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기자들과 같이 화가의 자택을 방문한 기자 아비드는 화가의 딸인 리디아에게 호감을 느낀다.
기자들과 화가가 있는 곳에서 나와, 리디아와 아비드는 둘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림이나 피아노 연주를 공유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리디아는 멀리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만 여자라는 신분에서인지 자유롭지는 못한 사정이다. 리디아의 아버지는 아비드와 교제하는 것을 불편히 여긴다. 반면에, 아비드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오페라를 방문하거나 여러 군데를 찾아가는 등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기사를 잘 써서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아비드와 리디아는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기자의 삶으로 돌아온 아비드는 기사 쓸 거리를 찾기 위해 오페라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리디아를 발견하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리디아는 아버지의 발목에 묶여 급히 돌아가게 된다. 이후 아비드가 전해들은 소식은 리디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이후 가정부 광고를 하려던 리디아를 우연히 발견하고 서로 애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결혼할 정도로 서로의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리디아를 또 보게 되었을 때는 로슬린의 아내가 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아비드는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하였다. 그렇게 아비드는 오페라에서 다그마르와 새로운 인연을 쌓게 된다. 다그마르와 부모님이 호감을 느끼고 아비드에게 다가갔고, 자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깨달은 점, 감상
영화 ‘스톡홀름의 마지막 연인’을 보면서 가장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사람이 갈망하는 것을 거세게 반대되는 것과 부딪히면 더욱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 아비드와 리디아가 서로를 더욱 생각하고 원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능력이 부족하고 어려워서, 또는 주변에서의 반대가 있다면 더욱 원하게 되는 경우를 눈에 띄게 많이 보았다. 사람의 본능인 욕심이 커지고 또 커지는 것만 같다. 두 번째는 하림의 노래 가사인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가 떠올랐다. 이 말의 의미도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데, 먼저 현재 실연의 아픔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아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있다. 굳이 실연의 아픔뿐만 아니라, 살면서 진짜 힘들다고 느끼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잊게 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느꼈다. 또는 사랑에 대한 기억이나 아픔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또 다른 ‘사랑’이라는 점이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질문
1.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처럼 욕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불행을 이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욕심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무언가를 꿈꾸고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을 사람의 욕심이라고 본다면, 꿈꾸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고, 꿈꾸지 않아야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철학에서 감각을 크게 두 가지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는 감각이 진리를 파악하는 전무후무한 도구로 보았고, 두 번째는 감각은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이를 방해하는 전유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 관점에서는 감각을 벗어날수록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보았는데, 이 주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은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파악하게 된다. 진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각을 벗어나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사람이 죽으면 감각에서 벗어나 진리를 파악한다고 볼 수 있지만, 사후에는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증명이 없다. 오히려 감각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으며, 선험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정말로 감각을 벗어나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을까?
첫댓글 토론 5) 발표자님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생각을 남깁니다. 애초에 진리란 도대체 무엇이고, 설령 있다고 한들 결국 인간이 규정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상당히 큽니다. 따라서 감각에서 벗어날 때 진리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일부 철학자들이 말했던 이유도 진리라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점이 최소한으로 반영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 하더라도 진리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순수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도 들며, 우리의 이성이 과연 감각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체계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기에 오늘날에는 확실히 감각에 벗어나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질문과 연관하여 핵심 요소는 진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진리일까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철학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일까 아님 더 넓은 생명체를 포함하는 것일까와도 강하게 결부된 요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도 진리라 하면 인간보다 더 넓은 생명체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토론 1) 발표자님의 질문 1번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욕심만 많으면 절대로 행복하게 살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심에 걸 맞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몸짱이 되고자 하는 꿈(욕심)은 넘쳐난다. 하지만 나태하고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다면 불행한 것이 당연하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욕심을 버려야 한 다기보다는 노력을 하는게 훨씬 더 편하고 행복해지는 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