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두 가지 경향의 투쟁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마치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프로이트의 그런 시도 중에 하나가 삶욕동과 죽음욕동(Todestrieb)이란 개념이다.(죽음충동이라고 번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번역어 논쟁> 게시판의 Trieb에 대한 글을 보시오.) 프로이트는 생명체(유기체)를 삶욕동과 죽음욕동의 투쟁으로 보았다. 죽음욕동은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척되기도 하고 각광을 받기도 한다. 죽음욕동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아마도 자끄 라깡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라깡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죽음욕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제자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왜 죽음욕동을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프로이트의 글 자체만을 겨냥해서 쓰여졌다. 내가 라깡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면 이 글은 더 풍부해지거나, 수정되거나 아니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삶욕동, 죽음욕동의 쌍은 동양철학의 음, 양의 쌍과 너무나 닮았다. 적어도 동양철학에 대해 거의 모르는 내가 보기엔 그렇다. 삶욕동을 양, 죽음욕동을 음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다르다. 음양이론은 우주의 이론인 반면 프로이트의 욕동이론은 우주의 일부인 생명체를 설명하려는 이론인 것이다. 내 생각에는 우주의 이론인 음양이론은 그럴듯한 이론일 수 있지만 생명체의 이론인 욕동이론은 그렇지 못하다. 프로이트가 좋아하듯이 단어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는 생명체라고 부르지 생사체(삶과 죽음의 물체)라고 부르진 않는다. 생명체에는 죽음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생명현상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열역학 제 2 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는 골고루 퍼지는 경향이 있다. 생명은 고도의 질서이다. 따라서 생명은 엔트로피 법칙과의 투쟁인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이 바로 죽음으로의 경향이다. 하지만 엔트로피는 생명체 ‘안에’ 있는 경향이 아니라 생명체 ‘밖에’ 있는 경향이다. 생명체 ‘안에서’ 삶욕동과 죽음욕동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안에’ 있는 삶욕동과 생명체 ‘밖에’ 있는 죽음의 경향이 싸우는 것이다. 죽음의 경향은 생명체 ‘밖에’ 있기 때문에 욕동이라고 불릴 수 없다.
프로이트가 죽음욕동이 발현된 것으로 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공격성이다. 공격성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한 공격(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을 공격할 때), 먹이를 잡기 위한 공격(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공격할 때), 같은 종의 경쟁에서 유래한 공격(육식 동물들이 죽은 초식 동물을 두고 서로 싸울 때). 이 때 공격은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부상을 입이거나 해서 죽음에 가까운 것을 초래할 수 있다. 문제는 누구의 죽음인가이다. 공격성을 발휘한 생명체가 아니라 공격을 당하는 생명체의 죽음이 초래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격성을 발휘한 생명체는 바로 살기 위해서 공격한다. 초식 동물은 육식 동물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즉 살기위해서 공격한다.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을 잡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육식 동물은 옆에 있는 동료보다 더 많이 먹어야 살아날 가능성이 커진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즉 공격성은 바로 삶욕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공격 즉 자기 파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자기 파괴 현상인 자살은 생명체를 그야말로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공격을 하는 바로 그 생명체가 공격을 당하여 죽는 것이다. 자기 파괴 또는 자살의 많은 부분은 동일시로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싶은 하지만 공격할 수 없는(너무나 사랑해서 아니면 너무나 강력해서) 남과 동일시한 생태에서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남을 공격하는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남에 대한 공격 즉 삶욕동에서 유래한 공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기 파괴 또는 자살의 많은 부분은 자기 처벌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처벌은 타인에 의한 처벌의 대체이다. 타인의 나에 대한 공격(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나의 남에 대한 공격이다)에서 자기 처벌이 유래한 것이다.
자기 처벌 중에 하나는 성행위에 대한 또는 성행위에 대한 환상에 대한 자기 처벌이다. 이것을 거슬러 가면 결국은 어렸을 적에 자위행위 한 것에 대한 처벌에 이르게 된다. 부모는 왜 자식이 자위행위하는 것을 처벌할까? 그것과 삶욕동과의 어떤 관련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위행위에 대한 처벌은 일반적인 성억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억압은 삶욕동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성억압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전략 중 하나이다. 즉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며 이것은 삶욕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침팬지의 알파수컷(alpha male)은 발정한 암컷이 다른 수컷과 교미를 하면 그 암컷을 두들겨 팬다. 나는 이것이 인류의 성억압의 기원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즉 삶을 위한 이런 행위가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성행위에 대한 또는 성에 대한 환상에 대한 자기 처벌로 이어졌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당장은 그것을 입증할 수 없을지라도.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것 중에는 거식증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식욕이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도 말했듯이 삶욕동의 발현이다. 그렇다면 거식증을 식욕과 반식욕 즉 먹고자 하는 욕동과 먹지말고자 하는 욕동의 투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반식욕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거식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현 시대에 있다. 여성은 다이어트를 왜 강요받는가? 누구나 알듯이 예뻐보이기 위해서이다. 왜 예뻐보이려고 하는지도 누구나 알고 있다. 남자들의 눈을 끌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남자들과 자기 위해서이다. 삶욕동 중 하나인 성욕이 결국 그 기원인 것이다. 거식증을 통해서 결국 예뻐지는데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 때문에 거식증의 기원이 결국 성욕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프로이트가 꿈이 소원 충족이 아니라면 소원 충족을 위한 시도라고 했듯이 거식증도 예뻐지기 위한 (실패한) 시도이다. 불안꿈(Angsttraum, 악몽)이 소원 충족을 위한 시도이지만 실패한 시도이듯이.
프로이트가 죽음욕동이란 개념을 만들게 된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되풀이강박(반복강박)이었다. 왜 인간은 괴로운 일을 되풀이하는가? 프로기사나 프로게이머 중에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은 게임에 졌을 때 잠을 못잔다. 그리고 괴로운 경험 즉 패배의 경험을 곱씹는다. 나는 이것이 설명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생명은 실패의 경험, 패배의 경험 즉 괴로웠던 경험을 곱씹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사냥에 실패한 사자는 그 경험을 곱씹어야 한다. 그래야 사자는 다음 사냥에서 더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사자는 살아남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죽음욕동으로 죽음을 설명하려 했다.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죽음욕동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엔트로피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체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는 이유도 바로 살기 위해서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빨이 평생 두 번 난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난 다음에 영구치도 빠진다면 이빨은 재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어는 이빨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왜 사람은 이빨을 계속 재생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왜 척추동물은 심장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을까? 모든 기관을 계속해서 재생해내면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그러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심장은 이빨과 달르다. 이빨은 빠진 다음에 나도 된다. 이빨이 없어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심장이 없으면 한 시도 견딜 수 없다. 따라서 심장을 재생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신장이나 허파처럼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교대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낭비다. 심장을 재생해내는 비용에다가 심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더 커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막대한 추가 비용이 든다. 이것은 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더 많이 사냥하여 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심장이 두 개인 사자는 심장이 하나인 사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심장이 하나인 사자는 살기 위해서 심장이 하나인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생명체는 엔트로피 법칙에 기생하는 존재다. 태양계의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지구의 생명체는 태양의 에너지 중 일부를 갈취하여 자신의 복잡성을 키워가고 있다.(태양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빅뱅 ‘이전’보다 왜 현재 엔트로피는 감소하였는가? 즉 어떻게 원자처럼 그리고 태양계처럼 복잡한 것들이 만들어졌는가? 등등의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물리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생명체의 시도는 실패하기도 하지만 생명을 위한 시도에 실패하는 것이다. 애초에 죽음을 위한 시도는 없었다. 예를 들어 자본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투자를 하고 되도록이면 경쟁자보다 더 좋은 물건을 더 값싼 가격에 팔려고 한다.(경쟁자보다 더 거짓말을 많이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래야 물건을 팔 수 있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국 공황으로 이끌어서 많은 자본가의 공멸로 이끌 수 있지만 자본가는 죽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결국 인류가 공멸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인류의 죽음욕동의 발현이 아니다. 우리가 농약을 뿌려댈 때 우리는 식량을 얻어서 살기 위해 농약을 뿌린다. 그것이 결국 생태계를 파괴해서 우리의 죽음을 재촉할지라도.
첫댓글It' is an interesting analysis of the drive of life and the drive of death. Freud's both mutual concepts might philosophically be considered in regard to Hannah Arendt's philosophy of natality and Heidegger's ontological analysis of motality in which a human is nothing else than a being-toward-death
barami님의 위의 글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삶욕동과 죽음 욕동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다. 프로이트의 두 상호적인(mutual) 개념은 Hannah Arend의 생철학(philosophy of natality) 그리고 Heidegger의 죽을 수 밖에 없음(mortality, motality라고 되어 있는데 실수인 것 같습니다) - 그 속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motality"는 "mortality"로 바로 잡아야 겠습니다. 영문으로 건방떨어 죄송함다. 제가 있는 도서관에서 한글을 사용할수없는 관계로. 다음부터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현상학 창시자, 훗설은 말씀하신 욕동을 의식의 발생과정에 있어 시간의식과 익명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풀기도 하지요.
프로이트가 한 말중에 욕망의 끝은 죽음이라고 했는데 그건 자기애적 행위의 마지막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절망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엔트로피 법칙이라던지 5연에서의 이야기를 듣곤 조금 생각이 바뀝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역시 어렵군요...
In old age, elephants tend to search out a final home where there is shade for comfort from the sun and soft vegetation for cushioning; the bones of many old elephants have been found in such places. 토플 지문이라 신빙성이 좀 떨어지지만 올려봅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의 본질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두 가지 힘을 상정한 게 아닐까요? 즉 무생물과 생물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 하나의 본질 속에서 작용하는 두 가지 힘, 죽음 욕동과 생명 욕동을 가정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죽음 본능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무생물과 생물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감히 제 생각 몇자 적어보고 싶은데... 저는 인류의 지대한 발전 중 한가지는 마빈 해리슨의 동물들에서 나타나는 발정기의 전쟁이 없다는데에서 찾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에디푸스 컴플렉스갔죠. 프로이트도 말하지만 성적억압은 인류의 문화발전에 충분히 긍정적 기여를 하고있습니다.
충분하지 못한 성적억압은 노이로제로 발전한다고 합니다..여기서 죽음의 본능은 마치 주역의 음양이론처럼 발전의 토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양속의 음은 발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삶의 본능속의 죽음의 본능이 인류를 발전시킨 힘이라 생각되며 이것이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생각합니다.
첫댓글 It' is an interesting analysis of the drive of life and the drive of death. Freud's both mutual concepts might philosophically be considered in regard to Hannah Arendt's philosophy of natality and Heidegger's ontological analysis of motality in which a human is nothing else than a being-toward-death
barami님의 위의 글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삶욕동과 죽음 욕동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다. 프로이트의 두 상호적인(mutual) 개념은 Hannah Arend의 생철학(philosophy of natality) 그리고 Heidegger의 죽을 수 밖에 없음(mortality, motality라고 되어 있는데 실수인 것 같습니다) - 그 속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being-toward-death)이외의 어떤 것이 아니다 - 에 대한 존재론적(ontological) 분석과 관련하여 철학적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motality"는 "mortality"로 바로 잡아야 겠습니다. 영문으로 건방떨어 죄송함다. 제가 있는 도서관에서 한글을 사용할수없는 관계로. 다음부터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현상학 창시자, 훗설은 말씀하신 욕동을 의식의 발생과정에 있어 시간의식과 익명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풀기도 하지요.
프로이트가 한 말중에 욕망의 끝은 죽음이라고 했는데 그건 자기애적 행위의 마지막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절망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엔트로피 법칙이라던지 5연에서의 이야기를 듣곤 조금 생각이 바뀝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역시 어렵군요...
'생물의 행동 양식'과 '사유를 통한 가설' 간의 화해를 추구하시는데, 코끼리와 연어의 죽음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직 죽음 욕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연어는 종족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기진맥진해서 죽는 겁니다.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종족 보존(상류로 올라가서 알을 낳는 것) 즉 삶이 목표입니다. 코끼리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요.
In old age, elephants tend to search out a final home where there is shade for comfort from the sun and soft vegetation for cushioning; the bones of many old elephants have been found in such places. 토플 지문이라 신빙성이 좀 떨어지지만 올려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코끼리가 "죽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임종을 편하게 보내고 싶은 것이겠죠.
음..그러면 죽음을 향한 육동도 또다른 삶의 연장을 이면하고있다고 한다면 죽음의 귀로에 서있는 고통은 승화된 인간의식의 영혼성이라 해석해야하나?,그러나 그 순간을 그리 철학적인 표상으로 말하기엔 윤회하는 제2의 실험철학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적폭력과 극도의 살인충동은 스스로 파괴시켜 환생하려는 지향된 쾌락이 아닐까 싶은데..자기처벌에 도달하기전 재촉되어지는 엔돌핀은 인간이상의 우주론적 에너지가 존재할찌도 모른다는생각이 드는군요..잘 읽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의 본질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두 가지 힘을 상정한 게 아닐까요? 즉 무생물과 생물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 하나의 본질 속에서 작용하는 두 가지 힘, 죽음 욕동과 생명 욕동을 가정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죽음 본능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무생물과 생물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세요...본질의 정의를 생각해보니 그리 간단치는 않군요...
감히 제 생각 몇자 적어보고 싶은데... 저는 인류의 지대한 발전 중 한가지는 마빈 해리슨의 동물들에서 나타나는 발정기의 전쟁이 없다는데에서 찾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에디푸스 컴플렉스갔죠. 프로이트도 말하지만 성적억압은 인류의 문화발전에 충분히 긍정적 기여를 하고있습니다.
충분하지 못한 성적억압은 노이로제로 발전한다고 합니다..여기서 죽음의 본능은 마치 주역의 음양이론처럼 발전의 토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양속의 음은 발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삶의 본능속의 죽음의 본능이 인류를 발전시킨 힘이라 생각되며 이것이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