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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 있는 한국 역사
1. 고조선은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 아니다.
고조선은 승려 일련이 편찬한 ‘삼국유사’ 기이편에 처음 나오는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했을 때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약 1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때였다. 그럼 일련은 무엇을 구분하기 위해 앞에 ‘고’자를 붙였는가?
삼국유사에서 일련은 고조선이라는 제목 아래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을 서술한 뒤이어 위만 조선이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조선을 위만 조선과 그 전의 조선 이렇게 둘로 나누고 위만 조선과 그 전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고’자를 붙인 것이다.
일연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고려말 유학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선 조선을 전조선, 후조선, 위만 조선의 셋으로 나누었고 조선시대에도 이같이 삼조선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우리의 정통성을 기자 조선에서 찾았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의 성인 공자가 기자를 은나라의 성인으로 칭송해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칭송한 기자가 은나라 멸망 후 조선에 와서 나라를 다스렸다니 조선시대 학자들이 얼마나 감개무량 했겠는가?
2. 고려 태조 왕건은 원래 성(왕씨)이 없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당연히 왕이 성이고 건이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왕건은 원 성이 없었다. ‘고려사’에 보면 왕건 아버지는 용건, 할아버지는 작제건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약 성이 왕씨 였다면 왕건 아버지의 이름은 왕용건, 왕건 할아버지의 이름은 왕작제건이라 기록되어 있어야 맞을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성을 가지고 있지만 고려 시대 이전에는 극소수 왕족과 대 귀족만이 성을 가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이 없이 이름만 있었다. 혹자는 신라 박혁거세의 박씨, 석탈해의 석씨, 김알지의 김씨, 그 밖에 고구려의 고씨, 백제의 부여씨 등을 들녀 옛날에도 성씨가 있지 않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비로서 생견난 것들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북한산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등 6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금속문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을 보면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 무렵부터 고씨를 성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여씨 성을 썼다가 7세기 부여씨로 바군다.
그러면 현재 처럼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갖겐 된 것이 언제 부터일까?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타파되면서 성씨와 본관이 빠르게 보편화 되었는데, 이때까지 전체 인구의 40%는 성이 없이 이름만 있는 사람들로 새롭게 성과 본관을 가지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호적 담당 관리들이 즉석에서 성과 본관을 정해 주거나 주인의 성과 본관을 그대로 물려 주었다 한다.
오늘날 김씨 이씨 박씨가 많은 것은 이련 연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3. 원래 백정은 도살업자가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백정은 도살업과 아무 상관없는 일반 농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신분도 천민이 아닌 일반 양민이었다. 국가에 대한 일정한 직역이 없는 자들로 백정은 직역이 없는 대신 성을 쌓거나 길을 닦는 일이 생기면 일반 요역을 지고 세금을 부담했다. 그럼 고려 때에 도살업자는 뭐라 불렀을까? 양수척, 또는 화척, 재인이라 불렀다.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초기 무렵 국내에 들어와 정착한 말갈인 또는 거란인들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일반 양민들을 뜻하던 백정이 어떻게 조선시대 이후 도살업자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을까?
세종대왕 시절 혼란에 빠진 신분질서를 바로잡고 양인 숫자를 늘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화척, 재인들을 백정으로 승격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원조 백정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들은 새로이 백정이 된 자들을 신백정이라 부르며 자신들과 선을 긋다가 어느새 스스로 백정이라는 칭호를 기피하며 백정을 천시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재인, 화척의 융화책은 이렇게 해서 실패로 돌아갔고, 일반 백성들이 이들을 기피하자 이들은 툭하면 도적으로 돌변했다. 조선 명종 때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대도 임꺽정도 백정이었다.
4. 고려 시대의 내시는 거세한 자가 아니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과거 급제나 음서로 벼슬에 오른 문벌 집안의 아들, 또는 전쟁에 나가 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자를 선발하여 왕의 측근에 둔 최고의 엘리트 집단들이었다. 내시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자만도 수십명에 달했던 것을 보면 당연히 이를 거세한 성 불구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거세한 남자들은 뭐라고 불렀는가? 그들은 환관이라 불리었다? 내시를 거세한 남자로 착각하게 된것은 고려 무신정권기와 원나라의 간섭기에 왕의 신임을 얻은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는 사례가 생겨났는데, 그 때부터 내시부 소속 환관과 본래의 내시가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5. 고려장의 풍습은 우리나라에서 실재하지 않았다.
늙은 부모를 깊은 산속에 내버린다는 고려장은 고려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몇몇 국어사전은 ‘고구려 때의 풍속’이라 적고 있으나 고구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고려 때 고려장이 행하여진 자료나 유적도 현재에 발견된 적이 전혀 없다. 고려장이 고려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도 고려장이라 불리게 된 것은 설화가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에 관한 설화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몽골 시베리아 까지 널리 퍼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고려장 설화는 크게 두 가지다. 중국 ‘효자전’에 실려 있는 원곡 이야기와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기로국 설화 유형이다. 이중 노인을 버리는 나라라는 뜻의 기로국(棄버릴기, 老늙을노, 國나라국) 설화가 기로국 → 고리국 → 고려국 으로 기로장(葬장사지낼 장)이 고려장으로 변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장을 실제 고려 때 있었던 풍습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일제 시대 때부터 인데, 일본인인 미와 다마키가 쓴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에 ‘불효식자’라는 제목으로 들어있던 내용을 조선총독부가 ‘조선동화집’이라는 전래동화로 발간하여 아이들에게 널리 읽힘으로써 오늘날까지 내용이 확대 재생산 된 것이다. 고려 시대의 실제 장례 풍습은 불교의 영향으로 대부분 화장을 했다고 한다.
6. 행주대첩과 행주치마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를 보면 행주치마는 행주대첩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반대로 행주산성이 행주치마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제는 둘 다 아니다. 행주치마가 행주산성에서 나온 말이라면 행주산성 전투가 있기전까지는 행주치마라는 말이 없어야 맞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행주대첩이 있기 76년 전에도 행주치마라는 말이 나온다.
행주산성이라는 말도 고려 초기 무렵부터 있던 지명에서 유래된 말이니 행주치마와 무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애초에 행주대첩의 진실은 행주치마와 전혀 상관이 없다. 행주대첩은 3천의 병력으로 3만 왜군에 맞서 싸운 필사의 격전인데, 역사의 그 어느 기록을 살펴봐도 행주산성에 부녀자들이 동원된 투석전으로 승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당시 행주 산성에는 화차라는 신무기가 있어서 왜군을 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한다. 행주대첩의 승리는 유리한 지형과 우수한 화약무기 그리고 일치단결한 병사와 백성들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7.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현모양처가 아닌 열녀, 효부다.
사람들은 현모양처하면 으레 신사임당을 떠올리며 조선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현모양처란 100년전 개화기 무렵 외국으로 부터 들어온 새로운 영성상이다. 애초에 조선시대엔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조선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은 열녀, 효부였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여자가 학문을 배우면 그 폐해는 끝이ㅐ 없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만큼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식을 낳는 것이었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조선시대 까지는 철저히 남자의 몫이었다.
구한말 계몽사상가들에 이르러서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주목,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야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보다 구체화 된 것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하면서 부터이다. 조선 초대 총독 테라우치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감상적이라 쉬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 여기에 신사임당이라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 정치인의 어머니를 결부시키면서 현모양처가 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육인양 탈바꿈된 것이다.
8.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적군을 전몰시켰다는 말은 과장이다.
귀주대첩이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거란군을 수장시킨 전투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귀주대첩은 강이 아니라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전투는 홍화진 전투로서 그 역시 거란군이 물에 침몰되어 죽었을 것이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홍화진 전투는 음력 12월 즉, 한겨울에 벌어진 전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강의 대부분은 얼어 붙었거나 얼지 않았다고해도 수량이 꽤나 적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았다가 터트리는 전술은 거란군을 수장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란군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크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시 고려군이 거란군보다 비교도 안되게 적은 수의 병력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당시 거란군은 10만 병력이었고, 고려군은 두배가 넘는 20만 8천의 병력이었다. 애초에 거란군의 3차례의 고려 침입은 송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을 적대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고려가 적당한 유화책을 취하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었고, 당시 고려는 그러한 거란에 크게 자존심을 굽힐 만큼 약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9. 목화씨는 문익점이 붓뚜껑에 넣어 온 것이 아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강남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이 때 원나라의 국외반출 금지 품목인 목화씨를 붓뚜껑에 몰래 숨겨서 우리나라로 가져왔다는 유명한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목화씨는 원나라에서 국외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당시의 실제 상황을 보면 원나라는 반원 정책을 쓰는 공민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공민왕은 문익점등을 사신으로 원나라에 보내는데 원나라는 공민왕을 끌어내리기 위해 덕흥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로 향하게 했다. 이 때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사이에서 택해야 했는데 대부붠 원나라가 미는 덕흥군을 택했고 문익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가 덕흥군의 군사를 물리치면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문익점은 다른 사신들과 함께 고려로 돌아오지만 파면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심고 재배하였다. 그로 인해 목화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문익점의 목화 재배가 성공을 거두면서 그를 미화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둘 덧붙여지는데,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했던 사실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문익점은 공민왕을 지지했지만 덕흥군 편에 선 것으로 오해 받아 그리된 것으로, 나아가 목화씨가 반출 금지 품목이라 몰래 들여왔다는 식으로 덧붙여졌다.
이같은 이야기들은 문익점의 친구 권근과 문익점의 후예인 남평 문씨 문중에서 대대적으로 조작을 감행하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익점의 목화 이야기로 변했다. 문익점이 목화를 국내에 들여옴으로써 우리 의생활 혁명적인 변화를 안겨준 업적은 인정해야겠지만 당시 그의 정치적 행보까지 지지하고 미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10. 신숙주 부인은 남편의 변절이 부끄러워 자살한 것이 아니다.
신숙주의 변절을 꼬집을 때에 으레 입에 오르내리는 두가지가 하나는 맛이 쉬 변하는 숙주나물이고 다른 하나는 부인 윤씨가 자살한 이야기다.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던 날 신숙주를 본 윤씨가 남편을 부끄럽게 스스로 목을 맷다는 이야기인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윤씨 부인의 사망 기록이 남아있는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윤씨는 사육신 옥사 사건이 발생하기 5개월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허위가 진실을 호도하게 된 것은 2개의 소설책 때문이다.
1923년 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 1928년 이광수의 ‘단종애사’등이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광수는 “역사의 기록은 정사 보다는 야사에 더 정확한 내용이 많다”면서 18세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역사책인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사건 그대로 재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선조 때 인물인 이기가 쓴 ‘송화잡설’을 인용했다고 밝혀 놓았는데, 두책 모두 끄트머리에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 쓴 것이다”, “신숙주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광수는 이 끄트머리 한 줄을 눈여겨 보지 않았거나 소설의 극적 재미를 위해 보고도 외면한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 같은 소설들을 야사가 아닌, 정사인양 교과서에 기록되고 드라마로, 연극으로 재현되면서 사람들이 이것을 사실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책은 읽되 역사 드라마를 함부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실제 있었던 일로 착각하는 것은 비단 옛날 사람만은 아니다.
11. 조선시대에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홍길동, 조선시대 혀균이 썼다는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으로 적서의 차별을 예리하게 꼬집은 사회비판 소설로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홍길동은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홍길동의 이름이 무려 10번 넘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는 평소 정 3품 당상관 첨지 중추부사가 입는 옷을 입고 관리를 자처하면서 대낮에 고을 관아에 드나들고 관리들과 결탁하여 고을 수령도 어쩌지 못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고 한다. 연산군 6년 10월에 체포된 홍길동은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는데, 홍길동에 대한 추국은 해를 넘어가며 계속된 것으로 나오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최후에 관한 기록이 없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 등, 등....
이쯤되면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과 역사속 실제 인물 홍길동 간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소설 속 홍길동의 활약은 실제 인물 홍길동의 활약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홍길동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세종 때 정3품 벼슬을 지낸 홍상직의 서자라는 이야기도 있고, 의금부에 체포되었지만 다른 나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오늘날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소설이 아니거나 맞다해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게다가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설명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는데, 허균보다 약 100년 먼저 살았던 채수라는 사람이 쓴 ‘설공찬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2. 율곡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율곡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율곡이 활동하던 당대 사료인 ‘율곡전서’나 ‘서애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후대인 1814년 간행된 ‘율곡전서’의 부록 김장생 행장에 처음 나온다. 이에 앞서 우암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에 10만 양병설로 윤색된 내용이 발견된다.
율곡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오늘날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신도비명’에 율곡이이가 군사력을 강화 할 것을 건의 했다고 전하는데, ‘신도비명’에 이항복의 생전에 내려진 것이 아닌 율곡의 시호 ‘문성’이 사용된 것으로 봐서 후대에 조작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나마 다른 사료들은 율곡 이이가 양병설을 건의한 시점을 ‘일찌기’라는 애매한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만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인 1583년으로 못 박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 역시도 일부러 연도를 맞춘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러면 왜 그 같은 일이 일어났느냐, 이는 집권 서인이 남인인 서애 유성룡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분석이다.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등장하는 시기에 주목하는데 조작 시점은 국왕으로는 효종, 집권 세력으로는 서인 노론 집권기이다. 당시 북벌론을 주장하던 효종은 10만 양병설을 통해 양병의 명분을 세워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이를 통해 적자도 장자도 아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려 하였으며, 집권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10만 양병설을 통해 임진왜란을 극복한 남인의 전설적인 수장 유성룡에 대해 군사 측면에서 우위에 서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남인과 대립하던 노론의 집권 명분을 확립하려 했다. 물론 10만 양병설이 완전히 없는 거짓을 진실로 꾸며낸 것은 아니다. 서인 율곡이이는 국방강화를 주장한 적이 있고, 남인 서애 유성룡은 민생을 내세워 이를 반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사실이 나중에 임진왜란을 내다본 서인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남인의 신화로 후대에 재창조 된 것이다.
생각건대 조선의 인구는 500만에서 1000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저 때 10만 병력이면 오늘날 100만 대군 이상의 병력이다. 세계 10위권인 현재의 경제력의 기반으로 해도 60만 대군인 대한민국의 군대를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 모병제니 징집제니 군복무기간 단축이니 하고 말이 많은데 당시 10만 대군을 유지할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당시 사회에 큰 피해만 주었을 멍청한 정책을 율곡이이 같은 대학자가 주장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게 합리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다.
13.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때문에 옥사하지 않았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세바퀴, 백두산을 여덟 번 답사했으며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평생의 역작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더니, 흥선 대원군이 지도를 태워버리고 국가기밀을 누설한다 하여 김정호를 옥사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해서, 위인전에 까지 이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몰수당해 불태워졌다는 대동여지도는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전체의 5/1이 현재 남아있는데 그 어디에서도 불탄 흔적이나 그을린 자국은 찾아볼 수 없다. 김정호가 국가기밀 누설죄로 투옥 되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쩍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조선시대엔 국가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지도 만들기가 분분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개인이 만든 동국지도, 동국여지도 등이 버젖이 존재하는데 19세기에 지도를 국가기밀 누설죄를 적용한다는 자체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소설가 최남선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글에서 이 같은 소설을 쓰고 일본이 “조선이 이래서 망했다”, “이래서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근거로 최남선의 글을 끌어다 쓰면서 우리가 사실로 인식하게 됐는데, 현재 까지도 이 같은 오류가 수정되지 않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남긴 잔재인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면 김정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대동여지도를 전국 답사해 만든 게 아니다. 그는 여러 후원자들을 두었는데,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지도를 두루 참조, 편집한 결과물이 대동여지도라 한다. 혹자는 이렇게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직접 가보지도 않고 지도를 만드는 게 가능하냐는데, 가능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지도학자 당빌은 프랑스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지만 당시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14. 명성황후는 고아 소녀가 아니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꺼려한 나머지 한미한 집안의 외로운 고아 소녀인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낙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으며 고아는 더더욱 아니었다. 명성황후의 집안 여흥 민씨는 조선 3대 태종의 왕비 원경 왕후와 19대 숙종의 왕비 인현황후를 배출한 명문으로 당파는 노론이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고을 수령까지 지냈으니 그 살림살이가 당대의 세도가에는 비길 수 없을지라도 끼니 걱정을 할 만큼 빈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처가 여흥 민씨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처남이 양자로 간 집의 딸, 즉 처제뻘을 며느리로 맏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혐오한 나머지 한미한 가문의 외로운 소녀를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가인 동시에 외가인 민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선택함으로써 외척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고도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5. 고인돌은 남방식 북방식으로 나뉘지 않고 모든 고인돌이 지배자의 무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고인돌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유럽,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에 생김새는 조금 다르지만 고인돌의 공통점을 지닌 거석문화가 존재한다고 한다.
고인돌은 전체의 40%에 달하는 4만기가 우리나라에 존재하며 그 중 절반인 2만기가 전라도에 존재 한다고 한다. 교과서에 기재된 고인돌의 분류방식인 남방식과 북방식은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분류한 것으로 그가 이렇게 분류한 이유는 한반도를 남반도와 북반도로 나누어 한민족은 예부터 스스로 발전하지 못했고 언제나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에 의해 발전했다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학계에서도 이 같은 분류를 거의 쓰지 않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이 같은 기록이 최근까지 남아 있다.(2006년부터 일부 내용이 수정 됨)
고인돌의 또 하나의 오해는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모든 고인돌이 지배자의 무덤은 아니다. 고인돌이 한 지역에 몇 십기씩 떼를 지어 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상식적으로 모든 고인돌이 지배자의 무덤일리 없는 것이다. 해서 고인돌이 지배자와 그 가족들의 공동묘지라거나 전사자의 무덤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고인돌이 무덤의 역할을 한것은 아니다. 몇몇 고인돌은 소원을 비는 곳으로 제단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6. 금관은 왕이 평소에 머리에 썼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금관을 왕이 평소 머리에 썼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일상생활에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묻어준 부장품일 가능성이 크다.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금관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처음부터 금관은 머리에 스고 다닐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백제의 무녕왕릉이나 고구려 왕릉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았고 고븐 벽화에서도 금관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백제나 고구려 왕은 신라왕처럼 금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금관은 신라인들이 죽은자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왕의 권한이 한창 강해지던 시기인 왕을 마립간이라 부르던 5세기초에서 6세기초 약 100년간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금관은 왕만 사용한게 아니다. 현재까지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6개인데, 그 시기 동안 왕은 모두 4명이었다. 결국 왕 이외의 사람 즉, 왕비나 왕의 가족이 금관을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현재 까지 전세게에서 발굴된 고대 금관은 10여점 뿐인데 그 중 6점이 신라시대의 것이니 가히 금관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을 만들 수 있었던 황금은 어디서 온 것일까?
17. 포석정은 왕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하고 벡제는 낙화암에서 멸망했디고” 조선 세종이 말했을 정도로 포석정은 망국을 앞둔 천년왕국 신라의 나태와 해이를 상징하는 향락의 놀이터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포석정이 정말로 놀이터 였을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향락에 빠져 놀다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군에 죽었다는데에는 적 잖은 의혹이 있다.
1) 견훤이 쳐들어온 것이 927년 음력 11월이라는 것이다. 한겨울 추위 속에 한가로이 밖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서 놀이를 했을까?
2) 경애왕은 사태의 급박함을 깨닫고 왕건에 구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견훤의 군대가 불과 25km 떨어진 고을부에 육박한 상황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3) 포석정의 위치는 경주 앞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경주 남산은 절이 130개, 불상과 탑이 400여개가 들어서 있을 정도로 불교의 성지다. 더구나 포석정의 주변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내려오는 우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우물, 신라 초기 왕들의 무덤인 오릉등 중요 유적들이 즐비하다.
삼국유사에서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님을 은연중 시사하고 있다. “왕이 또 포석정에 행차하였더니 남산의 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엇다.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했으나 왕만은 홀로 이것을 보았다”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신과 인간인 왕이 서로 교감했다는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 신과 인간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바로 제사였다. 경애왕은 포석정에 놀러간 것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이 달린 위급 상황을 잘 헤쳐 나가게 해 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런 포석정을 질펀한 술자리로 변화시킨 것은 신라의 멸망뒤에 고려와 조선의 식자들이 경애왕에게 망국의 책임을 지우고 폄하 하려는 의도였다.
18. 태극기의 처음 형태는 지금과 달랐다.
흔히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안에서 즉흥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극기는 박영효 독단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박영효는 출발 전부터 고종으로부터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라는 명령과 함께 대간의 모양 까지 받아 두었다. 중앙에는 태극을 주위에 팔괘를 배치하는 태극 팔괘도였다. 그러나 도안은 팔괘에서 사괘로 바뀌었고 태극기를 직접 그린 사람은 박영효 일행이 탄 메이지마루호의 영국 선장 제임스였다.
태극기가 오늘과 같은 모양으로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9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국기시정위원회를 조직해 대한민국 국기를 정하게 되었다.
19.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은 돌려 준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에 대해 교과서에는 살 곳을 잃은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돌려달라고 간청하여 고려에서 돌려주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실은 돌려준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워서 포기한 것이다.
고려 16대 왕 예종은 부왕 숙종의 유지를 바들어 윤관을 사령관으로 하는 17만 별무반으로 여진을 정벌한다. 고려로서는 일찍이 해본적이 없는 대규모 원정이었는데 원수 윤관은 135개의 촌락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동북 9성은 유지가 쉽지 않았다. 각종 물자와 인력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여진족 완안부 추장 아골타의 반격이 거셌기 때문이다. 고려군은 개선하자마자 다시 출정하는 일을 반복했고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자 조정에선 전쟁 반대론이 고개를 들었다. 문벌 세력의 극심한 반대에 왕도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는데, 때 마침 여진의 화친 사절이 도착했다.
화친의 조건은 9성의 반환이었고 전쟁 반대파들은 쾌재를 불렀다. 뭄무백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9성의 반환이 결정되었다. 여진의 간청은 포기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은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며 우리 안에서의 반대 때문이었다. 문신들 곧 전쟁 반대파들은 돌아온 윤관에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명목이 서지 않는 병력을 함부로 동원해서 국가를 패전시키고 나라에 손해를 끼쳤다며, 윤관은 관직과 공신 칭호를 박탈당했고, 정국은 전쟁 반대파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때의 주도 세력이 이자의, 이자연, 이자겸들이다.
한편 여진은 고려와의 화친으로 얻은 안정을 바탕으로 내부 결속을 도모하고 만주를 장악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정복하여 12세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다.
20. 조선시대 때는 담배를 남녀노소 함께 피웠다.
조선시대에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웠다. 유교 윤리에 따라 장유유서와 남녀 유별을 매우 중시했던 조선시대이지만 담배 만큼은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엇다. 17세기 중엽 조선에 표류하여 13년간 살았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표류기에 보면 “담배가 매우 성행하며 어린 아이들 까지도 4~5세 때면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 아이들에게 담배가 허용된 까닭은 당시 사람들에겐 담배가 약효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소문난 애연가로서 “담배가 더위를 씻어주며 추위를 막아주며 식사후 소화를 돕고 변을 볼 때 억취를 쫒으며 잠이 오지 않을 때 잠을 들게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모두 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치며 머리는 희게 되고 얼굴은 늙게되며 이가 일찍 빠지고 살도 따라 여위게 되니 사람을 빨리 늙도록 만드는 것이다.”라며 담배의 해악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또 다른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담배는 독이 있으니 경솔히 쓰지 말라”는 충고를 남기기도 했다. 담배가 이 땅에 들어온지 400년이 넘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찬반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