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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에 저항하는 얼빠진 시인--테렌스 헤이즈 (시와 문화 2014 여름호).pdf
중력에 저항하는 얼빠진 시인: 테렌스 헤이즈
양균원(시인, 대진대 교수)
헤이즈(Terrance Hayes)는 197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태생 아프리카계 미국 시인으로 2010년에 네 번째 시집 얼빠진 사람(Lighthead)으로 전미저작상(NBA)을 수상했다. 코우커 대학(Coker C)에서 학사, 피츠버그 대학(U of Pittsburgh)에서 예술학석사(MFA) 학위를 받았고 카네기 멜론 대학교(Carnegie Mellon U)와 피츠버그 대학교 등지에서 가르쳐오고 있다. 1999년의 첫 시집 근육질 음악(Muscular Music)으로 와이팅 작가상(Whiting Writers Award)과 케이트 터프츠 신인상(Kate Tufts Discovery Award)을 동시에 수상했다. 2002년의 두 번째 시집 엉덩이 논리학(Hip Logic)은 미국전역에서 매년 5권의 시집출판을 보장해주는 전미시총서(National Poetry Series)에 뽑혔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저작상(LA Times Book Award)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I
헤이즈 시의 가장 큰 주제들 중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다. 그는 태생적으로 주어진 개인의 역사와 그를 길러낸 문화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자신을 형성해 왔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문한다. 이러한 모티프에 대한 일별을 위해 세 시집에서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인다.
첫 시집의 첫 시 「나의 정체」(“What I Am”)는 그에게 가장 핵심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프레드 샌포드 시트콤은 12시에 방영
나는 (현금결제만 가능한) 소품목 계산대에서
헤드 엔 숄더스, 백인의 샴푸를
막 사려던 참,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이름은 라몬트일 수도 있으리라.
프룻 루프의 마스코트 펠리컨, 투컨 샘처럼 다채로운 색상을
걸치고 있는 조지 클린턴. 그가 말하기를,
‘네 후각을 따라가라.’ 하지만 내겐 코도, 입도 없으니
네가 말해줄래, 뭐가 선이고, 뭐가 신이며,
뭐가 불량한지를. 치즈버거 사려고
맥도널드에 들렸을 때, 내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로널드의 포스터에 대고 미소 짓는다,
화가 난 힙합 팬 소녀, 내가 사랑하는 그 계산원의
등 뒤에서 짓는 불후의 쓴 웃음. 빌어먹을 내 튀김은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미국인이 아닌가? 내 시에서는, 깜둥이들이라는 말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내 조상들은 이민가지
않았다. 자신의 고국 땅을
왜 떠나려 하겠어? 나중에 농구나 계속해 볼까
생각 중이다. 그 깜둥이들 모두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덩크슛을 해댈 거야. 내 정체에 대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차기 조던-신일 수도
있으리라. 그들은 토니 모리슨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른다. 마이클 잭슨은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거물의 이름. 마마 세
마마 사 마마 쿠 사, 아프리카 부시먼들이
노래한다. 게임 후에는 한 봉지 10불짜리 마약을 사게 되겠지,
나와 조디가. 그가, 이봐, 백인 직장인 저놈들
좆 까라고 해, 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그는
철저히 미국인이었지. 멋진 놈,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나의 정체를,
그런들 어쩌겠는가. 수 분 후엔 프레드 샌포드 시트콤이
시작되겠지, 내가 손에 넣은 것은 비듬 제거용 샴푸
백인의 헤드 엔 숄더스와 배불뚝이 치즈버거와
스릴러 시디와 나이키 스니커즈 신발
노예제는 죽었고 텔레비전이 내 아빠다―
어이 덩치 큰 멍청이!
프레드가 라몬트에게 말한다.
Fred Sanford's on at 12
& I'm standing in the express lane (cash only)
about to buy Head & Shoulders
the white people shampoo, no one knows
what I am. My name could be Lamont.
George Clinton wears colors like Toucan Sam,
the Froot Loop pelican. Follow your nose,
he says. But I have no nose, no mouth,
so you tell me what's good, what's god,
what's funky. When I stop
by McDonalds for a cheeseburger, no one
suspects what I am. I smile at Ronald's poster,
perpetual grin behind the pissed-off, fly-girl
cashier I love. Where are my goddamn fries?
Ain't I American? I never say, Niggaz
in my poems. My ancestors didn't
emigrate. Why would anyone leave
their native land? I'm thinking about shooting
some hoop later on. I'll dunk on everyone
of those niggaz. They have no idea
what I am. I might be the next Jordan-
god. They don't know if Toni Morrison
is a woman or a man. Michael Jackson
is the biggest name in showbiz. Mamma se
Mamma sa mamma ku sa, sang the Bushmen
in Africa. I'll buy a dimebag after the game,
me & Jody. He says, Fuck them white people
at work, Man. He was an All-American
in high school. He's cool, but he don't know
what I am, & so what. Fred Sanford's on
in a few & I got the dandruff-free head
& shoulders of white people & a cheeseburger
belly & a Thriller CD & Nike high tops
& slavery's dead & the TV's my daddy―
You big Dummy!
Fred tells Lamont. (Muscular Music 15-16)
화자가 서둘러 쇼핑을 마치고 가고자하는 최종 목적지는 프레드 샌포드가 등장하는 시트콤이다. NBC 시트콤 샌포드와 아들(Sanford and Son)은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시리즈로 방영되었는데 여기서 프레드는 아들 라몬트와 함께 고물상 겸 고가구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나이든 홀아비로서 비꼬기 좋아하고 걸핏하면 싸우려드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화자의 정체성은 이 시리즈물에서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당시 사회에 대해 해학과 풍자를 보여주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영향 속에서 그리고 조지 클린턴과 같은 펑크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자라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 내에서 화자는 친구 조디처럼 고교시절까지만 해도 철저히 미국인으로 자랐다. 그에게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침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켈로그사의 프룻 루프 시리얼을 먹고 점심에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것이다. 그러다 저녁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때로 비속어가 오가는 풍자에서 맘대로 웃고 지내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제는 이미 사멸했고 이제 새 주인이래야 텔레비전이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일상에서 화자는 어떤 이유에선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걱정하고 있다. 그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면을 품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의 정체성 탓에 사회적 불평등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은 모두에게 이미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바여서 쫓겨나는 일도 무시당하는 일도 없는 상태에 있다.
미국의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마이클 잭슨은 인종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가장 큰 거물이다. 화자의 조상은 어느덧 미국 내에 뿌리를 내려 다른 곳으로 이주하려 들 이유가 더 이상 없다. 친구 조디가 좋은 직장 차지하고 있는 백인들에게 욕을 날려보지만 그와 화자는 그들을 능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 듯하다. 그들은 비디오 게임을 한 후 마약을 사려는 자들이다. 텔레비전 앞에 서둘러 앉은 화자,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백인이 사용하는 샴푸와 불뚝 튀어나온 햄버거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시디와 나이키 신발이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패스트푸드와 메이커 신발의 유혹에 영혼을 팔아버린 화자에게 조상이 피 흘려 쟁취한 노예제 폐지는 의미가 약해졌다. 화자는 노예제가 없어졌어도 자신과 “깜둥이들”이 거대 기업과 대중매체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는 그런 그들 “모두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덩크슛을 날리고 싶어 한다. 그는 위대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성별조차도 모르는 그들에게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
시인은 화자의 자기 검증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문화의 요소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정하는 데 이제까지 관여해왔던 방식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길거리의 느낌을 여러 구체적 예증을 통해 촘촘하게 엮어가면서 새롭게 드러난 정체성의 문제를 점층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는 미국시의 풍토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II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 「엉덩이 논리학」(“HIP LOGIC”)에서 화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처한 거리의 현실을 간결한 호흡과 강렬한 이미지로 다소 암울하게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천성적으로 솟구쳐 나오는 활력을 삶의 논리학으로 발전시키고 있기도 하다.
부드럽고 핏기 없는 농구공 대가리
몇몇이 쏘아 올리고 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신발들. 이두박근에 땀땀이 새겨진
해골과 용들.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
라디오에 탈착 가능한 얼굴을 붙이고
몇몇이 어슬렁거린다. 속도제한과
우편번호에 잠재한 비탄.
저녁과 저녁 사이의 저녁.
문 잠긴 가게들.
몇몇이 깨진 차창
내버려둔 채 붐붐붐 굉음으로
이웃을 부산하게 움직인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 법이 가라사대
깨지지 않는 돌은 없다.
그게 뉴스감이 될 리도 없다.
몇몇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옥되리라. 이런 곳에서 영혼을
체포하는 것은? 빛의 속도를
빠른 걸음 정도로 늦추려 하는 짓.
여인들의 품에서 옷을 입는 몇몇.
영원히 손질당하면서 손질하고 있다.
엉덩이는 논리학의 요람이다.
늙지 않는 기억의 축복으로
깊은 고랑에서 깡충 뛰어오르는 정액.
Some shoot the soft bloodless
heads of basketballs. Shoes filled
with darkness. Skulls & dragons
stitched into biceps.
No standing still.
Some cruise with detachable faces
on their radios. The grief latent
in speed limits & zip codes.
The evening between evenings.
Stalls with locked doors.
Some leave their car windows
cracked & a boomboomboom
rustles the neighborhood.
No standing still. The law says
no stone will go uncrushed.
It won’t make the news.
Some will be set free for lack
of evidence or imprisoned
despite it. Trying to catch
the soul here? Like trying
to slow light down to a trot.
Some dress in women’s arms.
Perpetually groomed & grooming.
Hips are the cradle of logic.
Sperm hop in the trenches
blessed with an ageless memory. (Hip Logic 12)
이 시는 꼼짝 않고 서 있는 일이 불가능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팔뚝에 해골과 용을 문신한 채 더러는 농구공을 쏘아대면서 더러는 라디오를 어깨에 메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움직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우편번호에 비탄이 잠재해 있다. 그들은 차 유리창이 깨졌더라도 그대로 주변을 몰고 다니면서 굉음을 일으킨다. 그런 활력 탓인지 그들 중 더러는 증거가 있든 없든 감옥에 갈 것이다. 깨지지 않는 돌이 없다는 법에 따르자면 그들 중 누구도 깨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냥 서 있을 수 없는 “영혼을 / 체포하는 것”은 마치 광속을 속보로 늦추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여인들의 품에서 옷을 입는 몇몇”이 “영원히 손질당하면서 손질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있어 논리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에서 나온다. 두 다리 사이 고랑에서 정액이 깡충 뛰어오르고 있다. 엉덩이의 요람에서 성장한 리듬은 역사가 깊어서 “늙지 않는 기억의 축복” 속에 있다. 이 시는 아프리카계 미국 시인 헤이즈가 흑인의 태생적 동력, 엉덩이의 논리학에게 부치는 간결하고 다부진 찬송이다.
III
네 번째 시집의 서시에 해당하는 작품 「얼빠진 사람의 은하계 안내서」(“Lighthead's Guide to the Galaxy”)는 시인의 시론의 성격을 띠고 있어 시선을 끈다. 시인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은 미국 문화와 그 속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형성에 관한 사유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물질의 세상에 맞서는 시의 정신을 요구한다.
우리 주(州)에 거주하는 신사, 숙녀, 유령, 어린이 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시간의 요령을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예컨대, 지금의 시간은, 지붕을 뚫을 듯이 내리는 비만 없다면
다른 모든 시간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너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밤은 제게
겨울에 브라를 착용하지 않은 여인처럼 그 자체로 신중하지 못하고
골치 아프답니다. 내 생각에 모든 것은 성애(性愛)의 은유예요.
성교는 이별 행위를 모방하고 달빛은
나뭇잎 사이로 방울져 떨어져요. 당신은 단지 인생을 준비하고
생각하는 데만 온 인생을 다 써버릴 수 있지요.
“이게 다예요?” 그래서, 제가 이곳에 있는 거죠, 시인들이 이곳에 와
마시는 것은 작은 얼음 조각 띄운 진하고 강한 독,
내 영장류의 혀와 그 잔해의 음절들을 풀어주는
어떤 것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모든 말이라는 게 앞선 말에서 유래하여
우리의 선언들이 자아를 발달시킬 때까지 분화하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어둠 속에 짖고 있는 작은 개가
할 말이 있대요. 아버지가 “스크림프”라고 부르는 게 있으면 낫겠어요.
사실 “분리된”이라고 말한 것인데 그 말로써 그가 뜻한 것은
그저 시야에서 벗어난 거리랍니다. 눈으로 보는 것 말고 오관으로 지각하는 것,
그것이 시이지요. 소음이 아니라, 그 리듬이고, 교란의
조정이에요. 살기 위해 당신을 먹어치우겠어요, 그게 시랍니다.
갈색 피부의 산모처럼 빛이 났으면 좋겠어요.
내 선생님이 우리에게 몰리 블룸의 긍정의 독백을 읽어줄 때 그랬던 대로
내가 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내에게 입맞춤할 때
가끔 그녀에게서 경계의 맛이 나요. 하지만 그건 이야기하지 말자구요.
아마도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자아보존일 거예요.
가끔 하는 게임에서 내 원시적 기교는
지구파괴가 목적인 외계 우주선을 겨누어
발포하지요. 다른 때에는 우울함과 같은 단어와 사랑에 빠져요.
벗은 나뭇가지의 즙을 내고 있는 달빛과 그리되기도 하구요.
모든 종(種)은 공허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만
꽃은 개화를 멈추지 않지요. 입이 좌절될 때 당신이 들을 수 있는
훌쩍대는 소리, 원숭이의 지혜, 난 그것을 지니고 다녀요.
한 잔의 물에게 왜 빗물을 불쌍히 여기는지 물어보세요.
뒤뜰의 미친개에게 왜 가죽 목줄을 참고 있는지 물어보세요.
형제자매여, 깊은 잠에 빠질 기회는
위험한 상황에서 지새우는 밤들에 있답니다.
Ladies and gentlemen, ghosts and children of the state,
I am here because I could never get the hang of Time.
This hour, for example, would be like all the others
were it not for the rain falling through the roof.
I'd better not be too explicit. My night is careless
with itself, troublesome as a woman wearing no bra
in winter. I believe everything is a metaphor for sex.
Lovemaking mimics the act of departure, moonlight
drips from the leaves. You can spend your whole life
doing no more than preparing for life and thinking.
"Is this all there is?" Thus, I am here where poets come
to drink a dark strong poison with tiny shards of ice,
something to loosen my primate tongue and its syllables
of debris. I know all words come from preexisting words
and divide until our pronouncements develop selves.
The small dog barking at the darkness has something to say
about the way we live. I'd rather have what my daddy calls
"skrimp." He says "discrete" and means the street
just out of sight. Not what you see, but what you perceive:
that's poetry. Not the noise, but its rhythm; an arrangement
of derangements; I'll eat you to live: that's poetry.
I wish I glowed like a brown-skinned pregnant woman.
I wish I could weep the way my teacher did as he read us
Molly Bloom's soliloquy of yes. When I kiss my wife,
sometimes I taste her caution. But let's not talk about that.
Maybe Art's only purpose is to preserve the Self.
Sometimes I play a game in which my primitive craft fires
upon an alien ship whose intention is the destruction
of the earth. Other times I fall in love with a word
like somberness. Or moonlight juicing naked branches.
All species have a notion of emptiness, and yet
the flowers don't quit opening. I am carrying the whimper
you can hear when the mouth is collapsed, the wisdom
of monkeys. Ask a glass of water why it pities
the rain. Ask the lunatic yard dog why it tolerates the leash.
Brothers and sisters, when you spend your nights
out on a limb, there's a chance you'll fall in your sleep. (Lighthead 3-4)
시의 제목에서 화자는 자신을 “얼빠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시의 첫 줄에서부터 그는 그런 자신에게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들어야할 바가 있다는 듯이 떠들썩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남 앞에서 재간 있게 연설하는 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감히 은하계 여행의 안내자 역할을 자임하는 “얼빠진 사람”이 되고 있다. 우주여행은 우리 모두에게 낯설고 무지한 세계로 나가는 일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우주로부터 온 지구침략자와 게임에서 치고받은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화자는 경솔하게도 그런 미지의 여행길 안내자로 자처하고 나서고 있다. 스스로도 얼빠진 짓인 줄 알면서도 그가 그러는 것은 그런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이제껏 “다른 모든 시간과 다를 바가 없”는 시간 속에 살아왔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고 “이곳”에 와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시간의 요령을 터득하기 위해,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시간”과 다른 시간을 찾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그가 여러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얼음 조각 띄운 진하고 강한 독”을 마시고 “영장류의 혀와 그 잔해의 음절들”을 풀어내기 위해서다. 화자는 시인인 것이다.
화자에게 은하계 여행은 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에게 은하계 안내서는 시를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그는 시가 어떠해야하는지 사람들에게 안내한다. 시는 “그저 시야에서 벗어난 거리”일 따름이므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관으로 지각하는 것”이고 “소음이 아니라, 그 리듬이고, 교란의 / 조정”이다.
시에 이르는 여행은 위험을 내포한다. 그 여정에서 화자는 “살기 위해 당신을 먹어치우”게 되고 아내의 입술에서는 조심스러운 “경계의 맛”이 난다. 그에게는 우주여행의 환희가 보장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지구구원이나 우주정복이 아니라 “자아보존”이다. 시는 기껏 “우울함과 같은 단어” 혹은 “벗은 나뭇가지의 즙을 내고 있는 달빛”과 사랑에 빠지는 것에 불과하다. “신사, 숙녀 ... 여러분” 이렇게 세상 사람들을 불러놓고 화자가 기껏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별 것 없어 보인다.
화자는 한편으로 “얼빠진 사람”인 게 맞다. 그는 은하계 안내에서 사람들을 우주여행에로 끌어들일 수 있는 호소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거창한 안내를 일삼고 있다. 얼빠진 상태(lightheadedness)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신체적 이상 징후를 뜻한다. 얼빠진 사람으로 번역한 “lighthead”의 용어는, 이 시가 우주여행 안내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는 순간에 머릿속이 빈 듯 무게감이 없어진 상태를 뜻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시인은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자의 머릿속, 그 어지럼에 대해 말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화자에게 있어서 은하계의 중심은 지구이고 그 중심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그의 은하계 안내는 어떻게 이 지상에서 나를 지켜나갈 것인가에 관한 탐색인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지상을 벗어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온갖 것들에 대항하고 있다. 화자는 얼빠진 자가 되어 무중력에 들어감으로써 중력장에 맞서려한다. 화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의 “교란”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여서 “얼빠진 사람”이다.
하지만 화자는 다른 한편으로 “오관으로 지각하는 것”의 시를 쓰려는 자여서,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자여서, 어떤 의미에서 보다 더 건실한 안내자의 지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는 모든 동식물의 종에 존재하는 “공허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꽃이 핀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모두에게 알려주려 한다. 화자는 “입”이 좌절된 처지에서도 “훌쩍대는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한 잔의 물”은 “지붕을 뚫을 듯 내리는 빗물”에서 온 것이다. 뒤뜰의 미친개는 “가죽 목줄”에 매여 있다하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바가 있다. 외다리로 선 채 밤을 지새우는 “위험한 상황에서” 비로소 “깊은 잠”의 기회가 주어진다. 화자에게 시는 은하계의 온갖 위험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깊은 잠”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은하계 안내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시에 대한 헌신의 이유를 다소 장황한 어투로 재치 있게 제시하면서 입담 좋은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IV
헤이즈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생득적 운명을 교차시켜 직조해내는 거리의 풍경을 그려내는 데 재주가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일상의 중력장에 갇혀 지낸다. 특히 흑인들은 “라디오에 탈착 가능한 얼굴을 붙이고” “다른 모든 시간과 다를 바가 없”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것은 백인의 샴푸와 햄버거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시디와 나이키 신발이다. 이것을 주시하는 시인은 인종차별의 고통에서보다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존재의 방식에서 더 큰 위험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새 정체성은 흑인의 것이면서 또한 시인의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현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문화의 압력에 대해 저항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국외자의 목소리를 낸다. 헤이즈의 시는 삶을 속박하는 세력들에 대항하여 무중력 우주여행을 꿈꾸는 얼빠진 시인의 욕구를 구현한다.
인용문헌
Hayes, Terrance. Muscular Music. Chicago: Tia Chucha P, 1999.
_ ______. Hip Logic. New York: Penguin Books, 2002.
_ ______. Lighthead. New York: Penguin Books, 2010.
시와 문화 2014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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