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시 산책
Wedding Wind │ Philip Larkin (1922~1985)
The wind blew all my wedding-day,
And my wedding-night was the night of the high wind;
And a stable door was banging, again and again,
That he must go and shut it, leaving me
Stupid in candlelight, hearing rain,
Seeing my face in the twisted candlestick,
Yet seeing nothing. When he came back
He said the horses were restless, and I was sad
That any man or beast that night should lack
The happiness I had.
Now in the day
All's ravelled under the sun by the wind’s blowing.
He has gone to look at the floods, and I
Carry a chipped pail to the chicken-run,
Set it down, and stare. All is the wind
Hunting through clouds and forests, thrashing
My apron and the hanging cloths on the line.
Can it be borne, this bodying-forth by wind
Of joy my actions turn on, like a thread
Carrying beads? Shall I be let to sleep
Now this perpetual morning shares my bed?
Can even death dry up
These new delighted lakes, conclude
Our kneeling as cattle by all-generous waters?
결혼식 날 불던 바람 │ 필립 라킨 작·백정국 역
내 결혼식 날 온종일 바람이 불고,
초야는 바람이 거센 밤이었다.
마구간 문은 연달아 덜컹거려
그이는 가서 문을 닫아야 했고, 난 뒤에 남아
촛불 아래 멍하니, 빗소리를 들었다.
뒤틀린 촛대엔 내 모습이 비쳤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이가 돌아와선
말들이 불안해 한다고 했다. 난 슬펐다.
그날 밤 내가 누렸던 행복이
다른 사람, 다른 짐승에겐 없었기에.
이제는 한낮
해 아래 모든 것은 몰아치는 바람에 헝클어져 있다.
그이는 불어난 물을 살피러 갔고, 난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물통을 들고 닭장으로 가,
물통을 내려놓고, 쳐다본다. 바람은 온통
구름과 숲 속을 달려 사냥을 하고,
내 앞치마와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를 채찍질한다.
바람으로 살을 얻은, 내 행동이 불 지핀 이 기쁨,
구슬을 꿰고 있는 실처럼,
온전할 수 있을까. 잠들어야 하나.
이제 영원한 아침이 나와 잠자리를 같이하는데.
죽음이언정 이 새로운 환희의 호수를
말려, 사방이 넉넉한 물가에서 소처럼 무릎 꿇은 우리에게
종말을 가져올 수 있을까.
작·품·읽·기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나 미친 듯이 사랑하다 애틋하게 헤어지는 남녀간의 이야기에 얼마간의 낭만적인 환상을 갖고 있다. 불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은근히 부럽고, 사춘기인 아이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불량’청소년이 될까 두렵지만, 그런 사랑 한 번 못해 보고 철없이 결혼한 것이 가끔은 후회된다.
적당한 계절에,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속도로 달려오는 자전거에, 적당하게 치어, 자전거를 탄 사람과 가슴 저미는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여자도 있다던데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 난 몇 번의 탐탁하지 않은 중매 끝에 간신히 결혼해 애만 줄줄이 낳고, 그 애들은 속만 썩인다. 하지만 허다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들도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면이 있어 그나마 좀 살맛이 난다. 대체로 이 친구들은 결혼식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거나, 한다 해도 쓸쓸하기 짝이 없다.
본인의 경우든 자식의 경우든, 우리는 근사한 결혼식을 꿈꾼다. 이제껏 생각해 본 적 없는 길일吉日에 신경을 쓰고, 일기예보도 꼼꼼히 챙긴다. 계절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팽창하는 생명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어 대지가 그 기운을 싹으로 터뜨려 치올리는 봄이나, 들판의 오곡백과가 다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가을이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게 공들여 치른 결혼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필립 라킨의 「결혼식 날 불던 바람」은 그 잘못된 ‘무엇’이 무엇일까를 경건하게 되짚어 보게 하는 시로 읽힐 수 있다. 이 시가 더듬고자 하는 것은 결혼식 날 폭풍우가 몰아쳐 강은 범람하고 바람은 그칠 기미가 없어도 그저 행복에 겨운 어느 시골 새색시의 순박한 감정의 결만은 아니다. 이 시는 지속 가능한 사랑의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이 결혼이라는 행위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녹록하지 않은 시다.
시적화자가 기억하는 결혼식은 통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길한 결혼식이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혼날짜를 지지리도 잘못 잡은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프로스페로라도 혼례식날 몰아치는 비바람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홍수를 초래한 험한 날씨에 위축되지 않는다. 결혼이 환경종속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인식과 험한 비바람도 귀한 자연의 일부로 수용하는 겸손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감정의 단속이다. 시인은 이런 마음을 가진 처자의 결혼식을 특별한 방식으로 ‘축복’하는데, 그 축복이란 순환논리처럼 들리겠지만, 바로 폭풍우다.
비와 바람은 감각적인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파괴력을 가진 폭력적인 자연현상이다. 이 시 속에 몰아친 비바람은 결혼식을 망쳐놓진 못하더라도 만물을 헝클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마구간 문을 요동치게 하고, 홍수를 일으키고, 숲을 헤집어 놓고, 앞치마와 옷가지에 매몰차게 채찍질을 해댄다. 하지만 이 폭풍우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대상은 일련의 물리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결혼식 직전까지의 두 연인의 삶인 것처럼 보인다. 독자가 폭풍우의 파괴력을 목도하는 순간은 정확하게 이 부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이다. 폭풍우는 이 두 남녀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서 만났으며,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한 독자의 당연한 호기심을 잠재워 버린다. 결국 우리는 이들의 사랑이 결혼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처럼 생각된다.
결혼을 사랑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키지 않는 듯한 시의 모양새는 화자의 기억 속에 불던 바람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신비함과 사랑을 둘러싼 실존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엄숙한 바람이라는 암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신의 창조 작업에 수반된 역동성, 새로운 인류 전파를 위한 매개적 현상으로서의 대홍수의 모티브가 결혼식 날 불던 바람을 통해 감지되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신의 창조 작업에 참여하는 신성한 의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 참여는 결코 수동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가 힘겨워하는 사랑과 결혼의 주된 문제는 내 인생의 반려자가, 완벽한 모습으로 내 앞에 뚝 떨어져 주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완벽한’이라는 말은 더 이상의 노동의 부재를 전제하는, 남녀관계에서 가장 불온하고 가장 이기적인 말처럼 들린다. 천지창조의 과정에 신의 노동이 있었다면, 또 다른 종류의 창조 행위인 결혼에도 반드시 노동이 있어야만 한다. 「결혼식 날 불던 바람」에서 발견되는 낭만이 노동에 근거한 낭만인 소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낭만이 성적性的인 노동을 다소 비켜가는 낭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폭풍우가 신혼부부의 격정적인 초야를 상징하긴 하지만, 그 밀월의 밤은 덜컹거리는 마구간 문에 방해를 받는 소란스런 밤이다. 오히려 신부의 진정한 행복은 남편이 달콤한 신방을 떠나 비바람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마구간을 살피고 돌아올 때 찾아온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 비록 그 대상이 짐승일지라도 - 희생시키지 않는 배려와 그에 수반된 노고가 신부를 정녕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고에 기초한 사랑은 튼실하고 전염성이 강하다. 시골 살림살이라고 해도 결혼식 이튿날 아침 시원찮은 물통을 들고 닭장으로 가는 일을 반길 신부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될까. 그것도 다시 빨아야 할지도 모를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어지럽게 날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또 어느 새색시가 빨랫줄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고 실에 꿰인 구슬 목걸이를 연상하며 사랑의 견고함을 묵상할까. 이 시의 화자는 정확히 그런 드문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동화에 등장하는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는 치열한 삶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치다. 화자에겐 그녀와 남편이, 피할 수 없는 고된 삶의 노동이 갈증을 가져올 때 물가에서 그저 ‘함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한 쌍의 가축이면 족하다. 그 무릎에 죽음도 무릎을 꿇으리라 믿기에.
■ 필립 라킨Philip Larkin (1922~1985)
평생 독신으로 살며 죽기 전까지 30년 넘게 대학도서관의 사서로서 일했던 영국의 시인. 토마스 하디의 시를 발굴했으며 그의 시에 큰 영향을 받았다. 2008년 1월 영국의 『The Times』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시인으로 뽑혔다. 라킨은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인으로 시낭송회에 참여하거나 대중강연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말년에는 ‘헐 대학의 은자’라는 애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사귀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때로는 상스러운 유머도 즐겼다고 한다.
라킨의 시는 주로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통찰을 소박하고 전통적인 언어로 담아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감상적인 자기연민의 순간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종종 ‘비낭만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나이 60에,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모든 사적인 기록들을 불살라버리겠다고 약속했으나, 3년 후에 사망했을 때 편지와 일기 등 많은 귀중한 글들을 세상에 남겼다.
첫댓글 요즘 영미시 읽는 기쁨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만큼 번역하시는 분의 시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새삼 개닫습니다. 백정국 선생님이 우리시에 매 달 영미시를 번역, 소개해주셔서, 감상하는 재미를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