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줏대 없는 생각들이 갈갈이 찢겨져 어지럽고, 주먹 쥐고 내세울만한 크고 참다운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을 치유해 낼 수 있는 것은 문학이란 생각을 갖는다. 그 까닭은 문학은 순수할 뿐 고집스럽지 않고 문학은 진실과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儒學유학을 숭상해 오던 우리들은 숨이 막힐만한 학문적 규범 속에서 新儒學신유학까지 비판하고 理學이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心學심학의 발전을 꾀해 왔다. 格物致知격물치지의 主知的理學주지적이학에서 知지, 情정, 意의의 온전한 발휘와 실현을 뜻하는 致良知設치양지설로의 전환을 知行合一지행합일로 중심 사상을 삼고자 했다.
문학이 무엇인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진실한 삶의 기록이 아니던가. 당연히 存在존재와 心性심성, 理이와 氣기로 二元化이원화된 사상을 하나로 묶는 理이는 氣기의 條理조리요, 氣기는 運用운용에 불과한 것이니 理이와 氣기가 공존하는 理卽氣이즉기로 一元化일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마음이 곧 이치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발전하여 ‘문학은 道도가 아니다’란 생각을 낳았다. 맞다. 문학은 도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삶의 이치에 맞는 행동을 그리는 예술로 정착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 명나라 때 王守仁왕수인(호 陽明 양명/ 1472~1528)에 의해 창시된 陽明學양명학이 들어온 조선 중종 때, 새로운 학설로 이 사상을 받아들이는 학자들과 이를 이단이라고 부르고 배척하는 학자들의 싸움은 조선의 사상계를 격랑으로 몰아넣었다.
대표적 학자이며 사상가였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격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양 거두들의 배척으로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려 변방으로 밀려났다.
변방으로 밀려난 양명학이 발붙인 곳이 이곳 강화땅이었다. 조선 후기 霞谷하곡鄭齋斗정재두(1649-1736)는 서울의 명문 출신으로 관계에 몸담아 왔다. 朱子學주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61세 때,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면서 본격적으로 양명학 연구에 헌신했고 권위주의 학풍과 당쟁으로 얼룩진 주자학에 대한 불만이 컸다. 그는 주자학이 정쟁의 도구로 타락했다고 파악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학맥으로는 아들 厚一후일과 외손 申綽신작, 그리고 尹淳윤순, 沈錥심육, 李匡師이광사등이며 實學실학으로 저변을 넓혀 한말에 위정척사의 사상적 골격이 되어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문학으로는 李建昌이건창, 金澤榮김택영, 黃玹황현등이 있고 뒷날 鄭寅普정인보도 이 계보에 속한다. 이건창이 전라도 보성에 귀양간 뒤, 그 곳의 문인들과의 관계가 깊게 이루어졌다.
“강화학 250년은 모진 핍박과 갖은 곤궁 속에서 성취한 인간의 존엄과 그 발견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知行合一지행합일의 정신을 그들은 내세운다. 梅泉 黃玹 매천 황현이 자진할 때 “내가 꼭 죽어야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란 말을 남겼다. 나라를 잃었고 살아갈 희망이 없는데, 잃을 나라를 찾을 힘도 無望무망한 상황 속에서의 절규였다.
강화의 문학과 정신은 이건창, 김택영, 황현, 이건승 등에 의하여 전해왔고 정인보가 정리해서 엿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말의 숱한 의병들이 그 얼을 보존해 왔다. 이 정신적 자산을 한국의 중심사상으로 재현 해내려면 사상적 측면과 문학적 측면에서 폭 넓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강문학》이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따라 투철한 인물과 사상, 그리고 문학적 유산을 남긴 인물을 발견, 재조명하는 의미로, 강화학파에 관한 사상과 문학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자리에서 이를 주관하며 주제를 발표하는 하곡학연구원 이경룡 원장과 그리고 토론에 참가하는 이 방면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오늘의 행사는 큰 뜻을 가진 것으로 250년을 이어 온 강화학의 사상적 뼈대와 그 사상이 한국문학에 끼친 흔적을 찾아 한강, 특히 그 흐름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강화섬에서 사상적 특성을 찾는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주제 발표자와 토론에 참가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2017 만추, 《한강문학》 江華 세미나〉 발제문
霞 谷 學
李 慶 龍 하곡학연구원(Hagok Academy Korea) 원장
1. 하곡학이란?
하곡학霞谷學(Hagok Mind learning)은 조선후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선생(1649-1736)이 조선학계에서 서경덕을 비롯하여 독자적으로 발생한 심학心學을 계승하고, 조선 주자학의 학술비판을 극복하고 완성한 심학心學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송시열의 맹자 호연장 연구 과제를 계승하여 심학 입장에서 해결하였다. 조선 조정과 학계는 임진왜란 시기에 명나라 송응창과 원황 등이 양명학 수용을 건의하자, 반박하고 거부하여 학술주권을 지켰다. 따라서 하곡학은 조선의 학술주권을 지킨 조선학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계승한 학술이며 중국 양명학과는 지향과 종지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명나라는 멸망하였어도, 명나라에서 국가의 인정을 받은 양명학은 지지하였다.
하곡학의 학술종지는 존성尊性이다. 이는 하곡 정제두 선생이 중년에 지은 「정성문定性文」 3편에 잘 나타나있다. 존성종지는 모든 사람마다 타고난 본심의 양지를 깨달아서, 양지가 밝혀주는 본성에 따라 진지하게 실천하며, 궁극에는 모든 사람과 세상만물이 올바른 진리를 얻어 평안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학술이다.
하곡학은 조선시기 심학을 대표한다. 조선시기 학술사에서 주자학을 대표하는 이학理學과 함께 2대 학술을 이루며, 동시에 퇴계와 율곡 두 선생의 학맥과 더불어 3대 학맥을 이룬다.
중국 성리학에 주자학과 양명학이 있다면 한국에는 퇴율학과 하곡학이 있다. 조선학술의 독자적인 하곡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함께 동아시아의 심학을 대표한다. 과거에 동아시아 학계에서 이학과 심학을 두루 갖춘 국가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뿐이었다.
앞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현대화를 심화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화와 철학을 상대로 학술적 대화를 확대시켜야한다. 이때 한국은 하곡학이라는 커다란 학술자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학술대화를 주도적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2, 하곡학의 탄생
강화도는 하곡학파가 탄생하여 학맥을 이어오면서 학술과 경세를 주창해온 조선 심학의 성지이다. 하곡 정제두 선생은 61세에 할아버지 정유성의 고향 강화도에 이주하여 88세 돌아가실 때까지 후학에게 심학을 전수하여, 하곡학파가 탄생한 곳이다.
하곡의 후학들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학맥을 이어오면서 전국에 전파하였다. 이들은 학술에서는 국학 연구와 시서화詩書畵 등 예술을 꽃 피웠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아가 항일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참여하였다. 하곡학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 창조에 참여한 학술이며, 동시에 한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학술이다.
3. 하곡의 일생
하곡 정제두鄭齊斗 선생은 영일 정씨 정몽주 후손이다.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하곡霞谷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며 아버지는 정상징鄭尙徵이다. 서울 서부 반석방에서 태어났다. 41세(1689)에 경기도 안산시 추곡楸谷으로 이사하였고, 61세(1709)에는 할아버지가 사셨던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사하여 88세 돌아가실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하곡 정제두 선생은 어려서 외삼촌 이상익李商翼에게서 배우고, 남양주 석실서원에도 가서 공부하였다. 24세(1672)에는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학술에 매진하여 송시열, 윤증, 박세채 등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 시기에 본체와 작용은 둘로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체용일원體用一源을 확신한 뒤부터 주자학의 이분법을 의시疑視하고 양명학을 긍정肯定하였다.
28세(1676)에는 스승 송시열宋時烈 (1607-16891)에게 서신을 올려 무의無意와 무욕無欲 두 가지를 묻고 다시 심체의 허虛를 닦는 경敬 공부에 대하여 물었다. 이것은 사실상 서경덕(1489-1546)의 허정虛靜과 남언경(1528-1594)의 무의무욕無意無欲이라는 수양공부를 문의한 것이다.
32세(1680)에는 《맹자》의 성선性善과 《중용》의 천명天命이 뜻하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른 점에 의문을 갖게 된다. 이후 더욱 분발하여 학문의 근원에 관하여 깊이 사색하는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진다. 이 때 “심성心性이 둘로 나눌 수 없는 하나一物”라는 것을 확신한다.
34세(1682)에는 사색과 수양공부 때문에 목숨이 위독한 지경이 된다. 이 때 박세채 스승께 써 보내려던 유서에서, 양명학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 당시 양생공부에도 치중한 결과 건강을 회복하여 중년부터 장수하였다.
37세(1685)와 이듬해에 스승 박세채朴世采(1631-1695)는 퇴계의 〈전습록론변傳習錄論辨〉에 근거하여 양명학을 비판하는 서신을 하곡에게 보낸다. 그는 정제두가 양명학을 긍정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주자학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한다.
39세(1687)에 하곡 정제두 선생은 스승 박세채의 지시를 받은 민이승閔以升(1653-1697)과 경기도 고양군 송추에서 만나 논변한다. 이 때 하곡 정제두는 생사를 가르더라도 양명학을 변호하겠다는 입장을 공개한다. 이후 민이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간 논변을 벌인다. 이 시기에 《학변學辨》과 《존언存言》등 중요한 저작을 완성한다.
44세(1692)에는 스승 윤증尹拯(1629-1714)도 하곡 정제두가 양명학을 긍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서신을 보낸다. 또한 45세부터 56세(1704)까지는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1646-1715)과 양명학에 관하여 틈틈이 변론하였다. 48세(1696)에는 박심朴鐔과 정찬휘鄭纘輝, 52세(1700)에는 이항복의 손자 이세필李世弼(1642-1718)과 양명학에 관하여 변론하였다. 61세에 강화도 하곡으로 이사한다. 뒤에 많은 저작을 남기며, 여러 차례 높은 관식을 제수 받았으나 응하지 않는다.
위엣 살펴본 바와 같이 하곡학은 조선학계에서 우연히 탄생한 것도 아니고 명나라에서 묘목을 이식하듯이 양명학을 수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곡 정제두 선생이 청. 장년 시기에 당시 수준 높은 국내의 주자학자들의 비난과 배척을 이겨내면서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술은 당연히 ‘하곡학’이라고 불려야한다.
4. 하곡학의 존성종지와 학술연원
하곡 정제두는 민이승과 10년간 논변하는 동안, 왕양명의 양지를 넘어 양명후학들이 주창하였던 생리生理와 신리神理까지 참고하였다. 다시 연구방향을 정명도의 학술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리仁理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곡 정제두의 존성尊性이라는 학술종지는 양명학뿐만 아니라 양명후학까지 심지어 북송시기 정명도 학술을 평가한 뒤에 제시한 것이다.
존성尊性이라는 학술종지는 〈정성문〉 3편에 나타나있다. 이 글은 현재 《존언存言》에 실려 있다. 따라서 하곡학의 존성종지는 하곡 정제두 선생이 50세 전후에 완성하였지만 60세 이후에 정명도를 연구한 뒤에 보충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곡 정제두의 학술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조선 심학心學을 계승하였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사실상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밝히지 못한 까닭은 당시 조선학계가 조선 심학과 중국 양명학을 이단학술이라고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하곡 정제두는 선배 학자들 가운데 장유가 양명학을 가장 잘 이해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장유는 남격(남언경의 아들)을 찾아가서 조선 심학을 배우고 그 바탕 위에서 양명학을 참고하였던 학자였다.
조선 심학의 연원을 살펴보면, 서경덕(1489-1546)과 남언경(1528-1594)두 선생이 사제로서 담연허정(虛靜湛一)의 본체와 무의무욕無意無欲의 수양공부를 세워서 전파시켰다. 남격은 다시 최명길(1586-1647)과 장유(1587-1638) 에게 전수하였다. 하곡 정제두 선생은 최명길과 이항복 후손들과 교유하면서 조선 심학의 학술전통과 수양공부를 계승하고 장유를 높이 평가하였다. 다시 명나라의 양명학과 정명도 학술을 참고하여 조선 심학을 최고수준으로 이끌어 올려 하곡학을 건립하였다.
다시 말해 서경덕은 스스로 깨달아 본체론과 수양공부방법을 세워서 조선학계의 독자적인 심학을 건립하였고 북송시기 소강절을 넘어섰다고 자평하였다. 당시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서경덕 문집을 보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뒤에 청나라 학자들도 《사고전서》에 넣어 보존하였다.
그의 문인 남언경은 퇴계에게 서신을 보내 무의무욕의 징심澄心공부를 밝혔으나 오히려 퇴계의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조선학계의 심학과 이학의 첫 논변이었다. 그는 심지어 임진왜란 시기에 선조임금에게 양명학을 수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선조임금과 조정의 고관들이 거절하였다. 그의 아들 남격은 최명길과 장유 등에게 조선 심학을 전승시켜주었고 두 사람 모두 양명학을 참고하여 공부하였다.
따라서 서경덕과 남언경은 조선의 독자적인 심학을 건립하고 퇴계 선생의 비판을 극복하면서 후학에게 전수하였다. 하곡 정제두 선생은 조선 심학을 계승한 기초 위에서 조선 주자학의 비판을 극복하면서 학술종지를 세웠다. 나아가 명나라에서 먼저 국가의 인정을 받은 중국 양명학을 참고하고 변호하였다.
하곡학은 조선 심학의 원만한 완성이며 중국 양명학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명나라 지원군의 장군 송응창과 양명학자 원황은 조선 조정에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받아들이라고 건의하였다. 당시 선조임금을 비롯한 고급관원과 학자들은 모두 이 건의를 거절하고 조선의 학술주권을 지켰다. 따라서 명나라 양명학이 직접 조선학계에 전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곡 정제두는 조선 심학이 국가의 인정을 받아 건전한 학술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였다. 먼저 퇴계와 율곡을 계승한 주자학자들의 비난과 비판에 대하여 변론하며 설득하였다. 또한 명나라에서 먼저 국가의 인정을 받았던 양명학을 변호하였다. 결국 하곡 정제두의 존성종지는 조선 심학에 근거하여 건립한 학술이며 명나라 양명학의 양지에 머물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5. 하곡 후학의 학맥과 업적
하곡 후학은 정제두 선생의 문인들이 개인 또는 가문을 중심으로 이룬 학맥이다. 하곡 정제두 선생이 높이 평가한 문인으로는 윤순과 심육이 있다. 중요한 가문을 보면, 하곡 정제두 선생의 가문에는 아들 정후일을 비롯하여 사위 이광명과 손녀사위 신대우가 있고, 고손 정문승, 정기석, 정원하 등이 계승하였다.
하곡학을 계승한 가장 큰 문중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이다. 이광명은 아들 이충익을 거쳐 이면백, 이시원, 이지원, 이상학 이건창, 이건승, 정인보로 이어졌다. 이광사는 아들 이긍익, 이영익으로 이어졌고, 이광려는 정동유에게 전수하였다. 서예가 뛰어난 학자는 이광사이며, 학술과 수양공부가 뛰어난 학자는 이충익이고, 문장이 뛰어난 학자는 이건창이다. 조선이 멸망하자 문중에서 강화에 계명의숙을 건립하여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다.
윤순은 “실심實心을 실학實學하라”는 실심실학을 주장했다. 이광신은 수사수물 정찰심리(隨事隨物 精察心理)를, 민옥은 “實事를 實言하라”를, 이광사는 “반신체인反身體仁의 실학實學”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백하 윤순 선생의 ‘실심실학’은 “사람마다 타고난 본심(실심)을 실제로 수양 공부하여 깨달으라”는 심학의 종지를 나타낸 것이다.(이광사 : 사욕일거 일견공리私慾日去 日見公理. 투의리관 궁성명원 透義理關 窮性命源. 진견성위 취실잔번 眞見誠僞 就實剗繁. 수성대유 遂成大儒.)
신대우 가문에는 아들 신작과 신순 등을 거쳐 혜공 신익회 선생까지 전승되었다. 신대우 선생은 일찍이 강화군 양도면 공숙리에서 20년간 강학하였는데 공숙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본다. 이밖에도 많은 문인들이 있었으나 아직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새롭게 밝혀진 학맥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지난 해에 삼척박물관에서 홍락섭 선생의 문집과 서예작품을 소장하였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홍락섭 선생은 윤순과 이광사를 계승한 서예 학맥이며, 정제두 ⇨ 윤순 ⇨ 이광사 ⇨ 조광진 ⇨ 이희수 ⇨ 홍락섭 학맥이다.
또한 올해 여름에는 전남 보성에서 이건창 선생의 지도를 받은 이병일 선생과 송명회, 송운회 형제분이 문학과 서예 및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한 학맥이 밝혀졌다. 앞으로 삼척과 보성 두 지역의 학맥과 성과는 더욱 밝혀서 재조명해야한다.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술은 그 연원이 조선심학에서 유래하였다. 후학들은 하곡학파를 이루어 국학과 문학 및 서호 등 예술에서 뛰어난 문화적 성과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는 애국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고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에 동참하였다.
하곡학 국제학술대회
한국양명학회는 강화군의 재정지원을 받아 2004년부터 매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오늘날 동아시아 학계에서 중요한 국제학술대회로 성장하였다. 물론 강화군 역대 군수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열정을 쏟았으며, 강화군민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발전시켰다는 점을 주목하여야한다.
2004년 양명학회 회장 정인재 교수는 강화군 제42대 유병호 군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제1회와 제2회 하곡학 국제학술대회를 강화읍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양명학회 회장들은 하곡학 국제학술대회를 국제적 학술대회로 성장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제43대와 44대 안덕수 군수는 하곡학의 연구와 국제화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제3회부터 제8회까지 국제학술대회로 성장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제9회와 제10회에는 유천호 군수가 지원을 아끼지 않고 후원하였다. 아울러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김형우 교수는 하곡학이 강화도에 널리 알려지고 새롭게 뿌리내리도록 적극 협력하였다.
하곡학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국내의 양명학 연구자는 물론 주자학 연구자와 역사 및 문학 등 전공자가 참여하여 수준 높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학술적 성과를 얻었다. 또한 중국, 일본, 대만,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하곡학의 연구수준을 높이고 외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중국과 대만 연구자들은 하곡학의 위상을 왕양명의 수제자 왕기에 비길 만큼 높게 평가하였다. 일본학자들도 하곡학을 동아시아 학계의 중요한 심학으로 간주하여 연구하였다.
<하곡학 국제학술대회>
구분
세미나 명칭
일시
비고(군수)
제1회
강화 양명학파의 위상과 현대적 의미
2004. 10. 15-16
유병호
제2회
하곡과 강화 양명학파
2005. 10. 28-29
유병호
제3회
하곡과 한국양명학의 전개
2006. 11. 3.
안덕수
제4회
하곡학과 실학
2007. 12. 21-22
안덕수
제5회
하곡학과 근대성
2008. 11. 6-7
안덕수
제6회
양명학, 세상과 소통하기
2009. 10. 16-17
안덕수
제7회
양명학과 지구, 생명 그리고 공생
2010. 10. 8-9
안덕수
제8회
하곡학과 한국성리학의 대화
2011. 10. 14-15
안덕수
제9회
하곡 정제두와 18세기 동아시아 사상문화
2012. 10. 12-13
유천호
제10회
강화 양명학과 이상사회
2013. 10. 11
유천호
제11회
2014. 10. 11
제12회
2015.
이상복
제13회
2016. 11. 4
이상복
제14회
하곡학, 인문학으로 다가가기
2017. 10. 27
*자료제공 : 이경룡 하곡학연구원 원장
하곡제
하곡제는 하곡 정제두 선생을 추모하고 선생의 학술연구와 덕행을 현창하는 문화행사이다. 한국양명학회, 강화문화원, 강화군청, 인천광역시, 영일 정씨 종친회 등이 함께 올리는 강화군의 제례문화이다.
봉행 동기는 인천시 문화재위원 김형우 교수가 2007년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소를 조사하여 〈정제두 묘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여기에 근거하여 2007년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를 인천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의 인천시 사적지 지정은 2008년 10월 제1회 하곡제 봉행을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강화문화원 남궁신 원장은 적극 지원하고, 양태부 사무국장이 하곡제 추진과 봉행에 관한 행정실무를 맡았다. 조남호 교수는 하곡제 제례를 봉행하기 전에 복식, 제수 진설, 제례 절차 등에 관하여 많은 분들께 자문을 구하여 절차를 결정하고 소상하게 준비하였다. 이때 ‘하곡제 봉행 추진위원회’를 강화문화원, 한국양명학회, 영일정씨 종친회 등으로 중심 구성하였다. 강화군청은 해마다 하곡제 예산을 지원하였다.
제1회 하곡제 봉행에서 최근덕 성균관 관장이 초헌관으로 참례하여 성균관 제주를 지내신 하곡 선생에 맞도록 제례 절차를 조정하였다. 성균관 의례부장이 묘제 홀기를 제공하여 율곡선생과 성균관 제례의 전통을 따르도록 확정하였다. 강화 향교에서는 제기, 향로, 관수대 등 많은 제기를 제공하고 집례를 맡았다. 화도면 면사무소는 불편을 해소하고 강화경찰서는 교통을 통제하고 사단법인 한국차문화협회 인천지부 ‘규례다방연구회’에서는 해마다 차를 다려서 참배객에게 대접하였다.
하곡제는 해마다 봉행하여 왔으며 많은 강화군민과 학생들이 참례하여 2014년 10월 제7회 하곡제를 봉행하였다. 하곡제가 앞으로 강화군에 정착되어 강화군과 인천시의 발전정신을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최근덕 : 《한강문학》2017. 가을호, 29면 권두칼럼 “글자 아는 사람”/
*제8회 하곡제 봉행(2017. 10. 26일))
*〈2017 만추, 《한강문학》 江華 세미나〉 발제시
강화 중심, 대표적 6인의 한시
(이규보, 정제두, 이건창, 이건승, 김택영, 정인보) *年代順
서사序詞 : 강화도는 기가 강한 섬이다. 민족의 젖줄 한강, 임진강 담수가 합류해 서해 함수鹹水의 기운을 받아 생기의 절정을 이룬다. 그리하여, 우국충정지사가 많고, 뛰어난 문객도 많았다. 아울러 강화는 통일 후, 미래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번역은 원문의 시의(詩意)를 최대한 살려 현대감각으로 풀이했다.
1. 이규보
美人怨-回文(글을 되돌림)
-미인의 원망
順讀(순독)
腸斷啼鶯春(장단제앵춘)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 타는데
落花紅簇地(낙화홍족지) 꽃은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香衾曉枕孤(향금효침고) 향긋한 이불 새벽베개는 외롭기만 하여*
玉臉雙流淚(옥검쌍류루)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郞信薄如雲(랑신박여운)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 같고
妾情撓似水(첩정요사수)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누나
長日度與誰(장일도여수)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皺却愁眉翠(추각수미취)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
逆讀(역독)
翠眉愁却皺(취미수각추) 푸른 눈썹은 수심 겨워 찌푸려 있는데
誰與度日長(수여도일장) 뉘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볼까
水似撓情妾(수사요정첩) 강물은 내 마음인 양 출렁거리고
雲如薄信郎(운여박신랑) 구름은 신의 없는 님의 마음 같아라
淚流雙臉玉(루류쌍검옥) 흐른 눈물은 두 개의 고운 옥인양 *
孤枕曉衾香(고침효금향) 외론 베개 새벽 이불만 향기롭구나
地簇紅花落(지족홍화락) 땅 가득히 붉은 꽃이 떨어지고
春鶯啼斷腸(춘앵제단장) 봄 꾀꼬리 우는 소리에 애간장 타누나
* 대문장가 다운 절묘한 시다. 오언율시五言律詩 총 8구 40자를 구句는 물론, 글자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 읊어도 율律에 맞고 뜻이 통한다. 그는 수사修辭의 마술사이다. 이 회문시는 원류인 중국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물다. ‘강화문학관’ 글을 그대로 전재轉載했다. 다만 순독 제 3구와, 역독 제 5구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필자가 다시 다듬었다. 뭇사람이 보는 것이니 만큼, 좀 더 정성을 기울여 풀이해줬으면 하는 부탁이다. 또한 그 詩는 유감스럽게도 독음讀音을 달지 않았다.(필자 주)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고려 시대의 시인이자 철학자.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가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떨어졌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와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통해 그가 산촌에 한가롭게 은거하면서 인생을 달관한 멋스러운 일생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삼혹호 선생이라는 호는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하여 붙여진 것으로서, 그 세 가지란, 거문고와 술과 글을 일컫는다. 몽고 침입 때 강화에서 살았다.(백과사전, 위대한 철학자들은..)
2. 정제두
山溪(산계)
-산의 계곡
涓涓流出愛無情(연연유출애무정) 졸졸 새어나오니 정 없음도 사랑해
好看纖源一脈淸(호간섬원일맥청) 보기 좋아라 실낱같은 근원에서 한 줄기 맑은 물
去會江湖千萬里(거회강호천만리) 흘러가다 강과 호수 천만리로 모이나니
洪波誰識此中生(홍파수식차중생) 누가 알겠는가 큰 물결도 여기에서 생긴 것을
歷盡千巖萬壑艱(역진천암만학간) 수천 바위와 많은 골짜기 험한 곳 다 지나지만
如何日夜不曾閑(여하일야불증한) 어찌하여 밤낮으로 한가하지 못 하는가
滔滔萬里奔歸意(도도만리분귀의) 도도히 수만 리를 바삐 돌아가는 뜻은
只在滄波大海間(지재창파대해간) 단지 푸른 파도 일렁이는 큰 바다에 있고 싶어서라오
*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읊었다. 하곡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명징明澄한 서정시다.
*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추곡楸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조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다. 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건창
北漢失路(북한실로)
-북한산에서 길을 잃고
丹霞欲躡愴難梯(단하욕섭창난제) 붉은 노을 질 때 산 오르려니 참 힘드네
絶頂彷徨日已西(절정방황일이서) 꼭대기서 헤매느라 해는 벌써 서산에 지고
海色纖如通澮畎(해색섬여통회견) 밭도랑인양 저 가느다란 바다색이여
雲容深不辨山谿(운용심불변산계) 구름 자욱하여 산인지 계곡인지 모르겠네
* 이건창李建昌(1852~1898)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상학象學이다.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강위姜瑋,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는 특히 북한산을 사랑했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의 형이다.
4. 이건승 한시
合邦後入都(합방후입도)
-합방 후 도성에 들어와서
松栢森森日色昏(송백삼삼일색혼) 소나무와 잣나무는 울창하고 해는 저무는데
西風垂漏倚宮垣(서풍수루의궁원) 가을바람 부는 대궐 담에 기대어 눈물짓누나
關心祭器無人抱(관심제기무인포) 종묘 제기 걱정이어도 품고 갈 이 없어
亡國孤臣又後孫(망국고신우후손) 나라 잃은 외로운 이 신하 게다가 왕손 후예이니
* 망국의 심정을 읊은 귀중한 영사시詠史詩다.
* 이건승李建昇(1858∼1924)은 조선 말기의 학자 겸 문인이다. 호는 보경保卿, 경재耕齋, 본관은 전주全州로 왕손이다. 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깊이 교유하였고,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으로서, 양명학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을사조약(1905. 11. 17)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洪承憲,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자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고종 10년)에는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해, 교육으로 나라를 살리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한다.
5. 김택영
聞雁(문안)
-기러기 소리를 듣다
明河初灩別書堂(명하초염별서당) 은하수 처음 일렁일 적 서당을 나섰는데
錦水邊山驛路長(금수변산역로장) 금강을 거쳐 변산 가는 길 아득히 멀고도 머네
鴻雁後飛過我去(홍안후비과아거) 기러기 뒤에서 날다 나를 앞질러 지나가니
秋風秋雨滿江鄕(추풍추우만강향) 가을바람 가을비가 강 마을에 가득하네
* 김택영金澤榮(1850~1927) 본관은 화개.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아버지는 개성부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시詩의 황현黃玹과,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다.(다음 백과)
6. 정인보
獻忠武公(헌충무공)
-충무공에게 바침
一誓海山立(일서해산립) 한번 맹서하니 바다와 땅이 서고
綱常於百代(강상어백대) 사람의 도리(綱常)는 백대에 전하네
再造乾坤無(재조건곤무) 하늘과 땅이 없어 다시 세워도
伐矜於當時(벌긍어당시) 공을 자랑하지 않고 그저 때가 되어 그리 되었다 하네
成仁取義精(성인취의정) 어질음을 이루고 바름을 정성스레 취해
忠光於檀聖(충광어단성) 충절이 빛남은 단군의 성스러움이라
補天浴日功(보천욕일공)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 공로로
德蓋於槿邦(덕개어근방) 덕은 무궁화 나라(우리나라)를 덮었네
* 補天浴日(보천욕일) :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큰 공훈을 세움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신화에서 유래하였다.
* 이 시는 현충사 구 본당에 새겨진 주련柱聯이다. “홀로 전 민족을 구해낸 충무공”께 바친 헌시다.
* 정인보鄭寅普(1893~1950) :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작가이며,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저술가이다.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 도중, 사망하였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수파守坡,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국사학,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조선역사 연구의 바탕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은 곧 ‘얼’임을 강조한다.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그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1946년 민족사에 어두운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펴냈으며,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기 위해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다.
필자 : 半山 韓相哲/ (사) 한국한시협회 회원, (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 한시집 《北窓》, 풍치시조집 《名勝譜》 외 5권이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한강문학>이 2017년에 이룩한 업적입니다. 모두 애 많이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