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접근법(비이원론)에서는 ‘하나’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 하지 않고, ‘인식’을 미래에 성취할 목표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접근법(접근법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물론 아니다.)에서는 우리 존재의 본색이 이미 저절로 구현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이 ‘해탈’이 개인의 상품(많은 노력 등에 대한 보상)이 아니며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우리 손이 물건을 쥐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은 관념을 파악하기 좋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파악하고 어쩌고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더 이상 영적 탐구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만물에 투영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있음’을 찾기는커녕 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방식을 바꾸거나, 마음을 열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심지어 주어진 조건을 바꾸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탐구자가 지금의 상태에서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구분 감각을 뒷받침해 주고, 그럼으로써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에 영합하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구도를 무한히 계속하고자 하는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우리에게 뭔가를 하도록 권하는 어떤 가르침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어떤 책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있음’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요령도, 사실은 ‘있음’을 즉각 누리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있음’의 통찰은 계획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며,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통찰을 효과적으로 가로막는 길이다.
있는 것이란 오직 이것, 삶의 체현뿐이다. 그저 일상적인 삶뿐이다. 눈을 떠 보니 낯선 마술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다. 백일몽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평범한 생활이 계속된다. 평범하다고 해서 재미없거나 지루하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판단력이 그 힘을 잃으면, 있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나면, 평범한 순간들이 숭고한 것으로 되어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탈’은 희망이나 노력과 아무 관계 없는 것이며,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있는 그대로에 경탄하는 자세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출처 :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This Is It : The Nature Of Oneness)", 얀 케르쇼트(Jan Kersschot)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