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갈아, 미안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식물 가꾸기, 무엇보다 베란다가 확장이 되어있어 햇볕이 잘 들고 이왕이면 실내 건조함도 없애고 공기정화도 잘되는 식물들을 골라 가족으로 맞이했다. 집들이 선물로 화분을 사달라며 지인들에게 특별히 주문을 하기도 했다. 애기 돌보듯 세심하게 살펴보고 어루만지니 지금은 초록 옷을 입은 사이좋은 형제들이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서 나를 반긴다. 키가 자라고, 잎사귀 수가 늘고, 몸 둘레를 넓혀 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식물을 키우며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에 빠지고 소소한 행복함마저 느낄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 중에 으뜸의 자태를 갖춘 것은 뱅갈고무나무다. 키도 크고 군더더기 없는 몸통은 매끄럽고 가지런하며 잎사귀들도 진한 초록으로 잘 자라줬다. 지난 해 연말, 뱅갈고무나무의 잎은 검은 반점을 띠며 누런 누렇게 변해갔다. 몇 개 빼고 전체 잎으로 번지더니 이내 우수수 떨어졌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손을 살짝 대었건만 무섭게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벌어진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떨어진 잎사귀들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남편한테 보였더니 나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우리 집 대표 인물인 뱅갈이가 어쩌다가…….’
나란히 있던 형제들 중에 제일로 불쌍한 몰골을 하고 서 있게 되었다.
별안간 변해버린 뱅갈고무나무에 대해 전문가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고 또 검색을 해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식물재배의 초보인 나는 무조건 햇빛 좋은 대서 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물주기로 이 사단을 낸 것이다. 햇빛도 적당히, 물도 적당히, 때에 맞춰 분갈이 등 뭐든 적당치 않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말에 그 ‘적당’이라는 것은 대체 어느 정도 인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도 더도 말게,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간으로 맞춘다는 게 가장 힘들다.
앙상한 뱅갈고무나무의 가지 끝에 꼼짝 않던 새순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한 겨울, 소한이 지나고 대한이 다가오는데 말이다. 잎사귀 크기를 매일매일 조금씩 키워 가는 게 어찌나 기특하고 예쁜지 새로 돋은 잎사귀에 아침인사를 가장 먼저 한다. 요 며칠 떨어진 뱅갈고무나무의 숱 없는 머리를 보며 우울했는데 새 단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한 올리브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거실에서 가장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의의 배려, 친절, 관심, 사랑도 그 정도가 넘쳐버리면 부담, 의심이나 오해를 유발하기도 하고 나중엔 왜곡된 집착만 남게 된다. 특히 뭔가를 바라고 또는 기대하며 베푼 가면을 쓴 ‘선의’는 나중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기도 하고 파국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수없이 실패하며 깨닫고 얻는 지혜는 삶의 보물로 내 안에 쌓여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고 싶다.
‘뱅갈아, 미안해’
주인없는 거실을 지키고 있을 뱅갈고무나무에게 미안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