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교회론 3 - 교회의 다섯 가지 뼈대
에베소서 2:17-22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설 잘들 쇠셨죠. 떡국은 맛있게 드셨는지요. 혹 나이 한 살 더 안 먹으려 떡국 먹기를 거부한 분은 안 계시겠죠?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에는 떡국을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떡국은 흔히 나이와 관련되어 치러지는 통과의례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떡국을 먹음으로 우리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양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나와 시간을 서로 독립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호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먹는다는 표현을 통해 내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이죠.
철들었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표현입니다. 철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철들자 망령난다. 철없다. 철부지 등등 아직도 우리가 많이 쓰는 표현들입니다.
철들자 망령난다는 말의 뜻은 뭘까요? 철은 '계절(season)'을 의미합니다. 사시사철은 '시간'의 구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이 사람 몸과 마음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시간의 기운이 내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철들자 망령난다는 말은. 나이를 먹어도 속이 차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일컽는 말이 되는 겁니다. 시간(나이)이 몸과 마음속으로 들어와도 시간과 자신이 하나가 되지 못해 늘 어린애처럼 불안한 사람들을 비꼬는 말인 것입니다.
철부지란 또 무슨 말일까요? 계절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인 "철"은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힘, 곧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알지 못한다는 한자말인 "부지(不知)"가 붙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사람을 일컬어 철부지라고 합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절기를 모르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절기를 모르고 사는 사람을 절부지라고 말한 것에서 왔다고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서양에서는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 대신 늙어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한 살 더 먹었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You have aged a year"가 됩니다. 여기서 'age'는 '오래되다, 늙는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을 직역하면 '너는 한 살 더 늙었다'가 되는 것이죠. '몇살이니?'라고 상대방에게 물을 때 ‘How old are you?’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나이를 늙는다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나이는 죽음(끝)을 향해 가는 '늙는 것(old)'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이생과 저생도 넘어설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생은 죽음 너머 저편에 있는 이상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에 덧없는 것입니다. 시간 또한 이생이라는 인간 삶의 영역에 있는 것이기에 '영원'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는 거죠. 그러니 시간(나이)은 손실, 퇴락, 몰락을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살 더 먹은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어떻게 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이런 물음을 가지고 오늘은 바울의 교회론의 근본 뼈대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해 말할 때 교회라는 어떤 절대적인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관계론적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회심과 사도로서의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을 통해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신앙적으로 훈육하려고 애썼으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이방인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이방 전도는 교회론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헬라문화와 유대교육의 두 문화를 접해왔던 바울은 당시 헬라와 로마 전역에 파고든 스토아 철학, 헬라 민족 종교, 그리고 각종 이방 종교의 도전 앞에서 직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존재 이유를 변호해야 하는 책임 앞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상(像)을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의 제시한 교회상은 대략 5가지로 대별 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피로 맺은 언약에 의해 선택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한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그 뿌리를 두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차원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겠습니다(갈3장, 롬1:16-17, 3:21-26). 바울의 하나님의 백성 개념에는 전통적 개념과 달리 처음부터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출생에 의한 이스라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롬9:8). 할례자 뿐 아니라 무 할례자까지도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란 지역적이거나 민족적ㆍ종족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도 세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선교 역시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어 놓고, 모든 사람들과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 ‘새로운 피조물’ 사상은 예수의 사역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교회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교회 구성원 역시 먼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세 번째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 속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사상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해와 개신교회의 이해 간에 충돌이 있었던 거죠. 가톨릭교회는 성례전적 입장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진짜 피와 살을 나눈 실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봅니다. 이를 화채설(transubstantiation)이라 하는데 사제가 성만찬 제정사를 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나친 해석 같지만 중세시대에 예수님의 빵을 앞에 두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들에게 그 생생함, 거룩함, 황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모든 의식 중 성찬예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개신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계승하는 공동체적 관계로 이 문제를 받아 드립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화채설을 반대하며 빵과 포도주는 그대로 빵과 포도주이지만 성찬식의 순간 그 빵과 포도주 위에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교제’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인데 이는 ‘나눔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코이노노스(koinonos)는 ‘나누는 사람과 파트너’를 의미하고, 코이노네오(koinoneo)라는 동사는 ‘함께 나누고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에게서, 교제로서의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빌11:17)과 약속(엡3:6)을 함께 나누는 신자들을 공동생활을 의미합니다. 물건의 공유(행2:44, 4:32)뿐 아니라 형제애와 용서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나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 교제는 ‘공동식사’, ‘신자 사이의 거룩한 입맞춤’, ‘자발적인 물건의 나눔’ 등 구체적인 행동과 경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에클레시아’(Ecclesia)입니다. 원래 에클레시아는 시민의 전체 모임이나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의 모임, 또는 법률 제정에 관한 공청회 등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주전 150년경에는 마케도니아와 헬라의 모든 도시들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란 헬라어 ‘칼레오(Kaleo)'에서 온 말로 바울에 의해 회당(synagogue)이란 말 대신 채택된 용어입니다. 주후 50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당 유대인들이 점차 기독교인들을 배척하고 있다는 현실이고, 다른 이유는 에클레시아란 용어가 헬라세계에서 통용되는 용어였기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기독교 신앙에로 인도하기에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모임을 의미했으며, 그 목적은 예배와 봉사였습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의 개체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개교회 중심주의가 아니라 모든 다른 에클레시아와 연합하는 우주적 질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린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바울의 교회론의 뼈대가 되는 다섯 가지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 교제, 에클레시아라는 생각 이면에는 교회의 목적과 선교적 사명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첫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영적 삶을 살아가고, 신앙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한 주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이 은혜가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도록 선교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봉사의 삶을 통해 세상 변혁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고민하고 올바른 교회와 신앙인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한울림 식구들 속에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8.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