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난기
일제 36년은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감방으로 만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눈초리가 번득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들이 찬 칼의 절걱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라곤 없었다.
'황성의 적'이 맨 처음 불렸을 때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왕평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고, 조선악극단의 동경 공연 때 가수 강남향의 특이한 승무에서 북 가운데 그려진 태극이 말썽이 되어 공연 중지와 함게 인솔 책임자인 김상진 등이 동경 경시청에 검속된 일도 있었다.
이 조선악극단이 귀국해서 부민관 공연을 하던 중, 막간에 일본 공연의 성과를 자랑하느라고 "게다짝 정도는 우리 조선악극단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 말썽이 되어 주재자 이철이 10여 일 동안 종로경찰서에 구금된 일도 있었다. 그들이 금지한 노래를 부르면 임석한 순사가 무대에 올라와 노래 부르는 여가수에게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악극단의 대본은 꼭 검열을 받아야 했고 조금만 심상치 않은 내용이 있어도 그 단체는 막을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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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대의 공연 모습 |
1941년 12월 8일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자 한국 가요인들은 일제의 채찍을 더욱 받아야 했고 전의 앙양을 위한 군가를 불러야 했다. 이 무렵 모든 공연물은 국어(일본어) 상용이라는 원칙하에 우리말 대본은 검열에 걸려 햇빛을 보지 못했다.
고복수가 일본 순회 공연 때 '풍년가'가 우리말이라고 해서 공연 금지를 당하자 할 수 없이 가사의 한자만 일본어로 고쳐 불러야 했던 웃지 못할 넌센스도 있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이 노래를 '호넨가 왔네 호넨가 왔네'로 불렀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희극이었다. 아니 처절함이 극도에 달한 비극이었다.
라미라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갔을 때 준비한 공연물이 가극 '콩쥐팥쥐'였는데, 이 '콩쥐팥쥐'는 우리말로 되어 있어 대본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다. 밤을 새워 대본을 일어로 뜯어고치고 의상은 중국 것, 몽고 것으로 지어야 했다. 중국옷을 입고 일본말로 노래하는 가극 '콩쥐팥쥐'야 말로 절통한 비극, 웃다 울고 울다 웃어야 할 희극이었다.
레코드에 취입된 노래의 가사도 1절은 우리말 2절은 일본말이었고, 끝내는 우리말은 냄새도 풍기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칼'이란 우리 고담극을 일본의 나니와부시를 써서 우리말로 부르기도 했다.
내선일체란 미명 아래 숱한 죄악들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오케레코드에서는 미나미총독이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연설을 취입, 레코드 상가에 돌리기도 했다. 그런 레코드가 팔릴 것이라고 찍어 낸 것일까? 아니다. 이것 역시 총독부의 조선인융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강요된 연극의 막은 오른지 오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청승맞은 그들의 국민가요가 학교 운동장에서 울려퍼지고 군가들이 조석으로 라디오를 울렸다. 적성국가에 본사가 있다는 빅터와 콜롬비아는 쫓겨나 이름을 바꾸어야 했고 다른 레코드사 문전에도 거미줄이 쳐졌다.
화려하던 가요계의 신화들은 늦가을 펄럭이는 낙엽들처럼 서글펐다. 가요인들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배급 행렬에 끼어 섰다. 은쟁반에 사례 10원 바쳐 주는 맛에 방송국에 나가 군가를 불렀다. '아들의 혈서', '우리는 제국군인', 국책영화 주제가 '너와 나' 같은 것이 나돌았다.
외국 영화 상영 금지로 인해 전국의 영화관은 연예물로 채워져야 했고 소위 산업전사(징용당한 노동자)들을 공장, 광산으로 찾아 다니며 위문한다 하여 숱한 위문단이 조직되었다. 노래 한 곡 부르고 사양길에 있던 가수, 두세 명의 무용수와 얼치기 코메디언이 모이면 위문단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보과 아래에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내 주는 기예증이 없으면 그나마 공연단체에 끼지도 못하고 밥을 굶어야 했다.
아름다운 노래는 사라졌다. 가수도 악극단도 없었다. 거기에는 슬픈 앵무새와 허수아비와 광란의 전쟁 앞에 바쳐지는 굴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우리 가요의 수난기, 아니 암흑기였다.
4. 재생기(1)
[아, 감격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日王)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잡음 투성이의 그 중대 방송은 맨 처음엔 그 누구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누군가 ‘무조건 항복’, ‘해방’이란 말을 되뇌었다. 모두 꿈만 같았다. “대한독립 만세!” 누군가의 외침. 목멘 소리였다. 여기 저기 통곡이 번져갔다. 너무 기뻐서, 너무 감격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그 울음과 만세 소리는 삼천리 강산의 눈부시게 푸른 8월 하늘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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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성(작곡가) |
해방의 그 날까지 가요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작곡가 김교성은 공연단체를 이끌고 일본 북해도 탄광에서 위문공연을 하고 있었고, 라미라가극단 같은 큰 단체는 등화관제와 B29 공습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다. 평양에는 평양 매일신문사에서 주재하는 평매이동가극단이란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성보악극단이 명치좌(예전 명동 국립극장 자리)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금강악극단이 개성 공연에서 돌아와 종로 어느 여관에서 서울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금강악극단의 공연물은 ‘농부의 합창’. 쌀 증산만이 성전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요지의 악극이었다. 단원들은 공연 준비 때문에 밤 늦게 잠자리에 들어 늦잠을 자다가 꿈 같은 소식에 후닥닥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다.
약초악극단 역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이 날을 맞았다. 그들은 바로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요청으로 휘문고보로 갔다. 여운형의 연설이 있으니 그 전에 해방의 감격을 연주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총독부의 수족이었던 협회가 이젠 달라졌던 것이다. 단원들은 휘문고보 넓은 운동장을 어깨춤을 추며 돌았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거리에는 감격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청년들이 극장으로 들어가 악기를 꺼내 마구 불고 두드렸다. 이런 축제가 언제 또 있었던가. 아마 통일의 그 날이 오면 다시 한번 이런 축제가 있을까.
여기서 8.15의 감격이 낳은 우스개 이야기 한 토막을 보자. 광복 직후 9월 2일에는 미군이 진주했고, 앞서 8월말에는 미국 항공단이 먼저 들어왔다.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무장해제를 당하기 전이다.
김희봉, 이동춘, 김준덕, 김희조, 전봉열, 김호길 등 청년들이 서울음악단이란 것을 조직해서 반도호텔에 투숙중인 미국 항공단의 환영연을 하러 갔다. 그런데, 주문해 놓은 옷을 받고 보니 턱시도가 아니라 모닝코트였고, 거기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보니 흡사 새신랑들 같았다. 그들이 신은 신이란 것도 이른바 지까다비(じかたび, 노동자들이 작업할 때에 신는 신)가 아니면 헌 운동화였다. 전쟁통에 구두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희극적인 옷차림으로나마 그들은 반도호텔로 가서 미군을 환영하는 뜨거운 감격을 연주했다. ‘카르멘 실버스’, ‘다뉴브강의 잔물결’ 등을 연주했는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미군들이 얼마나 웃었겠는가. 단원들이 연주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통행금지 시간인 8시가 넘었다. 그래서 응급대책으로 일본군의 조선군사령부 표시가 있는 완장을 얻어 차고 귀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된 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가거라 삼팔선아]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
가거라 삼팔선 :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1948)>
감격의 그 날에는 삼팔선이란 원한 맺힌 말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삼팔선은 가혹한 현실로 눈 앞에 펼쳐졌다. 고려레코드가 내놓은 이 ‘가거라 삼팔선’이 유례 없이 히트한 것은 이 노래 속에 담긴 그 처절한 감상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공명했기 때문이리라. 이어 남인수는 1949년에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불러 또 한번 설움에 우는 겨레의 가슴을 쳤다. 물론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도 있었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
울어라 은방울 :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1948)> 노래 : 은방울 자매
장세정이 불렀던 ‘울어라 은방울’은 해방의 희열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돌아오는 해외동포들을 맞는 축가도 있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향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갈매기야 울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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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선 : 손로현 작사, 이재호 작곡, 이인권 노래>
이인권이 불렀던 이 노래는 건국에 대한 꿈이 부풀던 시절의 노래다. 한편, 고운봉이 불렀던 ‘선창’이 이 무렵 새삼 유행하기도 했다.
‘가거라 삼팔선’을 낸 고려레코드보다 조금 뒤에 간판을 내건 럭키레코드사는 상해에서 돌아온 현인에게 ‘신라의 달밤’을 취입시켰다.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6.25 전쟁 전까지는 어린아이들도 따라 불렀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려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신라의 달밤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1949)>
격동기에 이런 회고조의 노래가 불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중들의 가슴 속엔 옛날 신라시대의 태평성대를 꿈꾸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까.
‘신라의 달밤’이 히트한 뒤를 이어 현인은 또 ‘고향만리’를 내놓았다. ‘고향만리’는 남태평양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우리 젊은이의 향수를 읊어 애달픈 추억을 불러일으킨 노래로 이 역시 히트했다. 이밖에도 현인은‘럭키서울’,‘서울야곡’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이 무렵 가요팬들의 갈증이란 대단했다. 엿장수들이 모아 오는 고물 레코드를 재생하는 것이 그 무렵 레코드 제작이었는데, 그나마 전기 보일러로 프레스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숯불에 구워 내는 것이라 히트곡이라면 한 달 전에 예약을 하고서야 겨우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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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희 |
광복 이전 가요의 황금기에 레코드가게에서 미녀가 미소를 던지고 고급 차를 대접하며 레코드를 팔 때와는 엄청나게 다른 풍경이었다. 팔고 싶어도 레코드가 없어 못 팔 때였다. 그러나, 소자본으로 설립한 레코드사들은 쉽게 생겼다가 쉽게 사라졌다. 남인수가 손수 차렸던 아세아레코드며, 오케, 서울 등이 명멸했다.
이 무렵 백설희, 김백희, 이예성, 심연옥, 한복남 등이 무대에서 주가를 인정받고 있었다.
서울 중앙방송국이 가요를 전파에 실었고, 신인 가수를 모집하기도 했다.
1947년에 뽑힌 금사향, 송민도는 그 중에서도 뛰어나 밝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박재홍은 ‘마음의 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불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좌우익의 싸움이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대결도 있었다. 찬탁,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 삼팔선을 넘어 월북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사람도 있었다.
[째즈와 악극단]
해방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자 씨레이션, 츄잉껌, 째즈 등 새로운 문물이 직수입되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째즈 레코드가 단음계의 일본풍 노래에 식상했던 사람들에 의해 낡은 축음기 위에서 돌았다. 현인이 부른 ‘베사메무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리를 휩쓸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키스를 더 해 달라는 제목의 의미를 모르고 ‘베사메무쵸’를 여자 이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대사가 하필 무쵸라서 그런 성을 가진 여자가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과도기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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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인(작곡가) |
이 무렵 미군부대 주변을 서성거리는 악극단도 많았지만, 새로운 음악과 악극 재건을 위한 노력도 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음악단과 악극단은 자금난과 흥행 부진으로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비운을 맞기 일수였다.
해방 이후 최초로 풀멤버를 구성해 조직되었던 이안드레아 탱고오케스트라는 개인 재산 2백만 원을 몽땅 털어 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예는 허다했으나 그래도 오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는 김해송의 KPK악극단과 손목인의 CMC악극단, 조춘영과 이재춘 등이 이끈 OMC악극단 등이었다.
김해송의 KPK악극단은 주로 미군 대상 무대를 경음악과 째즈로 휩쓸었다. 이 무렵은 가히 KPK악극단의 전성시대로 그 째즈리듬은 미군들을 즐겁게 했고, 일반 무대에서도 환호를 받았다.
반야월은 남대문악극단을 이끌었고, 김호길 등의 뉴코리아악단도 전국을 순회했다. 이 때 악극단과 경음악단들은 미군부대 공연이나 캬바레가 주활동무대였고, 김생려가 이끌던 서울관현악단조차 이러한 방면에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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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푸른 언덕' 신문광고 |
황문평, 김형래 등의 장미악단은 뮤지컬과 세미클래식의 융성을 위해 분발했지만, 1년이 못 가 문을 닫았다.
흥행계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몇 명의 가요인들이 단체를 만들었다가 한번 공연으로 해산되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이합집산 속에서 뚜렷한 경향은 째즈가 주요 분야로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신민요를 부르던 박단마, 박혜옥, 유정희 등이 째즈가수로 변신하기도 했다.
현인이 주연한 음악영화 ‘푸른 언덕’은 해방 전 오케레코드 가수들이 총출연했던 영화 ‘노래 조선’에 이어 해방 이후 최초의 음악영화이기도 했다.
[6.25, 그 수난의 날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은 그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피로 물든 강산에 가요인들의 수난도 뼈저린 것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가수 이인근, 이몽녀 부부와 김홍렬, 강남춘, 이복본이 끌려갔고, 작곡가 김형래, 김해송도 납북되었다.
김해송이 끌려간 후 아내 이난영은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마포 형무소의 담벽을 돌았다. 어느 비내리는 밤 김해송은 어둠 속에서 이난영이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쇠고랑을 찬 채 끌려갔다. 그것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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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옥 |
신카나리아는 고구마장수를 하며 수난의 날을 견디려고 했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붙잡혀 갔다. 죽음의 행렬이 미아리고개를 넘고 총부리 앞에서 반죽음 상태로 북으로 끌려갈 때 구사일생으로 탈주할 수 있었다.
동란의 시절, 부산항은 피난민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좁은 네거리에서 서로 발을 밟으며 삶을 찾아 헤매야 했다. 무대도 없었다. 노래할 힘도 없었다. 이름난 가요인들이 국제시장 바닥에서 서성거리고 40계단 싸늘한 길바닥에서 울었다.
젊은 가수들은 전선으로 가기도 했고, 작곡가 박시춘, 김호길, 작가 유호, 김영수, 가수 심연옥, 신카나리아, 송민도, 금사향 등은 정훈국 문예중대에 배속되어 모여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 이 때 승리일보에 ‘승리의 노래’가 가사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어 실리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