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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본숭현(報本崇賢)과 양육인재(養育人材)의 도장(道場) "평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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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란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집을 말한다
이 곳 평장사는 광산김씨 후손들이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에 대한 추원보본의 도를 성경의 예로써 받들고 양육 인재를 위한 강학도장이다.
사우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된다.
예컨데 서원이 양육인재와 사문진흥에 목적을 두고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능보다는 보본숭현의 구현에 더욱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서원이나 사우는 모두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들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갔다.
호남지역의 서원, 사우 건립은 전국 총 건립수의 2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별로도 전라도가 선조 현종대에 전국 평균 사우점유율 34%를 휠씬 넘는 42%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나, 숙종 - 정조대의 평균 56%를 크게 상회하는 65%에 달하는 점에서 돋보여진다.
이같이 서원보다 사우의 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사실과 서원보다는 사우의 경우 문중적인 성향의 인물제향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없애고 설치를 엄금하고, 축소정비정책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가례에 의하면 사우는 반드시 앞을 남쪽으로 하고 뒤를 북쪽으로 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우의 건축공간은 반드시 축을 형성하였고 중요한 건물은 축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의 건물을 좌우에 배치하여 건물의 위계성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평지에 세워지는 경우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서 축을 꺽던가, 아니면 축을 변형하여 병렬형 등으로 자연지세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평장사는 전통 유교 건물로써 권위를 강조하여 정면 상부에 시조공 사우를 정점으로 하여 내삼문, 취사당, 광일문을 무등산 정상과 일직선 축으로 하고 주변의 시설물은 상호 대칭을 형성하여 위계성을 갖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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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산김씨 시조공의 사우 평장사(光山金氏 始祖公의 祠宇 平章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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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평장동은 한국전통 명문가의 얼과 혼이 살아 숨쉬는 광산김씨 발상지이다.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이 신라의 종말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에 둔세우거하여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신 개기 유허지이다. 성조의 개기 이래 후손 중에서 평장사가 많이 나와 세상 사람들이 이곳을 평장동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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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동은 노령산맥 태조봉을 조산으로 하여 서남으로 수백리 굽이쳐 내려온 산맥의 정기가 불대산 소조봉에 이르러 기와 창을 세워 놓은 듯한 서른 여덟 개의 장군봉으로 웅대하게 둘러 싸여 힘차게 뻗어 내려와 평장사에 이르러 기맥이 응결하고 장엄하게 우뚝 솟아있는 호남의 명산 서석산을 안대하여 수백리를 흘러온 황룡강 물과 서로 만나 함께 안고 흘러가니 산맥과 물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형상이다.
시조공의 사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맥이 다시 갈라져 백호의 줄기는 여덟겹이오, 청룡의 줄기는 일곱겹으로 그 형태를 보면 전체가 태극형을 이루고 좌우 청룡 백호의 날개가 균형을 맞추었으며, 주위의 산맥과 봉우리가 모두 명산으로 금태산, 서석산, 양림산, 삼각산, 건지산, 환등산, 삼선산 등이 우뚝 솟아있고 문필봉이 겹겹이 쌓여있다.
불대산 봉우리를 봉황의 머리에 비유하여 전체의 전경을 봉항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으로 표현하여 비봉포란형이라 하며, 용혈사수를 두루 갖춘 용진혈적으로 절의와 공명이 끊이지 않을 비기에 전하는 호남 제일의 명당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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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학의 극치를 자랑하는 평장사는 원경에서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조망은 점승적 최고조의 자연 풍광으로 조화의 섭리와 관용의 이치를 일깨워주는 호연지기 양생의 최적의 명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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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의 연혁(光山金氏 發祥地 平章洞의 沿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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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동은 신라 무주의 서일동이니 본래 백제무진주인데 신라가 병합하여 도독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에 무주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진성왕 6년에 견휜이 웅거하며 후백제라 칭하고 도읍을 전주로 옮기니, 궁예가 고려 태조 왕건을 정기태감으로 삼아 수군을 거느려 공략하고 주계를 정하였는데 성주 지훤이 굳게 지켜 불항하였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견훤이 아들 신검을 토벌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주를 낮추어 자사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낮추어 해양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고종 45년에 공신 김인준의 외향으로 지익주사로 승격하고 광주목으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다시 낮추어 화평부라 하였고, 공민왕 11년에 다시 무진부로 바뀌었는데 고려 혜종의 휘를 피하여 무(武)자를 무(茂)자로 고쳤으며, 공민왕 22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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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도 그대로 부르다가 조선 세종 12년에 다시 무진군으로 낮추었다.
문종 원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했고, 성종 20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연산 7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으며,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이조 12년에 주로 다시 하였다. 숙종 27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33년에 다시 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 관할의 광주군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가 부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이 되었다가 1910년 경술년 왜정 때 현재의 담양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곳 지명의 시원은 본래 백제 무진주에 소속된 마을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무주 서일동으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년전 신라말에 광산김씨가 이 곳에 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가 많이 나와 평장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왜정 때 화아로 동명이 바뀌었으나, 광산김씨들의 동명 복원운동에 의하여 1924년 평장동으로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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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문화벌 광산김씨(名門華閥 光山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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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역사는 평장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사는 천년이 넘고, 지금의 후손이 백만을 헤아린다. 장구한 역사의 변천속에서 영욕과 부침을 거듭하면서 명문화벌로 성장 발전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 김흥광은 장차 국란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 평장동에 둔세우거 하시어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셨다. 할아버지의 음덕에 기인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여 삼한갑족, 명문거족, 예문종가로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명신거유와 충의열사들이 줄을 잇고, 동방이학의 종사 문안공 김양감 선생님, 조선예학의 태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님이 유학의 대통을 계승하고 국민순화와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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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조상님들은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속에서도 대의와 명분을 생명력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명문의 전통은 역사속에 찬란하다.
겨레의 스승을 제사하는 문묘배향 18현 중 광산김씨 조상님이 두 분이나 되고, 또한 부자 명현으로 유명하다. 종묘에 배향된 보익공신이 세 분이고, 전국 쉰한개의 서원에서 여든두 분의 조상이 배향을 받고 있다.
"삼정승이불여일대제학" 이라는 대제학이 열한 분이며, 예문관 홍문관 양관 대제학이 일곱분이고, 형제대제학, 삼대대제학 배출가문은 유일하게 광산김씨뿐이다.
상신으로는 고려조 12평장을 비롯하여 조선조에 영의정이 두 분, 좌의정이 한 분, 우의정이 두 분이며, 관리의 표상인 청백리가 네 분이고, 인재의 등용문인 호당이 세 분이며, 부조묘가 열세 분, 시호를 받으신 분이 쉰여섯 분이다. 등단에 오른 대장이 아홉분이요, 임금앞에서 경서를 강의한 경연관이 열두 분이며, 조선조 문과 급제자가 이백예순다섯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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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후온화한 부덕이 조선 제일의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을 마친 숙종 왕비 인경왕후와 여원동정 연합군 창설시 소용대장군 우부도통 문숙공 김주정과 군함 900척 건조의 총책 양간공 김연, 국왕의 시호에 충성충자를 붙여야했던 속국의 진공사 신분으로 원나라 황제와 당당히 맞선 문정공 김태현, 무소불위한 부패권력을 응징한 김광철, 요승 신돈을 죽이기 위해 결사체를 만들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한 김정과 김흥조,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김약시와 김자진,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위난을 구하였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근시재 김해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략과 숱한 국란의 현장에서 순절로 충절을 지킨 수 많은 조상님과 음률에 밝아 아악을 정리한 김첨, 인수방에서 살았다하여 인수체로 불리우는 조선의 명필 자암 김구, 어머님을 위하여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쓰고 임금의 방탕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쓰는 등 충효를 위한 목적소설로 우리 근대 소설 문학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기신 서포 김만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의 화벌 명문가이다.
* 삼정승불여일대제학 :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하나만 같지 못하다.
* 여원동정연합군 :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
* 불사이군 :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기 않음
* 무소불위 :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