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문학 5호 신년호 원로초대석
그분은 운명(殞命)하셨다
-노화가 영전에 향(香)을 사르며
장 윤 우
그분은 운명(殞命)하셨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서울 초청전시가 있을 지음
빠리 교외에 자택에서
숱한 민중들의 허허로운 마음
검은 흑선(黑線)으로 번지고 밀리고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물이 들듯이
거리를 넘치며 가리는 백지 안에서
오고 가는 한민족의 일렁임으로 맞선
고령에 고난(苦難)이었던
그는 누구신가
광주항쟁의 착한 서민들인가 물결치며
동양과 서구의 상상 속 만남이련가
오늘 서울 사간동 화랑에서 이 분을 만나고
쓸쓸한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온다.
-1989.1.28.
* 에꼴 드(Ecole de LEE UNGNO) 이응노미술관-파리동양미술학교, 2015 국제심포지엄은 프랑스에 소개, 아시아 예술의 성격과 양상을 알림.
시인아~ 시인아
실로 언 땅의 시와 정의를 붙안고
밑둥부터 썩어버린 살려내려는
시인이 촌스럽구나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잡초시인으로
가려진 순수라는 것
애당초 이름 얻자고
문화인으로 행세하자고
지켜온 파수꾼도 아닌 바에야
해풍에 그을리고
도끼로 찍어낸 가슴팍으로
어디고 멀쩡한 데라곤 한 곳도 없는
썩고 냄새 짙은 세상에
증류수같이 말라버릴 위인(爲人)아
시대를 뒤쳐져가는
“니, 우에 살라카노”.
귀로(歸路)
비가 꽤 올려나
가끔 가랑빗줄이
목 속으로 헤집는 초저녁
돌아오는 불빛아래
포장마차 삐걱대는 의자와
탁주사발이
오늘도 기다리는 것 같아
어느새 골목어귀를 바삐 돌아서 왔다.
팔영산 능가사
신라의 절은 옷을 벗기워 춥고
불신자들은 모습조차 보이질 않는다
1997년 1월 6일, 한낮의 졸음
서울에서 눈발을 뚫고 열한시간 내려온
문우(文友)들은
뒷산머리 팔봉(八峯)의 거대한
팔영산 자락에 감히 오르고
시산제(始山祭)를 정성껏 올리다
돼지머리에 축문(祝文)
백자(百字) 선서(宣誓)로
금년도 산행도 무사를 빌고
입과 콧구멍, 귓대기에 꽂아 넣은
파란 지폐들에
17명이 절하고 탁주를 뿌린 뒤에
벌떼같이 달라붙어 돈을 뽑고
칼로 콧등이며 혀, 목살을 썰어 입안에 집어넣다
잔인한 게 인간이다.
이안자(李安子)
-후꾸오까(福岡) 교포 화가
주고 간 엽서에 마음이 찔린다
언젠가 아릿한 그날 저녁에
있었던........ 안암동 최루까스 깔린 일대를
데모가 한창이던 고려대 앞 모텔에서
그일 이후로 그미는 고국에 와서도
먼 발치에서 30여년을 박꽃처럼 스쳐가고
지금도 살아 있을까
작금(昨今)의 나는 무엇일까.
-88,10,3.
시작노트/ 목훈木薰 장 윤 우
-1960년대 초의 오만(傲慢)에서 오늘 허무(虛無)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아스라한 날들과 햇수가 덧없이 흘러가버렸다. 일제 치하(治下), 압제(壓制)말기에 서울 독립문 옆에서 1937년 12월 1일에 태어나서 光復(1945년)을 맞고 다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를 딛고 살아왔다.
그런 와중(渦中)에서도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밤이나 낮이나 골방속이나 비좁은 거리로 쏘다니면서 글과 인생을 담론(談論)하던 방자한 문학청년 시절은 언제였던가 나이가 들면 “과거”의 추억 속에 산다더니, 그런 걸 비웃던 내가 바로 그런 주인공이 되지 않았나.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인생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이라던 선인들이 아니였던가. 아무리 문명(文名)이 휘날린들 현실속의 치열한 경쟁과 저항 속에서 어쩔 거란 말인가.
나의 데뷔시절은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기에 호구지책(糊口之策)이 급선무였었다. 이른바 문학은 “춥고 배고픈 자들의 성찬(?)이라고나 할까”그래서 대학진학은 문과를 단념하고 미술대학교의 이른바 <응용미술>방향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산업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분야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믿었으며 당시 은사인 조병화 시인과 안병욱 담임선생님과 상의를 가졌었다. 철학가 안병욱 교수는 내 첫 시집에 한문 글씨를 얹어주셔 지금도 간직하고 산다.
1950년대-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폐혀화된 서울의 겨울은 너무나 춥고 배가 고팠다. 그래도 우리는 당대 명동의 은성(銀星) 주점, <돌체>다방이며 무교동 음악감상실과 종로 <복지>다방을 헤매었다. 50년대 말의 암울한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배를 곯아도 매운 겨울바람도 견뎌냈다.
1963년 1월 1일- 드디어 나도 문단 데뷔의 막차를 타게 되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2000여편의 응모에서 詩 <겨울 동양화>가 당선된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지금 보면 어설프고 부끄럽기만 한, 노티가 나는 작품을 미당 서정주 시인께서 어쩌자고 선정하여 주셨을까. 지극히 방자(放恣)하고 나이가 든 듯한 시인이라는 선평(選評)을 잊지 못한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선자(選者)에게 정종 한 병을 사들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골목 안에 댁(宅)으로 감사 인사드리려고 갔던 빈곤한 청년- 그 무렵, 이분과 함께 나를 뽑아주신 박남수 시인~ 두 분께서는 지금 지하(地下)에 계시면서 못나고 지친 나를 지켜보고 계실 께다.
먼저 나온 문우(文友)들- 동년배의 이제하, 유경환, 박리도, 김종원, 정규남, 구석봉, 신세훈과 연상의 권일송, 박봉우, 윤삼하 시인 등의 박수를 받으며 입성한 나는 소위 “無冠의 帝王” 행세를 톡톡히 하고 다녔다. 당시엔 달리 문단 데뷔할 문예지가 거의 없었다, 물론 현대문학과 사상계 등 두어 곳이 있긴 하지만, 등용문이 아주 좁았던 것이다. 이근배, 강인섭,황명, 권일송, 박정만과 더불어 <新春詩> 동인을 19집까지 만들고 계간으로 나아갔다.
1900년대, 20대 말의 노총각- 가진 것 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시절이 길고 춥고 배고프긴 했어도 아름답고 마냥 그리웁기만 하다. 오늘날, 문학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의 방만과 넉넉한 행보에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거의 동 시점에서 국전에 미술 분야로도 등장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 있어서 필명을 급조(急造)한다는 게 내가 좋아하는 청록파 시인들 중에서 박목월 시인의 "木“과 조지훈의 ”薰“에서 따온 ”목훈“이 아예 아호(雅號)가 되었다. 이른바 나무의 향기-. 화단(畵壇)에서도 공용되는 아호(雅號)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년여를 애용하며 살아간다. 술과 산행- 나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산다.
3~4년에 한권씩 펴내온 시집도 13권에 이르른다만 부끄럽기 이를데가 없다. 미술과 문학~ 교직과 절제를 모르는 폭음(暴飮)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를 훗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문단풍토에 휘말리면서 선거바람도 탔다. 원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시분과 회장, 부이사장을 연임하면서 해외 나들이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팔자에 없이 감투福(?)은 많은가보다” 라고들 말한다.
국내외 문학상 심사와 시상, 심사평으로 중국 하얼빈시에도 갔고 국제 PEN 한국대표로 프랑스 빠리와 리용에도 참가하였으며 인도 뉴델리에서의 Asian-African Writers Workshop에도 가는 등 전 세계를 거의 누비다시피 떠돌았다. 허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의 방황과 편력은~.
장윤우(張潤宇) 약력
1937년 12월 1일 서울 출생, 1963년 1월 1일 서울신문 신춘문예 詩 <겨울동양화> 당선, 시집 : <겨울동양화>, <오자인생>, <세 번의 종>, <뚜벅이 반추>, <형해(形骸)의 삶> 등 13권, 산문집 : <화실주변>, <장윤우예술시평집>, <글과 그림의 팡세>, 대학교재 : 중학교 검정 미술교과서 1.2.3. 외 다수, 수상 : 현대시인상, 동포문학상, 순수문학상, 영랑문학상, 서포문학대상, 한맥문학상, 시예술상, (사)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상, 서울시문화상(98), 국민훈장(2003,황조근정훈장)서훈, 성신여대 명예교수(박물관장, 대학원장, 산업미술연구소장 역임),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대, 건대, 한대, 성대, 숙대, 중대, 세종대, 청주대, 원광대 등 대학원 강사겸임, 미국 Losangeles. CAL State University 교환교수(1992~93), ㅅ경력 : (사)한국종이문화원장, (사)한국종이접기협회장,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시분과회장, 부이사장, 홍보위원장, 월간문학 발행인(6년) 역임), 국제PEN고문. (사)한국미술협회부이사장, 감사 현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