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패기넘치는 사진가들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 차세대 사진가로 자리매김할 수있도록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갤러리 브레송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습니다.
최현주의 감칠맛나는 글과 더불어 <사진 바깥에서 사진읽기>라는 제명으로 월간 사진예술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동사, 그리고 하나의 명사- 권두현
글. 최 현주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15년 동안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 및 제작팀장을 거쳐 현재 Freelance copywriter로 활동 중. 공저 <워딩의 법칙>(2005년) 및 <두 장의 사진> 출판(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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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다
상상의 크기로 말하자면 인도 사람들을 따라잡기가 여간 쉽지 않은 듯하다. 불가(佛家)의 숫자개념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옷깃 한번 스친 것도 인연이라는 말은 금방 수긍할 만한데, 단 한 번의 스침이 500겁의 인연이 축적된 결과라 하니 도대체 500겁의 시간이 얼마 만큼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1겁(劫)이라는 단위를 알아본즉슨, 놀랍다.
‘우주가 한 번 시작되어 파괴되고 다시 천지개벽을 할 때까지의 시간’이라는 상징적인 시간을 설정해놓고 나서, 초기경전인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과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수치적으로도 설명을 해놓았다. 상상해보라. 사방과 상하가 1유순(由旬, 약 15km)이나 되는 거대한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낸다. 이렇게 해서 겨자씨를 모두 다 꺼내도 끝나지 않는 시간, 그것이 1겁이다. 또 다른 상상은 다음과 같다. 사방이 1유순이 되는 큰 바위가 있다. 백 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천인(天人)이 내려오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의무봉, 잠자리 날개처럼 아주 가벼운 옷을 입었다. 그 옷자락으로 슬쩍 한 번씩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 그것이 바로 1겁이라 했다. 한마디로 무한(無限)이란 말이다.
1천 겁의 인연을 맺으면 한 나라에 태어나고,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려면 2천 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 부부가 되려면 7천 겁,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으려면 8천 겁, 스승과 제자가 되려면 무려 1만 겁의 스침이 있어야 한다. 오늘 내가 무심히 스쳐간 옷깃들, 지금껏 내 평생의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만난 인연들은 도대체 몇 겁의 인연이란 말인가? 1겁을 생각하니, 겁이 난다.
흔들리다
남편이 돌아왔다. 두 아이들과 함께. 이제 가족을 위한 식료품을 사러 시내에 나가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비웠던 나흘간, 지난 15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성실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함께. 식료품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진다. 교차로 앞 붉은 신호등 앞에서 남편은 차를 멈췄고 차창 밖 쏟아지는 빗속에는 그 남자가 서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매디슨 카운티에 왔던 자유로운 영혼이자 낭만적이고 진실하며 예의바르기까지 한 직업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프란체스카 존슨의 연기는 정말로 일품이었다. 물론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흠뻑 젖은 채로 폭풍우보다 더 뜨겁고 고통스런 갈구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서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일생에 단 한번 온 확고한’ 감정을 위해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운명을 가르는 교차로에서 쓰러질듯 한 가슴을 움켜쥐듯 문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던 그 뜨거운 손과 붉은 눈의 연기라니.
‘흔들리다’는 동사를 보고 들을 때마다 나는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이 장면이 떠오른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식상한 명제에나 어울릴 법한 동사를 두고 하필 이 장면을 연상하는 건, 일상의 지루함에 맥 빠지고 싫증난 중년의 여자가 안정된 가정이냐 새로운 사랑의 모험이냐를 두고 스릴 넘치는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정녕 아니올시다 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절대적 고민? 양자택일의 어려움? 알 수 없는 모호함? 아니, 내 눈에는 이 눈물 쏙 빼는 명장면 어디에도 모호함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대사처럼 그들의 감정은 이미 ‘일생에 단 한번 오는 확고한’ 것이 아니었는가. 단 나흘이었으나 그의 감정은 명확했고,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분명했으며 심지어 감옥의 창살처럼 촘촘히 내리꽂히던 그 날의 비도 더없이 확고부동했다. 그럼에도 그녀는‘흔들렸고’, 그 흔들림의 미세하고 수많은 진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영화에서 내가 느끼는 흔들림이란 이쪽인가 저쪽인가의 갈등이 아니라 더없는 확고함에서 오는 ‘move', 즉 움직임이다. 그것이 감동이고 떨림이며 공명이다. 흔들림이 모호함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고함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스미다
강미정 이라는 시인이 내게 또 한 마디의 말(言語)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태어나서 부모와 학교로부터 한 번 말을 배우고, 살면서 저마다 또 한 차례 말을 배워간다. 같은 단어라도 제 삶의 크기와 깊이, 넓이에 따라 두 번째로 배우는 말은 애초에 알고 있던 뜻과는 다르기 일쑤여서 그때마다 나는 종종 놀라고 감탄한다. 그녀가 가르쳐준 말은 ‘스민다’는 동사였다.
서두를 것 없이 사흘 동안 비 내렸다
빗길 그 사이에 점자처럼 도드라져 있는
파릇한 상처를 밀어 올리며 당신 꽃 피었다
숲과 나무가 천천히 스미듯 땅과 비가 천천히 스미듯
젖는 일이란 제 속의 마디를 끊어내는 일이었다
제 속으로 새 마디를 하나 새겨 넣는 일이었다
당신이 내게 소리 없이 스미어왔던 것처럼
내게 스미어 내가 모르게 된 것처럼
천천히 스미기 직전의, 수만 떨림의 촉수를 뻗었던
누군가가 내 인생에도 있었음을 알겠다
가슴 속 상처가 스민 그 자리에서
길을 더디게 걷는 일처럼
소리도 없이 서로 스미려고
그 얼마나 많은 비 내리고 바람 불었는지
몇 날 비에 젖고 있는 창 밖의 풍경처럼
적조하고 단조로운 음절도 때론 사무친다는 것
어느 사랑이 비의 경전에 귀기울이며
젖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창 밖의 풍경은 또 훌쩍 키가 자라고
마디진 길을 배회하던 기다림은 더 푸르러지려니
당신을 새겨 넣은 내 푸른 상처는
또 얼마나 오래도록 파닥이며 반짝이겠는가,
빗물 다 스민 자리에서 나무는 또
푸른 물기 스민 잎을 햇빛 속에 가득 새겨 놓는다
- 상처가 스민다는 것, 강미정
이 시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스민다는 것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임을. 빗물이 땅에 스미는 것이 아니라
땅과 비가 ‘서로 스미는’ 것임을. 숲과 나무가 서로 스미고 하나의 상처가 또 하나의 상처와 스미고 당신과 내가 서로 스미고......스민다는 것, 그것은 소통이란 말의 느린 표현이다.
스치고, 흔들리고, 스미다, 그리고...
스치고, 흔들리고, 스미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작품이 권두현의 사진이다. 그의 흔들린 사진들 속엔 언젠가 스쳐간 시간과 공간이 담겨있다(‘스치다’는 말이‘공간적, 시간적으로 거쳐 가다’는 의미임을 아는가?). 그의 시선은 정지하여 꿰뚫어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스쳐간다. 작품마다 하나의 색, 혹은 최소한의 색만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스침은 수많은 겁을 지나온 인연의 결과인데, 그의 사진들 속엔 인연의 주체인 작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진 속의 스침이 특정인물의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시간이고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제목이 없고 제목이 없으니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어떤 사건과 인물, 계층, 경험에 연루된 자들인지를 묻지 않고 가만히 많은 이들에게 스민다.
숲과 나무가 서로 스밀 때 어디까지가 숲이고 어디까지가 나무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스밀 때 상처와 사랑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사진인지 그림인지를 경계 지을 수 없다. 이러한 스침과 스밈의 사이에 흔들림은 당연한 과정이며, 결과다.
스침과 스밈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자들이 아무리 카메라를 흔들어도 그의 흔들림을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도. 그의 작품이 연상시키는 세 가지 동사 사이에 늘 하나의 명사, ‘빛’이 있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