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
말
博川 최정순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우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 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당신
博川 최정순
둘레둘레 사위 살펴보아도
지금은 당신의 모습 없어
매순간 포개지는 슬픈 음조들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
바람과 소근거리는 나뭇잎
의자 몸 길게 펴 누워 있는 길목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당신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오롯이 웃고 있는데
갈색 마음의 여백 채우고 채우면
성큼성큼 달려와 줄 것만 같은
향기롭고 상큼한 당신은
욕망의 잔혹한 묘사 비밀스레 그리다
조각조각 맞추는 능란하고 능란한 붓질
내 마음의 붉은 종피種皮 속
알알이 폭죽처럼 터트린다.
님
博川 최정순
터지고 찢긴 영혼 감싸 주며
사랑하고 미워하더니
오늘도 뜨겁고 차가운 정
가득 담은 사연 접었다 폈다
당신은 이 꽃 저 꽃
찾아 나는 한 마리 나비던가요
이제 그만 날개 접고
내 그늘에서 쉬세요.
님의 뒷모습
博川 최정순
까닭 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 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마음
博川 최정순
소리 없고 형체 없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너
몸 안 있는지 몸 밖 있는지
가슴 있는지 머리 있는지
항문이나 요도에 있는지
휘휘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네
망원경 현미경으로도
흔적의 실마리 찾을 길 없는 너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너를 찾아 먼 길 떠나네.
무정
博川 최정순
이별 한 장단 튕기며
하늘 휘몰아 운다
춤추는 등나무 등줄기 바람
어설프게 휘어지도록 붙잡고
우웅웅 한스럽게 후두둑 터지는
다시 못 올 가락이던가
서해로 천길만길 서해로
두메 계곡 휘돌아 울며불며
한 서린 중중가락 신명내다
크고 작은 분화구마다
당신의 행성
매몰차게 부숴 버리고
애간장 녹이고 녹이다
사라지는 은결스런
당신의 무정.
♥
그리움(1)
博川 최정순
당신이 어느 날
뜬금없이 잊으라기에
먹구름 되어
찌푸린 하늘 떠다니다
시뻘건 바다에 풍덩 빠져
망각의 벌판
차가운 별무리 가득하고
인정 없는 기억들만 가혹한데
날마다 눈 뜨는 그리움 어쩌지 못해
당신의 굳게 닫힌 문
다가서다 무서움에 오그라들고
잊기 위해 골백번 악무는 어금니
조금도 그립지 않다 속다짐
당신을 하루에 한 줌씩 버리고
그도 안 되면 반 줌씩 버리다
그것도 안 되면 그냥 쌓아 두지요
쌓고 쌓다 보면
썩는 날도 올 겁니다.
♥
그리움(2)
博川 최정순
문득 먼 아득한 하늘 쳐다보니
당신은 회색빛으로 거기 누워 있네
그날,
고개 떨구고 이별의 모습으로
묻어 두어야 할 사연 감추며
가슴으로만 감싸 안던 수많은 이야기들
내 가슴에 들어와 괴롭히던 속앓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히 그려 놓고
당신은,
그리움이라는 올가미 하나
튼실하게 걸어 두고 저 멀리 떠났네.
♥
여로 (旅路)
博川 최정순
땅 끝에서
또 다른 땅 끝
잃은 것 어느 하나
메울 길 없는 마음으로
여명黎明의 새벽길 허청이며 달려
청갈치빛 서늘한 하늘에
이별의 필무가筆舞歌 튕기우며
헐떡이며 울렁거리는 가슴
흰 보자기 가득 담아 두고
서먹하게 서먹하게
모두를 잃고
모두를 얻으러
다시 가야만 하는 발길
나그네 족적足跡.
모란
博川 최정순
태백산맥 준령 넘어
비탈길 따라 내려오던
뜨겁고 칼칼한 풍염風炎의 이향異香
대지 가슴 사무치게 붉어지며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는데
부질없이 붉어진 고개 떨구니
나 두고 가는 급한 바람
잠시 더 쉬어 가면 좋으련만.
꽃무덤
博川 최정순
비 오면 비 와 울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온몸 뒤채며 흔들리다
불타는 열병 소진 못해
탁탁, 희나리 튀는 듯
쓸쓸함 가슴 적시는 밤
님 향한 그리움
보름달처럼 휘황한데
꽃눈개비에 부서진
결별의 발자국 멀고 멀어
당신의 잔혹한 뒷모습
처연하다 못해 외로웁고
죽어 가는 모습으로
오늘도 몸부림치며 꽃보라
하롱하롱 분분히 흩날리다
동살 덮는 애절한 나의 꽃무덤.
두견새
博川 최정순
님의 숲에서
목 터져라 피 토하며 우는 밤
한때 걸쳤던 진주홍빛 옷 벗고
벌집처럼 시커멓게 구멍 난 시간들
주체할 길 어찌할 길 없어
튼실한 이음줄로 지배했던
지난날의 특별함 속으로
걸망 하나 둘러메고 날아가니
버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단상들
오로지 너 향하던 님의 선연한 눈빛
어디에도 꼬리 감췄네
무섭게 몰려드는 갈증 떨치려
이슬에 술 타 마시는 밤
눈물의 꽃가람에 홀로 닻 내리고
저 멀리 멀어진 님의 곁 그리워
목이 타도록 너는,
울고 울더라.
연지리에서
博川 최정순
울산 연지리 현내 방파제
짙은 속앓이 안개숲
암무(暗霧) 새벽 적막 비웃고
어디선가 흐르는 실비단 노래
바닷가 고요 두드리네
농밀한 습기 속 떠도는 너의 넋
낚시대 드리운 내 곁 다가와
못다한 밀어 속살거리며
해변 풍경 가뒀나
너의 첫사랑 몸짓은 명료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대상 지운 수목화
몽환적으로 피어나네.
는개
博川 최정순
오랜 시간 강렬한 햇살 들볶이다
대지가 토해낸 뜨거운 숨결
하늘 맺히고 맺히다 몽우리져
아래로 아래로 내리는 실비
피멍 맺히도록 이 악물어 참고
참았던 젊은 날의 초상
설움 복받쳐 응어리진 가슴에
예리한 칼날 결결 난자당하며
오는 듯 안 오는 듯 내리는 너는,
가슴 헤집으며 쓸쓸히 속삭이다
사라지는 나의 눈물이던가.
♥
야생화
博川 최정순
멀고 깊은 산길
명지바람 흔들리는 잡목 사이
너 고개 숙여 수줍은 미소 짓는데
잠깐 고개 숙여
이름 없는 너를 보며
제자리 종종 돌다
황망히 네 자리 떠나며
등 돌려 뒤돌아보니
아주 오래전
알았던 사람이던가 싶어
가던 걸음 멈추고
쉬이 못 가네.
♥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파초
博川 최정순
고향 멀리 떠나 반그늘지고 습기 많은 땅
뿌리 줄기 잎 밑동 감싸 헛 줄기 이루고
연노란 꽃 여름 가을 두 줄로 나란히 펴
장관 이뤄 기세등등 만산편야滿山遍野하였지
잎 하나 우산만 하여 얕은 돌담 덮고
거칠 것 없이 황금 꽃 피웠네
폭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고개 숙이다
삭풍 전선줄 붙잡고 울기 시작하면
자랑스런 황화黃花 푸른 잎 모두 떨구고
갈색 퇴물로 변하여 하늘 보면
맥없이 멀어져 간 아스라한 전설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
남쪽 향한 그리움에
복장 터지는 울음으로
온몸 부여안고
속으로 운다.
둥지
博川 최정순
둥지는 또 다른 한 누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미가
알을 품듯 품고 있었음을
서로 어미가 되어
상봉하며 알았네
앞으로도 그렇게 어미는
우리를 한 둥지에 품어
하나로 만들 것이기에
실망과 좌절 딛고
아픔 다스리며 살 것이네
참을 만치 참아가며
사랑으로.
♥
아버지의 그림자
博川 최정순
이유 없는
그리움이
뭔지 알아질까.
오래 묵힌
뒤돌아선 그림자
곰삭아져
툭! 떨어진
그리움 하나
있다.
그것은 아버지
구름꽃
博川 최정순
하늘에 덩실덩실 떠 있는
터질 듯 부풀은 구름
타래마다 사랑 행복 희망 담고
하늘하늘 몽실몽실
날이면 날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다니다
억겁의 인연 찾아
오늘도 서로 어울리는데
저 하늘 집이던가 고향이던가.
청옥처럼 푸른 하늘의 하얀 꽃밭
해 서편 바다 빠질 무렵
붉은 구름꽃 활짝 만발한다.
♥
구름과 나
博川 최정순
하늘이 제 집이라서
바람결 주춤주춤 흘러와
계곡 어느 외딴집
지붕 위 잠시 머물다
장독대 항아리 속
간장에 헤엄치며 놀다
물수제비 뜨는 개구쟁이
눈 속에 머문다
내 마음도 구름 같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가
어느 날 무심히 돌아선
당신의 그림자에 내려앉는다.
♥
홀로 가는 길
博川 최정순
어느 닭 울던 날 새벽
빈손 울음 터트리며 세상 움켜쥐고
종달새 짝 찾아 하늘 교감하는 벌판 넘어
독사 대가리 치켜들어 독 품는 골짜기 지나
벌 나비 향기롭게 춤추는 장미 정원 가로질러
달 별 꽁꽁 어는 극지방 어둠 서성이다
지천명 고개 허위허위 올라 보니
저 멀리 이순 고개 운무雲霧 쌓여 아득한데
바위 달린 팍팍한 무거운 발걸음
오르다 뒤돌아보니 외로움만 길게 누워 있네
진애塵埃 고개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폭풍한설 사지 동강나며 위태위태 걸어온 길
저 고개는 또, 누구와 함께 갈까.
♥
나의 쉼터에서
博川 최정순
세파에 허우적거리다 찾은
자연지형 살린 친환경 별똥카페
녹슬어 흑석 같은 외벽에
사위가 컴컴하여 그냥 산속
화전민 소원하던 성황당
전통 민속 공연장
설치작가 규화목
세월의 검은 이불 덮었네
잔별 무리 져 나무지붕 아래 쏟아지고
반딧불이 박꽃 주위 원무하는데
아득한 산골짜기 계곡 물소리 청아하여
돌계단 따라 야트막한 공원 오르니
저 멀리 의림지엔
월신月神이 은가비 소요하고
신선이 잠자는 원시림 속
피톤치드 세로토닌 음이온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세속의 앙금 말끔히 씻어내니
내 잠자는 육신에서 날아오르는 새
요부의 춤사위처럼
현란한 오색 형광 폭포수에 춤추다
눈 먼 어리석은 이슬 되어 내 찻잔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