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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문학 창간호 게재 /평설
도시를 등지고 산에 오르는 자의 노래
이승하(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우리는 모두 유한자이다.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난 날 고고의 울음을 터뜨리며 당당히 이 세상에 신고식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죽음을 향한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가 된다. 진시황도 클레오파트라도 이 이승에서의 삶이 그다지 긴 것은 아니었다. 때가 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마련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천수를 누린 복된 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문 사회면을 보라.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 하루라도 있던가. 우리 가운데 몇몇 사람은 비명횡사한다. 대형사고가 나면 아무 죄 없이 떼죽음을 당한다.
천국이 아닌 이 땅에서 생명체의 생명이 영원무궁 이어진다면 문학은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기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문학을 한다. 존재 증명을 위해 글을 쓴다. 특히 언어의 집중과 선택인 시를 쓴다. 탄생과 죽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喜怒哀樂과 愛惡慾 같은 감정,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우리의 꿈과 상상, 개인과 사회, 현실과 역사, 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 전쟁과 평화,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그리움…… 온갖 것들이 시가 된다. 과거와 다른 현재가, 어제와 다른 오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쓴다.
안재찬 시인도 한 명 사회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을 예의 관찰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광야의 굶주린 사자처럼편 제일 앞머리에 놓여 있는 시를 일단 보자.
내가 마지막 머무르고 싶은 가나안 땅,
곡소리 산발로 지축이 뒤흔들리다
동살이 잡힐 무렵에야 (파문이) 잠잠해지다
― 「내곡동」 전문
내곡동은 이명박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곳으로 지난해 아들이 아버지 재임 중에 뭘 어떻게 하려다가 큰 문제가 되었다. 언론에 보도되고 비난이 들끓자 10월경, 사저 건축은 취소 결정이 났다. 시인은 내곡동 파문에 대해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제2행과 3행이 바로 그 소동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또 서울에 100년 만에 최대 폭우가 내려 서울 도심 및 강남지역 대부분이 침수되고 32명이 사망했다(전국 78명 사망). 고양시 덕양구 내곡동은 비 피해가 특히 컸던 곳으로, “곡소리 산발로 지축이 흔들린다”는 대목은 비 피해를 입은 내곡동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살이 잡힐 무렵에야 (파문이) 잠잠해지다”는 아무래도 대통령 사저 관련 언론 보도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시대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이 시가 시집 앞머리에 놓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 다음 시에서 안재찬은 2011년 서울의 물난리가 자연재해 겸 인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라
똑똑히 보라,
무수한 칼질에 대한 하늘의 칼날을
비에 젖은 소복으로 가슴 쥐어뜯는
붉은 피 낭자한 거리
산이 울고
마을이 울고
아파트가 울고
― 「우면산」 부분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우면산 일대는 작년 홍수 때 산사태가 나 피해가 더욱 컸다. 그 이유는 터널을 뚫은 탓이 컸고, 여기저기 재건축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산의 지반 자체가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눈만 돌리면 널따랗게 길이 뚫려 있어 날로 날로 나무는 설 땅을 잃어버리고 산은 핏발이 서고 시들어”간다는 표현은 그런 의견에 부합한다. 시인은 인간의 “무수한 칼질”에 대한 “하늘의 칼날”이 있었다고 보았다. 오늘날 대다수 시인이 각종 사회문제를 외면하고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면서 서정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문학이란 것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곤란하다. 사회학자나 역사학자가 못할 일을 문인이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파동으로 가금家禽 수백만 마리가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내면의 괴로움만 읊조린다면 진정한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해설자의 생각이다. 시인은 일본의 원전사태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저 저기
노아의 방주조차 귀띔하지 않은
광야의 굶주린 사자처럼 바다의 검은 입으로
집을 삼키고
자동차를 삼키고
생명을 삼키고
개벽의 날, 실시간 동영상에 세상은 가위눌리어
또 하나 후쿠시마에는 독버섯 먹구름 피어나
수많은 숨결은 공포와 미래의 시간에 갇혀 흐느적이고
울음과 암울이 첩첩한 영토에
상흔의 백기가 나부끼는
― 「2011 촛불」 제4, 5연
대지진 해일은 인간 세상에 빛을 전해주는 원전 시설을 파괴, 방사능이 다량 유출되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시인은 “문명의 붕괴”를 예감하면서 “궤멸에 복받친 허무, 허무의 가슴 쥐어뜯는// 풍진을 태우는 화부”를 떠올린다. 신은 노아에게 방주를 마련하라고 귀띔을 해주었건만 일본 대지진 해일은 예고도 없었고 예상도 못한 것이었다. 신의 재앙인가, 일본 원전 사태는 우리를 바람 앞의 촛불이 되게 하고 “문명의 무명”을 예감케 한다. 이에 “문명의 탑 쌓기는 어디까지일까” 하면서 시인은 괴로워한다. 시인이 보건대 일본인들은 “아방궁에 화려한 불을 밝히고/ 희희낙락, 시끌벅적/ 오만 거드름을 피워보지만” “대책 없는 시간과 공간/ 잔혹사의 위력 앞에/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댓바람으로 무릎 꿇은/ 인간”(「불멸의 진혼곡」)이다. 안재찬은 다른 시에서도 “황사는 무슨 낯빛으로 바다를 건너오는가/ 방사능은 무슨 낯빛으로 바다를 건너오는가”(「불청객」) 하면서 대륙과 섬나라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불리함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는 “한 번도 남의 땅 넘본 적 없는”데 수의 침입, 당의 침입, 몽고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을사늑약, 강제합병, 6^25 때의 중공군 개입…… 얼마나 많은 침략을 겪었던가. 시인의 예리한 사회비판의식은 아주 재미있는 풍자시를 쓰게 한다.
※사람을 구합니다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 면제
논문 표절
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천국백성 1종자격증
취득자는 특별 우대합니다
― 청명주식회사
― 「필수과목」 부분
장관을 뽑기 위해 인사청문회를 해보면 위의 네 가지는 단골 항목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치고 이 네 가지에 걸리지 않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비리 내지는 부조리가 만연해 있음을 내심 개탄하는 시적 화자는 “나는 아이도 없고/ 나는 땅뙈기도 없고/ 나는 군번이 있고/ 나는 가방끈이 짧아// 저 광고는 그림의 떡!”이라며 소리를 지른다. 독자는 이 시를 읽고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후련함을 느낄 것이다. 시인은 「바른말 출입제한」이란 시에서도 “방글방글 떼거리로 찍어내는 모조품 세상”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안재찬 시인은 서울에서의 일상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보나마나 촌사람이다.
무슨 죄목으로
유배지 생활을 하고 있나
고향도
형제도
이웃도 다 접어두고
인림人林 우거진 퇴계로 대한극장 앞
섬으로 서서
쉼표도 없는 거리를 멀뚱거리고 있는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저 소나무
― 「실어증」 전문
도심 한복판의 소나무는 3중고를 겪는다. 공해, 소음, 전지작업. “쉼표도 없는 거리를 멀뚱거리고 있는/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저 소나무”는 혹 시인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고향도/ 형제도/ 이웃도 다 접어두고” 서울에서 유배지 생활을 하는 동안 그만 실어증에 걸려버린 한 사람의 초상은 시인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려니와 고향을 떠나 서울에 뿌리내린 소나무들, 이향離鄕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은 사람에게 서울에서의 삶은 더욱 각박하고 고달프다.
걸신들린 입들, 물렁물렁한 어둠을 거침없이 잡아먹는
가로등 입
아파트 입
자동차 입
속으로 서리서리 어둠이 얽혀들었다
― 「밤길」 부분
도회지에서 밤은 낮보다 더욱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밤 인식은 이렇듯 어둡기만 하다. 반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골에서의 밤은 실제로는 훨씬 어두웠을 테지만 기억 속의 밤은 “반딧불이 숨바꼭질하던 시간 속으로 추억을 밀어넣고 숙연해진 밤”이었다. 고개 들면 별들이 우주의 화음을 연주한다. 그래서 “밤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별들의 조막손 소리를 헤아리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도시의 밤은 “달콤한 꿈 한번 불러들이지 못한 시린 날들로 시름시름 형해만 남은// 밤”이어서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도시 쪽방에서의 삶과 고향 마을에서의 삶이 선연히 대비되는 시가 있다.
밤의 촉감은 열꽃으로 피어나고
절망의 나락에서 빠져나온 탈노숙을 느껍어
성채城砦에는 빈자의 고요가 쌓인다
애먼 쪽방 공허에 들어붓는 목마른 술병이 헐떡이며
한 눈금 온도를 끌어올린다
한 잔 술에 입술을 데우고
한 잔 술에 허기를 달랜다
― 「쪽방일기」 부분
노숙보다는 한결 나은 쪽방에서의 삶이지만 간신히 마련한 쪽방이라는 성채에서도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화자는 술을 마신다. 가난이 술을 더 마시게 한다. 하지만 백두대간 산맥을 넘어 달려가면 나오는 고향에서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엄이엄 풀벌레의 모음이 악보에 숨어 있는
청동빛 워낭 소리와
물렁물렁한 혈육의 늑골을 부둥켜안은
시간의 뿌리 그 심장에 불을 질러 추억이 타오른다
― 「쪽방일기」 부분
어두운 쪽방에서 홀로 소주잔을 비우고 있는 화자도 한때는 이렇게 심장이 뛰는 날들이 있었다. 활활 타오르던 추억은 어느 새 꺼지고 쪽방에서 목마른 술병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자주 승강기를 타게 되는데 그 공간은 “눈길조차 한 곳에 모두지 못하는/ 자폐의 공간”이다. 그 공간을 나오면 “넘어지면 손 닿을 이웃”과 “열없이 난수표만 읽다가” “비정한 길”로 우리는 각자 총총히 사라진다(「승강기」). 서울과 고향은 비로 이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고향에서 타인은 이웃이지만 서울에서 타인은 남이다.
시적 화자는 어느 날 육교를 오르다가 계단을 사뿐사뿐 내려오는 곱살한 아가씨의 치마 속의 “탐스런 붉은 꽃송이”를 보는 ‘행운’을 누린다. 꽃무늬 팬티를 본 것이다. 화자는 그 때 “꿈을 여읜 내 가슴으로/ 고스란히 이입되는 황홀한 전류”를 느끼면서 “오랜만에 삭정이 같은 몸은 물오른 봄나무가 된다”(「육교」). 화자가 아가씨의 치마 속을 한 순간 보고 생명력을 느낀 덕분이리라. 하지만 도시에서 이런 생명력을 감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의 사회비판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는 「서울민국」이 아닐까.
짐이 국가이던 때가 있었네
궁정동 주연에서 몇 발의 총성이 지나가고
그예 총으로 왔다 총으로 간
산업화의 심장이 핏빛으로 물든 그날
하필이면 그날에
총성 없는 반란이 새 역사를 쓰고 있네
붉은 아우성이 쓰나미로 몰려와
도시를 발칵 뒤집어놓았네
― 「서울민국」 제1, 2연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인 10^26사태와 서울시장 선거를 다룬 시다. 혹자는 박정희의 죽음을 지금까지도 애통해하며 그런 대통령이 나오지 않아서 이 나라가 이 모양이라고 한탄하고 있지만 시인의 생각은 다르다. 3선개헌에 이어 유신헌법 반포로 종신 대통령으로의 길을 다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고문당했던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았던 대통령이기에 그 시점에서의 죽음날짜와 서울시민의 손으로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고있는 듯 하다.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들어내고 있다. 시인의 예리한 역사의식은 「광화문광장」에서 “이 땅의 어른들은 믿지 못한다/ 믿지 못한다 광장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색깔 없는 너희 어린이다”라고 발언하게 한다. 오월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 「오월」에서는 그날의 아픔을 잊지 말자고 당부하고 있다.
제2부의 시편은 도시를 떠나 농촌사회로 공간적 배경을 옮겨 진행된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삶이라고 하여 낙원 같은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나는 밥을 먹어 피를 만들고
그녀는 내 피를 먹어 알을 만들고
더운 날 내내 둘이는
한 지붕 아래 숨쉬고 있다
― 「먹이사슬」 제2연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면서 길들이면서 살아가는 만물의 영장이지만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 모기도 그렇지만 각종 바이러스를 생각해보면 인간은 덩칫값을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지구 정화작업에 앞장서는 쇠똥구리보다 못한 것이 인간이 아닌가.
앞뒤 가릴 것 없이
아무 데서나 볼일 보는 무례함이 어디 소뿐일까만
한 무더기 배설물을 군소리 없이 매립장으로 옮기는
구슬땀이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얼굴 찡그리는 역겨움 묻어나는 현장에서
한눈팔지 않고 지구 어루만지기 앞장서는 쇠똥구리
― 「쇠똥구리」 제3, 4연
시인은 쇠똥구리의 삶을 본받고 싶었기에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무실역행, 남들이 뭐라 하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자라야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이타적인 삶을 살 줄도 안다. 하루살이에 대한 시도 하루를 살더라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 다짐의 산물이다.
뒷모습 아름다이
초침을 시침처럼 치·열·히 살다
날개를 접은
― 「하루살이」 제7연
100세 수명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은 어쩌면 하루살이보다 못난 존재일지 모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욕심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땀 일 힘/ 순종 신뢰 외곬/ 의 참뜻”(「워낙, 워낭」)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사람은 “펑퍼짐한 몸뻬에 땟국물 줄줄 흐르는 전대를 허리춤 차고 땀 한 종지 섞어 순대를 파는 아낙”과 그녀의 “반신불수 시어머니와 아비 없는 아들 딸 다섯 식구”(「복마전」)이다. 우리 시대에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하루의 공일도 손사래 치며/ 한눈팔지 않고 발로만 뛰는” 사람일 터이니, “그의 값어치는 열반涅槃 뒤에”(「소금」)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3부의 시편은 주로 가족과 친지 및 고향 언저리를 소재로 한 것들이다. 시인이 말하건대 ‘혈육’이란 “모자라도/ 앙칼져도/ 막무가내도/ 막돼먹어도” “버릴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사이”이며, “그런 까닭으로 깊이를 더해주는 사이”(「귀납법으로 말하는 혈육」)이다. 혈육은 또 사별을 전제로 하여 한 집에서 살되 아옹다옹 다투며 살아가는 전생의 원수이기도 하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하여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어떤 입은 나더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 「보름달」 부분
이승을 떠난 지 갑년이 된 아버지
철탄산 치맛자락 장막 앞에
홀로 된 누이가 반세기 만에 고개를 수그렸다
― 「누이」 부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아서 집안 내력을 잘 모르겠지만 기구한 사연이 있었나 보다. 특히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오누이에게 가슴 아픈 기억,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새겨준 분 같다. 영주댐 근처 무섬마을, 금강마을 등에 대한 지리지와 몇 개 가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성천」을 보면 “아아, 봉분 하나 없이 잠수해 버린/ 고향”이라고 하면서, “4대강 사업 나라의 부름에 조상에 얼굴 들 수 없는 그 마음 다 안다”고 하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전하기도 한다. 「6학년 추상」은 유년기 회상기로서 “6^25 포화로 새까맣게 타버린 학교 앞 늙은 느티나무 최후를 눈으로 그리는” 일과 “철조망 울타리를 넘어 가을 입은 철탄산 토끼몰이 실습시간”을 기억의 우물에서 건져올린다.
안재찬은 「80일 무렵」 「둘이서 하나로」 「날얼굴, 아가」 에서 가족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칠면조와 다윗동산」 「가슴꽃」 「억새 축제」 「은행잎」 「소나무」 등에서 종교적인 상념에 빠져들기도 한다. 「죄수의 불빛」 과 「대춘」 은 일종의 생명예찬인데, 생명을 가진 것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업신여기고 있는 데 대한 반대의 뜻을 표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고령화 사회」에 대해서는 모 월간지 월평에서 상세하게 논하였기에 언급을 피한다. 이상 제3부의 시는 주로 혈연지간과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제4부의 시편은 거의 다 시인의 등산기라고 할 수 있다. 산에 올라가면서, 정상에 다다라서, 산을 내려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시가 되었다. 제1부의 시가 번잡한 서울에서의 정신없는 삶이 시적 소재가 되어 있는 반면 제4부의 시는 “청정의 부요로 우뚝 서”서 쓴 시편이다. 천왕봉에 가서 시인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마음의 부자”가 된다. 산을 묘사함에 있어 시인의 자세는 화통방통하고 위풍당당하다.
반도 이남의 뿌리, 이 땅의 종산이던가
그 장엄함
그 중후함
그 포용력,
석양을 지운 산은 주목군락의 향기 곰비임비 우려내어
세속을 벗은 눈으로만 훔쳐볼 수 있는
하늘세계 아늑과 안온을 광휘로 펼쳐놓는다
― 「태백산」 부분
산의 이런 웅장한 경치를 보려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산은 음의 기운으로 나를 유혹하기도 한다. 봄 산, 여름 산, 가을 산, 겨울 산이 다 각각의 매력이 있는데, 봄 산과 여름 산은 특히 밤꽃 냄새나 아카시아 냄새를 풍기고 그런 사람은 색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녀와 나 사이 팽팽한 밧줄로 두 팔을 얽매어
내 안에서 그녀가
그녀 안에서 내가 젖어
미지의 황홀에 빠져든다
바다내음
산내음 물컹물컹한
광활한 우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사랑의 열락에 휩싸일 때
― 「사량도 옥녀봉」 5~6연
풍경에 감정이입을 하며 아주 멋지게 그린 이런 시편 외에도 경북 봉화군에 있는 청량산 봉우리에 설치한 하늘다리, 비 내리는 날 올라가본 봉화산, “천하 자존심으로 가부좌한 봉정암 중청봉”에도 오르면서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기도 한다. 반야봉을 오를 때는 “마야고의 속절없는 단심 향기 되어/ 반야가 숨쉬고 있는 정상을 덮”은 산의 신화적 내력을 더듬기도 한다. 두타산에 올라가는 길에서는 “산행의 노고와/ 자연의 순수가/ 머리 맞대어 감수한/ 땀의 무게와 이치를 똑바로 읽었다”고 하면서 땀의 의미를 새삼 느껴보기도 한다. 마이산에 가서는 말을 잃고 “유치찬란한/ 소꿉질 동무로 돌아가” “사랑의 심장”을 느낀다.
이와 같이 산은 시인에게 안식의 터전이요 배움의 전당이다. 아마도 평일에는 실어증에 걸린 도심의 소나무처럼 서울의 매연에 시달리다가 주말에는 산에 올라가 주중에 마음 가득 낀 때를 깨끗이 벗고 오는 게 아닐는지.
안재찬 시인은 늦깎이 시인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 시가 대체로 나이보다 훨씬 젊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를 젊게 쓰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만나면 여쭤보아야겠다.
■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과 따뜻함
이지엽(시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
안재찬 시인의 작품은 활달합니다. 거칠 것 없이 전개되는 시상은 키가 커서 훤칠하고 시원한 맛을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입니다.
「바람둥이 시신 詩神」에서는 바람을 시와 동일시하여 “안개 속 천의 얼굴”이라고 하고 시신 詩神 이라는 지위로까지 격상시킵니다. “날렵한 행보와 현란한 언어로 채색하는 그림”이지만 한결같이 “노예를 어엿비 여기”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결코 작지 않는 무게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성찰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발톱」에서는 “요렁조렁 장애발톱이 팔할”이라고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부생 復生」에서는 연둣빛 물오르는 길에서 미래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따뜻함을 잃지 않습니다. “일기장을 내려놓고 머리를 수그리는” 「예배당」을 좋아하며, “늑골을 홍건히 적시며 참뜻을 가늠하“는 「가슴꽃」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 따위는 묻지 않고 부지런하게 시간을 엮어/ 틈틈이 봄의 발원을 늘어놓”으며 “생명을 움틔울” 「해빙기」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따뜻함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과 더불어 시인의 시를 더욱 견고하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
또한 시인의 시는 소박하며 진솔합니다. 억지로 남의 흉내를 내지 않습니다. 정직하며 겸손합니다. 이를테면 「불편이 쓸 만하다」같은 작품에서 보듯 “높은자리 사람들 어둑스런 자물쇠를 열고 기억의 파편 너머로 보여주는 언어의 유희에 속이 매슥거려도 어디선가 내려오는 관용 하나”로 뭉클할 줄 아는 소박한 소시민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바닥 모를 깊이를 잠수하는」에는 “노숙하는 나뭇잎” 같이 터벅터벅 걸어야하는 소시민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산맥」은 작가의 심혈이 들어간 노작으로 시대의 정면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 민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눈길을 살짝 피하든지 모른 채 할 수도 있지만 그는 피할 줄을 모릅니다.
“띄어쓰기도없이성공신화논픽션을단숨에” 쓰고 “못다 피운 꽃송이와 무수히 떨어진 낙화”의 민주화를 거쳐 최근 세월호의 아픈 기억 중에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던 “가·만·히·있·으·라”는 어이없는 말을 두운법으로 희화하여 대한민국의 처하고 있는 상황들을 의욕적으로 그려냅니다. 뜨거운 피가 끓고 있는 셈이지요.
시인은 늘 시를 생각합니다. 시와 함께 갑니다. 「자전거」 같은 시에는 그런 시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발목이 페달을 길게 끌고 가면
어디서나 네 길은 열리고
쓰러지지 않는다
시가 편두통을 앓는다
펜이 곡기를 끊어 원고지에 묻히는 날
내 영혼 무장 해제로
우주를 떠나
시를 쓴다는 건 페달을 밟는다는 거
하늘에다 안테나 높이 세워
한사코 가야 할 황톳길
등골나무 흰물결 숲을 지나
마지막 팔천 리 다윗 성곽 빛을 좇아
오늘도 페달을 밟는다
― 「자전거」 중에서
시인은 한사코 페달을 밟고 시의 길을 갑니다. 어디 황톳길뿐이겠습니까. 자갈길, 모랫길, 비포장길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갈 것입니다. 허공이라도 없는 길을 가는 만들며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시인의 앞에 놓인 길에 “다윗 성곽 빛”과 솔로몬 성전의 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