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자락에 있는 노장스님을 한번 찾아뵙는게 어떠
냐는 친구 거사의 솔깃한 제안으로 처음 스님 법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찾아뵙기 전 유튜브에 올라 있는 스님의 법문을
밤늦도록 보았습니다. 자려고 누우니 스님의 죽비소리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이게 뭐
지...밤새 이 생각을 하며 뒤척였습니다.
다음날,
백운암에 올라와 산을 내려갈 때까지 노장님을 5차례 뵈었
습니다. 법회 전, 법회 때, 점심 공양 전, 공양 후, 그리고 다시
한 번.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린 후 법회에서는 예의 죽비법문이 있었
습니다.
'오후수행(悟後修行)'과 '사성제' 등에 대해 말씀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법문을 마치고 다시 노장님과 마주 앉아 직접
질문을 드렸습니다.
"왜 오후수행(悟後修行)입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라 알고 있고, 그게 불
교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장님은 법석에서
깨달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진정,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오후
수행'을 말씀하시면서 죽비를 쳐대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노장님으로부터는,
"본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수행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나침반
도 없이 항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달음 뒤에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시니, 수행법을 물어야 되
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물을 수 밖에 없
었던 것입니다.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라니.
속으로, ("불자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이 누가 있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될 리 없었습니다.
그 사이 점심 공양 때가 되어 공양을 하는데 스님은 독상 받
는 것을 마다하시고 대중들과 겸상을 하셨습니다.
공양 후, 뜰에 나가 이번에는 친구 거사와 이야기를 주고 받
았습니다.
"여기서는, 깨달음 뒤에 수행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수행은
뭐냐? 어떻게 수행을 한다는 말이냐?"
염불 수행을 하는지, 참선 수행을 하는지, 주력 수행을 하는
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에 친구 거사는, 싱겁게 대답
해주더군요.
"무엇을 하려고 하면 이미 어긋나 버리는 거야.
끊임없이 탁마(琢磨)를 통해서 본래 자성자리를 확인하고 물
들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 뿐이지."
아니, 어찌 그럴 수 있나. 명색이 불교인데, 염불도 아니고,
참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빠사나도 아니고...
스님과 다시 마주 앉았습니다.
깨달음에 대해 내 '생각'에 입각해서 '집요한 추궁'을 했습
니다. 깨달음 뒤에 수행이라니, 그리고 그 수행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니. 이제 드디어 깨달음의 '실체'에 대해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행 없이 어떻게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깨달음이 도대체 뭡니까?"
노장님은 다시 죽비를 들어 치셨습니다.
"탁!"
"탁, 탁!"
들립니까?
"당연히 들리지요."
이번엔 죽비를 들어 세우면서,
"보입니까?"
"보입니다."
"들으려고 해서 들었습니까. 보려고 해서 보았습니까. 아니
면 그냥 들리고 보였습니까?"
"그냥 들리고 그냥 보였습니다."
"(탁! 탁. 탁!) 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들리는 이것, 보려고 애
쓰지 않아도 보이는 이것, 이것이 바로 스스로의 참 모습입니
다."
.
.
.
("앗!")
노장님의 법석에 한 번이라도 참석한 사람이라면, 노장님의
법문을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노장님의 죽비 소리를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노장님과 죽비 소리는 둘이
아닙니다. 죽비 소리가 노장님이고, 노장님이 죽비 소리지 않
습니까.
노장님의 죽비법문은 부처님 팔만사천법문의 압축판입니다.(계속)
첫댓글 "탁!" ( )( )( )
()()().
^^* 스님 독대했던 날의 추억이 떠올라 빙긋 웃음이 납니다. 과정이 얼추 비슷하군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마하반야바라밀()()()
연재 해주시는 풍경님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