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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보
1908년(1세) 5월 20일 경북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 68번지에서 백내유(白乃酉)와 이내동(李內東)의 1남 1 녀 둘째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무잠(武簪), 호적 이름은 무동(戊東)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 이웃 고을 경산군에서 영천으로 옮겨와 포목점과 잡화상, 현대식 정미소를 운영했다.
1913년(6세)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천자문을 다 배웠으나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려운 글을 읽으면 명이 짧 아 빨리 죽는다며 아버지가 더 이상 공부를 못하게 했다.
1918년(11세) 집에서 50여 미터 거리에 영천공립보통학교가 있었으나 11세까지 건강 문제로 학교에 다 니지 못한 채 집에 이모부 김 씨를 독선생으로 두고 한학을 배우며 영천 향교에도 나갔다.
1919년(12세) 5월 1일 영천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했다. 학적부 이름은 무잠(武簪)이었다. 이때부터 호적 이름과 학적부 이름은 한번도 일치하지 않고 달랐다. 이 해 가을에 소학 한 권을 다 외웠다.
1920년(13세) 9월 1일 대구 신명여학교(현 종로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적부 이름 신애(信愛), 출생년도 가 1907년으로 되어 있다. 이때 아버지 백내유 주소가 대구였고 직업은 ‘곡물상’이었다.
1921년(14세) 10월 신명여학교 중퇴. 학적부는 중퇴 이유를 ‘건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 백신애는 어떤 글이나 이력서에서조차 신명여학교에 다닌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1922년(15세) 12월 1일 영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학했다. 학적부 이름은 술동(戌東). 학적부와 졸업 대장은 있어도 졸업사진에는 백신애가 없어 실제로 학교에 다니지 않은 유령학생이었을 것 으로 보인다. 4학년 편입학은 경북도립사범학교에 신설된 단기강습과 입학을 위한 편법이었 다. 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필 이력서에는 학적부와 달리 1923년 3월 1일 입학, 3월 25일 졸업, 4월 1일 경북도립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3년(16세) 3월 18일 이름 술동(戌東), 출생연도는 1906년으로 호적을 정정했다. 호적을 고친 이유 는 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연령 조건 때문이었다. 영천공립보통학교 수업연한 4년 과정 을 졸업했다. 당시 남학생은 6년제였으나 여학생만 4년제였다. 경북도립사범학교 강습과 입 학(학적부)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달성군 내당동에 차린 ‘백내유정미소’를 증축해 조양정 미소로 바꾸었다.
1924년17(세) 경북도립사범학교 졸업. 경북도립사범학교 출신 여성교사 1호로 모교인 영천공립보통학교 에 부임했다. 이 무렵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영천에서 비밀리에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1925년(18세) 경산 자인공립보통학교로 옮겨갔다. 이때, 첫사랑 남자인 대구 조선민보(朝鮮民報) 기자 이 우백(李雨栢)을 만난다. 1924년 1월 10일 ≪동아일보≫를 보면 이우백이 문예잡지 ≪이상 촌≫과 유아잡지 ≪보(步)≫ 창간호를 1월 30일에 발행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국역 고 등경찰요사 ‘제5장 출판 경찰 편 제2절’에도 이 부분이 보이는데, “1924년에는 이우백(영 천)이 ≪보≫ 및 ≪잣나무≫(뒤에 ≪이상촌(理想村)≫으로 개제改題)”라는 짧은 글이 보인 다. ≪동아일보≫가 발간 예고 기사를 썼다면 일제경찰은 발행 과정을 지켜본 10년 후에 고등경찰요사에 기록했으니 먼저 ≪잣나무≫로 발행되었다가 ≪이상촌≫으로 제호를 바꾼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고등경찰요사는 조선총독부 경상북도경찰부가 일선 경찰서에 참 고자료로 배포하기 위해 1934년에 비밀리에 발간한 책이다. 일제경찰이 작성한 자료에 의 하면 이우백은 신문기자가 되는 정통 코스인 도쿄신문학원을 다닌 영천 출신이었다. ≪보 ≫와 ≪이상촌≫ 같은 잡지 발간 이력으로 보아 1924년 7월 창간호를 낸 ≪부녀지 광(婦女之光)≫에 소설 「꿈의 결혼」을 발표한 이우백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백신애와 이우백은 영천에서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는지는 모르나 두 사람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우백이 음력 10월 12일(양력 11월 27일) 결혼한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동아일보≫(1925. 11. 6)에 실렸던 것이다. 신부될 사람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온 경주공립보통 학교 훈도로 있는 이경분(李敬分)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이경분은 1922년부터 경주공립보통 학교에 근무했기 때문에 김윤식 시인이 작성한 백신애연보에서 ‘경북공립보통학교 여성교사 1호’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우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보≫와 ≪대구일일신문 ≫, 해방 후에는 ≪합동신문≫에서 ≪대구시보≫를 거쳐 ≪매일신문≫으로 옮겨갔다.
12월 방학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19세) 1월 5일 조선여성동우회와 문화소년회가 주최한 서울 청진동 회중교회에서 어머니와 소 녀들 대상으로 ‘가정생활 개선’ 주제 강연을 했다. 이날 ≪신여성≫ 주간 소파 방 정환도 함 께 강연을 했다. 1월 10일 조선여성동우회 간친회에서 감상담 발표 사실이 ≪시대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사실이 학교와 당국에 알려져 권고사직을 당했다. 2월 20일 천도회관에서 경 성여자청년동맹 1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허가를 받아내고 대회를 성사시켰다. 3월 3일 제2회 정기총회를 통하여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인천 병인청년회 주최 학술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으나 연사가 요주의 인물이란 이유로 금지되었 다. 8월 14일 시흥군 북면 노량진청년회 주최로 ‘여성해방과 경제조건을’ 주제로 강연하고, 16일 화일(和一)청년회가 주최한 남녀정사(情死) 비판 강연회에서 ‘정사는 자본주의 산물’이 라는 주제 강연을 마지막으로 1927년 10월 28일까지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사라진다.
6월에는 오빠 백기호가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영천에서 검거되어 종로경찰서로 압송 되었다.
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에 의하면 원산에서 웅기를 거쳐 가는 2천 톤급 상선 화물칸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검거되어 게베우극동본 부 유치장에 감금, 한 달 후 추방당했다. 두만강국경 농가에서 한 달여 동안 머물다 ‘쿠세레 야 김’이란 가짜여권을 구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59년에 「백신애여사의 전기」(씨 뿌린 사람들)를 쓴 이윤수와 현대한국문학사탐방을 쓴 김용성은 백신애가 시베리아 벌판에 쓰 러졌는데 동사 직전에 한 노파가 구해주었다는 사촌여동생 증언을 싣고 있다. 블라디보스토 크로 떠난 목적이 밝혀지지 않았듯이 시베리아 벌판을 방랑한 이유 또한 알 수가 없다.
1927년(20세) 이 무렵 아버지 백내유는 대구역 근처에 미창(米倉)을 여럿 두고 경북 각지에서 쌀을 사들 여 일본으로 내다파는 거대미곡상이 되어 큐슈 출신 첩에게 홀치기공장도 차려준 신흥재력 가였다. 이때, 백내유는 장차 사위가 될 동래은행원 출신 이근채를 홀치기공장 관리인으로 데려왔다. 10월 오빠 백기호가 사임한 영천청년동맹 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7 일 영천청년동맹 주최 러시아 혁명 기념강연회에서 강연을 했고, 11월 14일 경동선 연안에 산재한 각 신문잡지 기자 조직인 경동기자동맹 제3회 경동기자대회를 조양각(朝陽閣) 누상 에서 개최했을 때 서기로 지명되었다.
1928년(21세) 1월 신간회 영천지회 정치문화 상무, 영천청년동맹 회관에 차린 여자야학 교사. 5월 근우 회 영천지회 설립준비위원으로 임시의장을 맡았고, 6월 2일 근우회 영천지회 설립, 7월 영 천청년동맹 벽(壁)신문 편집 책임자, 7월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8월 경북청년도연맹 여자부장으로 16일에 경북 청도 신간회 주최 ‘부인과 사회’ 강 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상사 명령’이란 이유로 청도경찰서가 금지시켰다.
1929년(22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필명 박계화)가 1등 당선.
1930년(23세) 봄에 영천을 떠나 경산군 안심면 용계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윤수가 쓴 「백신애여사의 전기」 에는 백신애가 일본에서 연극 흥행에 실패한 시점에서 “그지음 고향소식은 영천서 반야월로 이주 하여 과수원을 경영”하는 것으로 쓰고 있어 이사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백신애는 3 월이나 혹은 그 이전에 도쿄로 가 영화배우가 되어있었다. 그 사실은 백신애를 모델로 쓴 「 봉청화」 작가 이시카와 다쓰조가 산문 「한반도와 나」에서 “배우모집 선전에 이끌려 조선에서 건 너온 젊은 여배우가 있었다. 조성희(照星姬)라는 예명은 오카다 사부로가 붙여주었다고 나 는 들었다.(…)나와 조성희 사이의 교유는 반년 정도 이어졌다.(…)이윽고 그녀의 고향에서 내 앞으로 편지가 왔다. 주소는 경상북도 경산군 반야월이란 곳으로, 그녀의 본명은 백신애 라고 쓰여 있었다. 영화잡지 ≪키네마순보≫(1930. 4. 21) 363호에 의하면 백신애는 ‘조성 희’라는 예명으로 ‘일본키네마제작주식회사’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키네마순보≫(1930. 5. 11) 365호에는 일본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작품 「모던 마담」에 출연한 스틸사진과 그 이 름이 보인다. 일본키네마는 두 번째 작품 「모던 마담」 제작 후 파산했기 때문에 백신애 배우 활동은 「모던 마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해에 일본대학 예술과에 다녔다고 하지만 기 록은 찾을 수 없다.
1931년(24세) 아버지가 대구 달성로에 견직물 공장과 달성공원 앞에 삼화(三和)제면공장을 세웠다(이 건물 은 훗날 이병철이 사들여 삼성상회가 된다). 빨리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봄에 귀국했 으나 배가 수십 척이나 되는 부산 해운업자 아들과 결혼하라는 강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 다. 식모, 세탁부 같은 일을 하면서 삼월회, 근우회 동경지회에도 관여했다.
1932년(25세) 가을에 귀국, 이근채와 약혼했다.
1933년(26세) 3월 17일 대구 공회당에서 이근채와 현대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 규슈(九州)와 일광(日 光)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1934년(27세) 단편 「꺼래이」를 ≪신여성≫ 1월호와 2,3월 합본호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 작했다. 4월 ≪신가정≫이 주최해 조양회관에서 열린 ‘대구여성좌담회’에 참석했다. 6월 ≪신여 성≫ 생전에 쓴 단 한 편의 시 「붉은 신호등」을 발표했다. 7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판에 산문 「인텔리 여성의 집」을 발표(4∼6일)했는데 약력에 “노지(露支 : 중국과 러시아 국경) 국 경에서 GPU(러시아 비밀경찰)의 총탄을 받았다.(…)외국어 흑인 교수의 비서에서 일본 키네의 인기 여우와 파란에 찬 반생을 가진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백 신애가 영화 「모던 마담」에 출연한 여자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11월 ≪개벽≫ 속간호에 「적빈」을 발표했다.
1935년(28세) ≪소년중앙≫ 1월호에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를 발표했다. ≪소년중앙≫ 4~7월호까지 장 편 소년소설 「푸른 하늘」을 연재했으나 2회와 3회분이 수록된 잡지가 존재하지 않아 작품은 찾을 수 없다. 12월 병 치료와 온천요양을 위해 규슈로 간 아버지 백내유가 사망해 규슈대학병 원으로 갔다.
1936년(29세) 1월 ≪삼천리≫ 주최 여류작가좌담회에 참석했으나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고 박화성과 두 사 람은 기념촬영도 하지 않았다. 4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판 ‘반도여류작가집’에 「악부자」가 번역되어 6회에 걸쳐 소개되었다. 10월 9일 「꺼래이」를 개작했다(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에 수록). 12월 반야월 괴전 마을 과수원에 새 집을 지어 이사하고 손수 농사도 지었다.
1937년(30세) 4월 대구에서 동인지 ≪문원(文園)≫이 발간되는데 창간호가 존재하지 않아 백신애도 여기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월에 펴낸 2집에 산문 「초화」를 발표한다. 동인은 신삼수, 이윤 기, 정명헌, 김학준, 함성운, 손원도, 최병문 등 문학청년들이었다.
1938년(31세) 1월 현대조선문학전집에 개작한 「적빈」이 수록되었다. 5월 남편과 별거, 친정으로 돌아오면 서 8월까지 1년 만에 단편소설 「광인수기」, 「소독부」, 「일여인」을 연이어 발표한다. 9월 25일 위장병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 무렵, 반야월 1천 그루 사과밭을 팔아 상선 한 척 을 사들였는데 어느 날 그 상선 행방이 묘연해지자 중국으로 간 오빠 백기호가 오래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 오빠를 찾아 칭다오로 가 20여일이나 행방을 좇다가 10월 15일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서 오빠를 만나고 소설가 강노향도 만나면서 한 보름 정도 머물다가 10월 말 경에 귀국했다. 11월 「여행은 길동무」(1939년)에서 밝힌 니키 히토리(본명 이노우에 고타로井 上豪太郞)와 이 무렵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니키 히토리는 조선공연을 온 ‘신협극단’배우 겸 경영선전부장이었다. ‘신쓰키지극단’과 ‘도쿄 좌익극장’ 등 프롤레타리아연극을 표방하는 극단에 서 배우로 활약한 뒤 신협극단의 발전에 진력했지만, 조선 흥행 후 1939년에 장티푸스로 31살 에 목숨을 잃었다. 장혁주의 춘향전 조선공연 때 신협극단 단원들과 동행했던 작가 아키타 우자쿠 일기에 의하면 장혁주도 참석한 11월 7일과 8일 대구 연회(宴會)에서, 9일에는 경주로 가는 기차가 반야월역에 정차했을 때 흰 옷 차림으로 사과 세 바구니를 들고 온 백신애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았다고 했다.
1939년(32세) 1월 「채색교」를 개작하고 「식인(食因)」을 「호도(糊途)」로 개작해 수록한 여류단편걸작집이 발간되고, 일본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서울로 갔다. 어머니와 오빠 부탁으로 조카 공부를 돕 기 위해서였다. 2월 8일 소설가 유진오 집에서 니키 히토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키타 우작쿠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키타 우작쿠는 「조선여류작가와 니키 히토리」를 써서 영화잡지 ≪테아트로テアトロ≫ 3월호에 발표했는데 그 글에서 백신애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3월 노천 명 시인 집 방 한 칸을 얻어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라듐치료를 받았다. 이때 시인 백석과 평론 가 백철을 만나 기생집도 드나들며 피를 토하면서까지 술을 마셨다. 죽기로 작정한 것 같은 폭 음에 백석과 백철이 제동을 걸고 글쓰기를 강요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때 「어느 유언초 (抄)」(≪매일신보≫)를 발표했다. 4월 「봄 햇살을 맞으며」,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청도기행 」, 「혼명에서」를 써내자 백석과 백철이 들고 가 자신이 근무하는 ≪여성≫과 ≪조광≫, ≪국민 신보≫에 발표해주었다. 5월 오빠 백기호가 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백신애가 함께 기거하도록 총독부 근처에 집을 사서 노천명 시인 집에서 나왔다. 5월 말경에 병이 악화되어 경성제국대학 병원 13실호에 입원했으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약 먹는 것을 거부하며 몇 차례나 자살 을 시도했지만 간병하던 오빠 때문에 실패했다. 이때 백석과 백철이 자주 문병을 갔고 소설가 이석훈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도 다녀갔다. 6월 23일 오후 5시 경제국대학병원에서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당일 화장을 하고 서울 어느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 리 산 40번지 중산골에 있는 친정 가족묘지 아버지 옆에 안장했다.
1970년대 초, 집안에 계속되는 불행(전쟁 때 오빠 백기호 사망, 두 질녀 월북, 1950년대 조 카 한근 사망 등)의 원인은 가족묘지에 ‘출가외인이 안장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풍수와 점쟁이 들 말 때문에 파묘되고 말았다. 소설가 김용성이 1973년에 펴낸 한국현대문학사탐방에서 친 정 질부가 병원 침대 가에는 원고뭉치가 꽤 많은 분량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누가 출판을 하겠 다고 가지고 간 뒤 유고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 그 원고는 소설 「아름다운 노을」과 산문 「여행 은 길동무」였다. 그 원고는 백철이 보관하면서 백석과 의논해 작품집을 발간하기로 오빠 백기 호와 약속했으나 끝내 작품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여행은 길동무」는 백철이 일본어로 번역해 자신이 근무하는 ≪국민신보≫ 7월 2일 호에 발표했다. 중편소설 「아름다운 노을」은 백석이 가 져갔으나 만주로 떠나는 바람에 그 자리를 이어받은 계용묵이 주선해 ≪여성≫ 1939년 11월 호부터 1940년 2월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백석이 요청해서 백철이 쓴 추모 글 「요절 기(夭折記)」가 ≪여성≫ 8월호에 실렸다.
그 후, 1951년 5월 22일 전쟁 중에 죽순시인구락부가 주최하고 시내 각 일간신문이 후원하는 백신애추모회가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시인 구상, 백기만, 유치환, 이설주, 소설가 장덕조 등이 백신애에 대한 발언을 했다. 1986년 30여 년 동안이나 백신애 생애와 작품을 추적해 온 시인 김윤식이 최초의 작가론이면서 작품론인 「백신애연구抄」를 ≪경산문학≫에 발표하고 이듬해 꺼래이가 발간되면서 백신애를 한국문학사에 복원시켰다. 2007년 영천에서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문학비를 세우고 문학상을 제정했으며, 백신애길이 명명되었다. 2009년부터 백신애 선집, 산문집 슈크림, 백신애문학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을 엮은 백신애연구에 이어 방랑자 백신애 추적보고서, 원본 백신애전집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