들리는 현실에
한동안 회전목마를 탔지만
오늘만은 파도의 춤을 보면서
힘든 어제를 잠시 잊기로 한다
바다에서 꽃보다 더 향긋한
비린 냄새가 풍겨와
어머니를 닮은 무늬 피워낸다
바다는 들뜬 내 마음
가라앉히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가로이 데이트 즐기는
연인들의 다정한 웃음이
흔들리는 누군가를 잠재워주기도 한다
바다는 자갈도 모래도 해변의 발자국도
아련한 감회를 자아낸다
꼭꼭 숨은 조개껍질을 찾아
치마폭에 주워 모은
너와 나의 바다
핑크빛 설렘으로 움찔 거린다
너와 함께한 하루
열어둔 창문 사이로
노크도 없이
행복을 전해주는 풍경
외로이 짐승처럼
배롱나무만 서서 눈발을 맞는다
이런 날엔 나도 풍경이 되어
찡하게 마구 흔들려 본다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한
그리운 이름을 판화로 남기면서
마중하는 눈발을 따라 걷는다
새로울 것 없는 인생과
눈만큼 높이 올라간 하루
카푸치노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기 전에
차가워진 내 심장을 데운다
시간은 심경의 굴레 되어 몸부림치고
내 속에 나를 적시는 눈길의 포옹
너와의 사랑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불꽃으로 타는 단풍이고 싶다
동해역
숨이 멎을 듯 가슴팍까지 스며
돌아갈 곳 없는 남은 자의
슬픔으로 쓸고 가는 동해역 대합실
유년의 꽃물처럼
지워지지 않던 각인된 추억과
소란스러운 인파로
뿜어내는 휘황한 빛들 너머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들 마주 앉아
안내방송은 발차 시각을 알려주고
백열등 아래 사라져 가는 모습들
눈물과 환희의 광장을 연출하는
정담이 익어가는 소리 시끌시끌
하얀 전조등 앞세운
열차에 아쉬운 손
흔드시던 어머니의 눈빛
습기 찬 바람으로 젖어
맘속으로 그리워했던 지난 세월
멈춰진 시간 속은 아름다움이었더라
도리끄테1)2)
파도소리 바람소리 끌어안고
살아가는 그녀는
숨기고 싶은 사랑과
그리움의 바다가 된다
몸을 푼 어달리 바다는
초희란 모임 연인 다섯과
자분자분 이야기를 털어낸다
시간은 먼 곳을 향해 지나가고
그녀를 닮은 파도들이 뛰어다니며 외친다
클래식 음반을 틀어주고
시가 있는 카페 도리끄테는
시향詩香과 커피향이
바다내음 물씬 풍기는
정감 있는 찻집이다
느린 시간 속에
깨달음의 길은 언제나 아쉽다
백사장에서
속도계를 멈추고
나의 시간에 남아
잠시 쉼을 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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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해 묵호항에서 어달리로 지나가는
길의 중간쯤의 지명으로 본지명은 돌이 끝이다.
2) 동해 김진자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 이름으로
돌이 끝을 풀어서 썼다.
바다는 나의 쉼표
바다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평화로운 재잘거림과
카푸치노 거품 같은 편안함
파도가 걸음을 옮기면 이중주의
소리가 삼중주로 시작 되고
그 속에 중년의 웃음소리 섞인다
가끔 바람에 실려 오는
푸른 바다 냄새, 바다는
나를 조용히 빨아들인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작은 추억을 그리다,
긴 시간을 견디어낸 희망의 등대
늦은 저녁을 녹여주는
달달한 휴식
힘차게 박동하는 내 심장에
젖은 하루 내려놓는 푸른 소리
바다는 행복한 기억들로
마르지 않고 출렁인다
여러 개의 얼굴로……
바다와 마주 앉다
한 줌 바람과 파도소리는
당당한 여름 미인을
자연의 색으로 물들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 또한
시끄럽지만 눈 맞추고 마음 맞추니
짜릿한 쾌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어서 참 좋다
바다와 마주 앉은 난
팝콘처럼 부푼 세포가
기특하고 고맙다
온풍기 틀어놓은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가슴에선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바다의 깊은 곳에선
추억의 흔적들을
치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는지
검은 풍경이 파도 속으로 숨자
반딧불처럼 환한 불빛은
뜨거운 사랑의 열매로 꽃을 피우곤
그녀를 흥건히 자극 시킨다
칠월의 바람이 그녀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는다
반가운 빗소리
여름이 오는 동안
눈치 없는 하늘은
땀으로 절여지는
유체이탈을 곧잘 즐긴다
바람이 빗살을 뜷고
물속에서 산소 호흡기를 찾은 듯
느린 걸음으로 왔지만
풀잎들은 활기 돋아나고
심한 공복감에
새로운 입맞춤을 시작한다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는
목소리를 낮추어
들판의 곡식들과
어설픈 화해를 시도한다
귓전을 두드리는 반가운 빗소리
나이가 들수록 빗소리가 정겹다
부재
무기력한 하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저녁놀을 보며
헝클어진 마음의 결로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린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을
지치도록 그리워하며
부쩍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너의 부재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꾸역꾸역 시간이 흘러
눈물 두어 점 내려놓고
내 안에 너만 있고 나는 없어
모든 사랑은 바람처럼 뒹굴고
누덕누덕 생을 깁으며 살아낸다
삼척의 여름바다
햇살이 머물다
손 잡아주며 웃는 얼굴
힘들 땐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땐 눈물 같이 적셔주며
아픔까지 달래주는 그림자 같은 곳
아무런 준비없이
짚시처럼 길을 나서도 좋은 삼척 바다
어부의 주름살 갈매기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면
어선들은 달리기 선수되어
하나 둘 어두운 바다로 나간다
어둠이 줄달음치는 밤에는
잊어버렸던, 잊고 살았던
삶의 애환이 넉넉한 모성애로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파도가 거품을 숨겨 와
그대 앉아 있는 바위 밑으로
모든 것들을 다 뿜어 놓는다
파도들이 옛이야기 전하는
오늘 밤은
사랑도 희망도 즐거움도
삼척의 바닷가를 서성인다
슬프고 분노하다
여름 햇살에
깨진 조약돌 신음하고
선홍빛 꽃잎은 피지도 못하고
슬픔이 분노가 되어
반론의 여지가 없었네
시간의 바닷속은
식감으로 물결치고
발밑에 부서지는 통증은
하얀 거품 꽃으로 피어
미터기마냥 터져 나오네
너울성 파도는
성난 파도 같은 박력으로
어둠을 죄다 밟고 가지만
단물의 시간을 잘근잘근 씹은
과거의 바닷속 이야기로 전해지네
파도 소리의 반주는
내 눈물 버리고 너를 부르네
구겨진 질문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신호등에서
빨간 신호등 앞에서 주춤한다
귀에 MP3를 꽂고
음악을 감상하며
발걸음은 나비처럼 하늘거린다
발 빠른 현대사회의 변화로
전통적인 모습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숨 막히는 플래카드의 색깔들이
만국기마냥 춤춘다
사내의 주름진 얼굴엔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치받혀 오르는지
굵고 느릿한 억양은
경상도 텁텁한 사투리로
요란하게 울린다
바쁘게 움직이는 신호등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어느 노동자의 시낭송회
창문에는 하얀색 시어를 멘 현수막과
숨 가쁜 삶을 견디어낸 늦은 저녁
발음이 불분명한 소리는
끝없이 새어나오고
어둠을 시처럼 낭송하는
노동자이고 시인인 그 남자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멈추지 않는다
점퍼를 즐겨 입는 남자
가랑잎 같은 아내와 30년을
바람 속을 걸어왔다
가을이 익어가듯
헝클어진 내 마음에
누렁둥이 호박은 어깨를 맞대고
가을을 속삭인다
심장처럼 뜨거운 조명 아래에 앉아
현수막에 적힌
‘시의길 시인의길’이란 문구를 보면서
찻잔 속에 숨어
가을을 듬뿍 타서
오래전 나를 만나기도 한다
꿈이 익는 시간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복인가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엄마의 여름휴가
창원에 살고 있는 동생이
여름휴가 온다는 소식에
엄마는 열흘 전부터 들떠 계셨다
막내라서 유달리 더 애틋해 하신 걸 보니
부모라는 책임감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거리에서 엄마와 떨어져 살다 보니
서로 바빠서 못 보는 날이 많다
코로나 19사태로 노인회관도 못 다니시고
벌써 6개월째 방콕하고 계시니
얼마나 삶이 갑갑하실까?
올여름 휴가는 무조건 엄마랑 보내기로 했다
자가용 타고 드라이브로 좋은 기억만 떠올리면서
맛 집만 찾아, 먹고 즐기다보니
하루가 산 넘어 흐르고 있었다
주름진 엄마의 하루도 꽃처럼 활짝 피었고
산 같은 고비도 수없이 넘긴 세월
지금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는 엄마는
나의 젊은 날 보다 더 부지런하다
오라버님이 살고 있는
하맹방의 늦은 9시
노래방 속에서 엄마의 18번(개나리 처녀)노래가
노랗게 물든다. 막냇동생은 아픈 다리로 엄마의
손목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지구처럼 돌며 가무를 즐긴다
타임머신을 탄 엄마는 흥에 겨워서
쿵작 노랫소리에 몸을 흔든다
불빛 같았던 자식들 어느덧 흰머리 보이고
밤은 또 다른 풍경화 되면서
천년만년 엄마의 비뚤어진 미소를 사랑하리라
여름
대지의 불만은 수류탄이 되어
꼼짝없는 포로가 된다
땀구멍이 한껏 열려
복숭아 빛으로 익은 몸들은
활짝 핀 꽃처럼 보인다
바람은 훈훈한 숨결을 몰고 와
발악적으로 울어댄다
너도나도 피하지 못하게
해는 발돋음질하듯 조금씩 길어지고
매일 한 겹씩 엷어지는 더위 속
가로수가 호박잎처럼
축 늘어져 누군가의
가슴 곳곳에 숨막히는 대결을 한다
여름날의 열정들이
어두운 강가에 앉아
풍부한 색감으로
손수건마냥 나풀댄다
여름의 잔해
물보라 일으키던 바다는
파라솔 날개를 펴면
햇살은 시원한 그늘이 된다
보석 같은 해변의 여인
선텐 오일 바르면서
유연한 몸매 드러내던
오디1)처럼 익어간 S라인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여름 피서지의 추억 곱씹으며
한 해를 너끈하게 견디겠지
늦더위의 따가운 햇살은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뒤늦게 바다를 찾은 그녀
넘실대는 파도의 속삭임 따라
푸른 여행을 떠날 듯 요동치더니
서 너 장의 먹장구름 뒤로
맹방바닷가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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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뽕나무 열매
오십천1)ㆍ4
깊은 슬픔을 읽고 있습니다
등짝이 벌겋게 벗겨진 그대 발목은
빗물에 취해
둑도 없이 흐르는
바람으로 울분을 얽어맵니다
희망 없는 세월로
그냥 내맡겨진 여린 몸
지우지 못한 그리움만 쌓여
여름날 아픈 기억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슬퍼도 울지 않는
외로움에 익숙해진
온화한 얼굴 하나
한결같은 따뜻함 뿐입니다
돌아갈 길 없는 시간이
아픈 가슴 들추고
슬픈 어둠 숨쉬는
저녁 들길에 한 줌 뿌려주는
가을 낙엽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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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노곡, 신기, 미로면을 거쳐 삼척시내를 지나 흐르는 강
제등 행렬
봄날, 늦은 저녁
너의 작은 손을 잡고
붉은 사랑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제등 행렬
예쁜 달 아래
고단한 주름은 평화를 보면서
말처럼 걷는다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서
어둠을 버티고 서 있는 가로등
편안함으로 다가와
조용한 고독도 서러운 추억도 반추할 수 있어
주름투성이의 손을 모아 소원을 말해보네
굽었다 펼쳤다 가는
어머니 인생과 같은
붉은 봄날
내 사랑도 함께
활활 오른 촛불은
생명력의 끝을 보여주는
행복한 저녁 제등 행렬
내 즐거움이고 소박한 만족이네
지루한 장마
지루한 긴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의 영향으로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올해 고추농사가 시원치 않아서 큰일이다
남편의 수고로 빨갛게 주렁주렁 달린 고추가
긴 장마로 인해 말리는 게 제일 큰 난관이었다
건조기도 없이 한 달 넘게
장마기간 동안 전기장판 위에
신문지 깔고 말렸으니……
어쩌다 볕이 좋은 날이면
태양초 고추 말리려고
쉴 새 없이 뒤척여주는데
일어날 때마다 (에~고, 에~고)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
라는 속담이 실감난다.
집안 곳곳 벽면 곰팡이가 물감처럼 번지어
시골의 슬픔은 나를 아프게 했다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모든 것들
밭가 외등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우울한 독백을 쏟아 내고 만다
전염병 확산 등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건 어렵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요즈음은 마치
덫에서 허둥대듯 살아가는 느낌이다
호박잎
아침저녁이면
사방으로 뻗는 호박잎을 솎아
오늘 점심에
보슬보슬한 보리밥과
호박잎 쌈으로
추억도 같이 먹는다
초여름을 품은 호박잎 쌈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 주었던 양푼만한 호박잎
자연이주는
추억의 맛
입맛 잃었을 때 별미가 된다
여름 햇살에 피어난
노란 호박꽃 복스럽고 예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서 먹던
깔끔하게 손질된 호박잎
가끔 시장 좌판에서 추억을 볼 수 있다
제3편 그리운 모습 하나
가을 닮은 남자
멋대로 떨어진 은행잎은
예쁜 속살을 내어주곤
고장 난 블라인드마냥
잠들었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레 사랑을 풀어
기억의 첫 번째
서랍에 보관해 두었지요
삼십대의 푸른 기억과
오십대의 달 같은 추억에
입맞춤해 봅니다
아직도 걷어내지 못한
마음속 진동은
환절기 알레르기 되어 자주 잊으며 산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온도로
웃어주는 남자
오늘따라 더 정겹습니다
꽃과 햇살 그리고 가을 사랑에
특급 칭찬을 해줍니다
구수한 애정 표현과
임산부처럼 배불뚝이가 된
가을 남자는
익숙한 풍경 안에 갇혀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갑니다
가을 산책
여름비에 한바탕
세수를 한 나뭇잎
수줍은 산골 소녀마냥 곱기만 하다
그 나뭇잎 내 가슴
가득 주워 담은 행복한 하루
그리운 이름을 부르며
언덕을 넘는다
봉선화 같은 사랑도
두려움의 중량을 덜어내며
밟을 때마다 일탈을 꿈꾼다
때론 힘들면 쉬어가리라
고향마을 지도처럼
익숙한 시골 풍경은
여름이 흘러가는 동안
나란히 앉아 재잘거렸지
심장처럼 뜨거운 노을과
온종일 느린 걸음으로
서로를 명상한다
산으로 들로
콘서트를 열면서
가을 소리
소리는 공기의 파장이다
밤송이와 밤알이 툭툭
세월을 토하고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가 이름값을 한다
가을이 쏟아내는 소리들
계곡물 소리
풀벌레 소리
과일 따는 소리
색다른 맛과 정취로 달려온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무얼 채우며 살아왔는지
가만히 생각 열어보면
나약한 존재임을 자책해 본다
가을 색감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산책을 즐긴다
사각
사각
가을 청문회
가을바람이 도둑처럼 불어온다
분노와 증오의 바람되어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
한 편의 막장 드라마다
붉은 기억을 쏟아낸
남자의 한 생에
가을바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입바른 소리가 자신에게 돌아온 부메랑은
무수한 의혹 제기로
청문회는 최고의 성찬으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다
전쟁 같은 증오의
진영대결이 펼쳐지는데
고문 받는 사람처럼 아무말 대잔치로
최대한 연기를 피운다
억겁의 시간동안 답변을 하고
온천지를 휘감고
유령처럼 떠다니다가
숨을 곳도 기댈 곳도 없다
가을바람 이야기
키 작은 억새풀이
가을 햇볕에 일광욕을 즐기고
사랑은 거친 파도타기를 한다
지워질 수 없는 주홍의 무게
어지러운 정국이 잠시 쉬어갔으면 한다
가끔 공기가 새고
바람이 들락대는 가슴에
소리치는 가을바람
물가 이끼도 퍼렇게 살아난다
산 그림자 빚쟁이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불현듯 사람이 그리워지는데
단풍 옷은 서로가 색깔을 내며
가을을 서리한다
가을의 길목
자연이 한시도 정지돼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애쓰지 않아도
계절의 옷을 바꿔 입는다
그리운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그립다
가을은 빛깔과 냄새로 달린다
내 안에 숨어있던 빨간 수줍음
가을바람에 들키고
얼굴마다 붉은 수를 놓는다
행복을 달리는 길목의 한복판에서
기억의 공간을 불러내
단풍마냥 즐거운 웃음 짓고
질주하는 햇살의 따스함에
오솔길 친구가 되어준다
내 심장을 흔드는 가을날의 오후
겉옷을 벗어 던지고
머릿속 잡념을 없애고
힘찬 발걸음으로 자연에 물든
거친 숨소리가 좋다
발길에 차이는 서너 장의
단풍들이 자꾸만 묻어온다
가장 멋진 숲 길
조선 왕조의 뿌리가 깊은
준경묘로 향하는 활기리
백우금관白牛金棺 길은
봄이 오면 푸르름 더 진하고
숲냄새 땀냄새 깊이 배인
비포장 길은 그늘을 만들어
편안함을 준다
깔딱고개를 넘어
평지에서 만나는 들꽃과
세계 최초 정이품송과
전통혼례를 올린 미인송과 마주한다
바위에 초록이끼를 무성하게 수놓은
풍경들과 인사 나누고
소나무 사이로 햇살 보이는 산봉우리는
그대 품속 같이 포근한 느낌 든다
이안사도 이 숲속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끼었을까?
가파른 곳이라 숨도 차고 갈증도 났지만
위대한 지난 역사가
새소리 바람소리에 묻혀
가슴에 안기는데
홍살문 지나 준경묘로 향한다
그녀의 옛집
내 안의 비밀
떠나가버린 것들만
질그릇에 담겨져
슬픈 빛으로 흐르는 봄
싸리비 자국이 남아 있는 마당가엔
정갈한 장독대 스무 개 남짓 지켜낸 흔적
행복을 심어주었던
아름다운 화음의 둥지
저녁노을
외딴 집 한 채
여울처럼 떠돌다
저마다 색깔로 물든
내 안의 슬픔
붉은 알전구 켰던
따뜻한 부엌의 그리움은
오랫동안 익힌 김치 맛처럼
추억이 서려 있는 그녀의 옛집
그대와 영원히
가을빛 물들면
그대와 함께한
함백산 산상 시낭송회 날
시와 야생화의 아라리 고갯길 만항재에서
두타시낭송회를 그대와 함께
준비했기에 더욱 그립습니다
강물같이 바람같이 살았을 슬픔도
긴 시간 그대 그늘에
기대어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풀잎마다 반겼던 함백산 기원단
백두대간 만항재에서
돌담 위로 작은 돌을 올리면서
소원을 빌던 그대 모습
또렷이 생생하답니다
뭉게구름 친구 삼아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최고의 파트너
그대를 보내고
그대를 지우려
목젖에 걸려 나오지 않는 울음소리로
소리 죽여 흐느꼈다오
봄을 닮은 그대 온기가
수십 편의 작품으로 남아
나의 집 책꽂이에서 마주보고 있으니
참 숨 가쁘게 달렸더군요
잎새 속에 남은 온기
시든 달맞이꽃 하늘로 이르는 길
먼저가 본
그 곳 세상은 어떠한지요?
고단한 삶 잠시 쉬어가는
호적한 오솔길이었음
참 좋겠습니다
그리운 모습 하나
오늘, 거울 앞에
흔들리는 그리운 모습 하나
설레임으로 잠 못 이루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옛동무
빈 가지에 슬며시 내린다
별보다 작은 이 세상
별똥별 쇼를 바라보던 유년의 기억
봄 물결로 웃음 머금고
조개껍질 추억이 서려 있는 한재길을 오른다
내 마음 한 곳
꽃불잔치로 열리는 파도소리
가슴 속 언저리 갈매기소리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로
순백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리움에 울다 지쳐
절룩거리는 바람으로
지독한 사랑 꽃신 신겨
너의 길을 멀리 놓아보낸다
길 위엔 바람이 드세다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한랭한 느낌을 주면서
녹취된 테이프처럼 말문을 연다
길 위의 낮은 울음소리는
거대한 돌의 통곡처럼 들린다
탄핵으로 뒤덮인 길은
어느새 병든 마음
절박한 심정에 마른
종잇장되어 바스락 거린다
붉은 오후
가냘픈 어깨는
먼 길 돌아 제자리로
시간을 초월한 공간처럼
어둠고 험한 길은
역사의 법정 앞에서
길바닥의 빗물을 피할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뽑아 파면까지…
그녀의 봄은 참 춥다
닮아가는 두 사람
건강검진 종합 소견서에
저밀도 콜레스테롤
갑상선 기능 저하증
비타민D 부족
두 분이 똑같이 나왔네요
의사선생님은
좌ㆍ우로 보면서 말한다
성격도, 외모도 식성도
의학적으로 확인된 부분이 없는데……
서로 적응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걸까
두 사람은 분명
사랑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도 달랐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빛이 같아서
그 빛으로 서로 닮아가고 있었는게 아닐까
새로움보다 편안함이 좋았을 뿐인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스며들며
희노애락을 표현하며
서로 닮아가는 두 사람
돌아온 오후
무거운 연기가
방안 가득 깔리는
어느 날 오후
긴 한숨이
병든 젖소의 젖처럼 나오고
거미줄 같은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잠시 망설인다
힘겹던 그 해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기대고 싶은 사랑마저
압정으로 꼭꼭 찔렀건만
삶이란 복잡하고
걱정 없는 날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다
어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아름다운 흔적들로
사랑한다는 말과
가을처럼 살자던 문자메시지
삶은 아름다운 사건 속으로
내 안을 찔러댄다
만산에 홍화
봄은 소리 없이
다가와
내 가슴에
철쭉 불 질러댄다
숲이 주는
분주한 산새소리
바람에 살랑거리며
덩달아 풀무질하네
만산에 홍화紅花
찬물 뛰어들면
피시식 불길 잡힐까
철쭉 불 보다
더 뜨거운
당신 눈길에
오늘 밤
붉은 마법에 걸려
온 세상을 품어 볼까
몸살
난로의 연통처럼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쿨럭이는 기침소리는
배고픈 아이들의 눈망울처럼 지쳐만 간다
모든 힘 빼앗긴 삶은
밤새 두드려 맞기라도 한 듯이 아프고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젖은 소금기로 버석거린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몸이 들썩거리기를 일주일
혀끝으로 알약을 삼키며
주름진 눈꺼풀 위로
검은 눈물 흘리며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민둥산을 오르며
행복의 무게 풍선처럼 부풀어
더디게 떠나는 산행 기지개를 켠다
세차게 쓸고 가는 사람들의 땀 내음
분이 나는 황토길 적시며 마을 오를 때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조차
용서되는 여린 햇살의
옷 벗는 갈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가을로 무너지는 민둥산 풍경
카메라 렌즈에 고정시킨 사람들
맛깔난 대사 주고받으며 셔터를 눌러댄다
포근한 갈색 스웨터 위로
은빛가루 곰실곰실 춤출 때
나, 그대, 하늘, 땅 하나 되어
가을로 흔들리고 있다
잠시 벼이삭에 쉬어 가는
어머니의 삶 닮은 갈대의 물결
실핏줄 끝에 매달려 소리가락처럼
장단 있는 산굽이 돌아
그대와 잠시 행복에 젖는다
병실의 사람들
서로 다른 생활 습관이
갈등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때론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내야 한다
차가운 바람이 병실을 다녀간 후
그대들의 상처는 가려움증으로 남아
온 몸 쿡쿡 울리는 통증의 밤은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일상은 바쁘고 밋밋하게 흐르는 하루
마음의 병이 시선 속에 서성인다
서로가 서로의 땀을 닦아주는
그들의 미소는 때때로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다
빗소리가 울고 간다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며
습관처럼 나의 예민한 후각이
벽 쪽으로 돌아눕지만
지독스럽고 남루한 냄새가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참 좋겠다
시월은
오랫동안 삶을 지켜준
들꽃 무더기 향내가
생명의 감각을 기습한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작은 빛은
아직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만 하는 바람
나는 가끔 꿈인 듯
어깨를 기대고 늘어선 산처럼
당신께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 많던 은행잎이 다시 그리워지면
구름꽃 핀 언덕에서 허수아비처럼
두 팔 벌려 시월을 견디어 낸다
길의 어느 지점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게
모두 져버린 당신을 만나게 될까봐
내 마음의 현들은 소리를 낸다
어느 날, 사랑의 콧노래 부르며
계절풍에 날아온 당신이
예쁜 꽃처럼 끌리면
그대 안에 머물 것이다
시월의 끝자락
오늘따라 오십천은
수채화 색깔로
빠른 속도로 내 곁에 와
가슴앓이 했던 일들로
구원의 힘 되어 시름 달래주곤
하루를 평화롭게 까먹는다
잠시 눈을 감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눈이 호사를 누리는 풍광
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
오십천 마냥 신비롭다
벗들과 걷는 오십천 가을 길은
층층 색띠 두른 단풍과
아프고 아름다웠던 기억들로
짧은 감탄사와 함께
발길을 멈춘다
무거웠던 삶의 바위
나를 다독여 본다
괜찮아질 거라고
오후의 마술
새하얀 꽃구름 피워 올리는
마술의 한나절
따스한 옥장판에 몸을 눕히고
바람 든 허리 기울여
진통제를 필요로 한다
동화처럼 빨갛게 물드는
나의 육신
젖어드는 어제의 기억이
고통과 열정 담아낸 흔적으로
꽃잎을 열고 있다
흙바람 몰아치던 세상 잡것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빠져
날카로운 옷깃에 떨고 있는
그림자 하나를 더한다
분홍 노을
씁쓸한 아름다움에 제 살 문대며
흐드러진 시간을 덮어
아둥바둥 꾸려가는 하루살이
하늘 한 쪽 살짝 펄럭인다
준경묘
조선 왕조의 태동이
설레임과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깊은 산중에 평원이 형성되어
맨발로 걸어도 편안하고 좋은 느낌
흘린 땀을 식히고자 진응수를 음복하고
준경묘1)에 큰절을 올린다
百牛金棺으로 부친을 안장한 후
5대손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준경묘
울창한 송림 안에 명당의 기운이 뻗치고
소나무 숲 낙락장송은 멋들어지게 자리 잡아
오백 년 사직을 느끼게 한다
왕조를 탄생시킨
최고의 명당에서
태조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고
바람도 쉬어 가고 구름도 자고 가는
안온하고 편안한 땅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있는 산
대한 준경묘는
약속된 천만년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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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길 산 333-360
천문산
케이블카를 타고 운몽선정1) 기점으로
가파른 산을 오른다
끝없는 녹지와 깊은 협곡
발밑은 천길만길 낭떠러지
떨어질 듯 부딪칠 듯 위태롭지만
칼끝 같은 기봉들이 점차 낮아지면서
반복해서 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안개구름 위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명성을 가진 천문산2)
능선을 넘나드는 스릴
석회암 지형으로 높으면서
험한 자세가 더욱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과시한
거대한 자연이 내뿜는 녹음
최고의 비경을 선사하는 수려함과
기이함, 야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거대한 중국 대륙의 비경
짜릿한 스릴과 스케일을 느낀다
뱀처럼 휘감아 돌아서 99번
버스를 타고 경사길을 내려오는데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우리나라 대관령 옛길을 연상케 했다
기묘한 바위들과 자연이 빚어 선물한 천문산
지금 그리움을 혼자서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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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문산 귀곡잔도를 지난 지점에 위치한 장가계 최고의 관광지
2) 중국 장가계 명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
제4편 먹방 문화
12월ㆍ2
겨울은 지금 무너지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인생의 7할은 고통입니다
여름 하지감자 보다 예쁜 열다섯 처녀
병풍처럼 둘러싼 7남매 낳으시고
휘어지고 굽어진 연어의 몸 되어
아랫목 따스한 방바닥에 X레이 촬영하듯
언제나 내 가슴 파도치며 곁에 계셨습니다
시든 풀처럼 이어간 하루살이
빨대로 끼니를 삼키시던 당신의 마지막 모습
겨울산은 자는 듯 깃털처럼 가볍게
낙엽 되어 종소리로 떨어졌습니다
등뼈 드러난 나무
빈 가지가 추위에 떨며
미칠 듯 흔들고 갑니다그때마다 갈매기 울음보다 크게
흐느끼며 소리쳤습니다
모처럼
지나온 날들을 더듬어 봅니다
가슴에 묻은 사랑
가난을 피해가는 컴컴한 방에서
오이피클처럼 절여진 눈동자
세상 남자들 절반 넘게
바람을 피우며 산다는데
말 못할 가슴앓이를 하는 넌
겉으로는 피에로처럼 웃고 사는구나
작은방 뻐꾸기 시계바늘이
자정을 알리며 흔들리고
주방에 있는 냉장고가 씩씩거리며
찬 기운을 뿜어낸다
기울어져가는 밤하늘에
돋보기 안경을 벗어
컴퓨터책상 위에 놓고 일어서 보지만
주근깨 투성의 어둠이 가슴을 핥는다
그리고, 집안은 관 속처럼 고요하다
어미 잃은 병아리는 방바닥에 엎드려
제 몸이 젖는 줄 모르고
싸느랗게 얼었던 가슴 위로
슬픔의 눈물이 도랑을 이루며 버려지고 있다
건망증과의 전쟁
요즘 나는 건망증을 달고 산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교통카드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용카드로
처리하려니 안 되는 것이었다
노년도 중년도 아닌데
깜박깜박 지우개가 된다
건망증으로 인해
나 스스로 위축되고
의욕이 상실되기도 한다
평소에도 잊어버리는 일이 많다
뒤죽박죽 엉켜가는
내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책꽂이에 시선이 머문다
각종 서적을 분주히 뒤적이면서……
가늘게 슬퍼지는 마음을 붙잡는다
누군가에겐 모험 같고
누군가에겐 소풍 같은 게
인생 아닐까?
겨울연가
땅에 묻은 장독도 깬다는
꽝꽝 언 소한 추위
잠시 숨 고릅니다
남루한 겨울추억 기웃거리지만
툇마루 양지 녘
다시 물구나무 서는 햇살
풀리는가 싶더니
얼음장같이 돌아서고
쌀쌀한 바람 속의 화신
멀어질 듯 가까운 듯
아침마다 입었다 벗었다 하는
그대 이름은 사시나무
겨울 들판 위로
무지갯빛 사랑 그리는
내면의 고뇌 담아
기약 없는 겨울은 끝까지 아픔입니다
아침 벌판이
혼미한 내
마음의 창으로 스며듭니다
기억을 상실한 남자
길게 누운 돌담 사이로
몸을 던지는 낙엽의 울음소리
붉은 즙을 짜내어 분열하는 광경에
삶의 간을 맞추면서 가을을 삼킨다
고의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남자는
아름다움이란 때론 피곤하면서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다
매연으로 얼룩진 슬픈 길에서
바람소리만 딸려오니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는
관절마다 고열이 찾아와
손톱을 깎으며 머리를 짜르고 샤워를 한다
또렷한 새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비난과 상처투성인 가면을 쓰고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잠시
영양제라도 맞아야 할 것 같다
당신과 숨 쉬는 세상이 사막과 같다
달빛 속의 산책
— 찜질방
아줌마들 수다방이 그리워지는 계절
어두운 밤 그곳에 가면
바람처럼 사람들이 드나들고
유리문에 비친 그림자 사방을 가득 채운다
켜켜이 쌓아놓은 쑥의 잎들
가을꽃 되어 올망졸망 다투어 피어내곤
때 묻은 아픔을 스트레스로 풀어헤치는
달빛 속 산책이 펼쳐진다
적절한 온도의 열기는
고독한 내면의 세계로
영혼을 건드리는 언어 되어
한 꺼풀 벗겨내는 뜨거운 의지
찰흙 속 빚어낸 황토방의 높은 온도는
뜨거운 논쟁 즐기는
아름다운 반란의 시간
용도별 각기 다른 공간을 갖추니
5성급 호텔 부럽지 않는 찜질방
따스한 추억 한 자락을 차지하던
그곳, 그곳에 가고 싶다
덫
— 카드
천사의 얼굴로 다가와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그대는
단맛에 취하고
고열과 사경을 헤매다 쓰러진다
가면처럼 색색
파고드는 미끼
어둠의 벼랑에
위험스레 매달려
패가망신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자주 꺼낼수록 주름살 깊어지고
죄의 구덩이로 밀어 넣은 유혹
치료받기 힘든 상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통증
죽음의 깊은 그림자
덫에 걸려 몸부림친다
먹방 문화
느긋한 한 끼의 식사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며
배가 봉긋하도록
중년을 읊조리며 먹는다
그 옛날 가난이
진드기처럼 달라붙던 시절
비오는 날엔 배가 더 고팠다
처마 끝에 모여 앉아서 먹던
감자전도 생각난다
우리 몸은 기억력이 뛰어나다
요즘 ‘백종원의 골목식당’ 음식 장사가 화제다
성공하기 정말 어려운 세상에
현실과의 타협도 필요하다
가격도 착하고, 음식 맛도 좋고
배고픔과 좌절에 고민했던
먹방 문화는 부정적 인식을 뒤집고
건강한 식습관을 삶과 직결되는
새로운 블로그로 활성화 된다
혼자 식사할 때 먹방을 틀어놓고
같이 식사하는 기분은 어떨까?
유난히 맛있고 자극적이다
뜨거운 어묵도
가을에 먹으면
노란 눈물 된다
무거운 나이
서둘러 젖은 코트를 벗는다
한랭한 느낌을 주면서
분주한 마음도 내려놓고
어떤 의심도 하지 않으련다
눈빛은 강력한 흡입력을 보이고
무거운 음성은
냇물 바닥에 가라앉아
매우 처절한 얼굴빛으로 말문을 연다
핏빛 가득한 음성은 등뼈를 타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민다
셀 수 없는 무거운 숫자들은
억 단위를 넘으니 정신이 혼비백산되어
머리에 박히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물음표들이
창밖의 어둠 되어 쏟아져 내린다
몰락한 왕족의 고성처럼
우뚝 서 있는 녀석은
겉멋 들고 허세가 가득했던 과거를
스스로 깨우친다
참 다행이다
너무 늦지 않아서
물안개
물안개 피어나는 장관은
따뜻하고 감미롭다
잔잔한 호수의 녹색 물결
푸른 하늘에 담아
세상사 잠시 잊어 본다
붉은 해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여름 볕에 달아오른
붉은 고추 주렁주렁
알찬 옥수수 수염 발그레져
길섶에 보랏빛 도라지꽃
하얀 개꽃 서로 반길 때
세월 건너 만나는 시골 풍광
개구기 소리마저 잦아드는 밤
발자국 소리 귓전에 맴돌며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함
강물 위 물고기 소리
세월 잊은 채
고요가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미역국
아버님 어머님 합장合葬 하는 날
장지에서 돌아온 식구들에게
미역국을 끓여냅니다
따뜻한 정을 잃지 않으셨던
어머님 영정사진 앞에도
곡소리 대신 미역국 한 그릇 올립니다
새댁시절
첫아들 낳던 날
쇠고기 반 근 넣어 밤새
연탄불에 푹 끓여주시던 그 맛
한 달 내내 배불이 먹었던 미역국
동짓달 초여드레
당신의 손주 생일날
피곤에 지친 어둠 녹여내며
바람꽃들로 풀어져 소리 없이 떠나셨습니다
분주한 삶을 살고 가신 당신은
나의 젊은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성장한 아들
할머니 뵈러 가자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가을 성묘 때 가자고
늙은이처럼 나는 혼잣말을 합니다
오늘저녁은
시린 가슴 반 쪽
미역국으로 채워야겠습니다
바다의 음계
밤하늘의 별들과
옛이야기 늘어놓은 파도는
화려한 비상도 아닌
앞바퀴만 달려온
숨 가쁜 인생
초록 손바닥 펴든
어둠의 숨소리
아슬아슬한 곡예로
살갗까지 벗겨 낸다
파도가 춤을 추는 걸까
암흑 속을 탈출하는
덩크 슛의 충동과
완벽한 기쁨을 풀어낸
바다의 음계로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온 몸을 하얀 선율에 실어
파도의 동심을 묘사한다
바다는 정직하다
밤길이 멀어도 찾아갈 그대가 있다면
이런 저런 속내를
밤새워 나눌 수 있는 눈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때론
사람처럼 친밀감마저 느껴지면서
착한 발자국 위로 눈이 내게 온다
밤길이 멀어도 찾아갈
그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 눈들은 나쁜 남자처럼 나의
작은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며
아주 커다란 하트 모양되어
또 다른 기억을 한바탕 몰고 온다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운 이 밤
흔들리는 눈길로 유배당하는 기분은
아픔으로 넘어지면서
눈에게 위로를 받는다
대문 밖에는
그리움 같은 눈이
조용히 멀어져가고
잠들지 않는 사랑은
구멍 난 마음까지 매만지면서
쉼 없이 나를 흔든다
너와 내가 하얀 세상을 품었으면
보름달
저녁 운동 길에
우연히 마주한 보름달
이 마실 저 마실 떠밀려
두둥실 물오른 행복한 얼굴
밤하늘 별도 보름달에 가려져
잠시 비틀거린다
굶주린 들짐승마냥
바보처럼 웃으며
반항할 수 없는 무기력
무수한 신비스럼을 간직한 마력은
미움도 그리움도 멈춘 채
다양하게 비친다
사람들은 보름달 아래서
운동기구에 매달려 몸을 풀어주고
한결같이 건강을 다지며
지친 심신의 여유를 찾는다
밤하늘의 꽃 보름달
행복한 나를 찾아 걷는다
슬픔의 질량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남은 꿈들을 하나씩 버리는 일과
입안에 약을 털어 넣는 일이다
추운 겨울
담장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장미는
몸과 마음을 수혈하기도 한다
오래 묻어 두었던 속울음은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수많은 말들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왜 이토록 생경한지
3D영화 같이
숨조차 쉴 수 없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 이름도 증발하여
한참을 더듬거려야 떠오를 땐
헤매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나의 내면에
곰삭아 있는 공포를 몰아내고
놀랍게도 슬픔 속에서 희로애락이 들어 있다
어느 순간 슬픔의 얼굴은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
유쾌한 말투 뒤에 숨겨진
슬픔의 질량을 깊이 통찰해 본다
엄마부대
슬픔과 기쁨의 순간에
부르는 엄마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왜 집회를 할까
어느 나라 엄마고
누구의 엄마라는 걸까
대한민국 엄마부대 봉사단은
일본 정부와 밀약된 것도 없는데
친일 정체성을 드러내며 음모론을 보인다
한국 정부의 사과를 요구한 ㅇㅇ단체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럽다
폭염 속에서 여론은 부글부글 끓고
모성과는 동떨어진 엄마부대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할까, 분개한다
국민 모욕죄, 엄마 사칭 죄
분노하는 목소리 가슴을 친다
엄마부대는 누구의
엄마란 말인가
극단적인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엄마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죄
용서할 수 없다
저녁밥상
바쁜 하루를 보낸 소소한 저녁
혼밥 먹으러 온 사내는
자장면 곱빼기를 주문하면서
짬뽕 국물은 덤으로 시킨다
중화요리의 꽃 자장면은
香 짙은 본색을 숨기고
추억을 먹는다
따스한 창가에 앉아
눈 깜짝할 사이
저녁 한 끼를 뚝딱 해치우는 남자
요즘은 혼밥,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삶이란 늘 혼자라는데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이 아려온다
정월대보름제
— 기줄다리기
거친 파도 같은 사내들은
긴 새끼줄 위로
장갑 낀 두 손 마중을 나간다
너도 영차! 나도 영차!
핏빛 가득한 음성으로
한 가득 뿜어낸다
봄이 가진 힘!
굳어진 관절을 일으켜 보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린다
이겨야 한다는 간절함이
사내들의 허벅지 위로 빠르게 출렁인다
칡넝쿨처럼 악착스럽게
골 깊은 손금사이로
시간의 공기가 삐걱인다
풀잎이 그네를 탄다
파초 잎처럼 오래 흔들리면서
잠자고 있던 욕망이 깨어난다
세시 민속놀이인 기줄다리기
함성의 열정은
양면 색종이 같다
촛불, 성탄전야
전국 주요 도시에
뜨거운 낮 시간의 소리는
전통문화와 라이브 음악이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촛불’과 ‘맞불’
기온이 뚝 떨어진
햇볕에 타들어가는 갈증
후끈 달아오른 진한 여운과
사랑하던 시간들은 여느 때와 다르게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아름다움으로 때리는 통증
맞불집회도 시가행진을 벌이고
촛불집회 사이로 내 감정도 끼워 넣어
충돌 없이 평화롭게
언론과 입을 맞춘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소리 높여 노래 부른다
탄핵 캐럴도 상쾌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감상하며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광화문 광장의
붉게 물든 소통을 보는데
더불어 나도 슬프게 느껴진다
한가위
기우는 햇살 가슴에 품던 그날은
고요한 집안이 또닥또닥
도마질 소리로 부산해집니다
남매의 키가 컸었고
마음이 자랐던 언덕에서
수줍은 웃음 번지던 날
모처럼 얼굴 맞댄 식구들의
떠들썩한 소리는 넉넉함을 더합니다
객지로 돈 벌러 갔던
박꽃 같은 언니가 귀향하는 날은
눈처럼 맑고 밝은 새잎들 우르르 몰려나와
선물 보따리 한아름 풍만했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가위
덕담도 나누며 맛있는 것도 먹던 날
신이 난 동생과 나는
서로 손잡고 더덩실
어깨춤 춥니다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향香1)
— 굴짬뽕
시스템 같이 돌아가는
중화요리집 점심시간
굴짬뽕 두 그릇
주문을 한다
차가운 가을과 겨울 사이
시간은 천천히 흘러
깊고 진한 육수로
깔끔한 맛을 더한다
짬뽕 속 굴은
국물 속에서 올라오는 맑은 굴향
음식의 맛은 온도다
시간의 바닷속에서
식감이 살아 물결치던 굴은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먼 거리에도 지침이 없다
내 몸의 신경세포들은 습격해 온다
‘바다의 우유’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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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香(중화요리집), 삼척시 대학로 38(당저동)
호박
한여름 힘겹게 성장해
조그만 뒤뜰에서 푸른 옷 입고
두런두런 속삭였을 보름달 풍경
저마다 제 모습 갈아입느라 야단법석이었지요
친정집 베란다에 방석처럼 차지한
작은놈부터 시작해 가장 커다란 것은
빛깔 좋게 익어서 아버지 속내까지
좌지우지하는 터줏대감 같지요
익을수록 깊어지는 여유
얇게 썰어서 주시던 누런 호박
이 겨울 매서운 바람
다 녹일 수 있을까요
늙어갈수록 잘 여문 호박은
아버지를 닮은 것처럼 보여
어둠 속 비쳐 보이는 굽은 등이
왠지 서글퍼 보이네요
『바다는 나의 쉼표』 해설
생명의 숨결과 맑고 따뜻한 공명
— 정순란 시를 읽고
윤중 박 종 화 시인
1. 우리네 인간은 개인적인 인연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든 일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이 모여서 아름답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우연한 만남이든 섭리적 만남이든 만남은 중요합니다,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시작됩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순란 시인은 문학 안에서 만났습니다, 詩 속에서, 詩와 함께 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생은 긴 여행과도 같습니다. 생명이 탄생하여 죽음으로 끝이 나는 약 70~80년의 유한한 여행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춘하추동 네 계절의 순서는 절대로 착오가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맨 처음 배운 한시가 도연명의 「사시」였습니다.
春水萬四澤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峯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 봄물은 네 못에 가득차고, 여름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들.
가을 달은 밝은 빛 휘날리고, 겨울 영마루에 우뚝 선 솔나무.
그러고 보니 ‘사시’ 는 사람의 한 평생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나 정순란 시인이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그녀가 시집을 내어보겠다고 불쑥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 때, 시는 말을 건넵니다. 시는 무기력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시가 주는 감동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붙들어 이를 탐색하고 변화시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을 짚어보고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 시를 읽고 쓰는 것입니다.
멋대로 떨어진 감꽃이
예쁜 속살을 내어주곤
고장 난 블라인드마냥
잠들었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레 사랑을 풀어
기억의 첫 번째
서랍에 보관해 두었지요
삼십대의 푸른 기억과
오십대의 달 같은 추억에
입맞춤 해봅니다
아직도 걷어내지 못한
마음속 진동은
환절기 알레르기 되어 자주 잊으며 산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온도로
웃어주는 남자
오늘따라 더 정겹습니다
꽃과 햇살 그리고 가을 사랑에
특급 칭찬을 해줍니다
구수한 애정 표현과
임산부마냥 배불뚝이가 된
가을 남자는
익숙한 풍경 안에 갇혀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갑니다
― 「가을 닮은 남자」 전문
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도록 도와줍니다. 시는 그런 삶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통찰력과 탄력성, 의미를 제공합니다.
2.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감정이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때로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고 절망감까지를 느끼게 됩니다. 차라리 인간에게 있어 감정의 세계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때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감정이란 여간 까다롭고 성가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언어구조를 통해 시로 나타날 때 지극히 아름답고 밝고 환희롭기까지 합니다.
시를 읽다보면 ‘팅’ 하고 마음의 현이 울리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인과 나의 마음이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은 다른 존재와의 공명을 통해 생명의 숨결을 이어 갑니다. 타인과의 소통과 이해야말로 우울한 인간들의 마음을 쓰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조용히 음미해 보는 것만으로 치유의 힘을 발휘하고,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꾸기도 합니다.
정순란 시인은 자신의 직ㆍ간접적인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현실세계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제시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시인의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과 따뜻한 심성으로 모성의 세계를 기억해내고, 그 세계를 현재적 의미로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한데, 여기에 그의 시의 미덕이 있다 하겠습니다.
아침이면 색色으로 태어나
희망을 던져주는 바다
안개처럼 가는 비에
파도가 한 겹 두 겹 겹쳐지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각가지 색깔로 상처 입은 나날이
그리움 묻고 사연을 게워낸다
모래밭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광 또한 이색적이다
빨랫줄처럼 흔들리는 현실에
한동안 회전목마를 탔지만
오늘만은 파도의 춤을 보면서
힘든 어제를 잠시 잊기로 한다
바다에서 꽃보다 더 향긋한
비린 냄새가 풍겨와
어머니를 닮은 무늬 피워낸다
바다는 들뜬 내 마음
가라앉히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가로이 데이트 즐기는
연인들의 다정한 웃음이
흔들리는 누군가를 잠재워주기도 한다
바다는 자갈도 모래도 해변의 발자국도
아련한 감회를 자아낸다
꼭꼭 숨은 조개껍질을 찾아
치마폭에 주워 모은
너와 나의 바다
핑크빛 설렘으로 움찔 거린다
― 「너와 나의 바다」 전문
시는 곧 시인 자신입니다. 시인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탐험가이며,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명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메시아입니다. 또 무엇보다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개념을 검증하는 자아이어야 합니다. 시가 곧 언어이고, 언어가 곧 시이며, 세상이고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말을 낚아 올리는 어부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시인은 언어에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삶을 지켜준
들꽃 무더기 향내가
생명의 감각을 기습한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작은 빛은
아직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만 하는 바람
나는 가끔 꿈인 듯
어깨를 기대고 늘어선 산처럼
당신께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 많던 은행잎이 다시 그리워지면
구름꽃 핀 언덕에서 허수아비처럼
두 팔 벌려 시월을 견디어 낸다
길의 어느 지점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게
모두 져버린 당신을 만나게 될까봐
내 마음의 현들은 소리를 낸다
어느 날, 사랑의 콧노래 부르며
계절풍에 날아온 당신이
예쁜 꽃처럼 끌리면
그대 안에 머물 것이다
― 「시월은」 전문
3. 아무래도 정순란 시인의 시가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머무는 세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충분히 잘 살았다 할 수 없는 삶이 됩니다.
정순란 시인의 시에 나오는 사랑의 대상은 육친이나 형제, 정다운 이웃들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광범위한 사랑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시는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고, 상처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며,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인생이 외로움과 상처와 고통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듯 시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하루를 보낸 소소한 저녁
혼밥 먹으러 온 사내는
자장면 곱빼기를 주문하면서
짬뽕 국물은 덤으로 시킨다
중화요리의 꽃 자장면은
香 짙은 본색을 숨기고
추억을 먹는다
따스한 창가에 앉아
눈 깜짝할 사이
저녁 한 끼를 뚝딱 해치우는 남자
요즘은 혼밥,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삶이란 늘 혼자라는데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이 아려온다
― 「저녁밥상」 전문
아무리 시련을 피하고자 해도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시련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시련 없이는 인생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생을 형성하는 요소 중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시련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법으로 진실을 표현하는 능력 때문에 시를 찾습니다.
시는 우리에게 삶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보여 줍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반영하기 위해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는 사람들에게 화합과 유대감이 현실로 이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노크도 없이
행복을 전해주는 풍경
외로이 짐승처럼
배롱나무만 서서 눈발을 맞는다
이런 날엔 나도 풍경이 되어
찡하게 마구 흔들려 본다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한
그리운 이름을 판화로 남기면서
마중하는 눈발을 따라 걷는다
새로울 것 없는 인생과
눈만큼 높이 올라간 하루
카푸치노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기 전에
차가워진 내 심장을 데운다
시간은 심경의 굴레 되어 몸부림치고
내 속에 나를 적시는 눈길의 포옹
너와의 사랑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불꽃으로 타는 단풍이고 싶다
― 「너와 함께한 하루」 전문
4. 매사 열정적이고 올곧은 심성으로 오십천 갈대를 사랑하며 동해 해당화를 닮은 그녀! 정순란 시인의 시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시가 상당히 내성적內省的이고 존재론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지순하고 완미한 세계, 화해로운 삶의 세계를 동경하고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알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른 바 마음의 눈과 귀를 뜬 사람들입니다. 밖으로 보다 안으로 밝은 내명內明한 사람들입니다. 정순란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요, 그의 詩가 또한 그런 詩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과 우리네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때가 묻어 있으며 또 여러 가지 요인들로 하여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상주의적 경향이 있기 마련이어서 자기가 그리는 세계가 있을 수 있고 꿈이 있기 마련입니다.
길게 누운 돌담 사이로
몸을 던지는 낙엽의 울음소리
붉은 즙을 짜내어 분열하는 광경에
삶의 간을 맞추면서 가을을 삼킨다
고의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남자는
아름다움이란 때론 피곤하면서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다
매연으로 얼룩진 슬픈 길에서
바람소리만 딸려오니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는
관절마다 고열이 찾아와
손톱을 깎으며 머리를 짜르고 샤워를 한다
또렷한 새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비난과 상처투성인 가면을 쓰고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잠시
영양제라도 맞아야 할 것 같다
당신과 숨 쉬는 세상이 사막과 같다
― 「기억을 상실한 남자」 전문
문학이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식과 교양뿐 아니라 감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시는 그것을 찾아 읽는 사람에게만 충만한 기쁨을 주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초월의 힘을 발휘합니다. 시적 생활이라는 것은 시를 통해 정서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K지인이 물미역을 줬다
짐작하건대 민박집 냉동실에서
어렴풋이 4박5일은 머무르다 어제 밤늦게
우리 집 싱크대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밤새 바다냄새는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겨우내 갇혀 있었던 바다는
휴식을 위해 나들이 나와서
소박한 식탁 위에 흥건히 누워
시큼한 초장에 숨 막히는 절정
짠맛 느껴지는 바다를 풀어헤쳐 놓았다
어둡고 흐릿한 세월에 주름을 업고
부대끼며 살았던 삶도 소중하다며
숱한 시간이 낙엽으로 누워
하늘을 덮고 있다
술꾼이 토악질하듯 바다는
물거품을 길게 토해냈고
입안에서는 단맛이 돌았다
추억의 오후
얇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분홍빛 봄 바다
마법에 걸렸던 시간이
푸른 소리로 스며든다
― 「분홍빛 봄바다」 전문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지구라는 별로 여행을 나온 나그네. 이 세상 여행을 모두 마치는 날 또 하나의 세상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입니다. 부디 정순란 시인이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전코스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 여행의 흔적으로서 좋은 시들을 많이 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생명의 숨결과 맑고 따뜻한 공명의 정순란 시인의 시에서 간결하지만 아름답고 내면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시 한 편을 더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年年有餘년년유여, 孚世淸緣부세청연 善緣善果선연선과
— 언제나 넉넉하고 여유 있기를! 이 뜬 세상에서 맑은 인연 만났으니, 이 좋은 인연을 소중히 살려 나아가면 더 좋은 꽃이 피고 알찬 열매를 맺으리라!
고약한 날씨가
깊은 우물에 고여 있던
온갖 아픔을 길어 올려
온 육신이 이완되는 소리로 들린다
난로의 연통처럼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쿨럭이는 기침소리는
배고픈 아이들의 눈망울처럼 지쳐만 간다
모든 힘을 빼앗긴 삶은
밤새 두드려 맞기라도
한 듯이 아프고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젖은 소금기로 버석거린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몸이 들썩 거리기를 일주일
혀끝으로 알약을 삼키며
주름진 눈꺼풀 위로
검은 눈물 흘리며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 「몸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