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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 나타난 것은 모두 대상입니다.
2. 대상 하나에 모든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3. 진아와 무아
4. 좌선을 할 때
5. 지은 대로 받습니다.
2009년 5월 5일
1. 나타난 것은 모두 대상입니다.
< 질문 >
2월 법회 달력사건처럼 마음이 내적조건에 의해서도 형성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은 내가 아니다, 자아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정시점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견해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알아차리다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데 이런 시각을 가지고 알아차리고 있다 보니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내가 아닌 것이긴 한데 내가 없다, 자아가 없다, 라고 해서는 잘못된 견해로 실재를 보게 된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습니다.
단지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기 때문에 오온이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견해입니까?
< 답변 >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것을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있는데 여기에 자아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아입니다.
자아가 없는 무아라는 것은 낮은 단계의 지혜에서 볼 수도 있고, 높은 단계의 통찰지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낮은 단계의 지혜로 볼 때는 확신이 서지 않아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아직 완전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가 아닌 생각으로 무아를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되었거나 무아를 알았다는 것은 모두 필요합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그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앎’이라고 합니다. 항상 현재 있는 대상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떠서 생각에 빠지고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지혜는 단계에 따라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과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12연기를 완벽하게 이해하면 의심에서 해방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표피적인 12연기를 압니다. 그러나 12연기도 위빠사나 수행을 해나가면서 더 성숙한 지혜로 알게 됩니다.
어떤 것이 되었거나 나타난 현상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2009년 5월 5일
2. 대상 하나에 모든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 질문 >
오늘 길을 걸어가면서 걸음걸이를 알아차리는데, 걷는 동작 이전에 그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드러나게 보이진 않지만 움직임 이전엔 반드시 그 의도가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도가 있어서 매번 동작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조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온이 무상한 것은 조건이 매순간 결과를 낳으며 나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올바른 견해입니까?
< 답변 >
의도가 보인다는 것은 집중력이 생겨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의도를 보는 것은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경행을 할 때 의도가 없이 발을 겨냥할 수도 있고, 의도를 알아차리고 다음으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계속해서 의도만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발의 움직임만 알아차리는 것은 신념처이고, 의도와 발의 움직임을 함께 알아차리는 것은 심념처와 신념처를 동시에 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의도만 지켜보는 것은 심념처를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생기면 전면에서 의도만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발로 와서 알아차려도 됩니다.
의도에 의해 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행을 마음의 형성력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일으킨 원인이 있어서 행위라라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행을 마음의 범주에 넣습니다. 의도와 행위를 원인과 결과라고 하며 이것을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 즉 조건을 자신의 오온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조건에 대한 바른 지혜가 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을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에 고정하십시오. 이렇게 했을 때 여러 가지 색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수행을 하다보면 경험하지 않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계속해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며 그 길을 가는 것은 동굴탐험입니다. 알아차림만 있으면 어떤 위험도 없으니 계속해서 그 길을 가십시오. 그러면 통찰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나 모두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 대상 하나에 모든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2009년 5월 8일
3. 진아와 무아
< 질문 >
최근 들어 수행의 진전여부를 떠나 꼬리를 무는 의문이 있습니다. ''무아'가 진정 '무아'인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찰나생, 찰나멸에 자아가 개입 할 수 없으니 분명 무아임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오온을 끌고 다니는 이른 바 '이 뭣고?'하는 '그 무엇', 단지 이름 하여 진여, 법성, 진아, 참나, 진공묘유 등등으로 불리는 것, '그 무엇' 조차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법문 들을 때는 조금 이해되다가 돌아 서면 예전의 알음알이가 올라옵니다. 저도 조건이 성숙되어 알아차림의 지혜가 증장되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 답변 >
믿음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에 근거한 믿음이 있고, 다른 종교의 신앙으로 전해진 믿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이나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빨리어 경전인 니까야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업의 과보와 관계가 있으며, 또한 자신의 지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상좌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장, 율장, 논장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펴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무아의 반대인 진아를 믿지 않습니다. 항상 하는 것이 있는 진아는 힌두교 교리입니다.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진아가 옳고, 불교도의 입장에서는 무아가 옳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렇게 편협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중의 하나를 따르자니 알고 있는 것을 버릴 수가 없어서 무아의 끝에 진아가 있다는 색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선택 앞에서 곤혹스러운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자신이 배운 것을 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것을 버리자니 유신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문제입니다. 깨달음은 한 개인의 문제인데 천 육백년을 아까워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인지 알아야 합니다. 말로는 부처를 죽이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섬뜩한 말을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보고 나서 경험에 의한 확신에 찬 믿음을 갖도록 합니다. 진리는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한 통찰지혜가 생겨야 법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진아나 무아는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대할 때 지혜로 보는 것과 신앙으로 보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선택은 자기 몫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 의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각이 아닌 통찰지혜가 나야 바른 법을 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심이 일어나면 ‘지금 의심이 일어났네’ 하고 그 사실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 말고는 오래 동안 가져온 축적된 성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2009년 5월 11일
4. 좌선을 할 때
< 질문 >
작년 10월부터 토요반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고 있습니다.
약 4일전 이었습니다. 결가부좌를 하고 좌선을 약 30분정도 하던 중 발의 저림과 다리의 통증이 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항상 이 시간 쯤 되면 육체적 통증인 발의 저림과 통증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안 되면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자세를 반가부좌나 평좌로 바꾸고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발가락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무릎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가 되고, 피가 통하지 않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러다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서 그만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진 육체적 통증만 일어났었는데 이상하게 그 통증이 마음으로 전달되어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결가부좌를 하고 좌선을 약 30분정도 하던 중 발의 저림과 다리의 통증이 온 것입니다. 발가락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릎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또 영원히 일어서니 못하여 앉은뱅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아! 죽음이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행하다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원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정면 돌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동안 바라보니 두려움과 공포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와서 가슴을 보니 긴장을 해서 그런지 가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져 축축한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나중에 보니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안정이 되어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 호흡을 알아차리는데, 또 무릎아래 부분이 마비가 되었음을 알자마자 이번에는 빛이 없는 깜깜한 동굴에 혼자 있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려 보았으나 그 공포심이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눈을 뜨고 바닥을 응시하였습니다. 눈을 뜨고 바닥을 응시하는 사이 공포심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으로 와서 두려움을 보고 호흡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약 20~30분이 지나 약 50분~1시간 정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좌선을 하다가 또 그런 상황이 올까봐 그 경험으로 약간의 두려움이 지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대상을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왜 일어난 것이며 법(대상)이 나타났을 때 잘못 알아차린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답변 >
좌선은 움직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행에 대한 법문을 듣고 이렇게 면담을 하면서 조금씩 알아차리는 힘을 강화해야 합니다. 좌선을 할 때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좌선을 할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집중력을 얻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인내하는 힘을 키우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좌선을 할 때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방황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선은 마음을 몸에 붙여 길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러자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인내하는 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수행의 결과가 따릅니다.
좌선은 일정기간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빠지지 않고 좌선을 하면 차츰 통증이나 저린 느낌이 약해집니다. 이때 두려움이나 공포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때가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두려움이 생겼을 때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이렇게 분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두려울 때는 눈을 뜨지 말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상황에 따라 눈을 뜨고 알아차려도 되나 먼저 눈을 감을 상태에서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런 뒤에 가슴으로 가서 두려운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두근거리는 느낌을 주시하십시오. 이때 두근거리는 느낌을 없애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단지 그 느낌이 있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 가슴에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느낌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완전한 알아차림이면 대상과 쉽게 분리되어 두근거림이 쉽게 진정되지만 처음에는 대상에 개입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좀 더 강해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바른 수행을 하려면 같은 현상을 반복으로 경험하면서 반복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같은 대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사이에 차츰 좋은 조건이 성숙됩니다.
좌선을 할 때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은 내 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수행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동굴탐험이라는 것은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라서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좌선을 하면서 진실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진실하다는 것은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되었거나 있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법이라고 하며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정진하십시오.
2009년 5월 11일
5. 지은 대로 받습니다.
< 질문 >
불교에서요. 이번 생에 악업을 행하고도 잘 사는 사람은 전생에 복을 짓고, 이번 생에 악업을 해놓아 전생에 복업은 무르익고, 이번 생에 악업은 무르익지 않아서이고, 이번 생에 선업을 행하고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저번 생에 악업을 행하고, 이번 생에 선업을 행해 저번생의 악업은 무르익고, 이번 생에 선업은 무르익지 않아서 인가요?
머리 좋은 사람은 저번 생에 다 머리 좋은 조건들을 만들어 놓은 이고, 부자인 사람들도 다 저번 생에 조건을 다 만들어서 그런 것인가요?
< 답변 >
현재 학생의 신분으로 질문을 한 것 같군요. 답변하기에 앞서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첫째는 질문하는 문장이 너무 깁니다. 그리고 띄어쓰기가 많이 틀렸습니다. 이 글을 옮길 때 쉼표와 마침표를 넣고, 띄어쓰기를 해서 읽기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조그만 주의해서 쓰면 상대에게 분명하게 의사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에서 작업을 해서 글을 올리면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불타(佛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불타, 부처는 빨리어 붓다(Buddha)를 한문으로 불타(佛陀)로 음사한 것이고 다시 우리말로 부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붓다의 뜻은 깨달은 자, 초월자, 아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부처가 되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뜻도 있겠지만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무심히 하는 말이지만 자신을 부처라고 과시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처라는 말과 더불어 스스로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구루라고 칭하는 것도 스스로가 스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수행자의 자세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스님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스스로를 높이는 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르고 무심히 쓰지만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 내면에는 자아를 강조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말하면 자신의 허물이 됩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자신이 한 행위를 업이라고 하는데 업은 행위를 한 자가 받습니다. 이것을 업자성 정견이라고 합니다. 행위는 원인이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을 과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직접 간접으로 전생이나 지금 이전의 현생에서 만들어진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도가 지나치게 업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현재를 중요하게 알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업의 의미는 현재 새로운 업을 지어서 현재와 지금 이후에 좋은 결과를 얻는 지혜로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만약 업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진실은 순리 속에 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과보가 전해진 새로운 몸과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내가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인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아가 상속된 것이 아니고 과보의 영향을 받아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기법에서 나오는 말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기는 것이라고 알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