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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방에 나의 과거와 현재 ,남은 인생, 그리고 여러가지 생각과 글을, 시간나는 대로 또 생각나는 대로 쓰고 고쳐쓰고를 반복하면서 원고를 완성코자합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가급적 초등학교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쓸 것입니다.
1. 나의 삶을 돌아보며
가.고향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람마다 그 의미와 느낌이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지금도 부모님이 계시거나 친척들이 남아있다면,
현실의 고향과 마음의 고향이 일치하니 그의미가 애틋하고 푸근할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태어난 곳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를 다녔으면 개념이 모호해지기도 할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사전을 뒤져보니 고향이란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니 고향이 하나일 수도 두셋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또한 1과 2는 구체적이지만 3은 추상적이다.
나는 본관이 김해이나 김해에는 가본 적도 없다.
아버지와 5대의 조상이 충북 단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가 10대 후반 쯤 단양을 떠나 서울로 오셨다. 나는 단양에는 몇번 가봤지만 단양이 고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태어나 인근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학년때 동대문구 전농동으로 이사갔다.
어릴때라 서울에서의 학교생활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없다. 전농동에서는 얼마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소방서에 다니시다가 그만두시고 자영업으로 조그만 신발가게를 하다가 망했다.
그래서 이사를 갈때마다 집이 작아지고 허름해졌다. 그래서인지 서울생활이 그립다거나 정들었다는 생각이 없고 당연히 고향이라는 느낌도 없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춘천으로 이사와서 1979년까지 22년을 살았다.
사업하다 망한후 온 곳이 춘천이니 춘천에서의 생활도 상당기간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긴했으나 넉넉했다거나 여유로왔던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그리고 대학졸업후에도 한동안 살았던 곳이며 청소년시절 갖가지 추억이 담겨있고 꿈을 키웠던 곳이 춘천이니 제1의 고향임이 분명하다.
나. 초등학교시절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온 때가 1957년 이었을 것이다. 1학년때 전학온 것이니 초등학교 1학년을 세군데서 다닌 것이다.
이상하게도 초등학교시절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많지 않다.
10여년전 쯤인가 동기생모임에 처음나갔을 때 여자동창 하나가 특히 반기며, 내가 자기 짝이었으며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서로 넘지 못하게 하곤 티격태격 다투었단다.
참으로 놀라웠다. 어떻게 그런게 생각이 날까? 그리고 나는 왜 전혀 기억에 없을까?
고등학교 동기모임에 가보면 중고등학교때 학년마다 몇반이었고 단임선생님은 누구였고 같은반에 누구누구가 있었다고 줄줄이 읊는 애들이 있다. 그 신통한 기억력에 놀라고 내가 그런 것을 거의 기억 못하는 것에 또 놀란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억할 수 있는 전체 용량은 비슷하고 그래서 하나를 새로 기억하면 먼저 기억했던 하나를 잊게되는 것은 아닐까?
각설하고 초등학교시절 기억나는 몇가지를 써보련다.
< 소심하고 얌전한 학생 >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선생님말씀 잘 듯고 말썽 안 일으키고 조용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은 적도 별로 없고 또 칭찬받은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순한 성격에다 고집이 쎈 것도 아니고 몸집도 작았으니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투고 싸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남을 괴롭히지도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은 평온한 생활이었던 것같다,
주먹을 쥐고 싸웠던 적이 몇번은 있었는데 동급생이 아닌 한학년 아래 덩치큰 아이들 하고였다.
대부분 동네 형들이 재미삼아 싸움을 붙였다.저학년 아이에게는 나의 작은체격을 만만하게 보게 하고 나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식이었다. 다행이도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서로 부모가 모르게 넘어가곤 했다.
이시절 같이 자주 어울렸던 아이들은 집이 가까웠던 김춘식, 강이수 그리고 통학길에 집이 있던 심용흠, 연영길 등이 있다.
여자아이들하고는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 여자애들은 별다른 매력이 없었을 나에게 관심이 없었을 터이고 나도 여자애들에게 흥미를 갖지 못한 것 같다.
여자애들 중에서는 김이순이 기억에 남는다.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학교대표로 춘천시내 초등학교대항 주산대회가 있었는데 연습하다가 밤이 늦어지면 우리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이순이는 그때 덩치도 크고 어른스럽기도 해서 동급생이라기보다는 한참 위의 누나처럼 느껴졌었다.
< 실력도 없이 대회에 나가다 >
6학년쯤일 것이다.
학교대표로 선발되어서 춘천시내 초등학교대항 성격의 대회에 두번 나갔다.
한번은 주산대회였다.
숫자를 불러주면 주판없이 암산으로 계산해서 답을 적고, 칠판에 숫자가 적힌 커다란 종이를 잠시 걸어 놓았다 치우는 사이 계산을 해서 답을 적고, 숫자가 적힌 시험지를 나눠준후 일정시간내에 계산해서 답을 적는 세가지 유형의 문제였었던 것 같았다.
나는 계산한 답이 틀리기도 했고 시간이 모자라서 답을 적지 못하기도 했다.
당연히 나는 입상을 못했다. 내 기억에 우리학교에서는 성남용이 입상을 했었다.
조금은 아쉬웠었다.그러나 내실력이 확실히 모자랐었다.
큰누나 같았던 김이순도 참여했던 것 같은데 입상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또한번은 사생대회였는데 준비가 채 안된채로 참가했었다. 주산대회때는 대회전에 여러날 방과후에 모여서 연습을 했었는데 사생대회에는 사전준비가 없었다.
미술시간에 그린 수채화가 어쩐일인지 액자에 넣어져서 교실벽에 걸렸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학교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사생대회니 눈에보이는 풍경을 그리면 되는 것이었다.
도구는 현장에서 나눠주었는데 내게는 물감이 아닌 크레용이 배정이 되었고 나는 미처 색칠도 다 끝내지 못하였는데 정해진 시간이 다 지나갔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내 솜씨가 부끄러웠었다. 그 뒤로도 나의 그림솜씨는 별로였다.
우리학교에서는 입상자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아마 학교에서도 큰 기대없이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산과 그림솜씨도 별로 였지만 다른 재주는 더욱 없었다.
다. 끔찍한 사건과 기억 몇가지
오십년대와 육십년대는 모두가 기억하듯이 가난과 혼돈 그리고 격변의 시대였다.
여름이면 홍수로 겨울이면 추위로 사람들이 적지않게 죽었고 복어내장을 끓여먹고 죽기도 했다.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 무심했고 대범했다.
< 소양강과 홍수 >
춘천으로 처음 이사와서 자리잡은 집은 지금의 소양교가 시작되는 곳의 좌측 소양강과 인접한 곳이었다. 마당이 제법 넓었던 기역자집의 문간방으로 부억딸린 방 한칸이 우리식구가 거처했던 곳이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배터 즉 선착장이 있었는데 그때는 배텃게 라고 불렀다.
서면의 금산리, 중도 등은 지금도 채소류를 많이 재배하는데 그곳에서 재배한 무우 배추 파 상추 등 각종 채소가 배를 타고 배텃게로 와서 춘천시내 각지로 팔려나갔다.
지금은 그일대가 헐려서 제방의 일부가 되거나 큰 길로 편입된 것 같다.
부모님은 매일 선착장에 가서 채소를 조금씩 사다가 서부시장이나 중앙시장에 가서 팔았다. 이른바 노점상이었다.
아뭏튼 그집에서 오래산 것 같지는 않고 얼마후 춘천역 뒤 소양강가로 이사왔다.
그때만해도 소양댐은 물론 의암댐도 없었을 때이니 소양강이 꽤 크게 흘렀고 중도와 위도에도 상당히 많은 집과 농토가 있었다.
그당시 소양강은 평상시에는 넓은 백사장과 깨끗한 자갈 그리고 많은 물고기가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도 훌륭한 휴식처였다.
나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물고기를 잡거나 미역을 감으며 보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곤했다. 소양강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장마철만되면 해마다 홍수가 나곤 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두번의 큰 홍수가 있었다.
홍수때에는 좋은 구경꺼리가 있었다.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둥둥 떠내려 오기도 했고 소나 돼지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사람이 몇명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두번의 큰 홍수중 한번은 피난은 갔었지만 우리집이 침수되지는 않아서 아무탈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두번째에는 홍수규모가 훨씬 커서 우리동네 주민 대부분이 근화초등학교로 피난을 갔었고 우리집도 물에 잠겨버렸다.그때가 중학생이었던 것같다.
소양강 바깥쪽에 제방이 있어서 강물에 휩쓸리지는 않았고 물이 들어왔다가 조용히 빠져나갔기 때문에 지붕이나 뼈대는 멀쩡했다.
문제는 집안이었다. 온갖 오물이 집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참기 어려운 냄새가 가득했다.
쌓였던 쓰레기와 오물은 치워냈지만 퀴퀴한 냄새는 오랫동안 지속됬었다.
그때문에 홍수로 물에 잠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이난게 나았을 꺼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장마철에 홍수가 나서 집과 논밭이 침수됬다는 뉴스를 보면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군인들의 안전사고 >
다소 생뚱맞은 제목을 달았는데 사실 끔찍하고도 허망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50년대는 물론이거니와 60년대에도 춘천에는 군인이 많았다.
휴전선이 가까운 곳이기에 춘천시내에도 외각쪽에는 군부대가 많았었다.
우리집 부근에 103보충대가 있어서 군인들의 이동이 빈번했고 수송부대도 있어서 군차량의 왕래도 많았었다.
의암댐이 생기기전 소양강가에는 군대차량이 여러대씩 몰려와서 흐르는 강물에 세차를 하고 차 그늘아래에서 운전병과 조수등이 한참씩 낮잠을 자다 가곤 했다.
한여름의 햇빛이 뜨거운 어느날이었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동네 친구들과 강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군인이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돌아보니 저만치 군차량이 몇대 보였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달려가보니 시신은 이미 다른곳으로 이동되어 보이지 않았고 사고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핏자국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피가 뭍어있는 순두부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군인들의 머리가 터져 골속이 빠져나온 것이다.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치며 현장을 급히 떠났는데 그 생생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한동안 잠을 잘 못자기도 했다.
세차를 끝내고 사병들이 차 밑과 주변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운전병이 깜빡 잊고 차를 후진시키다 일어난 사고였단다.
그시절에는 사람죽는 것이 흔하기도 했고 사람목숨의 가치가 지금보다 못했는지 놀라운 뉴스꺼리도 아니던 때의 얘기다.
< 분신자살 >
중학교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집에서 춘천중학교까지는 걸어서 대략 4~50분 걸렸던 것같다.
집에서 나와 뚝방길을 한참 걷다가 뚝방길에서 내려와 철로길을 걷다보면 춘식이네 집을 지나게되며 거기서 조금지나게되면 남춘천역으로 가는 철길과 분리되어 시내쪽으로가는 철길이 따로 있었다.
그 철길로는 석탄이나 목재 등 화물이 이따금 운송되며 평소에는 사람들이 길처럼 이용하였다.
가을이나 초겨울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그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철길따라 쭉 늘어서 있는 판자집마당으로 불길이 뛰어나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군용담요로 불길에 휩싸인 사람을 덮어주었다.
담요에 휘감겨진 그 사람은 몇걸음 뒤로 물러서다 철조망울타리에 부딛히며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때 위로 뻗었던 손이 철조망에 긁히면서 불에 데어 익은 손등의 피부껍질이 훌렁 벗겨졌다.
불에 탄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집은 멀쩡하고 사람만 불에탄 것으로 보아 분신자살을 했었던 것같다.
그뒤로 불에 타던 그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시절에는 그런 저런 일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흔한일이었다.
사람목숨이 천했던 시절이었으니까.
< 우동과 미원 >
< 포니2 >
2. 선생님과 친구
가.생각나는 선생님
초등학교때부터 대학졸업때까지 15년이상 학교에 다녔으니 수많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분들 중에는 못잊어하거나 존경하는 분이 몇 분은 되어야 할텐데 딱히 그런 분이 생각나지 않는다.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아니면 내 성격 탓일까?
그래도 생각나는 분이 한분 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단임이셨는데 성씨가 '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꽤 엄하셔서 학교에서 규율담당을 맡으셨던 것같다.
4학년 1학기가 끝날때 쯤이나 2학기가 막 시작하였을 때 였을 것이다. 선생님이 "너 공부 곧잘 하는구나" 라고 칭찬해주셨다.
아마 시험을 잘 보았던가 보다. 어쨋던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칭찬을 들었던 것같다. 칭찬에 너무 기분이 좋았었다.
가능성을 인정해주신 것같아 우쭐한 마음도 생기고 또다시 칭찬을 받고 싶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했다.그 후로 학업성적이 꾸준히 올랐다. 공부 잘하는 학생축에 끼기 시작했다.
"칭찬보다 더 좋은 교욱은 없다"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같은데 과연 그말이 맞는 것같다. 특히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지금 그 선생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다른 아이에 대해서도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해주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재능에는 수없이 많은것이 있다고 본다.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 , 손재주가 좋은 사람 , 발재주가 좋은사람, 목소리가 좋은사람, 남을 돕기를 잘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상상력이 좋은 사람,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 등등등.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좋은 재능을 빨리 찾아내서 그것을 개발하고 키워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본다.
세상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 잘하는 사람의 몫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의 교육목표가 시험성적 올리는 데 매달려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낭비라고보며 우리교육계가 빨리 고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특별한 친구 생각나는 친구
초등학교시절 자주 어울리고 인연을 맺었던 친구로는 김춘식 강이수 심용흠 연영길 등이 있다.
대부분 한 동네에 살았거나 등하교길에 같이 다녔던 아이들이다.
< 연영길 >
연영길과는 중학교때까지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는 춘고로 가지않고 서울(아마 배문고였을 것이다.)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키가 나처럼 작은 편이어서 교실의 앞자리에 나란히 앉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여러가지점에서 나와 달랐다.
우선 생김새부터 특이했다. 나처럼 펑퍼짐한 얼굴이 아니고 콧날이 서고 눈이 깊고 이마가 튀어나와 이국적이었다. 키에 비해 상대적으로 팔다리가 길어서 옷을 입으면 맵시가 났다. 그의 집에 갔을때 누나를 본적이 있는데 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그는 옷매무새에 신경을 많이쓰는, 멋져보이고 싶어하는 시쳇말로 폼돌이었다.
초등학교시절 그의 집은 소양교 윗쪽 봉의산자락 아랬쪽 소양강변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집이 무엇으로 생계를 이었는지는 모른다. 특이했던 것이 그가 싸온 도시락 반찬이었다.
나를 포함해 아이들 대부분이 고추장 새우젓 무짱아찌 등이었는데 그는 모래무지같은 민물고기로 조림을 한 것을 싸왔다.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소양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왜 그때 그 도시락반찬이 깊이 기억되고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중학교 졸업이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내가 서울직장에 근무하고 있을때 나를 찾아왔다.
아마 1970년대후반쯤이었을 것이다.업무상 필요해서 였는지 아니면 그냥 옛동창이 보고싶어서였는지는 생각나지않는다.
당시 그는 여의도에 있는, 봉제의류를 만들어서 미국에 수출하는 중소규모의 무역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자기집에 놀러가자고 해서 함께 갔었다. 송파구였는데 당시에는 강남의 변두리로서 그의집 주변은 채소밭이 많았다.
그때 이미 그는 결혼을 해서 아내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집을 아내가 설계했다고 한다.
부인이 홍익대 건축과를 나왔다고 그랬던 것같았다.
그래서인지 집구조가 다른집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뭏든 재능있는 아내를 얻은 것같아 부러웠었다.
그 이후로 한번인가 더보고는 연락이 끊어졌다. 나중에 미국에 산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그랬는데 지난봄에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중국이란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심용흠이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용흠이 한테 나의 연락처를
알았단다.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한단다. 아이들이 커 놓으니 애비 맘대로 안되더라는 푸념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08-6158-0198-3507 연영길
한국에 들어올 때도 있는데 그때 소주 한잔 하자며 통화를 끝냈다.
아다리가 잘되서 우리들이 동기생모임을 가질때 한국에 들어와서 함께 만날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심용흠 >
용흠이를 생각하면 늘상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다.
시쳇말로 잘 나가던 젊은 장교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군인의 길에서 중도하차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절망감 내지는 좌절감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운명이라 생각도 했을 것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의지도 생겼을 것이다.
그런 참담한 상황에서 사람마다 선택이 다를 것이다.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 체념하고 대충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좌절감을 떨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생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옹흠이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긍정적이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사고이후 그를 몇번 만났을 때 그늘을 본적이 없었던 것같다.
성공적인 삶이란 무었일까?
소위 출세한 것이 성공한 인생일까?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한 인생일까? 자식농사를 잘 지으면 성공한 인생일까?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어느정도 성취한 것이라면 괜찮은 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용흠이네 집은 근화초등학교로 가는 길에서 가까운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그의 집에 몇번인가 들렸었는데 그의 어머니도 보고 아버지도 보았다.
어머니는 항상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체격이 당당하고 풍채가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불평을 했었다.
일자리가 별로 없었던 그 시절 아버지중 어머니를 고생시키지 않은 사람이 몇%나 될까?
평범한 샐러리맨이 꿈꾸는 퇴직후의 모습은 대부분 다달이 연금이나 임대료가 나오고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시골에서 조그만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일 것이다.
용흠이가 지금 그렇게 살고있다. 그의 유유자적한 삶이 부럽다.
< 강이수 >
이수의 어릴적 이름은 남수였다. 언제부터 이수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형 이름이 일수이니 이수로 했나보다.
이수를 보면 항상 꿈꾸는 소년같다. 60이 넘어가는 나이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의 대부분이 희망사항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형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리고 소설가가 되어서 판타지소설을 썼다면 성공했을 것같다.
돈이 인생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한 제약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같다,
어릴적 이수네 집은 우리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양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마도 여름철 홍수때에는 집이 침수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함께 먹은 적도 있었는데 찬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도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던 이수였다. 그가 음식을 먹을 때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수의 아버님은 이수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수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단다.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서 자식들을 키웠을 이수 어머니의 고생이 어땠을까? 그때 이수 어머니의 연세가 얼마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여러개였던 모습이 기억난다.
남자가 결혼해서 부인에게 짓는 가장 큰 죄는 일찍 죽는 것이리라.
내가 평생 결혼식 사회를 딱 한번 보았는데 그게 이수 결혼식이었다.그게 70년대 중반쯤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아이셋을 년년생으로 줄줄이 낳았다. 박봉에 단둘이서 애들 키우느라 고생이 막심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다 자라서 큰딸은 지난여름에 시집을 가서 내년여름이면 아이를 낳는단다.
그 딸이 공무원으로서 맞벌이를 하고 있으니 아마도 아이 양육은 남수 내외의 차지가 될 것이다.
딸네 집은 이수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두째가 아들인데 금년가을 괜찮은 중소기업에 취직했고 막내아들은 카나다로 어학연수를 보내놨다.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부모로서의 역할은 나름 성실히 했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이수 자신이다. 내년 6월이면 그도 퇴직을 해야한다.
퇴직하면 연금이 나오니 생활은 그럭저럭 될터인데 시간 보낼일이 막막한가보다.
정말로 이수는 술 잘먹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없이 살아왔다.
바둑도 테니스도 당구도 모르고 낚시도 해본적이 없단다. 매일 등산만 할 수도 없을 테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강좌를 몇개 들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낚시를 해 볼 생각인가보다.
낚시하고 문화강좌 듣고 등산하고 외손주 돌봐주고 하면 그럭저럭 세월이 갈 것이다.
시간 날때마다 판타지소설을 써보면 어떨까한다.
< 김춘식 >
초등학교시절 춘식이네 집은 우리집과 한동네에 있었다. 그것도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중학교 다닐때 쯤인가 춘식이네가 이사를 갔는데 우리동네와 춘천중학교의 중간쯤되는 곳의 철길옆에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하교길에 자주 들리게 되었다. 자주 만나다보니 저절로 친한 친구가 된 것이다.
춘식이는 형제가 많다.. 모두 칠남매다.
형님이 객지에 터잡고 사시기때문에 춘식이가 사실상 맞이 노릇을 하고 있다.
가난한 집안의 맞이노릇하려니 고달픈 일이 많을 것이다.
춘식이 아버지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통이 굵은 장사형의 체격이셨다.
춘천역의 대한통운에서 화물하역작업을 하셨는데 월급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당시로서는 꽤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과묵하시지만 부드러운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춘식이 어머니는 작은 몸집에 부지런하고 활달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시다.
얼마전 그의 어머니를 오랬만에 뵈었는데 허리를 다치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다.
연세가 팔십셋이니 여기저기 고장이 나실때도 되었다.
나를 보고 엄청 반가와 하셨는데 건강을 되찾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춘식이는 글씨를 잘 썼다. 연필그씨도, 펜글씨도, 붓글씨도 모두 잘 썼다.
내 주위에서 본 아이중 글씨체가 가장 예뻤다. 서예가로 나섰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바둑실력도 그림솜씨도 나보다 났다.
가정형편이 좋았더라면 예술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나와 춘식이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지만 친구따라 학교를 자퇴한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춘식이와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 2학년 여름방학때 둘이 함께 자퇴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결정하고 춘식이에게 알려줬고 춘식이가 따라했다.
그과정에 무슨 심각한 사연이 있었던게 아니라 어설프기 그지없다.
나나 춘식이나 모두 사춘기였고 학교생활이 시시했고 재미없었다.
더군다나 긴 인생을 생각하고 큰 그림을 그리고 심각하게 결심한 것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시절 즉흥적인 판단일 뿐이다.
춘식이는 얼마후 공무원시험에 합격해서 교육공무원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게되어 내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나로 인해 학교생활을 중단하였으니 마음 한구석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큰 탈 없이 직장생활을 했고 딸과 아들 남매를 낳아 대학졸업을 시켰으니 부모로서의 기본책임은 했다고 본다.
그가 금년 유월에 무사히(?) 정년퇴직을 하였다.
술 먹으면 가끔씩 발동하는 고약한 주사가 있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남편 잘 챙겨주는 부인덕에 가정생활도 별다른 위기를 격지 않았다.
더군다나 부인이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해 그의 노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술만 절제할 수 있다면, 술을 조금만 덜마시면, 노후생활이 근사할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그것이 쉽지 않은가 보다.
알코홀을 잘 분해하는 좋은 간을 가진 것이 무조건 좋은 것 만은 아닌가 보다.
3. 나의 가족
< 아버지 >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단양이고 사형제의 맞이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전혀 기억에 없다.
할아버지때부터 형편이 어려웠던 것같다.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 공부하고 초등학교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가진 전답이 변변치 못했고 배움도 부족했으니 시골생활에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년시절 서울로 오셨다.
어떤일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소방관으로 일하시다가 장사를 하셨다.
서울에서 하신 마지막 장사가 서대문 영천시장에서 차린 고무신가게였는데 사기를 당해 쫄딱 망했다.
그바람에 전농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무렵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그곳에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아버지를 심하게 닥달하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는데 어린 가슴에 큰 상처를 받았고 아버지가 무능해 보였다.
어린자식이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한 아버지는 나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얼마 뒤에 우리가족은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 빚쟁이를 피해 도망간 셈이다.
아버지가 무능하면 어머니가 고생하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양교 및 뱃터에서 서면 금산리나 중도 등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채소를 사서 중앙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파는 노점상을 하셨다.
술은 여전히 드셨지만 양을 줄이셨다.
노점상일을 나름 열심히 하셨는가 보다. 돈을 좀 모으셔서 춘천역 뒤에 있는 살림방이 딸린 가게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렵기는 했지만 형펀이 조금 나아졌다. 어린 자식들이 걱정이 되어서일까 술도 덜 드셨다.
아버지는 그닥 자상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엄하시지도 않았다. 매를 심하게 맞은 기억도 크게 야단맞은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쉰일곱이던 1969년 9월 1일에 돌아가셨다.
그날은 대학 들어가서 첫 여름방학을 마치고 이학기 첫 개강을 하는 날 이었다.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던 룸메이트가 춘천에서 전보가 왔는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놀라고 의아해하니 그제서야 돌아가셨다고 애기해 주었다.
당시에는 우리동네에 전화기 있는 집도 없었으니 집에 가기전에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절망감속에 허둥지둥 집에 도착해보니 입관준비를 해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은 방이 세개였다.
방 두개를 튼 안방과 공부방으로 쓰던 건너방 그리고 가게에 딸린 방이 있었다.
여름내내 연탄불을 피우지 않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처음으로 불을 피우고 아버지혼자 주무셨는데 연탄가스가 새어들어와 가스에 중독이되어서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고단하신 삶을 접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불과 마흔 아홉이었고, 여동생은 중학생, 두 남동생은 초등학교 삼학년과 사학년 이었다.
너무 황망해서일까 아니면 집에 오면서 많이 울었기 때문일까 장지에 가기전까지의 장레절차중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상주가 너무 울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았다.
동네 어른들의 도움으로 학곡리 시립묘지에 안장하였다.
해마다 한식때와 추석에는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관리도 하였는데. 산소 주변에 나무들이 많아서 갈 때마다 일꺼리가 많았다.
잔디를 깎는 것 외에도 잡풀도 뽑고 씨앗이 떨어져 자라난 어린나무도 뽑고 산소 주변 나뭇가지도 잘라주어야하니 서너시간은 족히 걸렸다.
산소관리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허름해 보이는 시립묘지에 모신 것이 맘에 걸리기도 해서 오년전에 강촌에 있는 경춘공원묘원으로 이장을 했다.
전망도 좋고 갈 때마다 항상 깨끗이 관리가 되어 있어 좋기는 한데 그곳의 토질이 학곡리만 못하다.
내가 편하자고 공연히 이장을 한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 어머니 >
어머니!
어머니라는 세글자를 읍조리다보면 누구나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데 대한 고마움, 고생하신 것에 대한 애틋함,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효도를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등등.
특히 우리들의 어머님들은 육이오전란을 겪으면서
4.인생에 대하여
가.어른으로 산다는 것
나.늙은이가 된다는 것
다.생을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는가?
라.세상과 이별하는 방법
구구팔팔이삼사(九九팔팔二參死)
잘 아시겠지만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서 죽는 것,
나이든 사람들의 희망사항이요 꿈이다.
세상을 떠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한때는 나이든 사람들의 모임 때 건배구호로 쓰이기도 하였다.
혹가다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가 못하니 한낮 꿈에 머물고 만다.
늙은 시부모가(친부모 일지라도) 그런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 며느리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자식들 마저도 내심 싫어할 것이다.
아버님은 워낙 일찍 그리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셨기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시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죽는게 좋을까 라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2011년 9월 17일(추석이 지나자마자) 우리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2012년 2월 6일 돌아가셨다.
입원기간은 4개월 20일 정도였다.
입원하시기 몇달 전부터 어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작년초에만 해도 외출하면서 밥을 차려놓고 가면 점심때 보온밥통에 데워논 국을 떠서 식사를 하셨는데 여름부터는 끼니를 못 찾아 드시고 굶는 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왜 안드셨냐고 물으면 배가 안 고파서 라고 하시던가 아니면 잠을 자느라 잊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치매가 있으셔서 장기요양등급 3등급 판정을 받았는데 치매증세가 조금씩 더 진행되고 있었다.
걸음도 훨씬 불편해져서 지팡이를 잡고도 부축해주기를 바라실 때가 많아졌다.
입원하게된 결정적 동기는 새벽에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털석 주저앉으면서 허리를 다치셨기 때문이다.
인내심 많은 어머니는 그상태로 혼자 아픔을 참고 계셨다.
아침에 집사람이 발견하고는 곧바로 미리 알아두었던 집옆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요양병원환자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혼자서 식사가 가능하면 일반실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중환자실에 수용된다.
환자의 80%정도는 여자이고 남자는 20%도 안되는 것 같았다.
또 환자의 대부분이 허리를 다쳐서 보행이 불편한 경우이고 일부는 치매때문에 또 일부는 말기암환자이거나 일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식들이 돌보기 힘든 경우이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일반실에 입원하였다.
아픈 허리는 조금 나아지셨지만 치매도 조금 더 진행이 되고 보행도 여전히 어려워서 퇴원할 정도는 못되었다.
1월 중순경 맑은 콧물을 조금씩 흘리시더니 구정 직전인 1월 21일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고열을 동반한 폐렴증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코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팔에는 링거줄과 항생제가 투여되는 줄이 연결되어있었다.
폐렴증세가 잠시 호전되어 1주일만에 일반실에 옮겼다가 하룻만에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폐렴증세가 다시 악화된 때문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긴후 어머니의증세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4일 후 입과 기관지로 인공호흡기가 삽입되었다.당연히 말씀도 하실 수 없었다.
소변배출이 안되어 줄 하나가 더 연결되었으나(모두 5개의 줄이 연결됨) 그럼에도 소변배출이 안되자 배와 팔 손 등 온몸이 붓기시작하였다.
또다시 4일후 병원에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와서 급히 가보니 사실상 돌아가신 뒤였다.
몸은 아직 따듯하였으나 맥박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사는 강제로 작동되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때를 공식적인 사망시각으로 한다고 했다.
동생이 도착하여 인공호흡기를 떼게하였다.
그 시각이 2012년 2월 6일 낮 12시 55분이었다.
폐렴증세가 나타난지 불과 17일 만이다.
매일같이 병실을 드나들었지만 정작 임종시각에는 지켜보지 못한 것이다.
입에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었으니 유언조차 말 할 수가 없으셨다.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인공호흡기를 끼게 한것은 잘 못한 것 같다.
그로 인해 며칠 더 사셨겠지만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 어머니께 고통의 시간만 길게 하여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병원의 병상이 130개 정도인데 1월 한달에만 12분의 환자가 돌아가셨고 그 대부분이 급성폐렴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우리 어머니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과 이별할 것이다.
우리들 또한 20~30년 후면 비슷한 과정을 밟아 세상과 작별하게 될 것이다.
다만 죽음을 앞에 두고 환자나 보호자가 생명연장을 위한 수단들을 어느단계까지 할 것인가는 선택하기 나름일 것이다.
병원이나 의사는 경영을 위해 최대한 고단계의 치료를 권할 것이다.
< 또다른 이별 >
어머니 장례를 치른 그다음날 우리집에서는 또하나의 생명이 세상과 이별하였다.
17살 된 애완견 곰돌이다.
우리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6년 8월 15일 동네의 동물병원에서 구입한 45일쯤 된 마르티즈로 곰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고 이름을 곰돌이로 지었다.
이름처럼 개로서는 건강하게 장수한 편이었으나 늙어가면서 기력이 떨어지고 여러가지 병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2~3년 전부터는 곰돌이도 심장약과 항생제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1년전부터는 뒷다리 넓적다리부분에 혹이 생겨나서 점점 커지더니 얼마전에는 그 크기가 사람 주먹만해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한번 넘어지면 혼자 힘으로는 똑바로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던 날 집에 와보니 곰돌이가 네다리를 하늘로 향한채 누워있었다.
아마도 온종일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치료를 받아오던 동물병원에 가서 안락사를 부탁하였다.
수의사가 주사기를 3개나 꺼내 놓았다.
한개는 혈관을 잡아주는 것이고 하나는 진통제를 놓는 것이고 맨 마지막에 독극물을 주사하였다.
마약성분의 진통제를 주사하는 순간 곰돌이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다음에 독극물을 주사한 것이니 정작 죽을 때는 통증이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힘들게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곰돌이가 훨씬 편안하고 우아하게 세상과 이별했다.
우리들이 죽게되는 20~30년 후쯤이면 사람도 안락사가 허용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 >
늙고 병들어서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어머니를 보면서 두가지의 생각이 교차하면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알게 되었다.
하나는 오래 살아서 미안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죽기 싫다, 더 살고 싶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이 90 이 넘었을때 자식들에게 당신의 나이를 묻고 확인한후 많은 나이에 스스로 놀라시면서 한탄하셨다.
오래도 살았다는 사실과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현실이 슬프고 두려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흘리듯이 하시는 말씀중에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죽기 싫다 더 살고 싶다 라는 말씀 대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제일 듣고 싶어하시는 말은 "100살까지 사세요"란 말이었다.
그 말씀을 해드리면 어린아이같이 좋아하시면서 용기백배하셨다.
지난해 가을에는 어머니가 나를 살짝 부르시더니
"아들아, 아들한 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 지금 죽으면 억울하다 더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얘기를 절대 며느리한테 말하지 말라"고 말 하셨다.
어머니께서 그나이에 무엇이 억울할 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더 살고 싶다는 것에는 공감이 간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도 정작 죽기는 싫을 것이다.
더 살아서 무슨 영화를 더 누리지는 못한다고 해도 이 밝은 세상, 사랑스러운 자식들을 다시는 못본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두려움일 것이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던 물건이 실내화였다.
실내화가 눈에 안띄면 안절부절 하셨기에 간병인이 비닐봉투에 담아서 침대맡에 올려놓았다.
신발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상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여쭤보면 "집에 갈때 신발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병상에 누워계시면서도 꼭 병이 낳아서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시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10 여일전 쯤부터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는 것 같았다.
몸 여기저기에 줄이 연결되자 건강을 되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간병인이 "어머니께서 줄을 자꾸 잡아빼서 손을 묶어둔다"고 했다.
"어머니 줄 가만 두세요.줄 잡아빼면 죽어요!"했더니 어머니께서 "죽지 뭐"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노인들이 병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그 때를 안다더니 어머니도 그 때가 다됬다고 판단하셨던 것같다.
그로부터 열을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012 , 5, 10 ****
<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
사람이 늙으면 점차 쓸모가 없어진다.
나중에 병까지 들면 쓸모가 없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주위사람에게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된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사정이 조금 더 낳지만 보아줄 손주가 다 커버리면 역시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은 비슷하다.
어떤면에서는 남자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남자보다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늙은이가 자식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요체는 도움은 못주고 짐만 된다는 것일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형편이 조금 나을 것이지만 그래도 늙은 부모가 오래 오래 살기보다는 얼른 죽었으면 하는 자식이 더 많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부담이 되니 이래저래 오래 산다는 것은 불편한 노릇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늙고 병들어도 죽기싫고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늙고 병들어 갈수록 현명하게 처신해야 미움을 덜 받을 것이다.
우선은 늙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너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한테 함부로 하느냐" 고 항의 하거나 투정을 부려봤자 소용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미움만 키울 뿐이다.
그런면에서 나의 어머니는 현명했다고 생각된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면 어머니께서는 "밥 먹여주는 것만해도 고마운데 용돈까지 주니 고마워요"라고 공손히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을때는 어머니가 참 안됬다는 생각이 들었다.힘없는 어머니가 측은했다.
집사람이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을 시켜드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수고했다고 집사람에게 만원씩을 주었다.
그 또한 현명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며느리들은 늙은 시어머니가 주방살림을 뒤지거나 따따부따 참견하는 것을 싫어 한다.
손주 키우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한 답시고 참견하는 것도 싫어 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것 들에 대해서는 집사람으로부터 미움을 안 받았다.
며느리가 싫어하는 것은 안 하시려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런 처신 때문이었는지 집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빨리 돌아가시지' 하고 학수고대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늙으면 좋지 않은 버릇이 생긴단다.
남의 말을 잘 듯지 않고 고집을 피우거나 조금만 서운하게 대해도 잘 삐친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때문일 것이다.
늙어서도 자식들의 미움을 덜 받고 살아가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2012 ,5,26
첫댓글 지나온 세월 50여년 동안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현준의 가족관계. 현준의 삶. 현준의 인생관을 지켜보면서 살아왔다.
4형제의 장남으로서, 가족의구심점으로서, 모범적 생활을 했을 뿐만아니라
효행을 실천했던 이 시대의 보기 드믄 효자였다.
세상 살다 보면. 고부간의갈등. 형제간 갈등. 고민스러운 가족 문제가 많이 있을 터 이지만.
현준은 항상 인내와 현명한 처신으로 모든문제를 잘 조정하고 이끌었다.
그래서 현준은 나의 절친이기 이전에 내 인생의 반면교사 이었다.
진솔한 옛 이야기를 읽으니 감개무량하여 읽고 또 읽었다,
오래동안 회상에 잠겨 많은 생각을 했다.
감동적인 이야기 속편을 기대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