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우리의 본성, 있음, 알아차림, 존재, 무한, 전체, 불성, 본래면목, 진아, 공적영지, 공, 신, 깨달음, 도, 해탈 등 여러 용어로 불린다)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전체(everything)가 된다는 의미의 확장은 없다. “확장(expansion)”은 이미 되어있는 것이다. 겉모습만 “나”로 축소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단순히 “나” 또는 자아의 실체에 대해서 꿰뚫어 보기만 하면 되고, “나”의 존재 여부, 자아의식이 떨어져나갔는가의 유무는 실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구도자에게는 위의 사항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 같다. 드라마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 ‘의식’은 모든 배역(character)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모든 배역에게는 다른 줄거리(storyline)가 있다. 그리하여 어떤 배역은 자아의식이 항상 완전하게 없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배역은 “나”와 완전히 동일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나”가 완전히 사라질 필요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나”를 꿰뚫어 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나”를 꿰뚫어 보면 우리의 본성으로 편히 쉬게 된다.
만약 Nathan(글쓴 이)이 이 “나”의 완전한 없음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굉장해”라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배역들이 “나”의 실체를 꿰뚫어 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일과 편안하게 쉬는 장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없애려고 하는 구도행위를 촉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만약 내가 “”나“는 여기서 완전히 사라졌어” 또는 그와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소위 깨달음 또는 깨어남이라는 황금으로 만든 당근을 매달아 보이는 것과 같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아차림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깨어있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깨어있음 안에는 “나”와의 최면상태도 포함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단지 또 하나의 (나타났다 사라지는)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본다면 “나”가 완전히 또는 영원히 사라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완전히 OK다.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가 잠시 사라짐으로써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경이로움과 지복감을 찾을 필요가 없다. 만사가 이미 OK이기 때문이다. “나”를 꿰뚫어 봄으로써 생기는 편안함으로 충분하다.
출처 : "Already Awake", Nathan G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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