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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산 시인들의 성과와 한계
- 지옥에서 쓴 서정시
김양헌(평론가)
1970년대 생 시인으로 최금진을 빼놓을 수 없다. 최금진은 문태준과는 거의 반대쪽에 서 있다. 문태준이 비교적 가볍고 경쾌한 수사에 기대고 있는 반면, 최금진은 어둡고 둔중한 이미지를 내세운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그 화법이 모더니즘 쪽으로 기우는 경우도 많아서 전통적 서정시라 하기 어려운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것은 존재론적 성찰이다. 인간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서정시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가장 본질적인 주제다. 궁극적으로 모든 시는 존재의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을 터. 다만, 전경에 내세우며 직접적으로 다루는 제재가 다른 뿐이다. 1970년대 생 시인들 대다수가 실존의 문제와 자의식의 압박에 매여 있을 때, 최금진은 거의 유일하게 존재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며, "어딘가에 스스로 매여 있는 것을 모르"(「섬」)고 "제 운명의 펑퍼짐한 엉덩짝을 치면서"(「소들은 울지 않는다, 웃는다」) 아둥바둥 삶을 끌어가는 존재의 부조리를 냉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문태준은 작품 밖에 있을 때도 내적 정황에 정서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금진은 작품 밖에서 존재의 실상을 면밀히 관찰할 뿐 상황에 개입하는 일이 없다. 작품 안에 있을 때조차 냉정하게 존재를 '바라본다'그것은 존재의 의미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서 시인의 가치관이 개입하지만, 그 해석을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자연히 사실성이 중지된다. 감정을 배제한 섬세한 묘사가 시의 육체를 이룬다. 주관성은 "추억의 허기로 바싹 마른 여자의 젖가슴이 흔들린다" 정도로 보일 듯 말 듯 왜곡된다. 혹은, 불빛 켜지는 뒷골목마다 깨진 소주병이 퍼렇다"(「무엇이 그녀를 역전에 박아 놓았나」)처럼 사실적인 묘사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성이, 객관적 묘사가, 부정적 정황과 만나면서 존재의 의미를 쓸쓸한 애상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최금진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전문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검은 박성우의 「거미」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최금진의 다른 작품 「조용한 가족」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우리는 이런 류의 선구를 1980년대 초반 이하석의 「나른한 현장」,「교통사고」등에서 만난 바 있다. 이 작품들은 존재론적 질문보다 자본주의적 비인간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거미」도 마찬가지로 실존적 상황을 묻는 쪽이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은 그 뒤를 따라간다. 현대인의 실존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다. 최금진도 실존의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최금진은 실존의 형식을 빌어 존재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은 객관성과 구체성을 얻기에 유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지나치게 심각한 어조로 치우치기 쉽다. 심각함은 철학적 감상으로 빠질 우려를 낳는다. 박성우가 한 것처럼, 작품 밖의 존재가 미시적으로 해석에 개입하는 경우도 잦아진다. 그러면 오히려 존재의 의미가 주관적 틀 속에서 상투화할 수도 있다.
"그녀는 이것들 벗어놓고/어디로 갔나?" (「나른한 현장」) 이하석의 물음에는 아직도 답이 없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존재는 답이 없는 것이다. 답을 하는 순간, 존재는 이미 다른 것으로 변해 있다. 답은 끝없는 질문 안에 있다. 그렇다면, 존재는, 혹은 존재의 탐구는 무겁기만 한 것인가? 「흘러간 천렵 시절」, 「사랑의 변명」,「자매」정도면 즐겁게 삶을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따스한 구멍」이라면 죽음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우리는 존재론적 고독에 깊이 빠진 진지한 젊은 시인 한 명쯤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결국은 우리 삶의 한 귀퉁이를 지켜주지 않겠는가.
오는 길과 가는 길이 서로 입맞춤하는
개미들의 길, 그대 집으로
나는 문상을 갔네 눈을 감고도
길 찾아가는 개미들 서로 부딪히는 법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부음을 전할 때
허리 질끈 동인 그대의 식솔들
나 왔다고,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찔러 깨웠네
가슴에 한 움큼 흙덩이가 무너져 내렸을 그대
누군가 솜으로 눈과 귀를 막아 놓았지만
한 숟가락 쌀알을 가득 입에 물고 그대도
찾아 돌아가야 할 땅 구멍이 있겠지
나는 입 속에 물고 온
곡소리를 꺼내어 그대 앞에 내려놓았네
복숭아꽃 피어 있는 산마을 병풍 속
향냄새를 한 상 차려 내오는 그대
내가 주는 것을 그대가 받는다 생각지 않지만
가다가 배나 곯지 말라고
<밥값, 언젠가 외로울 때 얻어먹은 저녁일세>
흰 봉투에 그렇게 적어 놓았네
그대와 내가 문득 축문을 사이에 두고
한 잔씩 조등을 기울일 때 영차영차,
제 몸의 상여꾼인 개미들은 제 몸을 메고
장판 밑 따스한 구멍으로 돌아가고 있었네
- 최금진,「따스한 구멍」전문
존재에 대한 의문은 인간이란 종이 유지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질문 자체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인간을 현실의 속도에서 끌어내려 멈춰서게 만든다. 도저한 가속의 시대에 느림의 미학을, 시간의 역전을 꿈꾸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금진의 작업은 문태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목구멍까지 주름이 접힌 갈증"(최금진,「과일가게 앞의 개들」)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문태준,「회고적인」)시간이 만들어낸 것. 1970년대 생으로서 어쩌면 양 극단에 선 두 시인이 본질적으로 동질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는 셈이다. 존재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시간과의 사랑이다.
1970년대 생 시인들이 다른 세대의 시인들과 근본적인 차별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이 모더니즘 쪽으로 기울고, 몇몇 시인들은 양쪽에 걸쳐 있다. 전통적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도 다른 세대와 전혀 이질적이라 하기는 힘들다. 문태준과 최금진은 아주 독특한 맛이 있지만, 그 근본 사상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방법론적으로도 같은 세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사실성에 크게 기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소설의 리얼리즘, 민중시의 리얼리티와는 다른 차원에 있다. 이들 세대의 사실성이란 진지함의 다른 이름이다. 모두가 가벼이 현실의 즐거움으로 욕망의 손뼉을 치며 달려 가는 동안, 이들은 뒤에 남아서 냉철하게 그것을 분석하고, 천천히 걸어서 더 빨리 새로운 생의 의미에 도달한다. 진지함이 없으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1970년대 생 시인들은 아직도 앞 세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그들을 넘어서는 길뿐이다. 저 태화리 밭두렁의 순하디 순한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문태준, 「굴을 지나면서」). 그 길이 훤히 보일 때까지, 캄캄한 "어둠 속을 제 몸으로 밝히며 가는"(최금진, 「소들은 울지 않는다, 웃는다」)반딧불이처럼, 사랑의 길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나가는 수밖에.
*『오늘의 문예비평』2002년 겨울호 특집의 '부분'
따스한 구멍
오는 길과 가는 길이 서로 입맞춤하는
개미들의 길, 그대 집으로
나는 문상을 갔네 눈을 감고도
길 찾아가는 개미들 서로 부딪히는 법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부음을 전할 때
허리 질끈 동인 그대의 식솔들
나 왔다고,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찔러 깨웠네
가슴에 한 움큼 흙덩이가 무너져 내렸을 그대
누군가 솜으로 눈과 귀를 막아 놓았지만
한 숟가락 쌀알을 가득 입에 물고 그대도
찾아 돌아가야 할 땅 구멍이 있겠지
나는 입 속에 물고 온
곡소리를 꺼내어 그대 앞에 내려놓았네
복숭아꽃 피어 있는 산마을 병풍 속
향냄새를 한 상 차려 내오는 그대
내가 주는 것을 그대가 받는다 생각지 않지만
가다가 배나 곯지 말라고
<밥값, 언젠가 외로울 때 얻어먹은 저녁일세>
흰 봉투에 그렇게 적어 놓았네
그대와 내가 문득 축문을 사이에 두고
한 잔씩 조등을 기울일 때 영차영차,
제 몸의 상여꾼인 개미들은 제 몸을 메고
장판 밑 따스한 구멍으로 돌아가고 있었네
*2002년<시와반시> 여름호 (2003 올해의 좋은 시-푸른 사상사)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와 생활과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고 안목은 산뜻하다. 그대는 한 숟가락 쌀알을 입에 물고 나는 입 속에 물고 온 곡소리를 꺼내어 그대 앞에 내려놓는다는 대조는 재미있고 "향냄새를 한 상 차려 내오는 그대" 같은 표현은 절묘하다. 봉투 속에 조의금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저승길 가다가 배나 곯지 말라고 흰 봉투에 "밥값, 언젠가 외로울 때 얻어먹은 저녁일세" 하고 적어놓았다는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까지 한다. 아무튼 개미들은 따스한 구멍 속으로, 그대는 싸늘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장례식 날이다. 시골 마을의 초상치레라는 진부한 소재를 갖고 이렇게 시를 세련되게 쓰기란 쉽지 않다.
악의 꽃
할머니 무덤 이장하다가 보았다
꽃과 나무들이 육식성이라는 것 강아지처럼 귀여운
솜털의 뿌리가 무덤을 향해 입을 내밀며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흐물흐물한 몸에서 손톱과 발톱과 머리털을 뻗어
관을 후벼파고 기어 나왔다
할머니, 하얗게 피어난 꽃이었다
구덩이 속에 뱀처럼 엉겨붙은 뿌리들은
햇빛이 닿는 순간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흙 속에 흘러든 검은 체액을 빨아대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독한 술을 부었다
땅 속의 썩은 입 냄새를 감추기 위해
무덤의 꽃들은 현혹색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가, 나다, 할미다, 피묻은 입술과
멍든 살코기를 매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삽으로 뿌리를 찍었다
할머니, 허연 머리털이 뽑혀 나갔다
어둠에 촉수를 박아 넣은 것들은 모두 음주광성
내 습한 겨드랑이가 간지러운 것도 그 때문
나를 빨아먹고서야 시들어버릴 털 때문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 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
삽날에 찍힌 아카시아 뿌리들이 드러났다
나는 미친 듯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 하세요!
- 『현대문학』2002년 2월호
김기덕 - 저는 「악의 꽃」을 보면서 섬뜩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굉장히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시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할머니를 이장하다가 할머니의 몸을 파고 들어간 나무뿌리가 할머니의 허연 머리털로 연상되며 머리털이 양분으로 자라듯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 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시인은 얘기하고 있는데요, 할머니의 흰머리와 나무뿌리와 또 털과 꽃의 연결을 통해서 썩어짐과 다시 양분이 되어 꽃피는 새로운 태어남의 관계를 느끼게 해 주는 선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관계를 상징적으로 연결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구덩이 속에 뱀처럼 엉겨붙은 뿌리들은 햇빛이 닿는 소리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흙 속에 흘러든 체액을 빨아대고 있었다'라든지, '무덤의 꽃들은 현혹색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피묻은 입과 멍든 살코기를 매달고', 이런 부분들이 아주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느끼는 것은 마지막에 있어서 이런 강렬한 이미지의 느낌을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 하세요!'라는 그런 쪽의 결말보다는 더 승화가 되었어야 되지 않느냐, 그러면 정말 강렬하고 찡하게 울려줄 수 있는, 뭔가 영혼의 뇌리를 울려줄 수 있는 그런 시가 될 수 있었지 않느냐,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승화된 깊이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전체적으로 폭발할 듯한 강렬한 이미지의 은유와 상징이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쓸어버리는 햇폭탄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끝 부분에서 조금 상쇄된 느낌이 있어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임미옥- 저는 앞부분은 김기덕님이 하신 말씀에 공감하는데 끝부분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르거든요. 저는 이걸 읽으면서 보들레르를 생각하기도 했고, 또 불가의 말씀인 '인간에게 애욕은 꼭 개에게 던져준 피 묻은 뼈다귀와 같다'라는 그런 말씀도 떠올랐습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존재의 한계를 「악의 꽃」이라는 제목을 달고, 할머니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그 실상을 통해 현장감 넘치게 표현하여 공포와 충격을 주는 데 상당히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 앞부분에 나온 '삽으로 뿌리를 찍'는 행위와 함게 이미 죽어서 썩은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는 행위, 이건 곧 자기 자신, 말하자면 욕망이라는 삶의 질곡에 빠져 허덕이는 자기 육체를 흔들어 깨우는 행위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장하는 사건을 통해서 뭔가 새로워지고 싶어하는 시인의 간절한 심정을 마지막,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 하세요!' 하는 절규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어둠 속에 촉수를 박아 넣은 것들은 모두 음주광성'이라는 명확한 깨달음의 구절을 통해 더욱 탄력을 받는데요. 보들레르가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악의 꽃」을 쓴 것처럼, 이 「악의 꽃」도 불교라는 풍부한 종교적 상상력에서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성공했지만 삶에 실패한 보들레르와는 다르게 이 시에서는 삶에서도 성공하기 위해 악의 순환 고리를 끊고 싶어하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어 더욱 고무적이었습니다.
위상진- 「악의 꽃」은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할머니 무덤을 이장하면서 무덤 속 상황을 표현하였는데, '꽃과 나무들이 육식성이라는 것', 무덤 속을 보았기에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시인의 관점도 중요하지만. 시신을 감고 있는 꽃들의 정황을 「악의 꽃」이라 했는데, 모든 것이 무덤을 빨아먹고 있는 것, 마지막 부분에서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 하세요!'에서 비장미를 느꼈어요. 이제 그만 유골에서 벌떡 일어나라는, 깊이 든 잠을 흔들어 깨우는 행위는, 나를 깨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내가 무덤에서 무슨 꽃을 피울 수 있나도 유추하게 했습니다.
[감상]
섬뜩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불수의적 기억'으로 나의 호흡이 이끌려 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여름에 나의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서울에서 소식 듣고 내려가는 기차 창 밖으로 광목처럼 일렁이는, 늦게 핀 흰 꽃들이 있었고, 읍내로 들어가는 버스 밖으로는 금강이 있었고, 차령산맥 그 어디 품 자락에 외할머니의 '닭 뼈다귀 같은' 몸은 부려져 있을 것이었다.
好喪이라는 말의, 好자와 喪자 사이에는 얼마나 커다란 슬픔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가. 노인의 죽음, 그렇다, 나의 외할머니는 늙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그래서 好喪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인들 사연이 없으랴. 누른 돼지고기에 소주를 먹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상모를 고쳐 써야 했다. 아무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관찰과 죽음에 대한 반응만이 가능한 것이다.
삶의 대척점인 '죽음이라는 현상'은 그래서 '삶'을 반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최금진 시인의 등단작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창작과 비평』2001년 겨울호)의 추락한 차 밖으로 나온 쪽지,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라는 구절처럼, 시는 '질문'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노파의 손'에 구겨져 있는 사진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고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에' '뭉개진 변이 가득'해서 죽은 亡者의 몫이기도 하다. 좋은 시는 그 몫의 고통을 뿜어낼 줄 아는 시다. 몇 장의 스냅 사진처럼 이어지는 행과 행 사이, 그 깊은 구석구석마다, '삶'을 살아내는 시인의 울분은 얼마나 큰 울음을 안고 있는가. 복날, 살비듬, 조용한 가족…
하니리포터 박진성 기자/ parkjinsoung@hanmail.net
최금진 - 진부한 소재의 세련된 형상화
최금진은 1970년 생 시인으로 춘천교육대학을 나왔으며 2001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시와 반시』에 발표한 「섬」과 「따스한 구멍」중 뒤쪽의 시에 주목한다.
오는 길과 가는 길이 서로 입맞춤하는
개미들의 길, 그대 집으로
나는 문상을 갔네 눈을 감고도
길 찾아가는 개미들 서로 부딪히는 법 없이
입에서 입으로 부음을 전할 때
허리 질끈 동인 그대의 식솔들
나 왔다고,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찔러 깨웠네
가슴에 한 움큼 흙덩이가 무너져내렸을 그대
누군가 솜으로 눈과 귀를 막아놓았지만
한 숟가락 쌀알을 가득 입에 물고 그대도
찾아 돌아가야 할 구멍에 있겠지
- 「따스한 구멍」전반부
연 구분 없이 총 23행으로 이루어진 시의 전반부 11행이다. 이 시의 제목이 말하는 구멍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개미집의 땅 구멍이요, 둘때는 사람이 죽어서 찾아 돌아가야 할 구멍이다. 개미에게 있어 땅구멍은 집, 즉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 땅 구멍은 영원한 죽음의 자리이다. 구멍의 의미는 이밖에도 몇 개 더 있다. "누군가 솜으로 눈과 귀를 막아놓았지만/ 한 숟가락 쌀알을 가득 입에 물고"를 보면 구멍은 죽은자의 눈과 귀, 입이기도 하다. 눈과 귀는 솜으로, 입은 쌀알로 막아놓았는데 다섯 개의 구멍은 모두 싸늘한 식은 구멍이다. 하지만 개미들은 하루 일을 마친 뒤 "제 몸을 메고" 상갓집 장판 밑 따스한 구멍으로 돌아간다. 거기가 집이니까.
그대와 내가 문득 축문을 사이에 두고
한잔씩 조등을 기울일 때 영차영차,
제 몸의 상여꾼인 개미들은 제 몸을 메고
장판 밑 따스한 구멍으로 돌아가고 있었네
- - 「따스한 구멍」중반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와 생활과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고 안목은 산뜻하다. 그대는 한 숟가락 쌀알을 입에 물고 나는 입속에 물고 온 곡소리를 꺼내어 그대 앞에 내려놓는다는 대조는 재미있고, "향냄새를 한 상 차려 내오는 그대"같은 표현은 절묘하다. 봉투 속에 조의금을 얻었는지 안 넣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저승길 가다가 배나 곯지 말라고 흰 봉투에 "밥값, 언젠가 외로울 때 얻어먹은 저녁일세"하고 적어놓았다는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까지 한다. 아무튼 개미들은 따스한 구멍 속으로, 그대는 싸늘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장례식 날이다. 시골 마을의 초상치레라는 진부한 소재를 갖고 이렇게 시를 세련되게 쓰기란 쉽지 않다. 바다에 나가 죽은 남편을 기다리다 미치고 만 어느 섬 여인을 그림 시 「섬」의 앞 9행을 보자. 소재는 진부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어법은 바람난 봄처녀의 치맛자락처럼 날렵하다.
섬이 헝클어진 하늘을 머리까지 말아 올려
몇 개의 핀처럼 저녁별을 꽂는다
여자는 산신당 옆 밭둑에 앉아
검은 가죽잠바를 뒤집어쓰고
제 발톱인 줄 모르고 뜯어먹는 흑염소들을 보며
꺄르르 웃는다 남편이 남기고 간
작은 머리통에 다 담을 수 없는 운명을 뿔에 달고
쿡쿡 소나무를 치받는 염소들은
똥도 소심하게 까맣다
최금진 시인의 시를 아직 다른 것은 못 봤는데 조언하고 싶은 것은 운율 살리기이다. 산문시는 아니지만 연 구분이 안 되어 있어 간혹 답답하게 느껴지고, 문장들이 대체로 길다. 길어도 지루하지 않은 시가 있고 짧아도 지루한 시가 있지 않은가.
*『문학마당』2002년 겨울 창간호 p.212 - p.214 中
그로테스크와 긍정 - 이경수(평론가)
극단적인 부정의 방식을 통해 너머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긍정의 시선을 통해 너머를 꿈꾸는 방식 또한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또 한 편의 시는 긍정의 시선을 통해 너머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게 해 준다. 긍정이 따뜻한 위안만을 낳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긍정이 따뜻한 위안이나 포용의 시선과 섣불리 결탁해서는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여기 인용하는 최금진의 시는 긍정의 시선이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유발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사과를 깎아 먹으며 TV를 보는 자매
여우원숭이처럼 킥킥킥 웃으며
주름이 지문을 다 파먹어버린 손으로
손톱을 세워 미끄러운 사과를 집는다
이를 잡아 주듯 서로
사과쪽을 권하기도 하면서 가끔은
가려운 잇몸을 포크로 벅벅 긁기도 하면서
『동물의 왕국』을 본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이 누런 바나나 껍질처럼
반지하 셋방 창살 틈으로 던져지고
눈두덩이에 검은 기미로 안경을 해 쓴 자매
작은 꽃밭 같은 꽃이불 속에 들어앉아
알록달록 칼라로 꽃피는 TV를 본다
설인 사스콰치처럼
눈꽃 한 다발씩 머리에 이고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폭삭 늙었나
서로를 쓰다듬으며 보듬으며
웅크리고 앉아 모아 쥔 손으로
사과를 먹는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다
- 최금진, 「자매」(『시안』2002년 가을호)
적나라한 삶의 모습은 때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이 그만큼 적나라한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이를 먹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게 되면서 대부분은 적나라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인색해지게 된다. 적나라함보다 오히려 가면이 더 익숙해져버린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네 삶의 못나고 그늘지고 비루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나 소설, 영화 등을 접했을 때 익숙함보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금진의 「자매」가 주는 불편함도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주름이 지문을 다 파먹어"버릴 만큼 폭삭 늙어버린 자매가 여우원숭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사과를 찍어 먹던 포크로 가려운 잇몸을 벅벅 긁기도 하면서 『동물의 왕국』을 시청한다. 할머니가 되어버린 자매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지만, 그들도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설인 사스콰치"를 연상케 할 만큼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하루종일 깔려 있을 것임에 분명한 꽃무늬 이불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회적인 체면이나 교육 받은 겉치레 형식 같은 것은 이미 다 던져버린 자매에게는 자연스러움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어딘지 불편하게 다가온다. 알고 있지만 적나라하게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테스크함 역시 낯설게 말하기의 일종이다. 최금진의 시는 익숙한 것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놓음으로써 독특한 긍정의 시선을 보여준다.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그로테스크함.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그려놓음으로써 긍정의 시선이 지닐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최금진의 시는 의미가 있다. 자매에게 남아 있는 동물적인 본능을 인정하고 그 밑바닥을 본 후에 연대감에 도달하게 되는 것도 이 시가 유발하는 독특한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여전히 소통의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소외를 현실적 조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시인들은 소외를 넘어서는 소통을 꿈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시인은 단절과 균열이 일어난 층을 보여 주기도 하고, 어떤 시인들은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통을 말하는 형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소통 가능성에 대한 집요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다시 등 돌린 차가운 뒷모습을 확인하는 아픔을 겪게 될지라도 너머를 꿈꾸는 일은 고통스럽고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과경계』2002년 겨울호
詩를 찾아가는 時間여행
1. 아주 오래 된 기억
처음 나의 詩는 달에서 왔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 번 나를 업어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충북선 밤 기차를 오가며 외투를 휘날리던 건달, 내가 세 살이 되자 아버지는 서둘러 나를 업고 그 미루나무 아래에 서서 달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얼굴도 없는 아버지가 내 기억 속에 환하게 떠오르는 건 그 밤의 달 때문이다. 보아라, 네 어미다, 목에 걸어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천천히 씹어 먹도록 하여라, 아버지는 어린 내게 커다란 달 하나를 보여 주시고 가신 것이다.
그 밤, 미루나무 아래에 한 남자가 가마니를 덮고 누워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였는지, 내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만든 환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 한 남자가 죽어 있었고, 메주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지독했고, 포자들이 둥둥 떠서 달빛 속에 날아다녔다는 것이다. 나는 달이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아버지 키를 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처음 나의 詩는 그렇게 왔다. 현실과 환상의 지평선 위에 걸려있던 달덩이와 지금의 내 나이에 요절한 한 사내의 주검과 썩은 가마니와 메주냄새 속에서 그날 밤 시는 혼령처럼 조용히 내게 스며들어왔던 것이다.
2. 코끼리를 타고 가다
나에게도 코끼리가 있었다. 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코끼리,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순한 어금니로 툭툭 나를 받던 코끼리. 나는 그것을 파출소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나는 코끼리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길다란 총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살 수만 있다면 그 총을 사고 싶었다. 콧수염을 기른 무서운 순경 아저씨,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무서운 순경 아저씨. 사실 코끼리는 이다음에 커서 다시 타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깟 피 흘리는 병신 코끼리, 서커스에서 공놀이나 하는 코끼리 따위는 정말 관심 없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조부모님을 따라 정선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얻은 것은 까맣게 타버린 위와 수전증뿐이었다. 탄광촌의 까만 모래밭에서, 까만 세발자전거를 타고, 까만 똥을 누던 친구 하나가 있었지만 나는 그 아이가 파놓는 모래 구덩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아였던 그 아이 엄마가 만드는 이상한 손 이야기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혼자 있는 밤이면 나는 코끼리 생각이 난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코끼리가 아니었다. 창살에 갇혀 눈곱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런 병든 코끼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코끼리 아닌 것은 다 지워지고 코끼리 같은 것, 코끼리인 것만 생각이 난다.
3. 길 안에서 길 찾기
나는 빨간 룩색을 메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새벽에 도망치듯 뒷길로 떠나셨다. 중앙토건, 중앙토건,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중앙토건 옆 작은 슬레이트집을 생각했다. 룩색 안에는 사과 한 알이 들어 있었다. 중앙토건, 중앙토건, 나는 중앙토건을 찾아야 했다.
얼마를 걸어갔던 것일까. 나는 오줌이 마려웠고, 추웠고, 길을 잃었고, 겨우 아홉 살이었고, 가방 안엔 사과 한 알이 전부였고, '자연보호'를 해야 하는 착한 국민학생이었고, 자연을 훼손하면 벌금 백만 원을 물어주는 것이 무서웠던 가난한 집 아이였고, 그래서 나는 오줌을 쌌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끝내 중앙토건은 찾지 못했고. 중앙토건, 중앙토건, 지금도 내가 찾아가야 할 그 어두운 골목. 지금도 그 골목엔 어머니가 살고 있고 백발이 다 된 詩가 살고 있고, 아직도 내가 가진 것은 사과 한 알이 전부.
4. 날아라, 詩
우리집엔 하늘을 나는 자전거가 있어. 나랑 함께 놀아주면 한 번씩 태워줄게. 게다가 오늘은 내 생일이야. 바나나도 있고 맛있는 케익도 있지. 나랑 놀자. 집엔 아무도 없어. 할아버지는 아프셔서 누워있고 할머니는 행상 나가셨고 어머니는 공장에 가셨어. 나는 숙제도 해줄 수 있고 무엇보다 내겐 하늘을 나는 자전거가 있어.
나는 밤마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우산을 지붕처럼 달고 페달을 굴리면 마을 위로 사뿐히 떠오르는 자전거. 내 꿈속에서 자전거는 정말 하늘을 날아 강도 건너고 산도 넘었다. 공중을 한 바퀴 돌아 천천히 땅에 내리는 내 자전거, 할머니께 생떼를 써서 고물상에서 산 삼천 원짜리 고물 자전거, '노틸러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누군가에게도 믿게 하고 싶었다. 아니다, 나는 외로웠다. 주목받고 싶었다. 아니다, 내 자전거는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날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5. 첫사랑, 내게 흐르는 아버지의 달
내가 詩를 말할 때마다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본다면 아마 너는 웃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의 깨어남, 잃어버린 고대의 회복, 우주와의 황홀한 교감. 너는 내 속에 죽은 아버지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다만 어떤 연애시도 쓸 수 없는 나의 비관주의에 대해 잠시 웃다가 돌아설 뿐이다.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졸시,「월식」부분
6. 로뎀나무 아래서
그 나무 아래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기형도를 읽었고 파스칼을 읽었고 내 몸은 거의 안개에 가까워졌었다. 새벽 거리를 걸어 한 나무에게로 다가섰을 때, 나는 그 나무가 은행나무가 아닌 로뎀나무인 것을 알았다. 선지자 엘리야가 폭군 아합왕에게 쫓겨 절망 가운데 앉아 있던 성경 속의 나무, 그 나무는 아주 우울하게 내게 물었다. 왜 모든 詩는 어둡고 너는 혼자 여기 서 있는가.
까마귀들이 날아왔다. 까마귀들은 은행잎이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그 가느다란 잎맥을 열어보았다. 은행잎은 까옥까옥, 울었다. 거리에 까마귀들이 샛노랗게 내려앉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 걸어가는 행인들의 입에 뿌연 입김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달고 하늘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풍선을 부는 것 같았다. 나는 안개 속이었다. 나는 안개 속에서 나와 마주서서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는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내 몸이 안개에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뭉개진 손을 들어 품에 넣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까마귀가 들어 있었다. 까마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내 입에 떡을 넣어주었다. 나는 눈이 밝아졌다. 나는 일어나 허리띠를 고쳐 매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구가 내 뒤에서 헐레벌떡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안개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이제 너는 스스로 詩가 되어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내게 명령을 내렸다.
7. 가장 최근에 만난 어린 왕자
일곱 살 이후로 소년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소년은 언제나 나를 앞서가 내가 당도하기만을 기다려줄 뿐이었다. 사는 게 늘 술집이었다. 그날 나는 취해 있었고 누군가 내 신발을 바꿔 신고 돌아갔지만 나는 일부러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 누군가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를 두고 나는 그를 지켜보았다. 들키지 않으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절망의 얼굴로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황망히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손에 썩은 생선과 식은 밥덩이를 들고 서서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제 이 한숨뿐인 이야기를 끝낼 시간이다.
나는 소년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도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엔, 내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낡은 신발 한 짝이 들려져 있다.
나는 그것을 詩의 발이라 믿는다. <끝>
[산문] 詩를 찾아가는 時間여행 -『시와정신』2002년 겨울호
[산문] 나의 등단작 이렇게 썼다 -웹진『한반도』
그 무렵, 나는 정말 글만 쓰고 싶었다. 글 쓰는 일 아니면 어디에고 내 초라한 삶의 명목은 없었다. 두 번 병원에 입원했고, 직장을 그만 두었으며, 밤마다 실성한 사람처럼 저수지와 숲과 덤불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시속 120킬로를 밟고 강원도 산길을 쏘다니면서, 핸들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해당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음식물을 담아 버리고 간 검은 비닐봉지처럼, 그 인적 없는 산길에 방치된 채 내 삶도 그렇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떼처럼 지겹게 질문이 몰려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서른 두 살이고, 가장이고, 여행을 좋아하고, 뱃살이 좀 나왔고, 평범한 교사고…… 그러나 내가 애써 회피하듯 내린 결론은 다시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껏 믿어왔던 생에 대한 확신이 뿌리째 흔들렸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반쯤 썩은 해골의 여자, 그 여자의 허망한 웃음은 바로 나의 것이었다. 세상을 향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묻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가. 절망한다는 것은 그렇게 온몸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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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제1회 창비신인상 시인상 당선작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2002년 웹진<한반도>가을호 - http://litopia21.com/hanbando/
전환, 하이퍼, 파괴
― 70년대생 시인론 이경교(시인, 명지전문대 교수)
1. 각성의 章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듯, 2차원의 세계는 곡률(曲率)이 없으나 3차원 공간엔 곡률이 존재한다. 그래서 세 각의 합은 180°가 아니라 그보다 커진다. 여기서 결정론의 환상이 무너진다. 지구는 3차원 공간이며 우주는 다시 4차원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곳에 가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란 형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모든 게 휘어지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들은 지동설 시대에 교육을 받았으며,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라고 배워왔다. 그들은 무슨 무슨 법칙이나 원리를 암기하며 성장해 온 세대이다.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 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 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은 어떤가.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치유하고 극복할 대안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시인들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기성세대처럼 비본질적인 문학의 행태에 안주하지 말고, 끝없는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실험의식으로 무장하길 바란다. 기성의 안일에 오염되지 말고, 새로운 상상력의 집을 지어주기 바란다. 그들의 선배들이 실패한 혁명가로 전락했던 원인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혁신이 없는 전통주의에 물들거나 협소한 지방적 근성에 사로잡히지 말기 바란다.
1.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신작로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었다. 짚가마니 썩은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 아래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 검은 뒤통수에 대고 나는 물었다. 저기,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셨다. 아버지는 구멍, 숭숭 뚫린 메주통, 곰팡이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에서 달이 돋았다. 받아라 네 어미다,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여자를 엮어 내 목에 걸어주셨다, 어머니.
2. 첫사랑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 최금진 「월식」
최금진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품이다. 「월식」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달이 가리워지는 자연의 신비다. 「월식」은 많이 씌어진 소재다. 그 중에서도 김명수의 「월식」(1977)이 돋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금진의 「월식」은 그 시와도 다른 각도의 신화적 상상력을 지닌 시다. 최금진은 신세대적 주술을 즐겨 쓴다. 그만큼 언어운용도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미 독자적이다. 신세대 시인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바로 이런 독자성의 구축이다.
1. 어머니」에서 달은 어머니이며, 월식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독특한 기억이다. 어머니는 과연 죽었을까. 그러나 그건 불분명하다. 달이 여성의 상징인 것은 오래된 관념이다. 그래서 월식과 여자의 죽음을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럼 죽은 여자는 어머니였을까. 그것도 애매하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성이 또한 현대시의 특징이다. ꡐ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ꡑ란 질문은 고도의 메타포어다. 그것은 월식의 종료와 함께 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교 장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성교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징후는 문맥 속에 치밀하게 삽입되어 있다. ꡐ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ꡑ 있는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건 바로 여근 속에 흡입된 남근이미지다. 달에 의해 삼켜졌던 아버지가 뱉아지는 순간은 월식의 종료 시점이며, 그것은 죽었던 어머니의 부활 시점이다. ꡐ받아라 네 어미다ꡑ가 그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지구의 대치이며, 어머니는 달과 동일시 된다. 더구나 ꡐ썩은 냄새, 메주, 곰팡이ꡑ의 냄새가 환기하는 성적인 무드는 「2.첫사랑」으로 계속 연장된다.
「2.첫사랑」에서 월식은 화자의 성적 욕망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1.어머니」에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동일시다. 그것은 달밤에 이루어진 ꡐ수음ꡑ에 대한 연상이다. 그 연상이란 행위하고 싶은 욕구와 수음으로 끝나버린 체험 사이에 달처럼 떠있다. 수음 순간의 몰입을 ꡐ깜깜해졌다ꡑ고 말한 것은 달이 곧 여성이며, 여성을 ꡐ집어삼켰ꡑ기 때문이다. 그것이 월식의 어둠이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성욕이란 일종의 살해의식인 셈이다. 그러나 달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곧 배설의 순간, 내가 그런 것처럼 달 또한 제빛을 회복한다. ꡐ내 몸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ꡑ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ꡐ석유냄새ꡑ와 ꡐ꽃물드는 밤ꡑ이란 배설의 기억이며, 월식에 대한 뜻밖의 해석이기도 하다. 드라마적 구성과 상징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이채롭거니와, 감각적인 해석은 그의 뛰어난 자질이다. 「고흐와 함께하는 달빛 감상」에서 ꡐ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ꡑ이라거나 ꡐ비릿한 석양ꡑ이라고 말한 것도 모두 이런 자질의 산물이다.
3. 주변인들
이제 우리는 시와 시의 생산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태도들이 그것들의 환경을 제공한 특정한 형식의 정보테크놀로지와 시적 기억의 테크놀로지에서 산출되었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그 시대 문화적 바탕에 기대어 읽고 쓰며 사유하는 주변인들인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 것은 상황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감지하였으며 주변인적 숙명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정보의 테크놀로지는 일깨운다. 현대 물리학의 한 정점에서 타자중심적 사고, 곧 혼돈이론과 만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시가 나가야 할 방향도 여기서 찾아진다. 나를 앞세울 때 시는 이야기로 전락하며, 장황한 설명으로 퇴행한다. 따라서 말만 많아진다. 그래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허하거나 공소한 넋두리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결정론의 허울만 남게 되는 셈이다. 미래의 시는 선형성이 아니라 다선형성을 지향해야 한다. 진리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변을 주목해야 하며, 타자중심적 세계관을 배워야 한다. 더 이상 환상은 실재의 반개념이 아니라, 실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자각하자. 시적 상상력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우주, 지하핵이나 바다밑을 향하여 뻗어나가야 한다. 시의 형식과 내용도 다채로우며 자유분방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유형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독자나 평론가의 구미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과거와 전혀 다른 실험의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에게 이 점을 당부하고 싶다.
4. 주문들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관계없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몫은 역시 젊은 세대의 시인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혁명 이전의 세대를 추종할 명분이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요구해선 안 된다. 이미 전 세기와 구별되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진행중인가.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건만 문학만은 언제나 유유자적이다. 하지만 전대의 사유에 머물기엔 한 세기가 너무 길다. 아니다. 일 년도 너무 길다. 여러분 스스로 새시대적 이념을 창조하라. 창조적 파괴란 빠를수록 좋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파괴다. 아직도 전시대의 문턱에 안주하거나, 그 시대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새로운 세대의 시인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핍박하거나 억누를 권리가 없는 것처럼 젊은 시인들 역시 그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할 이유가 없다. 시는 설명과 이해의 수순이 아니라, 수용과 감응의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상상력이 그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하더라도 기성세대여,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새롭지 못한 걸 나무라자. 우리에겐 신인을 제대로 알아보는 ꡐ백락ꡑ이 필요한지 모른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형식적인 칭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 새 세대 시인들의 전향적 자각 여부에 우리 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02년<문학과창작>7월호
[기사] 창작과비평 웹진 인터뷰 - <웹진>2001년 겨울호
글 작성 시각 : 2002.12.05 21:22:09
1. 이 시대에 왜 문학을 하는가? 하필 이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나는 이 시대와 세상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관심도 흥미도 느끼지 않는다. 때문에 문학을 나의 '삶' 이상을 능가하는 어떤 가치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지 않다. 세상에서의 나의 삶은 평범하며 진부하고 통속적인 것이다. 고로 나의 글쓰기는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며,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진 의미 없는 버릇일 뿐이다, 라는 정도로 밝혀두는 게 세상에 대한 나의 자존심이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에는 무슨 거창한 이유가 없다.
2. 자신에게 있어 '창비'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와 상징을 갖는가?
나는 90학번이다. 민중과 노동해방의 거대담론에 대한 갈등보다는 문화와 풍습 등의 자질구레한 사회적 속박과 그릇된 관념과의 마찰 같은 것들과 부딪히며 사는 세대이다. '창비'가 어떤 사회적인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창비'가 아주 유명한 문학잡지라는 쪽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솔직했지만 속물이라는 비난은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적고 싶다.
3. 꼭 글을 써야겠다고 작정하게 된 계기는?
첫사랑에 실패하고 반드시 글을 써서 그녀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 후로도 내 결심에 더 단단한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알고 보면 8할이 열등감이다.
4. 글을 쓰면서 가장 심하게 울었던 적은 언제, 왜인가?
이 세상에 나 혼자 있고 결국 누구와도 하나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누구도 몰라주는 글을 계속 써야만 하는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내겐 글쓰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았고 뭔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 잔뜩 안고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까지 출구는 하나도 없으며, 내게 글쓰기란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의 반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즈음에 나는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5.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가? 있다면 누구이고, 왜 좋아하는가?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다. 그의 작품들에선 방황과 고독의 냄새가 난다. 이교도적이면서도 세상을 포용하는 그의 글들을 읽고 난 후엔 나는 한동안 열병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접점을 읽어냈고, 내가 살아온 생에 한없는 연민과 용서로 따뜻한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 시를 썼다. 내가 발견한 유일한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집이었다. 내가 본받고자 했던 시인들의 작품엔 내가 좋아하는, 내 경험과 삶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고, 나는 그 시인들의 시적인 형식까지도 익히고 싶었다.
김기택, 이정록 시인들의 시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직하고 성실하다. 장석남 시인의 시는 좀 순한 면이 있지만 가장 시답다. 한때는 기형도 시인도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시엔 눈물이 너무 많아서 세 번 정도 통독했을 때 나는 너무 지쳐버렸다. 송재학 시인과 송찬호 시인들의 시도 좋아했다.
6. 글쓰기와 명망욕(名望慾)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믿고 싶진 않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명망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나는 이미 이 점에 대해선 일단 포기했다. 좋은 글을 많이 써서 오래 살아남는 작가가 되고 싶을 뿐이다.
7. 앞으로 다가올 시대(그것이 무엇이건)에 문학의 영역과 역할은 어떻게 변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시나 소설로 통하던 '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난 '문학적'인 것들이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시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다양한 영역에서의 작은 부분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성서의 표현을 빌자면, 문학 아닌 것이 문학의 자리에 선 것을 보거든 문학의 끝이 가까이 왔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의 역할과 힘이 줄어들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한다.
8. 수많은 신인들이 유행가수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분명히 등단은 어렵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등단하고 난 후의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나도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애써 문학이 내 삶의 전부라는 것을 숨기며 표정 없이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9. 문학과 생계(生計)는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경우를 중심으로 솔직히 답해주기 바란다.
올 5월에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않는 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게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문학을 위해서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학을 하면서 생긴 갖가지 비관적인 생각들과 피곤함들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다. 문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비로소 내 객기에도 명목이 설 것이라고 중얼거려본다
10. 한 달에 보통 몇 권의 책을 사나? 최근 사서 읽은 책 중에서 한 권을 꼽으면?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는 사색과 명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 알기 때문이다. 나는 정기구독 잡지 빼고, 한 달에 2-3권 정도 산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어떨 땐 한 달에 한 권 읽기에도 벅찰 만큼 괴롭고 우울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진열된 상처의 서재들을 믿는다. 최근엔 문학잡지를 두 권 읽었고, 시집을 세 권 읽었는데, 그중 두 권은 내가 샀지만 굳이 추천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11. 시인의 답변에서는 위악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만큼 문학의 길은 빛의 성채가 아닌, 험난하고 우울한 길이라는 자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요즘 시단의 경향이 정신보다 포즈에, 언어의 탁마(琢磨)보다 수사(修辭)에 치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신인들이 등단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기성 문단의 풍토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좌절한 적은 없었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시 속의 생각이나 내용이 어려워야지, 시의 외형을 이루는 표현이나 문장이 어려워서 해득이 안 되는 시는 엄밀히 말하면 시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新人이 무슨 노인네 생각을 갖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걱정이다. 새롭고 낯설고 어렵고 기발한 수사와 거기다 세상의 이정표가 될 만한 가치관과 감동을 동시에 품고 있는 시라면 얼마나 좋을까. 겉만 화려한 시에 대한 반성이랄지 오히려 최근엔 화려한 장식의 포즈를 걷어낸 시들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시들에선 고통스런 성년식을 거쳐온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신인들이 등단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기성 문단의 눈치를 보는 건 아마도 지독히도 많은 낙선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왜 부족한가에 대한 답은 이미 시인이 된 공인된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데서 찾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작품을 모범답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더 곤혹스런 것은 일단 등단하고 난 후 기성문단에 대한 자신의 처세술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부끄럼이 많고 사람이 좀 덜 된 나는 등단 전부터 이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누구는 나더러 유머감각을 배우라 했다. 참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좌절이 맞았다.
대숲으로 가다
- 1996년
눈을 감으면 보였다 병원 근처 대나무 숲,
또 밤이 오면 눈발이 대나무에 달라붙었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간호사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대나무에 달라붙어 옹이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칼날 같이 빛나던 빙판길에서
어머니는 울었다 거리가 온통 병실이구나,
마구 자빠지는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고
아침의 빛다발 속에서 아무것도 부활하지 않았다
환자복에 가죽점퍼 걸치고 버스를 타면
금강의 물빛이 달려들었다
대청호가 여기서 멀지 않은데… 그 해 겨울,
대나무를 깎아서 竹刀를 만들었지만 간호사가 자꾸만
빼앗아갔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날카롭게 빛나는
주사바늘 끝에서 아침 빛다발이 쏟아졌다
또 밤이 오면 눈발이 침대에까지 닿았다
窓門을 닫지 말아요, 나는 금강으로 가야해요,
대숲의 바람소리를 병원에 부려놓으면 의사는
나보다 작아졌다 작아져서 흰 알약이 되었다 어머니,
나는 詩人이 되야 해요, 책갈피를 견디지 못한 종이가
침대 밑으로 쏟아지면 어머니는 종이들을 내 몸에
덮어주었다 네가 입을 옷이란다,
또 밤이 오면 바람 부는 대숲으로 갔다
대나무는 스스로 칼이 되고 있었다
- 『시현실』2003년 봄호
나무 물고기
차창룡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가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창자를 꺼내고 허공을 넣으니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입에 문 여의주 때문에 나무는
날마다 두들겨 맞는다
여의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도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나갔지만
시집 <나무 물고기>에서
발자국
박주택
우리가 혹시, 저 길의 어디쯤에서
서로의 安否를 묻는다더라도 그것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하지 말자
걸음이 더뎌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발자국이 먼지에
덮이고 밤길 또한 숨을 열지 않을 때
하나 둘씩 꺼져 가는 상점의 불빛에 눈망울이 긁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의 여린 어깨 위로 나리는
빗방울들이여, 자정의 너머에 바구니는 잠에 밀려와
立看板 아래에서 젖고 시절에 버림받은 노래 한 곡절만이
용케 웃음에 가득 차 있다 혹시,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여 죽음을 다루는 솜씨만 늘고
허공을 더듬는 눈동자에게서 빛을 빼앗아
서로의 잠 어디쯤에 보태더라도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太古로부터 발자국들이
오로지 파멸로 떠밀려 오고 침묵에서 자란
것들이 생의 입구에서부터 웃자라
은신처마다를 가득 메운 채 탄생만을 축복하고 있으므로
2002년 <시와 시학> 겨울호
자명한 산책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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