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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김씨 圭堂 김영채一家 치열한 절약,공동체에 대한 보시와 積善의 정신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cyh062@wonkang.ac.kr)
‘경물중생’(輕物重生). ‘외물’(名利)을 가볍게 여기고 생명을 중시한다’는 말이다. 제자백가 가운데 한 명인 양 주(陽朱)의 인생관이 바로 ‘경물중생’이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일리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맹자(孟子)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들어온 까닭에 양 주의 인생관을 지독한 에고이스트의 독백쯤으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 주의 생명사상은 오늘날 재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기도 싫고 구속받기도 싫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양 주의 개인주의 철학을 무조건 몰상식한 이기주의로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평유란(馮友蘭)은 그의 명저인 ‘중국철학사’에서 양 주가 말한 ‘경물중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보충설명을 달고 있다. “중산공자모가 첨자에게 말했다. ‘몸은 강과 募牟?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조정에 가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생명을 중시하십시오. 생명을 중시하면 명리는 경시됩니다(重生則輕利).’ ‘생명을 중시하고 명리를 경시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자제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자제할 수 없으면 욕망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정신만은 해를 입지 않을 것 아닙니까. 자제하지 못하면서 또 욕망대로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애쓰다 보면 바로 이중손상을 입게 됩니다. 자고로 이중손상을 입고도 장수한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중국철학사’상. 박성규 옮김. 까치출판. 227쪽.) 명리(名利)에 대한 집착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해 몸을 상하기 쉬운 필자 같은 유형의 범부가 두고두고 유념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벼슬과 돈에 집착하다 몸을 망치지 말고 한 번뿐인 자기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양 주의 철학은 맹자로부터 “자기의 터럭 하나 안 뽑겠다는 놈들”로 융단 폭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맥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노자’ ‘장자’를 통하여 도가(道家)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평유란의 지적이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다 보면 대자연을 찬미하는 쪽으로 가게 마련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 사상은 오늘날 반전(反戰)사상가·생태학자·여성운동가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양 주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시도하는 이라크전쟁은 생명을 경시하고 명리를 중시하는 ‘경생중물’(輕生重物)의 전도된 가치관의 소산이라고 보았을 테니까…. 양 주와 도가의 생명사상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상적 맥이 풍수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산의 지세와 함께 바람과 물의 배합을 따졌던 풍수의 대가들은 사실 알고 보면 그 뿌리를 모두 도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도가의 후예들이 많고, 산을 좋아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풍수의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 생명과 산 그리고 풍수는 같은 쳇바퀴를 따라 돌아간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도사들에게 풍수는 교양필수과목에 해당되었다. 선비들이 젊었을 때는 세상에 나가 경륜을 펴는 유가(儒家)를 선호하지만, 나이 들면서 세상살이의 험한 꼴을 많이 겪으면서 50대로 넘어가면 대개 도가지향적 스타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겉은 유가이지만 내면세계는 도가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도사들로 손꼽히는 정북창·이토정·류겸암·남사고 등이 모두 유가에서 시작하여 도가로 간 인물들이다. 산과 생명을 사랑했던 도가들은 공통적으로 풍수도참(風水圖讖)에 관한 각종 비결서(秘訣書)를 남겼다. ‘정감록’ ‘격암유록’과 같은 비결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비결서를 대표하는 ‘정감록’을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십승지(十勝地)를 밝혀 놓은 대목이다. 풍수적 유토피아 十勝地란 무엇인가 십승지란 풍수적 유토피아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는 난리가 일어났을 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10여 군데 피난지를 말한다. 전쟁이란 관념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남자들은 목이 잘리고 사지가 절단나고, 부녀자는 무자비하게 겁탈당하는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해야만 하는 피튀기는 현실이다.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전쟁도 정당화될 수 없다. 생명을 죽이는 그 어떤 명분도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가. 그 방안으로 대두된 것이 바로 십승지다. 10군데를 열거하면 이렇다. 1.풍기 수리바위 금계 동쪽 골짜기, 소백산 두 물 사이에 있다. 2.화산(안동의 옛이름) 소라국 옛터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을 지나서 들어간다. 3.보은 속리산 증항 일대. 난을 만나 몸을 숨기면 만의 하나도 다치는 일이 없다. 4남원의 운봉 행촌. 5.예천 금당실. 이 땅에는 병화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왕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6.공주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둘레가 200리나 되는데 피난할 만하다. 7.영월 정동(현 연하리).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 만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사람(無髮者:승려)이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8.무주 무풍산 북쪽 동방상동. 이 일대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피난할 만하다. 9.전북 부안 호암(壺岩) 밑이 가장 기이하다. 10.합천 가야산 만수동. 그 둘레가 200리나 된다. 오래도록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부쪽으로는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한 곳이다.(최어중, ‘현장풍수’, 동학사, 46쪽) ‘정감록’에 의거하여 전국의 십승지를 찾아다니면서 직접 현장답사해본 최어중(崔於中) 씨의 분석에 의하면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3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정신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토속신앙의 성지였던 곳이다. 풍수적으로 길지였음은 물론이다. 둘째는 경제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만한 농토가 있어야 했고, 약초나 산삼도 캘 수 있어야 했다. 셋째는 전략적으로 험준한 도나 군의 경계에 위치해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또 다른 행정구역에 있는 십승지와 쉽게 연결되어야 했다. 그래야 관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십승지의 온 주민이 다른 십승지로 피할 수 있다.(같은책, 67~69쪽) 조선시대 역사에서 십승지가 등장한 시점은 대략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난리가 그 원인이다. 그렇다면 난리났을 때 십승지로 피난갔던 사람들은 과연 효과를 보았을까. 효과를 보았다.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다른 인명피해 없이 난리를 넘겼던 것 같다. 모두 지독한 오지였기 때문에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은 산이 전 국토의 70%여서 미로와 같이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산들도 대개 1,000m 내외의 높이에 동식물이 풍부해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 살 수 있다. 정부에서는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해 제대로 된 도로를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알 수 없는 곳이 많았다. 한반도와 같은 조건을 갖춘 나라도 세계에서 드물다. 중동의 이라크처럼 국토가 거의 평지이거나 사막으로 된 나라에서는 당연히 십승지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주변 100여 리가 한눈에 파악되는 형세이니까 말이다. 난리가 발생했을 때 십승지로 들어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소문은 이후로도 계속 십승지 수요를 창출했다고 보인다. 조선 후기 사회는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이필재의 난과 함께 각종 명화적(明火賊)이 출몰했고, 염병(장티푸스)이나 호열자(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1~2년 사이에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던 흉흉한 시절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서민들은 잦은 가뭄과 흉년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데다 악덕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갈 데는 어디였겠는가. 요즘이라면 집 팔고 퇴직금 정리해 캐나다로 이민이라도 가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탈출구가 오지 찾아 삼만리. 즉 십승지로 가서 숨어 사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나 싶다. 정읍 산외면 평사리의 圭堂 金永采 고택 조선 후기 사람들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세를 살아가는 최선의 방안은 오지의 명당인 십승지를 찾아가는 일뿐이었다. 십승지의 주고객은 누구였을까. 난리를 피해 일생을 평화스럽게 살고 싶었던 보통사람들, 정도령의 출현을 고대했던 술사(術士)들, 죄를 짓고 도망다니던 사람들, 체제로부터 탄압받던 지식인들이 주된 수요층이었을 것이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山外面) 평사리(平沙里)에 자리잡은 강진(康津) 김씨(金氏) 규당(圭堂) 김영채(金永采·1883~1971) 집안이 이번 호의 주제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터에 자리잡은 규당 김영채 고택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열거한 경물중생·풍수·십승지 그리고 시대적 혼란기라는 사전지식을 필요로 한다. 산외면 평사리는 첫째, 지형적으로 전북의 오지 마을이다. 정읍이나 전주쪽에서 70~80리 내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노령산맥의 깊은 산골마을에 속한다. 둘째, 명당이 많다고 알려진 곳이다. 풍수도참에 의해 선택받은 곳이다. 셋째, 산골인데도 불구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넓은 농토가 있다. 대략 400~500마지기 넓이의 전답이 확보된 곳이다. 넷째,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사회적 혼란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 왔다는 점이다.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는 이상의 4가지 조건을 갖춘 곳이다. 풍수도참의 측면을 한번 살펴보자. 평사리에는 규당 김영채가 1940년에 세운 고택이 남아 있다. 대지 2,000평에 40여 칸 규모의 전형적인 전라도 스타일의 고택이다. 규당 고택은 일제의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40년에 완공된 집이니 그리 오래 된 집은 아니다. 역사적 비중으로 보면 별것 없지만, 집터가 다름아닌 평사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평사리는 예사 동네가 아니었다. 명당이 많다고 소문난 지역이었다. 그 소문에 이끌려 구한말~일제 시기에 걸쳐 호남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 경상도의 풍수도참 마니아들까지 평사리로 이주하였다. 논 팔고 집 팔아 전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 때는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셋방 얻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요즘 같으면 서울 강남의 대치동에 집 얻으려고 모여드는 것과 같다. 각지에서 모여들다 보니 이곳은 집성촌이 아니다. 각기 다른 성바지가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8도촌’(八道村)이다. 평사리로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사낙안’이라는 명당을 얻기 위해서였다.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국’이 바로 평사낙안이다. 평사낙안의 터는 묘를 쓰는 음택 자리가 아니라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양택 자리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소문난 양대 길지가 이북 원산에 있는 사치혈(死稚穴:죽은 꿩을 나무에 걸어 놓은 형국)과 산외면 평사리의 평사낙안이었다고 한다. 사치혈은 음택으로 유명했고, 평사낙안은 양택으로 유명한 자리였다. 당시 평사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평사낙안을 ‘양택의 십승지’로 꼽을 정도였다.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예언에 의하면 평사낙안에는 한 군데가 아닌 세 군데의 집터가 있다. 상대(上垈)·중대(中垈)·하대(下垈)가 그것이다. 상대에 집터를 잡으면 공자·맹자와 같은 도학군자가 나오고, 중대에서는 천하문장이 배출되고, 하대에서는 천하갑부가 나온다는 예언이었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적 인물관을 신봉하던 당시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도학군자·천하문장이 나오고 천하갑부가 나온다는 터에 집을 지으려고 전국에서 모이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이곳에 집터를 잡은 사람들은 서로 자기 집터를 놓고 평사낙안이라고 여겼다. 어느 지점이 정확히 평사낙안 자리에 해당하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적인 중평은 상대와 중대 자리는 몰라도 부자가 나온다는 하대 자리는 규당 김영채 고택이 자리잡은 터라고 여긴다. 실제로 규당 집안은 1,000석 부자로 살았다. 평사리에는 평사낙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옥녀직금(玉女織錦: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오공혈(蜈蚣穴:지네 형국)·연화도수(蓮花倒水:연꽃이 물가에 피어있는 형국)와 같은 명당들도 있다고 여겼다. 평사리는 직경 4km 정도의 한정된 면적인데, 그 안에는 여러 군데의 명당이 득실거리는 특수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라면 그 자체로 하나의 풍수적 유토피아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여겨진다. 평사리의 오공혈(지네혈)을 보자. 지네혈인 이곳에는 유명한 김동수 고가가 보존되어 있다. 여행잡지에 많이 소개되어 이 근방을 들르는 답사객들이 자주 찾아오는 집이기도 하다. 김동수 고가는 호남 지역의 전형적인 부잣집 저택의 풍모를 느낄수 있는 집으로, 1,700년대 후반에 건축되었다. 10년 동안의 세월에 걸쳐 상당한 경비와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이다. 경상도민의 호남 이주 추측건대 지네혈 명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먹고 지은 집 같다. 그 뒤로도 부자로 살았으니 일단 효험은 본 셈이다. 옥녀직금 자리를 보자. 이곳은 통상 직금실(織錦谷) 또는 지금실로 불린다. 동학농민혁명 3대 장군 중 한 명인 김개남이 태어난 동네다. 평사리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김개남이 5~6세 무렵 어머니가 미영(목화) 딸 때 밭에 따라갔다고 한다. 그때 어떤 도승이 지나가다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있는 어린 김개남을 보면서 “좋기는 좋다만 시운을 못 타고 났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 갔다.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는 구전이 지금까지 전한다. 어찌되었거나 지금실은 동학혁명의 인물인 김개남(강진 김씨 中派에 속함)을 배출한 동네다. 흥미로운 부분은 전봉준도 한때 이곳에 살았다는 점이다. 동학 전문가 박맹수 교수에 의하면 전봉준은 이곳 저곳으로 많이 옮겨다니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평사리 동곡(東谷)에는 결혼 후인 30대 초반 무렵 이사해 몇 년간 살았다는 것이다. 풍수와 도참에 전문가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하는 전봉준이 평사리에 살았다는 사실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전봉준도 명당을 찾아 이곳으로 왔지 않나 싶다. 거사를 염두에 둔 인물들은 지령의 감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야심 있는 인물들치고 풍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은 없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야심가는 반드시 풍수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근래에 평사리로 이주했던 사람들을 보자. 평사리 내릉(內菱)이라는 동네에는 박효수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해남의 부자였는데 재산을 정리하여 일제 때 이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풍수도참은 물론이려니와 ‘사기’(史記)를 비롯한 동양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식자층이었다. 박효수의 동생이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철수이고, 1980년대 후반 중소기업은행장과 주택은행장을 지낸 박동희가 아들이다. 도화동에는 전남에서 고씨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다. 호남의 명문으로 알려진 창평 고씨들이었다. 진계(眞溪) 마을에는 여산 송씨인 송정근이 살았다. 그도 역시 한다 하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운전(雲田) 마을에는 경상도의 만석꾼으로 알려진 김병호가 마음먹고 집을 지었다. 대구의 부자였던 김병호는 대구의 가산을 상당히 정리해 멀리 전라도 땅에 있다는 길지를 찾아 이사했던 것이다. 비단 김병호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조류 가운데 하나는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이 한창일 때는 호남 사람들이 부산의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경상도로 많이 넘어갔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그 반대였다. 전라도가 곡창지대여서 먹을 것도 경상도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전라도에는 희망이 있었다. 나라가 망했지만 전라도에는 새로운 시대, 후천개벽의 시대를 외치는 민족종교들이 발흥하고 있었다. 일본이 머지않아 물러가고 좋은 세상이 온다는 메시지였다. 동학·보천교·원불교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의 지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최강의 선비들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 다음으로 울분을 느꼈던 사람들은 만주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대신 민족종교쪽으로 들어왔다. 그 민족종교의 온상이 현재의 전북 지역이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자 비전을 상실한 경상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정읍 입암산 아래 대흥리에서 시작한 보천교나 모악산 금산사 아래의 구릿골과 원평 일대에 많이 모여들었다. 당시 “상도로 가자”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경상도에서 볼 때 상도란 전라북도였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을 지나다 보면 경상도 말씨를 쓰는 노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후천개벽을 믿고 고향의 집 팔고 논 팔아 떠나온 사람들이다. 수십 개의 중·소 종교단체 교주는 전라도 사람이 많았고, 이를 열성적으로 뒷받침했던 핵심 추종자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영·호남의 절묘한 배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그 다음으로 많이 모였던 지역이 정읍의 산외면 평사리가 아니었던가 싶다. 자식들은 모두 나가고 없지만 머리가 허연 노인들 몇몇은 아직도 이곳이 구원의 땅임을 믿고 있다. 이야기가 샛길로 벗어나는 감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왜 전북 지역이 유독 민족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는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같은 전라도라도 전남과 전북은 약간 분위기가 달랐던 것 같다. 말씨도 다르다. 전북의 말씨는 충청도와 약간 섞여 있어 템포가 느리고, 전남에서 많이 사용하는 ‘그렇당-께’ ‘했당-께’ 하는 ‘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교적 분위기도 전남이 전북보다 훨씬 강하다. 조선 중기 이후 유학의 대표적 학자들도 전북보다 전남에서 더 많이 배출되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전남 담양의 소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호남가단(湖南歌團). 그 주요한 멤버들인 송 순·기대승·임백호·고경명·정 철 등이 모두 전남 사람이다. 전북도 물론 있지만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들은 전남 출신이 많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면 전남이 전북보다 유학적인 기풍이 훨씬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전북 지역에 충만했던 개혁적 도학의 분위기 유학적 기풍이 강했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유학 이외의 다른 사상들이 활동할 여지는 약했다는 말이 된다. 즉 도교·풍수도참·방술(方術) 등 재야의 학문은 전남에 비해 전북에서 더 활발하게 숨 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김제·만경으로 상징되는 곡창은 생활의 여유를 주었고, 그 여유는 술사들이나 방사들로 하여금 부잣집의 식객으로 장기간 기생(寄生)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말하자면 들판이 주는 의식주의 풍요가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의 활동공간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다. 정통 유학의 노선에서 보자면 이단이지만, 사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축복이었던 셈이다. 구한말 매천(梅泉) 황 현(黃玹·1855~1910)은 방술이 유행하던 호남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또 그 사람들이 재주와 지혜가 많고 깨닫기를 잘하며 방술과 도참의 학문을 좋아했으니, 단가(丹家)의 권극중(權克中)·의가(醫家)의 유상감(柳尙堪)·여가(輿家:풍수)의 이의신(李義新)·박상의(朴尙義)는 근고(近古)에 있어서 모두 뚜렷이 상고할 수 있다. 그밖에 괘명(卦命:운명을 점치는 일)·풍감(風鑑:관상)·성력(星曆:천문역법)·사복(射覆:그릇 속에 무언가를 숨겨 그것을 알아맞히는 점의 일종)·기을(奇乙:기문둔갑과 태을)·임둔(壬遁:몸이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기는 방법)의 글이 집집에 비축되어 있고, 입으로 전하여 잡담을 하여 수십년 이래로 모든 서울의 권귀(權貴)에 가서 머리를 숙이고 상학(相學)을 이야기하고 명수(命數)를 이야기하는 자는 호남 사람이 10명 중 7~8명은 된다.(황 현, ‘東學亂’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98쪽) 필자는 전남보다 전북 지역에서 이러한 방술이 더욱 유행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방술은 도교(道敎)의 하위체계로 불교보다 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천교를 비롯한 모악산 일대의 민족종교 단체를 표방한 교리체계의 주요한 패러다임이 도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조선조가 망하자 주류 신념체계였던 유학의 신뢰도가 추락하였고, 그 사상적 공백기에 후천개벽과 주역 그리고 풍수도참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종교들이 대두했다. 역설적이지만 나라가 망함과 동시에 백가쟁명에 버금가는 사상의 자유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자유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맞이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전북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민족종교들과 그들이 내건 후천개벽설은 민초들에게 난세를 조명해 주는 사상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 대안이라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100% 토종 국산품이었다. 김영채가 평사리의 평사낙안 명당에 집터를 잡을 즈음의 시대적 배경에는 전북 지역에 충만해 있던 새로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규당 김영채의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 그의 벼슬은 높지 않았다. 구한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던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참봉을 지냈을 뿐이다. 참봉 중에서도 특별한 참봉이 경기전 참봉이라고는 하지만 참봉벼슬을 자랑할 수는 없다. 규당 집안은 벼슬은 높지 않았지만 그 학행과 덕망으로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던 것이다. 강진 김씨들은 전북의 칠보·태인 일대에서 500년 가깝게 향반(鄕班:지방 양반)으로 알려진 집안이다.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화려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실속이 있는 집안이라고 할까. 그 실속이란 지방민들의 존경과 인심을 얻었음을 지칭한다. 강진 김씨들이 한양에서 살다 정읍 칠보의 남전(藍田) 마을에 낙남(落南)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초기 이방원이 정권을 잡을 무렵이다. 1413년 태종 이방원이 그의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을 죽일 때 그 참화를 피해 정읍 칠보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때 내려온 인물이 이덕방(李德芳)이다. 덕방의 아버지인 이회련(李懷鍊)은 민씨 형제들이 죽을 때 같이 죽었다. 이덕방의 부인도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와 같은 집안인 여흥 민씨였던 까닭에 신변에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전남 장성에 처음 살기 시작한 울산 김씨가의 민씨 할머니도 이 무렵 같이 한양에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 원경왕후의 친정인 민씨 집안이었다고 한다). 이덕방은 3명의 아들을 낳았다. 3형제는 이름이 희(希)자 돌림이었는데, 막내가 희석(希奭)이었다. 호조좌랑을 지냈으니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희석의 후손들을 이 집안에서는 계파(季派)라고 부른다. 희석을 비롯한 3형제는 모두 8명의 아들을 낳았다. 8명의 아들들은 이름이 약(若)자 돌림이었다. 3형제와 그들이 낳은 8명의 아들을 가리켜 ‘3희8약’(三希八若)이라고 부른다. 희석의 아들 가운데는 청백리로 이름난 아들이 하나 있다. 바로 약묵(若默·1500~58)이다. 경기도 양주목사를 지냈는데, 학행이 높고 청백리로 소문나 죽은 후 칠보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무성서원은 태인(태산) 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을 주벽으로 모시는 서원으로 전북에서는 알아주는 서원에 든다. 약묵의 아들이 복억(福億)이다. 충청도 홍주목사를 지냈다. 복억은 태인에서 살았던 일재(一齋) 이 항(李恒·1499~1576)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사후에는 정읍 북면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배향되었다. 약묵·복억 부자는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각각 무성서원과 남고서원에 배향되었던 것이다. 부자가 모두 서원에 배향된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만큼 검증받았음을 의미한다. 당대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부자 동시 배향은 최고의 영광이다. 강진 김씨들이 호남에 내려와 본격적인 뿌리를 내리는 것이 이 시기부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향반으로 자리잡았다는 말이다. 향반으로 살면서 재산을 모은 시기는 김기혁(金驥赫:1825~98)부터다. 재산을 모은 방법은 정경유착이 아니라 철저한 검약과 절제된 생활이었다. 길을 가다 곡식 몇 알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이를 주워 도포 자락에 넣었다. 길에서 개똥이나 소똥을 발견하면 거름이 되라고 남의 논에 넣어 주고는 하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밥님’(飯任) ‘돈님’(錢任)이었다는 기록이 그의 행장에서 발견된다. 밥과 돈에 대한 경외감 밥과 돈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가 길을 가면 주변의 아이들이 ‘저기 밥님, 돈님 지나간다’고 할 정도였다. 절약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 신앙의 차원까지 끌어올린 경지라고 생각된다. 본인은 그렇게 절약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아낌없이 쌀을 내놓았다고 한다. 한쪽에는 치열한 절약이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는 공동체에 대한 보시와 적선이 있었다. 절약과 적선. 양립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하듯 절약과 적선이 적절하게 균형을 잡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 이 집안의 이후 행보를 보면 이 두 날개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99가마 가진 부자가 1가마 가진 사람에게 ‘그 1가마 나를 주라. 보태서 100가마 만들려고!’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다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이 봉급쟁이보다 훨씬 인색한 사례를 많이 목격한다.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인색하니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번 사람들일수록 움켜쥐고 돈을 저승까지 가져가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이 집안은 그 어렵게 모은 돈을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을까.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통쾌하게 쓰기는 더욱 어렵다. 돈을 통쾌하게 쓰려면 평소에 생각을 다듬어 놓아야 한다. 사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경물중생’의 정신 같은 것이다. 자기의 삶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다. 절약과 적선의 행태는 ‘경물중생’의 정신과 재물의 결합이 낳은 결과물 아니었을까.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재물만 홀로 축적되면 바로 졸부가 되는 길 아닌가. 이 집안의 돈을 쓴 역사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통쾌하게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규당 김영채의 조부는 김기혁이다. 이때는 천석군으로 불릴 만큼 상당한 부자였다. 그는 대대로 거주하던 터전인 칠보를 떠나 산외면 평사리의 평사낙안에 터를 잡아 이주하였다. 영채 역시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8(戊辰), 29(己巳)년은 이 지역에서 ‘무기(戊己) 대흉년’으로 일컫는 대단한 흉년이었다. 2년 연속 흉년이 드니 당장 먹을 양식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세금이었다. 산외면 면민들은 도저히 호세(戶稅)를 낼 수 없었다. 지금은 데모라도 해서 세금을 경감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살벌한 왜정 치하라서 데모는커녕 진정서도 쉽게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영채는 산외면 면민들의 전체 호세를 대신 내주었다. ‘이 지역의 어른이고 부자인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대납한 금액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현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상당한 액수였음이 틀림없다. 이를 고맙게 여긴 면민들이 ‘산고해심’(山高海深)과 같은 은혜라고 칭송하면서 현 칠보면 지서 자리에 시혜비를 건립하였다. 시혜비가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영채는 “보기에 민망하다. 산 사람 비문은 세우는 법이 아니다. 철거해서 땅 속에 묻어달라”고 지역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래서 그 비문은 다시 땅 속에 묻혔다가 그가 죽은 해인 1971년에야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김영채는 자신의 스승이자 의병장이었던 김영상(金永相·1836~1911) 가족의 생계를 평생 책임지기도 하였다. 김영상은 면암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고, 한일합방 후에는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군산형무소로 이송되던 중 만경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분이다. 그분의 가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논과 밭을 사주면서 호구지책으로 삼도록 하였고,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자 보호막 역할을 자청하였다. 비록 일선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이선에서 해야 할 도리를 했던 셈이다. 積善의 가풍 이어간 아들 김윤술 영채의 아들인 윤술(金允述·1903~58)도 역시 집안에 내려오는 적선의 가풍을 이어갔다. 현 정읍시 칠보면에는 섬진강 상류의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1945년에 완공된 칠보발전소가 있다. 1만5,000kw의 발전 용량을 가진 칠보수력발전소는 해방 당시 남한 전력 수요의 3분의 1을 감당할 정도로 큰 발전소였다. 그러나 이 발전소의 전기는 외부 지역으로 송출되었기 때문에 정작 현지 주민들은 전기 혜택을 볼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윤술은 “발전소 옆에 사는 사람들이 호롱불만 켜고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전기 시설에 드는 비용 일체를 부담해 칠보발전소에서 산외면 정량리에 이르는 7km 구간에 송전선로를 가설하였다. 그 가설 비용으로 논 100마지기, 즉 2만평의 사재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때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컴컴한 호롱불에서 벗어나 대낮같이 환하게 해주는 전기 혜택을 보게 된 산외면 사람들은 김윤술의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그 공덕비는 김윤술이 사망한 후인 1966년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산외면 양로당 뜰에 한가하게 서 있다. 1923년 무렵 고향인 칠보에서 나와 자식들 교육을 위해 도회지인 전주로 나가 살기 시작한 김영채가 평사낙안의 터라고 여겨지는 지점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시점은 1940년 무렵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인 그 시기는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인심이 더욱 흉흉하였다. 집집마다 공출이 심해지고 쌀도 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탄압이 가중되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 혼돈의 상황에서 풍수도참의 길지라고 소문난 평사리로 전 가족의 이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현재규당이 지은 고택을 바라보면 정면에서 우측 방향으로 둥글둥글한 산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 고인들은 이 산세를 보고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습’을 연상해 평사낙안이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산세에 둔감한 일반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산봉우리들이 어떻게 기러기 모습과 연결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의 기세를 몸으로 감지하는 사람에게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과 물이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로 감지된다는 말이다. 산이라는 무정물(無情物)과 사람 혹은 동물이라는 유정물(有情物)이 서로 호환(互換)될 때 비로소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고수들의 체험담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기러기·봉황·닭(金鷄)은 날짐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날짐승에 해당하는 산봉우리 모습은 둥그렇다는 것이 특징이다. 바가지 또는 철모처럼 둥글둥글하다. 크기가 문제다. 둥그런 봉우리가 크면 봉황으로 본다. 예를 들어 비봉포란(飛鳳抱卵)의 자리는 그 해당 산세가 둥그런 봉우리가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는 그보다 작은 봉우리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다. 가운데 큰 봉우리는 봉황의 머리로 보고, 양 옆의 작은 봉우리는 날개로 간주한다. 기러기는 봉황보다 크기가 작으면서 둥그런 봉우리가 6~7개 길게 이어져 있는 경우다. 6~7개 봉우리 중에서 가운데가 약간 높고 날개 부분이 낮으면 대체적으로 기러기로 본다. 규당 고택의 뒷봉우리들도 자그마한 금체(둥그런 모양) 봉우리들이 연달아 이어져 있다. 고택 앞으로는 들판이 전개되어 있다. 그 봉우리와 들판을 압축시켜 보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내려앉는 형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러기는 상상의 동물인 봉황과 함께 선비들이 좋아했던 새다. 저녁 노을이 익어갈 무렵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에서 질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상징되는 유교적 질서(綱倫)를 몸으로 보여주는 새가 기러기였다. 같은 산이라도 ‘야산 몇 개가 그냥 있구먼’ 하고 보는 것과 ‘기러기가 내려와 앉아 있구먼!’ 하고 보는 것에는 엄청난 시각 차이가 있다. 최근에 읽은 ‘풍경에 다가서기’(효형출판)라는 책의 한 대목은 그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내가 평소에 느끼던 바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대목이어서 인용해 본다. ‘길가의 가로수를 기계적인 반복 식재로만 보지 않고 마치 그 길을 걷는 사람을 정중히 맞이하는 안내인처럼 느낄 때, 다시 말해 일종의 의인적 풍모를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풍경을 체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산 앞에 섰을 때 그 산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거나, 물가에 서서 치렁치렁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가 물끄러미 수면을 관조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풍경을 체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풍경 체험은 사물에 대한 의인적 체험이다. 의인적 체험은 사물에서 인격적 풍모를 직관하는 것이다. 사물에서 인격적 풍모를 느끼는 이른바 애니미즘 체험은 이 세상을 무(無)로 돌리지 않으려는 지성의 장치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강영조, 13쪽) 규당 고택의 특징 ‘접집’의 의미 규당 고택 뒷산의 둥그런 산봉우리들을 보고 기러기를 연상한 우리 조상들은 사물을 의인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의인적 체험의 핵심에는 애니미즘이 자리잡고 있다. 애니미즘이 무엇인가. 개개 사물마다에는 정령이 있다는 믿음 아니던가. 조선시대 지관들은 산마다 지령(地靈)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산은 신령스러운 존재다. 풍수를 이해하려면 애니미즘을 통과해야만 할 것 같다. 심하게 말한다면 애니미즘의 전제를 깔지 않고서는 풍경을 체험할 수 없다. 산은 삼겹살에 소주 먹고 찐 살을 빼기 위한 땀 흘리기의 목적에서 시작하지만, 한참 진도가 나가다 보면 산에 뭉쳐 있는 정기를 감지하는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등산의 개념에서 입산의 개념으로 전환되어야만 산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규당 고택을 한번 둘러보자. 대지 2,000평에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40칸 정도 된다. 원래 60칸이 넘는 규모였는데 사람이 많이 살지 않게 되면서 사랑채와 부속건물들을 철거하였고 행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는 상태다. 안채는 지금도 장손인 시산(詩山) 김환재(金煥在·1920~) 씨와 부인인 고 단(高휛·1922~) 여사가 주말에만 사용한다. 평소에는 전주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다 틈틈이 시간날 때는 안채에서 머무르다 간다. 이 안채의 당호는 소고당(紹古堂)다. ‘옛것을 잇는다’는 뜻의 당호다. 사랑채에 당호를 붙이는 것이지만 시절의 연따라 사랑채가 사라졌으니 안채에 당호를 붙였는가 보다. 소고당은 건축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이 있는 건물이다. ‘5칸 접집’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접집이란 마루가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는 형태를 가리킨다. 방이 앞뒤로 있는 형태다. 한문으로 ‘전후퇴’(前後退)라고 부르기도 한다. 툇마루가 앞뒤로 있다는 뜻이다. 소고당은 앞마루도 4자 반(135cm)이요, 뒷마루 역시 4자 반이다. 앞마루와 뒷마루의 크기가 같아야만 진정한 의미의 접집(전후퇴)이라고 한다. 접집은 전라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전통가옥의 한 형태다. 경상도에서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접집은 앞뿐만 아니라 뒤쪽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개방적이다. 동시에 실용적이면서 운신의 폭이 넓다. 5칸 접집이라면 방이 보통 10개가 나온다. 홑집에 비해 훨씬 많은 인원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더군다나 남자들이 머무르는 사랑채가 아닌 여자들의 은밀한 공간이었던 안채를 접집의 형태로 건축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전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 형태가 아닌가 싶다. 남원 호음실의 죽산 박씨 고택 사랑채인 몽심재가 접집의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는 안채가 아니라 사랑채였다. 찾아오는 많은 남자 과객 손님들을 한꺼번에 몽땅 수용하기 위한 용도라고 여겨진다. 소고당의 안채를 접집으로 지었다는 것은 여자들이 그만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보인다. 아마도 조선시대 같았으면 안채를 접집으로 짓는다는 파격적인 발상이 불가능했겠지만, 남녀동권(男女同權:남녀평등)의 후천개벽 세상이 유행하던 1930년대 후반 전북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구조라고 여겨진다. 소고당의 건축 구조만 놓고 보면 당호(堂號)와 다르게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면서 파격적인 구조임에 틀림없다. 전라도 부잣집이었던 소고당의 살림살이 가운데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는 삼신기(三神器)도 이채롭다. 아이가 출생하였을 때 건강하고 무사하게 해달라고 삼신에게 빌면서 사용하던 그릇들이다. 아이 출산후 이레(7일째)가 되는 날 빌고, 이후로 7일 간격으로 여섯 번 더 빈다. 49재 지내는 사이클과 동일하다. 출생도 7일째 7번이요, 사망도 7일째 7번 간격으로 빌었음을 알 수 있다. 삼신기의 내역을 보면 백사발로 된 밥그릇, 국그릇이 각각 3개씩이다. 옹기로 된 물그릇도 3개이고, 역시 옹기로 된 떡시루도 3개다. 떡시루 3개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운데 차려놓고 작은 것 2개는 좌우로 놓는다. 그릇을 차려놓을 때는 자리를 깐다. 이 자리는 왕골로 만든 자리 대신 촘촘히 짠 띠자리를 사용한다. 우측에는 볏짚도 한 줌 가지런히 놓는다. 볏짚풀 위에 떡시루, 밥·국·물그릇을 한 세트 올려놓기 위해서다. 차려 놓는 장소는 방안의 웃목이다. 가운데 떡시루 안에는 조그만 등잔불을 켤 수 있도록 조그만 접시를 놓는다. 밤에 공을 들이려면 불이 필요하다. 삼신기가 모두 설치되면 띠자리 오른쪽에 물을 담은 옹배기를 놓는다. 그 옹배기에 조그만 박을 다시 띄워 놓는다. 공을 들일 때 숫가락으로 이 박을 두드리면 장단에 맞춰 소리가 난다. 목탁 같은 용도다. 공을 들이는 사람은 산모나 가족이 아니고 동네의 당골이었다. 1주일마다 당골이 출장왔던 것이다. 소고당의 안주인인 고 단 여사는 81세의 고령이지만 우리나라 규방가사의 맥을 이어가는 여류시인이다. 1977년에는 공저로 ‘한국 현대 내방가사집’을 낸 바 있고, 91년에는 고희 기념으로 ‘소고당가사집’상·하권을, 최근에는 ‘소고당가사집 속편’을 펴냈다. 고 단 여사 본인이 애송하는 가사인 ‘삼신기명애무가’(三神器皿愛撫歌)를 소개하면 이렇다. “앙증할사 삼신동이 기묘할사 삼신시루 시어머님 정성어린 손때묻은 삼신그릇 아들형제 칠형제를 일곱이레 삼신빌 때 동이에는 정화수요 시루에는 떡을 쪄서 아드님들 부귀장수 축원하던 그릇이네 우리고부 연년생산 면면히 복을 빌고 6·25 동란때는 사랑양반 무병장수 삼신동이 안고가서 정화수를 길어다가 뒤뜰안에 돌아들어 장독대에 바쳐놓고 동서남북 돌아가며 사배축수 하온뜻은 우리부부 재회코저 정성으로 기원했네.” (‘소고당가사집’상권, 17쪽) 장손 김환재 옹의 가풍 잇기 장손인 김환재 옹. 그는 일제 때 중앙고보와 평양 대동공전을 나온 인텔리였지만 그가 평생 주력한 일은 고향에 있는 서원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을 관리하고 뒷바라지한 일이었다. 이제 과거와 같이 천석의 부자는 아니지만 집안의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 그는 자그마한 실천을 하고 있다. 그 실천 방법은 장학금이다. 1982년부터 정읍군 산외·칠보·산내면의 3개 면에 있는 중학교 한 군데씩을 골라 각 중학교마다 매년 쌀 한 가마니를 보낸다. 올해로 22년째다. 드러내놓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정도이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덕망가 집안의 후손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고 단 여사도 남편의 실천에 적극 동조한다. “내 친정이 제봉 고경명 선생 집안인데, 하인들이 몰래 쌀을 퍼가고 김치도 퍼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어른들은 일부러 모른 체 하였다. 가난한 집안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어린 마음에도 장학금 주는 것이 마음 뿌듯하게 느껴졌다. 나도 나중에 꼭 장학금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집와서 보니 시가집도 덕망가였다. 남편이 장학금 내놓는다고 하길래 적극 찬성하였다.” 막내 아들인 형균(炯均·43) 씨도 업무관계상 중국을 자주 출입하는데, 지난해 우연히 베이징(北京) 민족대학의 조선어문학과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다른 소수민족의 언어학과인 티베트어과·몽골어과·위구르어과에는 모두 컴퓨터가 있는데 유독 조선어문학과에만 컴퓨터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봉급을 털어 컴퓨터 몇 대를 기증하였다. 양반의 자손은 평소 행동에서도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는 집안의 훈도가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소고당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환재 옹에게 질문을 던졌다. “돈만 많고 법도는 모르는 졸부를 옛 어른들은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부한’(富漢)이라고 했지. ‘부자 상놈’이라는 뜻이야.” 6·25 때 이 일대의 여러 부잣집들이 착취계급이라고 여겨져 불에 탔지만, 소고당은 어른의 집이라고 여겨져 불에 타지 않았다. 소고당의 아름다운 전통은 그 손자들에 의하여 계승될 것이다. 이 집안 후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택술(金宅述·2, 3대 국회의원)·김형균(金炯均·아시아나항공 상하이지점장)·김명균(金明均·해군 소장)·김봉균(金奉均·LG 페테르부르그지사장)·김학균(金學均·미국 심장병 전문의)·김희균(金晞均·미국 마취과 전문의)·김민균(金敏均·서울대 교수)·김병욱(金炳昱·강남 고려병원장). 덧글 3개 엮인글 쓰기 공감 |
[출처] [한국의 명가③]강진김씨 圭堂 김영채一家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