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은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내포, 금강문화권으로 구분 된다.
내포문화권은 충남 서북부 즉, 서산, 태안, 홍성 등이 포함된 지역이다.
내포지역은 동쪽으로 가야산이 있어 서쪽 바다를 통한 해양교통이 발전해온 지역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자연스레 서해바다 건너 중국문화를 먼저 수용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급변하던 개화기,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건너온 천주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지역 또한 내포지역이었다.
실제 내포는 조선 3대 교구 중 하나였다.
내포지역에서 퍼진 천주교는 수도권일대로 전교됐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정조 15년(1791년) 최초의 천주교 탄압인 신해박해(辛亥迫害)를 시발점으로
천주교인의 고난이 시작된다.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인들은 피난을 떠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천주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내포지역을 선택했다.
이렇게 내포지역에는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다.
교우촌이란, 혈연, 지연 등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구성된 마을이 아닌 신앙에 의해 형성되고
성당생활이 마을의 중심 활동인 촌락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우촌을 중심으로 성당 본당과 공소가 설치됐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은 단위의 성당으로 성직자가 비상주하는 곳이다.
따라서 공소는 본당에 비해 규모가 작고 기능도 축소된 장소였기에
초기에는 한옥을 증축하거나 개조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에는 소규모의 한옥 공소를 신축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공소가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에 있는 ‘상홍리 공소’이다.
프랑스 선교사 폴리 신부는
1919년(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일본인 및 중국인 목수 그리고 지역주민의 힘을 모아 상홍리 공소를 건립했다.
건물구성은 바실리카 양식을 사용하면서 지붕은 기와를 얹고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등
한옥의 특징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20세기 초 대표적인 성당건축의 특징 중 하나다.
건물은 앞 3칸, 옆 6칸의 작은 성당건물로
종탑이 있는 전면부 파사드(Facade)를 두고 가운데 신랑과 좌·우익랑을 두고 있다.
가운데 신랑을 높게하여 창을 달아서 내부 조명을 밝게 하면서 전체적으로 웅장하게 보이게 하고 있다.
내부 제단에는 원죄 없이 잉태한 성모상을 중심으로 성요셉과 예수성심 성화가 좌우로 걸려 있고,
옛 제대와 현 제대가 나란히 공존한다.
또 십자가의 길 14처, 남녀로 나눠 고해성사를 한 고해소, 장궤틀 등이 전해져온다.
모두 건립 당시 폴리 신부가 프랑스에서 들여온 것이다.
상홍리는 병인박해 이후 피난해 온 신자들을 주축으로 성장했다.
신규 공소였지만 초기부터 서산 지역에서는 가장 큰 공동체로 시작했으며,
1910년대 이후부터 100여 명이 넘는 신자 수를 유지했다.
당시 상홍리 공소는 교육·문화에서도 우수한 면모를 드러냈다.
청년들의 모임인 ‘천주교 친목회’가 결성돼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천주교 요리’라는 교리책을 자체 제작해 단계별 학습을 지원했으며,
농번기 탁아소 등 사회복지 활동도 이어갔다.
1935년 해미 순교자들의 유해가 상홍리에 모셔짐으로써 순교자 현양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한편, 단국대 김정신 교수는
“한옥교회는 그리스도교 전례의 기능과 상징성을 위해 중세 바실리카식 공간을 줄곧 추구해 왔으며,
내부 공간구성에는 유교의 관습과 불교건축의 의장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며
“한옥교회는 동서융합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어 “(한옥교회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귀중한 자산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동시에 보편교회와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상홍리 공소는 (재)대전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소유이며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