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모습 https://cafe.daum.net/an386/NEMB/338
수궁동 옛지명 및 유래
● 수렁 고개
구로구 궁동의 옛 자연 마을인 성짓골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부천시 여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수룬고개라고도 하였다. 수룬고개라 불리는데 이는 고개와 인접한 구로구 궁동의 수룬마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동남쪽 기슭 골짜기에 절터가 있었다. 성짓골은 궁동 어귀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양천구 신월제4동으로 통하는 길인 궁동길과 수렁고갯길이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수렁고개는 한남정맥의 한 줄기인 와룡산[137.3m]의 서쪽 산등성이에 위치해 도당산[95.5m]과 두리봉[78.5m]을 연결하고 있다. 수렁고개가 있는 와룡산은 구로구 궁동의 진산(鎭山)으로 그 좌우로 뻗어 있는 산등성이가 마치 용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와룡산이라 한다.
● 댓골 고개
구로구 궁동에서 동북쪽 양천구 신정제3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댓골은 큰 고을이라는 뜻인데 죽동이라고도 한다. 죽동은 대나무가 없었으며, 큰골→대동→댓골→죽동(竹洞)으로 변한 것으로 짐작되며 예전에는 여우고개라고도 불렀다.
● 성짓골
궁동 어귀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북쪽 양천구 신정3동으로 통하는 길인 궁동길과 절터 서북쪽 부천시 여월동으로 넘어가는 길인 수렁고개길과 양천구 신월동으로 넘어가는 댓골고개와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권씨 문중묘가 있는 고추 모양의 언덕 동쪽 깊숙한 사타구니 쯤에 자리잡고 있다.
● 이명래고약 공장 터
이명래 선생의 막내딸이자 제헌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선생의 부인인 이용재 여사가 1970년대 이명래 고약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출수 있도록 기초를 다듬은 장소이자 직접 고약을 만들었던 공장 터(구로구 궁동 산1-3)이다. 이명래 고약은 1906년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서양약학을 배운 이명래 선생이 개발한 종기치료제다. 50대 이상이라면 어린 시절 곪은 상처에 이명래 고약을 성냥불에 녹여 붙인 기억을 가진 이가 적지 않다.
● 궁터
궁동저수지 서남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산 밑 마을 일대이다. 원각사가 있는 쪽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 끝에 높이 87.5m와 86.3m의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두 봉우리의 동쪽 기슭에 있다. 이 마을 북쪽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바라다 보이는데 이 문중묘 너머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일대가 궁터이다.
궁터 표지석이 학교 정문에 있는데 본래는 학교 본관 앞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구로구 궁동에 있던 마을로서, 선조의 7녀인 정선옹주가 부평부에 속해 있던 이곳 안동 권씨 권대임(權大任)에게 시집을 오게 되자 선조가 이 일대를 정선옹주에게 사패지로 내려주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부마와 옹주가 사는 집이 크고 으리으리하였기 때문에 궁궐 같은 집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궁마을・궁동이라고 도 하였다
● 정선옹주묘역
정선옹주 묘역(안동권씨 묘역). 제일위에(6열)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무덤. 그 아래에(5열)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城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 권대임의 아래에(4열)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 그 아래에(3열) 권대임의 장남 권진(權?)과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무덤. 권진의 묘 아래에(2열) 권진의 장남 현감(縣監) 권이경(權以經)의 묘가 그 아래에(1열 제일아래) 권이경(權以經)의 장남 군수(郡守) 권세태(權世泰)의 묘가 있다.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었다. 이는 권대임이 왕의 부마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부자간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신중의 묘는 위의 아버지묘가 있는 아들쪽을 향하지 않고 북동쪽으로 방향을 조금 틀었다. 묘역 아래 남쪽 끝에 권협의 신도비가 있고 동쪽에 권대임의 신도비가 있다. 궁동저수지가 있는 언저리를 비석거리라고 한다.
● 벼락구덩이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본래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으나 저수지 위 좌측에 상징적 의미로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식음 불가 판정을 받아 먹을 수는 없다.
● 궁동저수지생태공원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하여 왜정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콸콸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시대가 흘러 궁동 일대 경작지가 많아지면서 물 부족이 나타나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롯해 이웃 오류동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지리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띄게 되었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화되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 근교에서 저수지가 있는 곳은 인근 항동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서울의 외진 시골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산업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적지 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과 온갖 도시형 주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고, 저수지는 농업용수의 기능이 사라지고 자연히 낚시터로 변모해 가게 되어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다.
2000년 이후 주택과 상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쪽에 도로(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새로운 도로(오리로)를 추진하게 되었다. 도로를 건설하면서 자연환경과 저수지를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되어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져 반토막이 되어 버린 저수지는 그 기능이 반감되어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낚시터로도 더 이상 운영하기가 어렵게 되어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변해갔다.
2003년 9월 저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2006년12월 28일부터 다음해 연말까지 1, 2차 사업으로 궁동생태공원이 되었다. 동쪽을 1구역 서쪽을 2구역으로 구분,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고 또한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은 개발로 다시 옛 궁동저수지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더불어 친환경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7년 궁동 45번지 일대를 시작으로 총 3차에 걸쳐 4년 6개월여 만인 2008년 4월 완공되었다.
도로와 궁동어린이도서관이 생기기 전에는 1구역 동쪽에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으며 궁동저수지 2구역에는 생태습지원이 2013년 10월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해 12월 완성을 보았는데, 면적은 3,379평방미터로 생태습지와 여러 습지 식물들과 돌탑, 쉼터 등이 있으며 제14회 환경부 자연환경대상(2014년)을 수상하였고 2016년 서울대공원에서 야생생물Ⅱ등급인 멸종위기 종 금개구리 100마리를 방사하여 현재 서식 중이다.
● 뱀일골
뱀일은 말 그대로 뱀과 관계가 있으며 일이란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궁동 산1-6번지 일대를 말하며 지형이 뱀처럼 길게 뻗어 있을 뿐만 아니라 뱀이 많이 살았다는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 불당골(북당골)
궁동저수지생태공원 동쪽 관음사 북쪽 지점에 있다. 옛날에 佛堂(불당)이 있었다 해서 불당골로 불렀는데 그것이 변해서 북당골이라고 부른다.
● 음지 말(陰村)
구로구 궁동 정선옹주묘 동쪽 청룡산 아래 음지말. 이곳이 전의이(全義李)씨 집성촌. 1360년대부터 이곳에 터를 잡아 수궁동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가문이다. 현재 전의이씨 가문이 25가구가 산다. 전의이씨는 고려의 개국 공신인 이도(李棹)가 시조다. 태조가 이름을 하사하고 전의후에 봉했다. 초명은 치(齒)이며, 후삼국시대에 충청도 전의현(全義縣,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일대) 출신의 호족으로 전의현 이성산 아래에서 거주했다. 후손들이 이도를 시조로 모시고 전의를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년)때인 1360년 이도의 11세손 이정간, 이문간 형제가 궁동 산10번지 일대 약 30만 평의 사패지를 하사받은 것이 궁동 집성촌의 시작이었다.
● 양지 말(陽村)
현재 덕성교회 부근과 원각사 아랫마을로 안동 권씨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예전에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때의 문신인 길창군 권협(1542∼1617)이 최초로 구로구 궁동에 정착하여 안동권씨 가문이 400여년 넘게 살고 있다. 묘는 궁동저수지서쪽 안동권씨 묘역(정선옹주 묘)에 있다.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 재위1567~1608)의 7녀인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해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현재 서서울생활과학고)를 사패지로 받아 궁궐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옹주궁, 부마궁이라고 불렸다. 궁은 6.25때 불타 사라졌고 서서울생활과학고 정문안에 궁골 표지석이 있다. 정선옹주와 그의 부군인 길성군 권대임의 무덤은 궁동저수지의 서쪽 안동권씨 묘역에 자리잡고 있다. 궁동을 중심으로 안동권씨 집성촌이 형성돼, 현재까지 17대손이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사패지의넓이에 대해서는 "사방 10리" 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 비치는 곳 모두"라고도 하는데 사패지는 주로 경기도에 많았다.
● 유진오 별장 터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대한민국의 법학자, 소설가, 교육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헌법초안의 제2조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이다. 현행헌법 제1조 제2항에 해당한다.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고,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으나 다시 사별하여, 1956년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부인 이용재는 이명래고약을 개발한 이명래의 딸이다.
궁동생태공원에서 정선옹주묘역이 있는 좌측으로 올라가면 원각사 절이 나오는데 절에 가기 전 중간 우측 산기슭에 유진오 별장 터(서울 구로구 궁동 산1-13)가 있다. 1989년 화재가 일어나 별장은 전소 되었다.
● 도당 고개
구로구 온수동 텃골에서 궁동 삭새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온수동 산12-1, 산4-1번지 일대 현 온수힐스테이트(온수연립주택단지)의 가압장 부근의 산에 도당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도당째고개・도당산이라고도 하였으며, 길마처럼 갑자기 꼬부라졌다 하여 길마간고개・길마산고개라고도 하였으며, 궁동 옛 자연마을인 삭새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삭새고개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에는 도당나무가 있었고 나무 아래에서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를 지냈다
도당산의 높이는 102m이고 현대힐스테이트(구 온수연립) 가압장 자리가 정상에 해당된다. 도당산은 전주 이씨의 선영이다.
● 삭새고개
구로구 온수동 텃골에서 궁동 삭새로 넘어가던 고개로서, 높이 186m의 두리봉 능선에 해당된다. 이 능선은 온수골부터 시작한 멱고개와도 연결되며, 능선 비탈 기슭에는 1977년부터 조성된 온수연립주택단지(현 온수힐스테이트)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온수초등학교를 지나 우신중, 세종과학고를 잇는 고개를 말한다.
● 갈매(葛馬)
옛날 갈대가 많이 났다는 골짜기이다. 현재의 현대힐스테이트(구 온수연립단지)가 있는 골짜기를 갈골이라고도 한다. 갈골은 현대힐스테이트 입구에서 우신 중 후문을 지나 정진학교가 있는 곳까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주위에 갈대가 무성했던 골짜기로 힐스테이트로 가는 좌측에는 고구마, 밀밭이었으며 우측에는 계단식 논이 있었다. 현재는 개천을 복개하여 버스가 다니는 도로로 사용 중이다.
● 텃골
조선왕조 세종(世宗)임금의 열셋째 왕자인 밀성군(密城君)의 차자(次子) 춘성군(春城君)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왕조 초 왕세자이었던 의안대군(宜安大君)이 후사 없이 세자로 별세하자 춘성군(春城君)을 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하였다. 그 후 춘성군의 5세손인 이양(李暘)이 1640년대 말(仁祖 말,孝宗 초)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전주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온수동 터골은 전주이씨의 집성촌으로. 조선 제4대 세종의 열셋째 왕자인 밀성군(密城君)의 차자(次子) 춘성군(春城君)의 5세손인 이양(李暘)이 1640년대 말(제16대 인조仁祖 말)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전주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이양의 묘가 터골 뒤 도당산 아래 있으며 매년 시제를 지낸다고 한다.
● 길마간 고개
온수골에서 텃골으,ㄹ지나 궁동 삭새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로서, 길마(수레를 끌 때 마소의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처럼 갑자기 꼬부라져서 유래된 이름이다. 길마산고개라고도 하였다.
● 온수골
구로구 온수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 물이 나왔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온수꿀이라고도 하였다. 온수역에서 북쪽 방향으로 깊이 들어가 온수동 76번지에서 93번지에 이르는 곳이 온수골의 중심부인데 지금의 초운교회 부근에 해당된다. 온천수에 대한 기록으로 세종실록에 조선 제4대 세종 20년(1438년)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종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어 찾아보라고 했던 바, 그 곳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을 아니하므로 부평부사를 문책하고 부평도호부를 폐하여 현으로 강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전설과 기록에 근거하여 온천수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온천 시추작업을 하였다고 하나 맥을 찾지는 못하였다. 일제시대 1920년 온천을 찾기 위한 작업들을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후 1969년, 1970년, 1985년 계속된 탐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2000년 7월 이러한 근거가 있어 교통안전공단이 부지를 조성하면서 온천수맥을 검사하였는데 탐사한 결과 온천 부존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떻게 온천지대가 형성돼 있는지 그 효험이 얼마큼인지는 정밀조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온수골은 본래 제주고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250년 전에 온수골에 자리 잡았다. 현재 제주고씨 6가구가 대를 잇고 있으며 아직 온수골 마차길 주변에 고가(古家)도 몇 채 공가로 남아있었다.
● 시루봉(벽산/동그란산)
지금 온수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 옛날에는 동그란산 또는 벽산이라 하였는데,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약91m이며, 철길옆이라해서 철마산(鐵馬山)이라고도 한다. 산등성에는 진달래가 아래쪽에는 밤나무가 많았다.
● 능안
능안은 왕릉이 있는 골짜기의 안이라는 뜻인데, 온수동 약수터가 있는 골짜기 일대는 신라말 고려 초에 호족들이 정착해 살면서 능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 때에 능안의 고분을 파본 결과 석곽과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이 중 중요한 유물은 총독부에서 가져가고 나머지는 발굴 참여자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 개건너(해방촌)
온수골 동쪽 곧 텃골 동쪽 개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텃골 앞으로 지나는 경인선 너머 개울 건너가 되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 대흥빌라 동쪽 성원연립 옆이 된다.
● 안산
터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터골 앞 경인선건너에 있는 길쭉한 산인데 높이는 약 58m 이며 부천시 역곡동과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은 동진 성원 대흥빌라가 들어서있다.
● 턱거리
궁골 마을의 어귀이다. 궁동의 동부로 연세중앙교회 앞에서 온수동 세풍운수주식회사 버스종점까지 경인선 철길과 나란한 버스길인 궁동길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 수룬
궁동의 옛 이름인 ‘술은’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술은’이라는 말은 이곳이 조선시대에 부평군 수탄면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수탄을 ‘술탄’이라 했고 이 ‘술탄’이 다시 ‘술은’ ‘수룬’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수궁동주민센터 부근과 아랫마을을 말하며 전의(全義) 이씨 후손과 안동(安東) 권씨 후손들이 많이 살았다
● 주막거리
주막거리는 마을 이름이자 거리 이름으로, 개항 이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점심을 먹는 휴게소로 항상 붐볐다. 흥선대원군도 1855년 이곳을 지나면서 쉬어 갔다 한다. 지금은 주막거리 객사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은 없어지고, 객사터임을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주막거리 옆 작은 능선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마을을 안오류골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 뒷산에는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정(柳順汀)의 묘가 있다.
● 오류골 참외
1975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이 일대는 오류골 참외 생산지였다. 오류골 참외는 옛날 궁중에 진상하던 과일로, 부천(소사)의 복숭아, 시흥의 수박, 성환의 배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과일로 꼽혔다 오류골 참외가 유명한 이유는 인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울의 마포 쪽에서 인분을 싣고와서 이곳에 거름으로 이용되어 참외를 재배하였기 때문에 특히 인분으로 재배되는 참외는 당도가 높아 달고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오류동 텃골
구로구 오류동 오류초등학교 서쪽 14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텃굴・기곡이라고도 하였으며, 오류동의 가장 안쪽에 해당되므로 안동네라고도 하였다. 텃골은 버들이 마을 안쪽 동네로 안동네 또는 기곡(基谷)이라고도 하는데 오류초등학교 서쪽 오류동 14번지 일대에 위치한 오류동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또 이 마을에는 밤이면 부엉이가 나와 울었다는 부엉바위, 오류초등학교 동쪽에 범처럼 생긴 범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주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 독장이고개(덕정)
경인국도변에 있고 고개로 옛날 옹기를 구워서 팔던 독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고 지형 지물이 많이 변동되어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 동이점골
옛날에 좋은 흙이 나서 동이(항아리)를 구웠다는 곳이다.
● 수궁골에 집성촌이 만들어진 순서
전의이씨(1360년대) --> 안동권씨(1580년대) --> 전주이씨(1640년대) --> 제주고씨(1750년대)
● 연세중앙교회 자리터
▶ 원호병원
1953년 2월 23일 대구제 2호 병원 창설(대통령령 제65호)되어 1957년 4월 22일 에는 궁동 턱거리 동쪽 산기슭에 구병원으로 이전 했다. 그해 9월 25일 구호병원으로 개칭했다. 1962년 5월 12일 원호병원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1969년 8월 20일 국립원호병원으로 개칭 하였다. 1974년 8월 1일 종합병원으로 승격하였다. 이 원호병원에서는 상이군경 치료를 담당하였는데 근방의 공기가 맑을 뿐만 아니라 공해가 적고 조용하여 병원으로서는 적격지였다. 그러나 시설이 낡고 노후 된 원호병원을 1980년 6월 17일 강동구 둔촌동에 착공하여 1983년 8월 16일 완공하여 옮겨갔다. 1985년 1월 1일 한국보훈병원으로 개칭하고 2001년 1월 서울보훈병원 으로 명칭 변경하였으며 2011년 9월 6일 중앙보훈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신축 개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교통안전공단
병원이 이전하고 이곳에 1981년3월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89-1 설립하여 교통안전공단이 들어섰다. 여기서는 자동차의 안전검사와 함께 우수기업체의 안전관리자들을 대상으로 안전관리에 관한 교육도 했다.
1981년 3월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89-1 개원, 그해 7월 1일 교통안전진흥공단을 설립
1995년 3월 1일 교통관광 TV 개국하고 그해 4월 5일 교통안전공단으로 명칭 변경했다.
2000년 3월 21일 교통TV를 매각하고 2001년 5월 3일 공단을 매각하여 2002년 6월 경기도 안산으로 이전하였다. 2014년 4월에 김천 혁신도시(경상북도 김천시 혁신6로 17)로 이전
2018년 1월 교통안전공단에서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연세중앙교회 이전
교회 설립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337-17(1986년 3월15일)
성전 이전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1990년 9월 3일)
노량진 성전 이전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2동 273-7(1992년 6월 28일)
궁동 성전 이전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89-1(2002년 6월 6일)
● 온수공단(영등포 기계관리공단)
온수동 100-26번지에는 영등포기계관리공단(永登浦機械工業管理工團)이 있다. 세칭 온수공단(溫水工團)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총 면적은 온수동 128필지와 함께 부천시 역곡동 24번지의 32필지를 포함하여 155,541㎡이다. 1968년 3월 12일 사단법인 영등포공업인협회(永登浦工業人協會)에서 기계공업단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가 1970년 4월 20일에는 동추진위원회를 해체하고 대신 영등포기계공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0일에 사단법인 영등포기계공단을 상공부 허가 제161호로 인가받았다. 1973년 8월 3일에는 상공부 공고 제7511호로 기계공업 및 비철금속(非鐵金屬) 적격단지로 지정을 받았으며 동년 8월 24일에는 일본 도야마현(當山縣)의 기계공업센터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어 다음 해 5월 9일에는 숭전대학교와 산학협동 결연을 맺었고 1975년 12월 31일에는 법률 제2843호로 공업단지관리법에 의한 공업단지로 지정받았다.
1977년 5월 8일 공단 새마을중학교를 설립하여 이듬 해 3월 1일 개교함과 동시에 야간 특별학교도 문을 열었다. 1978년 산공부 허가250호로 영등포기계공업단지 관리공단으로 개편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1989년 10월말 현재 입주업체는 146개소로 조립금속이 143개소, 석유화학 1개소, 제지 1개소, 섬유 1개소이고 전체 종업원 수는 약 4,000명이다.
수차례에 걸쳐서 개발 계획을 세우고 발표하였으나 조율이 되지 않아 무산되어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 온수힐스테이트 자리터
▶ 1977년 4월에 당시 공사비 12억 2천만원으로 온수동 우신중 · 고등학교 북쪽 그린벨트지역에 인접한 온수동 산12-1번지와 산 4-1번지 일대 9,865평의 대지 위에 12평형 4가구 연립식의 151동 604가구의 온수연립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길이 생겼다. 상가, 점포, 어린이놀이터, 파출소 등의 부대시설과 함께 2차분 160가구의 연립주택을 건립하여 무허가 철거민에게 우선 입주권을 분양하여 동년 9월부터 입주하자 경인선과 나란한 온수연립주택단지까지 버스길이 났다.
▶ 2007년 7월 6일에 현대건설이 착공하여 2009년 9월에 온수힐스테이트를 준공하고 2009년 10월에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본래 숲으로 둘러 싸여 자연환경이 매주 좋아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너구리 딱따구리 맹꽁이 꿩 등이 서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