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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이란 성리학의 수양 방법의 하나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의미하며 궁리(窮理, 외적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진리를 터득함)와 함께 쓰이는 개념이다. 거경과 궁리는 바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로 추앙 받고 있는 퇴계 이황의 학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수양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 6권으로 완간된 소설 <유림(儒林, 최인호 작)>의 제5권 격물치지 제2장에서도 거경 궁리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필자는 ‘안향 선생’ 하면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고민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원나라에 국왕을 모시고 다니다 당시 신학문인 성리학을 도입해 고려 왕조의 재건을 꿈꾼 이로 이해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해 퇴계와의 인연도 생각한다.
안향은 고려 말 인물로 경상북도 영주 순흥(順興) 고을 출신이다. 그는 불교가 지배한 시대를 살았고, 무신 집권기와 수차례 몽고의 침략 등 시련을 겪으면서 올곧게 학문과 수양에 매진할 수 없었던 때에 고려의 관료로서는 최초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연구했을 뿐 아니라 후진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교육에도 부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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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이 세상을 떠난 195년 뒤 순흥과 100여 리 떨어진 안동 예안(禮安)에서 태어난 퇴계 이황은 48세 때에 풍기군수가 되어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강학(講學)을 하고 경상감사에게 서원에 사액과 서책 노비 등을 내려줄 것을 공문으로 청했다. 선배 군수인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로 풍기 관내인 순흥 땅에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는데, 퇴계는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퇴계의 결론은 국가의 인정과 아울러 지원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 그래서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탄생했다. 회헌이 고려 말에 관학을 진작했다면 퇴계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학을 진흥한 공이 컸다. 또한 회헌이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했다면 퇴계는 이를 집대성했다. 두 사람은 이러한 공으로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 시대 인물인 안향의 종손이 남아 있을까? 인터넷상에서 안향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순흥 안씨 종가가 영주에 있다는 자료를 보고 그곳이 종가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 후 종가가 경기도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선생의 묘소가 황해도 장단군에 있으니 북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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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다녔고 서당에서 한문 공부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와서 22세 때 명륜전문학교 3년 과정을 마친 뒤 해주에 있는 도청에 근무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직장에서 나왔고 부친(安柄直)께서 40대에 일찍 돌아가시자 1947년 단신으로 월남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고 잠깐 고향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산의 아픔이 묻어난다. 이산가족을 상봉했는지 물었다.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76세 누이동생만 만났는데, 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북한 권력층은 광복 후 숙청을 하고 서슬이 대단했는데, 그들에게는 종가나 종손의 개념이 없었죠.”
북에 두고 온 묘소와 종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천행으로 안향 선생의 위패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손이 월남할 때 가져온 덕분이다. 자연히 안자묘를 이곳에 모실 수 있었던 사연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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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생(안중근 의사의 종질) 회장 당시에 기념관 등을 조성했고 전 국회의원 고 안균섭 회장이 안자묘를 지었다고 한다. 종손은 서울의 재무부에서 7년을 근무했고 퇴직해 인쇄업에 손을 대었지만 많은 손해를 보았다. 40세 가까이 되어 창원 황씨와 결혼해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차종손은 안규태(安圭台, 52세)요, 손자는 안정현(安鼎鉉)으로 대학교에 다닌다.
종손은 안향 선생으로부터 24대를 내려왔다. 생년으로 따지면 종손은 679년의 시차를 보인다. 유구한 세월이란 이런 경우에 쓸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맏아들로 그대로 내려온 집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족보를 청해 보았다. 문성공 종가는 순탄하게 내려오지 못했다. 순흥 안씨의 시조는 안자미(安子美)며, 그의 증손자가 문성공 안향이다. 안향은 밀직부사를 지낸 안부(安孚)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이듬해에 부친이 문과에 급제했다. 그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한 혁혁한 집안이었다. 안향의 종통은 11대 종손인 안광국(安光國)에 이르러 딸만 셋을 두어 종통 계승에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래서 그의 고조부인 안지귀(安知歸, 안향의 7대 종손)의 넷째 아들인 안종(安琮)의 9세손 안창록(安昌祿)을 입후해 사손(嗣孫)이 되게 했다. 이때가 영조41년(1765)의 일이었다.
종손은 사당과 기념관을 열어 공개했다. 불시에 연 사당이지만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사당 왼편에는 문성공의 복제품 초상 족자가 걸려 있었고 무이구곡(武夷九曲) 병풍서가 둘러쳐져 있었다. 일생동안 주자를 흠모했던 선생을 위해 주자의 고향인 무이구곡 병풍을 마련한 종손의 정성이 아름답다.
안향 선생에 대한 신도비문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47세(1639)에 지은 바 있다. 김세렴은 동인의 영수인 성암 김효원의 손자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부제학과 대사성을 지낸 이다. 그럼에도 종가에서는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17년 공자의 76대손인 연성공(衍聖公) 공령이에게 신도비명을 청해 받아 경기도 장단 묘소 아래에 다시 세웠다.
연성공은 신도비명에서 선생을 안자(安子)로 높이고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해 마지않았다. 이어서 현 종손은 77대 공자 종손인 공덕성 박사에게 청해 안자묘 휘호를 받아 걸었다. 이는 바로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긍구긍당(肯構肯堂, 아비가 시작하고 자식이 이음, 시경에서 나오는 말)’의 정신을 실천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종손에게 이제 남은 사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순흥 안씨 1, 2, 3파가 각각 파대동보는 편찬했지만 전체 대동보를 못 낸 지가 80여 년이 됩니다. 이제 봄이 되면 총회를 열어 범 순흥 안씨 대동보 편찬을 위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성공에 대해 책 한 권으로 알 수 있도록 보다 쉽게 엮어볼 생각입니다.” 노익장은 종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안향 1243(고종30)-1306(충렬왕32)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
중국서도 安子로 추앙한 海東儒宗… 문묘에 배향
‘안향(安珦)’은 고려 시대 인물이기에 우리에게 그리 친근하지 않다. 또한 이름이 안유(安裕)와 안향(安珦)으로 함께 쓰여 혼란스럽다. 그는 이름을 빼앗긴 인물이기도 하다. 원래 그의 이름은 유(裕)였고 나중에 향(珦)으로 고쳐 썼다. 그가 남긴 필적에 분명하게 향이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는 아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휘자인 향과 같아졌고, 당시의 휘법(諱法)에 의해 아명인 유로 고쳐 쓰게 되었다.
안향은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을 시작으로 조정의 관료로 있다가 28세 때는 삼별초의 난을 당해 구금되는 곤욕을 당한다. 30세에 감찰어사, 33세에 상주판관으로 잠시 외직에 나왔다가 36세에 국자감(國子監, 고려의 국립교육기관)에 들어가 후진 양성에 힘쓴다. 46세에 좌승지가 되고 47세 때는 충렬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들어간다. 이 무렵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서 돌아온다.
48세에는 몽고의 침략을 당해 강화도로 몽진했고, 52세 때는 동남도 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했다. 54세에 다시 왕을 수행해 원나라로 들어갔다. 이 무렵 다시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셨다. 56세에 집현전 태학사, 계림부윤이 되었고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58세 때에 벽상삼한 삼중대광이 되었다.
59세 때는 저택을 조정에 헌납하여 반궁(泮宮, 조선의 성균관) 신축에 쓰게 했다. 또한 인재 양성을 위해 61세 때는 백관들에게 은포(銀布)를 갹출하게 하여 양현고(養賢庫) 재원을 확충했다. 이듬해는 섬학전(贍學田)을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장학재단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충렬왕 32년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즉시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헌정했다. 사후 12년 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1542년(중종37)에는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신재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위패를 봉안했으며, 그 7년 뒤인 명종4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에 의해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634년(인조12)에는 여항비(閭巷碑)가, 1639년(인조17)에는 신도비가 각각 건립되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선생은 육경과 논어 연구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주자서를 최초로 도입해 연구한 것을 고려할 때 수준 높은 저작물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이는 사후 4차례에 걸쳐 간행된 선생의 문집 격인 실기(實記)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실기 초간본(47판)이 선생 사후 460년 뒤인 영조42년(1766)에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선생의 글 수집과 편집이 원활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유학사에 크나큰 손실이다.
역대에 안향을 기린 내용을 보면 경이롭다. 그를 중국 곡부의 공자 후손 직할 관청인 공부(孔府)에서 공식적으로 안자(安子)로 의결해 높였고, 공자 종손이 직접 안자사당에 안자묘(安子廟)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이 직접 안자묘 현판을 써서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통치 수단의 한 방법이었겠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안향을 선정해 황해도 종가까지 방문했던 것이다. 현 종손의 선친이 갓을 쓰고 안자묘를 참배한 사이토 총독 일행과 기념촬영을 한 사진도 남아 있다(1924, 대정13년).
퇴계 이황은 소수서원에 제사하면서, ‘안향 선생은 그 공이 학교에 있어 길이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기렸다. 청음 김상헌은 ‘우리 유도(儒道)에 길이 공을 끼쳤다’고 했으며, 택당 이식은 ‘해동유종(海東儒宗)’이라고 했고, 도암 이재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역대 국왕은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영조는 사제문(賜祭文)에서 ‘백세종사(百世宗師)요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했다. 이들은 안향을 유학의 조종(祖宗)이며 후진양성에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로 인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안향을 말할 때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그 공이 빛났다고 한다. 우선 국왕으로부터 선생으로 추앙을 받았고 최초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합호서원(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 도동서원(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치리), 임강서원(경기도 장단군 북면 고량포리)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를 비롯해 전국 230여 개의 향교 대성전에 위패를 봉안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안향은 관과 민의 풍토쇄신과 유학 진흥책으로 신유학 전파에 공이 컸다. 이때 쓴 시는 하나의 상징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곳곳마다 향과 등 밝혀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퉁소 불며 잡신을 섬기는데(簫管家家盡祀神)
외로운 저 두어 칸 공자 사당에는(獨有數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 인기척조차 없네(滿庭春草寂無人)
그에게는 이처럼 국풍 진작이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불교국가에다 미신까지 널리 퍼진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 그에게는 더욱 성리학이 필요했다. 새로운 선비, 이것은 그가 꿈꾸는 고려의 이상을 실현해 줄 것으로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이들은 고려를 멸망시키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했다.
▲ 안향 문하의 六君子
성리학의 본향인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성공 안향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를 육군자라고 해 추앙해 마지않았다. 육군자는 국재 권보, 역동 우탁, 동암 이전, 매운당 이조년, 이재 백이정, 덕재 신천 등을 일컫는다.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이 세상을 떠날 때 백이정, 권보 등 문인들에게 “나는 학문이 그대들보다 못하였다.
그대들은 연상이나 동년이라고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면 우탁을 나와 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라”고 당부했다. 이에 당시 백이정의 문인이던 익재 이제현과 치암 박충좌 등 24인과 권보의 문인이던 가정 이곡, 담암 백문보, 졸옹 최해 등 19인이 모두 역동 우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해 학문적 계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