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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남기고 싶은 이야기ㅡ
우리 대한구세군본영에서
성실과 충직으로 일생을 보낸 두 고결한 근로자여!
金 素 仁
서설(prologue)이다. 한국구세군변천사, 이는 1908년 국제규모 구세군교단이 우리나라 첫 상륙 이래 그 기본과업요체의 양대 수레바퀴 강령 그대로 복음전파 및 구제봉사를 베풂에 있어서 갖가지 험난한 가시덤불 헤쳐 온 궤적낱낱을 가리킴이다. 한데, 그 숨 막히고도 괴로운 질곡의 행적뒤안길 거기엔 사관에 한정된 눈물어린 헌신사연만이 아니라, 단순병사⋅군우로써 마디마디 맺힌 애환스토리(哀歡story)가 마치 낙과(落果)인양 떨어져 커다란 산더미처럼 이뤄 잔뜩 쌓아져서 있다. 불가분리의 거대한 밑거름현상이거니 싶다.
무릇, 이로써 우리구세군은 여느 여러 교단보다 단연코 탁월한 특색을 지녔다고 강력히 주창하게 된다. 사실인즉슨, 본 구세군이 다른 교단에 비해 완연히 돋보이고 뛰어난 그 실례를 든다면 모든 사관 그리고 온 군우가 언제나 일체감으로 호흡하며 함께 어우러져 하늘나라확충건설과업에 맹렬기세를 떨쳐 이바지 한다는 대목이다. 물론, 그 원칙고수 시행 때문에 자주 힘겨운 다방면 걸친 인성교육 이수와 고난도의 신앙생활훈련을 치러야 함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규례통과관문이다. 그 까닭에 아무나 함부로 흉내 내거나 따르기 만만찮은 대상 <전인구원 군사/全人救援 軍事>, 즉 공칭(公稱) <구세군/救世軍> 또는 원어(原語)로선 <The Salvation Army>이다.
이젠, 위에서 이미 내걸은바 명제 그대로 본론에 든다. 군말 없는 직행이다. 일찍 나는 유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한 건물서, 한 지붕아래서, 한 일터서 사뭇 신실한 근로직원 두 인물과 퍽 친숙하게 지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두 인물 모두 너무 우연스레 같은 교회, 즉 한 영문(營門)의 출중한 부교(副校)이면서 그 영문건물관리에 종사하였다. 또한, 구세군대한본영(救世軍大韓本營)의 근로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 두 부교는 본영에 들어온 이래. 남들처럼 마냥 기분 들뜰 주말이건, 희희낙락으로 즐길 고유 명절이건, 전혀 아랑곳 않은 채 다만 본영과 영문만을 오가면서 미화작업 및 여러 가지 잡역에 진력 다 쏟았을 따름이었다. 허나, 그 반복적 노역활동은 어느 간섭으로 말미암아 마지못해 택정한 일상사가 아니었다. 각기 자의적 결정에 의해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이 게다 하물며 평생 통해 지속된 고결한 생애주기, 곧 라이프사이클(life cycle) 그 자체활동이었다.
바로, 그러한 그 두 주인공과 나는 무슨 숙명처럼 무려 근30년 동안이나 무척 가까이 유대를 지속하면서 지냈거니와, 그
중의 한사람이 강학신(姜學信/ 1908.5.6 - 1979.8.15.) 부교, 그였다, 전라북도 전주가 그의 고향이자 역시 그곳 전주
영문(全州營門)출신이었다. 그런 그와 나와는 어떤 연계성이 있느냐 하면, 엉뚱하나마 이해편리위해 좀 멀리 에둘러
부연(敷衍), 본지(本旨)의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한다.
사실, 나는 진즉에 그 사관(士官)이란 신분명색은 내게 도무지 가당찮을뿐더러 대단히 분수 넘친 직분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토록 나에겐 뻔뻔한 데가 있었고 작금에도 여전하다는 고백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서울시가지
한복판 그것도 광화문(光化門)께 쯤의 신문로(新門路) 가로변 소재 본영별관(本營別館) 거기에 부설된 구세군사회부
(救世軍社會部)라고 일컫는 중차대한 분야 그 일터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야, 총책 사회부서기관(社會部書記官)은
지금까지 누구이든 두고두고 마음에 대단히 존경해 마지않는바 양풍원(梁豊源/ 1908. 7.16 - 1996. 3.9.) 정령보(正
領補) 그이이고, 나란 존재는 매우 평범한 일개 하급말단 사관자격(士官資格)으로써 종사하였다.
그런데 그 구세군사회부란 일터는, 곧 본영조직기구가운데 한몫인 구제시행 전담부서(專擔部署)였다. 주로 관여하는
기본업무분야를 대별하면, 구세군산하 각종 복지시설운영집행, 구세군영동병원(救世軍永同病院/대지 1만여 평과 병동
건평 4백 남짓의 3층/준 종합의료시설/병상 약 50개 규모)감리, 자선냄비모금운동진행 일체사무와 그 관장(管掌)은
물론, 도탄지고(塗炭之苦)에 이른 뭇 영세민하며 노숙자(露宿者)에게 구호물자제공 및 무료급식(우유에 옥수수가
루 넣은 죽)공여, 행려병약자(行旅病弱者)에게 귀향여비보조(歸鄕旅費補助)지급 그리고 불시 재난발생 현장엔 여느
기관보다 가장 맨 먼저 뛰어가 펄럭이는 혈화기치 밑에서 각양각색 도움 적절히 베풂을 모토(motto)로 삼는 등등의
가지 수를 꼽게 된다.
그러한즉, 구세군본영사회부라고 명명된 그 부서야말로 당연히 예사롭지 않은 특수하고도 가장 성서적인 소중한 일터
였다. 그 뒷받침의 한 표본적 실례를 더 들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그 사회부건물 뒷마당 공간, 그 자린 공휴일 제외하
고 대개 오전 9시께면 이른바 불우인생 그들끼리 불문율(不文律)로 은연중에 만남의 약속장소로써 활용하는 데였다.
그 연유로 말미암아 구세군사회부 일터 주변은 항상 극빈생계에 몹시 부대끼고 질고로 극히 찌든 하나하나의 당사자가
모여 마침내 군상(群像)을 이뤄 시끌벅적댔다. 물론 그들 무리는 한통속 진배없이 남루옷차림뿐만 아니라 한결같게
초췌한 모양새유지로써 참 가여운 현상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또, 그런 그들은 언제이든 거의 궁상스러운 모습 그대로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모여 앉아 피차 암담한 팔자신세타령 늘어놓는 게 상례였다, 더런, 희망도 기대도 다 잃고 우수사려절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겨우 한 두 개비의 끽연으로 먼 허공 한 녘에다만 멀거니 시선 멈춰두는 애처로운 인생들 처지를 자주 목견되던 장소도 똑같은 곡절 사무치게 스민 거기 마당 버드나무 밑 주변이었다. 그런가하면, 구제대상선정여부와 관련된 상담차례가 되기까지 지루한 시간보내기를 무던히 참고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그들 무리의 눈물겨운 동태 역시 구세군사회부 일터지대가 아니라 치면 과연 어디서 쉽사리 전개될 장면이었겠는가, 싶다. 혹은, 당장 끼니 못 채우고 굶주린 동냥아치의 서러운 하소연에 연민의 정을 한껏 느끼며 간청사정 그대로 일일이 다 귀담아 들어주는 그 선의(善意) 또한 구세군사회부 일터로써 본디 지닌 압권적 진면모가 아닐까보냐 -.
사실인즉슨, 나는 그 시절 그 당시 그 사회부일터를 통해서, 날이면 날마다 내처 슬프고 애처로운 <인생극장> 연속드라마 관람인양 착각하고 빗나간 관념에 엉켜 하루일과를 거반 마음 아프게 보내었다. 그것은, 하도 안타깝고 불쌍하고 섧고 게다가 병든 처지인 요구호자들, 환언하면 오로지 불행하게 헝클어진 인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근무였던 그 까닭에서 비롯된 추상적 착시현상이었다. 다시 부가설명하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기계적으로 일관되게 불우인생 그들만 한정하여 줄곧 마주하거나, 접촉하거나 그리고 대담하거나하며 종사타보니 저절로 부조리현실정황과 사유개념구역(思惟槪念區域)사이를 명료하게 분간 못한 채 혼돈에 빠졌었는데, 그 대가지불결산(代價支拂決算)이었다. 정녕, 그러했다. 그와 관련, 단마디로 심경을 표출하면 그만큼 애끓듯 한 일과를 보냈다는 증좌(證左)이겠다. 그토록 내 집무실내에서조차 늘 비애의 기류가 무겁게 감도는 판세였으니까.
즉, 그렇잖아도 구제대상 적부심사 필수 면접 상담과정 거치고자 하여 사회부일터의 출입구를 향해 기다라니 줄지어 늘어선 가여운 무리 그들을 얼핏 두루 헤아려보노라면, 자못 애처롭고 동정어린 생각이 한꺼번에 와락 솟구쳐 올라, 여간 괴롭고 울적해지는 게 아니었다. 막상 그러한데 가뜩이나 실제적으로서 요구호자 그들 저마다 상담진행도중, 홀연 눈시울 붉히다가 끝내 그만 울음 터뜨려 쏟아진 그 눈물로 좌석주변 판자마룻바닥 여기저기 마구 흩뿌려 얼룩지도록 적셔놓게 된 애절한 사연서린 현장을 직접 지켜본 나로선 더더욱 극도의 비감에 한참 잠길 수밖엔 다른 도리 없었다.
바로 그와 같은 마음 쓰라린 광경이 빚어진 경우, 언제나 지척서 제꺽 목견한 다름 아닌 강학신 부교, 그가 얼른 민첩한 동작으로서 용산 미8군으로부터 선사해준 탁자위의 그 티슈(tissue)를 집어가져다 피상담자, 즉 요구호자 남녀막론하고 신속하게 건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도록 배려했다. 그러면서 연속 흐느껴 재게 들먹이는 어깨를 극진히 다독이며 복받친 감정을 달래주곤 하였다. 그리고 으레 친절히 인근의 버스 혹은 전차(電車)정류장에 동행, 배웅하기도 했다. 가급적, 구세군사회부일터에 찾아온 모든 요구호자 전원에게 따뜻하고 정다운 손길을 고루 내밀었던 것이다. 누구나 쉽지 않은 강학신 부교, 그의 선행일면이었다.
나는 그처럼 감동적이고 갸륵하기 그지없는 강학신 부교, 그의 일거수일투족 행실을 수시 직접 눈여겨보게 되면서, 나 자신을 냉철하게 비판대위에 세워봤다. 그다음, 무엇보다 먼저 내 인간됨됨이부터 매섭게 따지며 분석했다. 아울러, 구세군사관일진댄 필수불가결의 함축된 소명과제(召命課題)가 되는 동시 일생동안 두고두고 붙매여 놓고 수칙해야만할 절대적 조령(條令)인 사랑, 희생, 봉사, 인고(忍苦), 그리고 선행(善行)이라는 지극히 눈부시고도 숭고한 그 다섯모기둥 어휘개념들을 빈 노트여백에다 몇 번씩 낙서하듯 끼적이어댔다. 그리고는 그 어구문자 밑에 좀 굵직하고도 선명하게 언더라인(underline)을 쳤다. 내 딴엔 전적으로 꾸밈없는 순수하고 소박한 희구(希求)의 획을 그은 표시였다. 여태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실로, 나로 하여금 그러한 일련의 특이반사작용행위를 일으키게 한 근원인자(根源因子)는 분명히 강학신 부교, 그였다. 그렇기에 강학신 부교, 그라고 하면, 대뜸 나의 인성교육훈장(人性敎育訓長)이라는 그런 좋은 이미지(image)가 내 뇌리에 선뜻 스치게 마련이었다. 그 정도로 깊은 의미를 강학신 부교, 그에게 늘 부여하고 지냈다. 그만큼 강학신 부교, 그는 보기드믄 참된 크리스천(Christian)으로 내 마음에 꽉 찼었다, 더구나 그는 구세군부교로써의 성서적 <애린여기사상/愛隣如己思想>이 매우 투철하게 무르익은 행동파모델(行動派model)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이웃사랑윤리실천사례와 그 결말에 따른 함수관계(函數關係)이음매 고리엔 어김없이 강학신 부교, 그가 꼭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 눈부시게 부상(浮上)하였다.
사실상, 그럴진댄 강학신 부교, 그가 구세군대한본영(救世軍大韓本營)과 지금의 중구정동(中區貞洞) 제일영문(第一營門) 전신인 서대문제1영문(西大門第一營門)서 근무하게 된 그 연유배경에 관해 간략히 짚어낸다. 우선, 그 시기는, 일제강압통치 20년 정도 지난 때, 새파란 청년기 무렵에 한 외국인 선교사관(宣敎士官) 주선으로 구세군본영과 서대문제1영문서 첫 근무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본영과 서대문제1영문은 동일건물에 들어있었다. 그 위치는 오늘의 종로구 신문로 1가 소재 <구세군회관/救世軍會館> 그 자리 고대로가 된다. 건축양식구조는 일목요연하게 적색연와(赤色煉瓦)의 2층 양옥이었는데, 맨 하층은 영문으로써 활용하고, 2층을 본영업무용도로 쓰여 졌다. 그러니까, 강학신 부교, 그가 바로 그 건물 전체 층의 관리인이자 근로직원으로 종사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지상2층 본영건물엔 출입용 계단이 두 군데 시공, 설비돼있었다. 그중 한곳은,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나 전차가 분주히 오가고 시민들 또한 자주 지나다니는 큰 가로변인접 정문어귀 그 안쪽의 현관과 직결된 계단을 지목하게 된다. 다른 나머지는 뒷문층계, 즉 후문통로계단을 가리킴이었다. 본래 그 계단은, 사실상 비상구이면서 2층 본영의 각 사무실 및 휴게실로부터 곧장 뒤꼍마당과 맞바로 이어지는 유일통로이기도 하였다. 그에 더하여 그곳은, 본영별관(本營別館) 하층의 사회부부서와 구세군전용물매점(救世軍專用物賣店)인 당시의 상업부(商業部/이후, 공급부로 개칭), 무료급식소 그리고 물품보관 겸 청소도구 곳간에 드나들자면 반드시 거처야만 하는 일종의 터널(tunnel)구조식 계단이었다.
한데, 그 계단은 또한 본영건물 뒤편도로를 두고 쓸모 있게 자주 나다니는 지름길 구실 몫도 톡톡히 됐었다. 그러하다보니, 매일 본영상근사관(本營常勤士官)은 물론, 대다수 일반내왕인조차 편리상 부지불식간에 그 본영건물정면의 현관계단보다는 후문통로계단을 썩 더 빈번하게 활용하였다. 그러한 상관관계가 내재한 그 후문통로목조계단은, 가파른 경사도(傾斜度)를 다소 완만하게 하려고 전체 계단길이의 중간쯤에 이르러 기억자형으로 꺾은 층계참(層階站) 구조 상태에서 다시 하층바닥에까지 엇비스듬히 기운층층계였다.
하지만 그 계단 폭이 불과 90센티(centimeter)한도여서 워낙 비좁아 자유분방 통행엔 몹시 거북하고 또 무척 불편스러운 데가 많았다. 더욱 그럴 것은, 그 계단이용 중에 어떤 상대와 맞닥치면 피차 어긋나게 비켜주어야 했기 때문에서였다. 그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특히 강학신 부교, 그의 직무수행에 있어선 한결 더 난처한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해서, 강학신 부교, 그가 남모른 심적 고충 치르며 애로사항 견뎌낸 그 전반적 흔적상황을 곧이곧대로 도식화(圖式化)하여 만약 그래프(graph)로써 나타낸다고 치면, 고대인도(古代印度)서 전래된 특정교훈 설화인 <상상(想像)의 산(山>부분 관련 이야깃거리 말마따나 <수미산/須彌山/ Sumeru>정상높이에 당장 이를 것이었다. 그 만큼의 어마어마한 잣대로 들이댐은, 강학신 부교, 그가 오로지 머리앓이와 난제거리 심하게 쌓이고 쌓인 사각지대(死角地帶) 외곬업무분야서 종사해오기 한 세기의 절반에 다다른 연륜(年輪), 곧 장장 50년간이라는 기본적 세월흐름숫값만 그냥 헤아려도 과연 그러하겠다고 누구든지 넉넉히 공감할 겻으로 기대해서이다. 강학신 부교, 그가 본영에서 땀 흘리며 첫 근무한 이래로부터 기산(起算)하여 퇴임시점까지의 그 광음여류(光陰如流)를 대충 어림잡은 수치(數値)에 근거 두었다.
자못, 그처럼 길고도긴 햇수의 세월을 헤쳐 오면서도 늘 되풀이로 곤경에 처한 그 근본요인은 강학신 부교, 그 스스로가 저지른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에서 비롯된 과보(果報)는 천만 아니었다. 강학신 부교, 그에게 부과된 직무수행 그자체가 그리될 수밖에 없었고 또 막다른 구석진 곳에 몰아붙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통과인 셈이었다. 이는, 시대구분 따라 다소 다른 내역부류로 바뀌지만, 가령, 추운 겨울이 임박하면 으레 본영 각 사무실마다 난방스토브(暖房stove)용 나무장작단 들여놓기, 아니면 힘겨운 연탄반입 및 불타고 남은 잿더미처리 그리고 연료기름통 운반 뿐더러 일체의 청소도구하며 허드렛물 무겁게 퍼 담긴 바깨쓰(bucket), 때가 덕지덕지 낀 쓰레받기와 빗자루, 걸레 따위 등등을 가지고서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아주 갑자기 다른 사람과 정면으로 만나게 되어 곤란한 지경이나 어려운 입장에 처해질 경우엔 다른 수습이란 있을 리 만무고, 단지 노상 그러해왔던 그 몸가짐을 다시금 재현하는 그 방도가 최선의 타개책이었다.
즉, 강학신 부교, 그의 그 최선책 몸가짐이란 도시 무엇이겠나. 강학신 부교, 그가 그처럼 잡다하고 너절하기 그지없는 상용물을 한 아름 잔뜩 안거나 든 채 그 계단을 통과하던 도중에 황차 내방객 아니면 제복(uniform) 입은 구세군사관과 우연찮게 서로 마주쳤을 적이면 괴연 어떻게 하였을까, 그 예상동작이란 짐작하고도 남는 터다. 그 때의 강학신 부교, 그는 분명히 상대방에게 너무 송구하여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계단측면 벽체에 바짝 기대서서 모걸음으로 옮겨갔을 성부르다.
짐짓, 가상극해설(假想劇解說)이 아니다. 실지 그랬었다고 친다. 그러니, 강학신 부교, 그는 너무 자연스레 인습에 젖어서 그런가, 아니면 매우 익숙해져서인가, 이무튼 평시에도 약간 옆으로 걷는 걸음새를 취했었다. 그래, 주일이면 옆구리에 성경⋅찬송가 고이 끼고 소속영문 향해 느릿느릿 모걸음으로 걷는 보행새 보인 강학신 부교, 그의 인물됨은 내 눈빛 앞엔 너무 감동적이었고, 이 세상 어떤 성스러운 반열에든 어느 주인공보다 훨씬 더 정결한 품위 갖춘 삶의 원형으로서 일약 강렬하게 다가왔었다.
진정, 강학신 부교, 그는 우리구세군대한본영의 어느 누구보다 가장 오랫동안 걸쳐 고된 근로업무분야서 모범직원으로 꾸준하고도 부지런하게 삼백예순날 주야장천 근면하였다 그뿐더러, 가욋일까지 송두리째 도맡아 혼신의 노력 다하여 바라지했었다. 그러다보니 남들처럼 온 집안과 더불어 저녁 한 끼니일망정 아늑하고 오붓하게 함께 보낼 그 여유로운 겨를마저 미처 챙기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을 아끼지 않은 고귀한 정신 발휘의 주인공 강학신 부교야말로 소위 논리학상의 빈사(賓辭), 곧 속성개념(屬性槪念)으로써 판단하면 그는 구세군대한본영에의 가히 전설적 <대부/代父>였다라고 서슴없이 칭술(稱述)케 된다.
다음, 구세군의 또 다른 한 부교마저 소개한다. 그 주인공의 태생지는 저 멀고 먼 북녘의 동토(凍土) 함경남도 함흥만(咸興灣) 연안에 자리 잡은 함흥시(咸興市)로써, 한국전쟁당시 목숨 내걸고 남하한, 곧 실향민가운데 한사람인 이명상(李明祥/ 1922.8.15. - 2013.3.22.)부교, 그를 가리킴이다. 그러한 그가 서울중구정동(中區貞洞)의 구세군대한본영 근로직원에 충원보임(充員補任)되어 근무하기 시작한 그 연대는 휴전성립 직후 무렵이었다. 원래, 구세군대한본영건물 그 위치에 관해선, 진즉 언급한바와 같다.
그런즉, 그 구세군본영진(救世軍大韓本營陣)이 시내 중구정동지역으로 이전케 된 그 근본소치와 경위배경을 간략하나마 부연해 둔다. 이해 돕는 측면애서다. 그러니까, 60여 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막상 휴전협정체결에 이르자, 남단(南端) 곳곳서 피난살이 지내다 즉시 본거지 서울 찾아 속속 돌아온 수많은 시민, 또 이북으로부터 넘어온 엄청난 난민으로 하여 서울은 금세 생기의 맥박이 뛰었다. 그리고 인적이 끊겨 일명 유령도시 그처럼 흉측했던 시가지일체 모양새가 재빨리 원상 활기차게 복구되면서, 수도규모(首都規模)다운 서울면모로 갖춰지고 있었다. 하긴 좀 몰상식한 언급이지만, 동족상잔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게다 천추의 민족적 원한까지 두텁게 응어리진 어두운 그림자 장막은 나라 안 여기저기 여전히 그대로 드리워진 채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모처럼 수복된 서울은 예외인 듯이 어느새 여느 지방시읍면(市邑面)보다 비교적 쉬이 복구기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인구수치가 매일 대폭 증가일로추세로 파악되는가하면 대중매체 역시 그 뒷받침관련 실례를 들어 자주 보도하였다.
물론, 그 두드러진 현상에 발걸음 맞춘 수도서울은 각 중요기능분야마다 생기왕성하게 꿈틀대며 계속 개벽되어 갔다. 바로 그때쯤, 구세군수뇌부측역시 그 희망 요동친 도시발전현상구도와 어울린 복음전파선교 및 구제봉사활동에 관한 새로운 기획수립과 그 실천에 걸맞은 필요성을 매우 절감한 나머지 신문로시대의 비좁은 본영건물서 취급하던 일체업무를 부득이 접고, 결국 중구정동의 구세군사관학교 구내 너른 2층 건물에로 본영기구전반체제(本營機構全般體制)를 옮기도록 조처를 내렸다. 그와 동시 이미 앞서 수차 거명된바 강학신 부교,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신문로 위치의 제1영문, 상업부, 무료급식소, 사회부부서 그리고 새로 설립한 청소년학생 공동기숙, 즉 유스호스탤(youth hostel)수준급 <청학관/靑學舘> 등등 시설서 근무키로 방침 세워 잔류결정 되었다. 그래서 이명상 부교, 그를 중구정동지대 본영의 신규근로직원에 특채하였던 것이다. 그렇기로 나로선, 정동의 중앙회관에서 관례적으로 매주 목요일저녁마다 개최 된 집회 때 간혹 보기는 했으나 그 이명상 부교, 그와는 생소하기만하여 뜨악한 사이로 지냈었다. 단지, 내 출생지가 이명상 부교, 그의 고향 못 미친 함남원산(咸南元山)이었을 따름이고 낯이 매우 서먹하였다.
그 같은 내가 이명상 부교, 그와 본격적으로 갓 수인사(修人事) 나누고 나서 깊이 사귄 시점은, 이른바 장안명소(長安名所)가운데 한곳으로 꼭 등장하기마련인 고색 짙은 풍경과 멋스러운 정취 그득 깃든 데다 더하여 청춘선남선녀연인(靑春善男善女戀人)끼리 산책로이기도한 덕수궁돌담길, 그 끝머리부근 정동(貞洞) 경사도로(傾斜道路) 한옆에 근대유럽건축양식이듯 제법 우아하고도 자못 장중하게 우뚝 세워진 붉은 벽돌건물 구세군사관학교, 거기서 잡티마음 모질게 다스리며 교육받던 생도시절이었다.
그러한데 그 구세군사관학교란, 자칫 의례적으로 얼핏 관찰하면 옛 율법규정에 의한 성막제사장(聖幕祭司長)자질 버금가는 후예양성기관정도(後裔養成機關程度)로써의 상아탑경지구역(象牙塔境地區域) 그쯤이라고 결론내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처럼 단순개념 인식작용과 어설픈 지레짐작동원으로서 짚어낸 평가절하야말로 매우 빗나간 심리학⋅철학용어 지향설(志向說)내지 동기설(動機說)이며 절대 금물이다. 사실상, 이 지구상애서 둘도 더도 아닌 단 한 갈래계열소속 그 국제적 명분 띤 구세군사관학교는 오로지 주 예수그리스도의 정병교육(精兵敎育)이바지에 밤에나 낮에나 간단없이 실천신학 교과과정(敎科課程)하며 인격도야코스(人格陶冶course) 및 필수원칙고비 치르도록 매섭고 본때 나게 가르치기로 이미 정평(定評)이 난 그대로의 성스러운 특수영역이라 하겠다.
바로 그러한 구세군사관학교는 본디부터 그 경영정책 측면에서 국내 여러 신학교와 너무 판이하게 대조적인 사항이 있어 왔다. 그것은, 교내재적생 수효가 다수(多數)이냐 소수(少數)이냐 그따위 집계수치로써, 교육위상 우열의 바로미터(barometer)를 삼지 아니하였다는 그 특이점이었다. 대저, 구세군사관학교로서 입학지망생도(入學志望生徒) 확보는, 세상 뭇 인간구원 위해서라면 모름지기 온몸을 선뜻 불살라 던질 굳건한 소신과 함께 기상(氣像)이 아주 뛰어난 젊은 남녀 엘리트(ѐlite) 인재(人材) 엄선에 초점 맞춰 놔두고, 그 의도적(意圖的) 규정대로 해마다 전국각지 고루고루 거쳐 청약(請約), 공모방식 (公募方式) 따라 채워졌던 것이다. 대단히 엄격성 갖춘 기준제시, 그리고 사뭇 까다로운 절차가 아닐 수 없겠다.
해서, 지지리 못난 나 같은 업신여김의 회색분자(灰色分子)로선 더더욱 올바른 인성평가받기는 글렀었다. 무엇보다, 다각적인 면으로 열성농도(熱誠濃度)가 대단히 결핍하여 신앙의 미숙아(未熟兒)일수밖에 없어 결정적 타격손실을 입었다. 그런데다가 전형적 이단아(異端兒)로 낙인까지 찍힌 만큼, 지나치게 많은 난제와 숱한 우여곡절을 헤치고 나아가야만 됐었다. 그때, 천상천하 초월적 존재, 곧 절대자이며 전능자의 무한창대 헤아림 그늘아래서 결국 그 유수기관에 드디어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혈화깃발 드높이 앞세운 행군대열에 참가, 힘 부치나마 온갖 고된 과정을 근근이 마칠 수 있었다. 그 뒤, 가라면 어서 속히 곧장 가야 되었고, 오라면 한눈팔지 말고 즉각 똑바로 와야만 하는 그 하명에 너무나 잘 길들여져 순명(順命)타보니 부득불 중구정동의 구세군대한본영서 다년간 근무했었다. 신문로의 구세군회관관리직은 차치하고라도 사회부 그 본연의 말단직 전담수행을 비롯하여 청학관, 전장부, 자산부, 편집부 그리고 서기장관실 대정부관련업무(對政府關聯業務)를 무명보필, 성의껏 도왔었다.
그 시절의 우리부부는 사관학교구내 본영사택(本營舍宅) 2층서 지내고, 이명상 부교, 그와 그의 가족은 동건물 1층에 주거하였다. 신문로시대에 있어서도 강학신 부교, 그와 그의 가족은 사회부별관건물 1층에, 우리 동부인 주거는 2층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두 군데 상황이 하나로 이어지는 특수인연이라 치겠다. 즉, 어느 허무맹랑한 외침이나 시답잖은 일갈(一喝)을 듣고 공연스레 들뜨느니, 차라리 강학신 부교 그리고 이명상 부교 모두 한결같게 숨김없이 죄다 드러낸바 그 실생활내면을 근접거리(近接距離)서 착실히 보고 배워둬라 하는 무언의 섭리(攝理)이며 시사(示唆)였지 않았으랴, 여겨졌단 뜻이다. 다름 아닌, 땀과 노력, 견디고 기다림, 도타운 신의(信義), 지칠 줄 모른 꾸준함, 양보의 미덕, 차별두지 않은 시선, 청렴결백. 따뜻한 인정미(人情味),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소탈 근검살림살이 등등 인간존재 그 자체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다.
여기서, 내 딴으로 그 중구정동지역 주거기간에 이명상 부교, 그와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일방 그를 통하여 흠뻑 많은 본보기 터득과 더불어 증험(證驗)을 한 그 사실부터 이야기 거리 삼겠다. 이명상 부교, 그는 늘 본영근무사관 및 일반직원 그렇게 다들 퇴근할 때를 기다리며 으레 홀로 남았다가 그 시간이 마침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1⋅2층에의 각 사무실, 긴 낭하, 화장실 그리고 건물안팎 너른 공간지대 구석구석 미화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벅찬 작업개시과정은 춘하추동 언제나 해넘이 시간대에 진행되었다. 그 까닭에 이명상 부교, 그는 그의 가정서 일정시간에 제대로 석식을 못했다. 항상 그랬다. 우선, 도맡아 책임진 그 미화작업부터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너무 외곬으로 매달린 듯싶은 작업애착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느라고 늦저녁까지 애쓰다가 용케 잠시 틈내어 구내 사택에 얼른 들러 변변찮은 찬과 밥 한술 후딱 뜨고 되돌아와서 일시 미뤄둔 그 일거리를 마저 속행(續行)했으니만큼, 어찌 일반 유복한 가정생활규례에 비견하랴-.
사실인즉, 내 주제꼴에도 너무나 고단한 근무일과(勤務日課)를 치르는 이명상 부교, 그를 깊은 동정심으로써 파악하였다. 딱히 그럴만한 정황단서에 의해서였다. 단순하게 이명상 부교, 그의 일과시간만 들먹여도 논리적 입증이 충분한 노릇이었다. 남들의 출근 때보다 한 시간 앞선 아침 8시 본영도착, 그리곤 늦은 밤9시의 미화작업 마무리, 그래놓고 헤아리면 하루통산 무려 13시간동안 집중 근무하는 셈이었다. 과연 그랬다면 그 업무마감시간대를 어찌 알았느냐고 굳이 물으면 넉넉한 뒷받침 증거를 댄다. 이명상 부교, 그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을 즈음엔 꼭 각 사무실 책걸상 정돈, 창문 단속 그리고 출입문 닫아걸기에서 부득이 발생하기 마련인 진동소음이 새어나왔던 그 실례(實例)가 바로 큰 입증이 된다. 즉, 내 집 서재에서 그 작업종료를 알아차릴 갖가지 낌새의 잡음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통에 아, 이제야 마침내 이명상 부교, 그의 그 작업수고가 마치는 시점이구나 하고선 나는 절로 벽시계를 쳐다보게 되었다. 시침(時針)은 밤 9시경을 가리켰던 것이다. 그 작업종료시점은 대체로 변동이 없었다. 늘 한결같았다.
그런데 그 작업마감 시점은 이명상 부교, 그의 근무상황여건에 맞춰진 타이밍(timing))이었다. 아니, 이명상 부교, 그의 최선 다하는 시분할(時分割/timesharing))택정이었다, 그렇기로서 나는 더 한층 이명상 부교, 그의 그 처지와 관련, 인간적으로 유별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자아내게 됐었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이명상 부교, 그는 흡사 우리나라 옛 봉건시대 한 종갓집의 기구한 노비나 머슴처럼 줄곧 언짢고 꺼림칙한 일처리로 분주 다망했다. 그 충직성은,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명상 부교, 그의 남다른 특징이기도 하였다.
이건, 순전히 내 게으른 탓에서 빚어진 경우이지만, 나도 연중 몇 차례씩은 업무량과다로 밤새껏 근무한바 있었다. 그럴 적이면 으레 이명상 부교, 그는 자신의 일을 부리나케 서둘러 끝내고서 내 잔무처리시간을 덩달아 함께 애써 메워주었다. 그는 외려 나를 몹시 딱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곁에 넌지시 다가와선 설혹 한 닢의 가벼운 종잇장일지언정 맞들어 쥐어주는가 하면 방금 타자해내어 책상머리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수북이 쌓인 문서를 발송지별로 잘 간추리거나 한데모아 철하고, 보관하는데 거들고, 그랬었다. 또, 더러는 내가 심부를 의뢰하면 원근거리 가리지 않음은 물론, 통금시간직전에라도 기어코 뛰어다녀왔다. 그러한 그의 독특성은, 제아무리 고된 노역거리이지만,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척척 마무리 짓는 그 장점이었다.
바로 그러한 그 이명상 부교, 그가 평소 가장 공들여 주력해온 미화부분은 본영건물 및 중앙회관의 모든 창문유리였다. 그 유리 닦기는 매월 2회, 그것도 토요일 오후 두세 시쯤에서 시작하였다. 내방객의 발길이 뚝 끊길 시간대를 염두에 둔 배려였다. 그렇듯 늦게 시작된 그 미화작업은 대개 오밤중 1시경 아니면 2시정도에 이르러 가까스로 끝나졌다. 물론, 환히 밝힌 야간작업등은 어두워지는 초저녁쯤에 지붕처마 밑에다 내걸어놓고서 그 숱한 아래위층 창문유리를 혼자 몸으로 모조리 깨끗하고 말갛게 닦아내었다, 대단히 고생스러운 중노동이었다. 그 탓으로 비교적 자주 부인과 자녀들, 그러니까 집안전체가 번번이 나서서 일심진력 기우려 그 작업을 적극 도왔었다. 그 보람으로 통상 힘들기만 하던 그 작업은 한결 수월하게 풀렸을 뿐더러 능률이 올라 좀 이른 밤에 마치고 그랬었다.
그토록 감탄 연발의 미거활동(美擧活動)은, 오히려 구세군대한본영 울타리 바깥 이웃인 맞은편 길의 당시 경기여고, 가까운 담장너머 덕수초등학교, 또 본영앞뒤 근접주재 미⋅영 대사관관저 그렇게 여러 곳 직원들이 더 잘 눈치 채고 극찬 아끼지 않던 터였다. 그 점에서 특히 이명상 부교, 그와 그의 집안은 어느 누구이든 추종불허 대상이며 우러러본 선망의 가정이었다. 그렇기로서 이명상 부교, 그는 더더욱 자랑삼을 중구정동 제1영문의 한 하사관이었으며, 세월이야 변한들 도시 잊힐 리 만무인 보배스러운 본영근속직원으로 봉사 헌신했다고 이처럼 널리 천명해 둔다. - 대단원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