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의 양대 성씨(姓氏)인 손씨와 이씨는 각기 자문(自問)의 서당을 보유하고 있는데, 안락정은 조선 정조 4년(1780)에 건립된 손씨 문중의 서당(書堂)이다. 이 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講學塘)과 쌍벽을 이루며 마을 어귀인 양동초등학교 맞은편 언덕 위 산기슭에 있다.
안락정(서당)은 서출(西出)한 산줄기의 남쪽 중허리를 평정(平正)한 위에 세우고 방정(方定)한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동과 남에 각기 문을 내었다 담장 안마당에는 백일홍, 감나무, 향나무를 심었으며 연못을 축조하여 산중정취(山中情趣)를 돋구었다. 一자형 평면집이며 그중 3칸은 대청이고 양 끝 1칸씩이 온돌방이다. 온돌방은 각기 후면에 벽장을 두었고 대청쪽에로는 각 3짝씩의 불발기 창을 달았다.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썼으나 온돌방 전면 양 기둥만은 방주를 썼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반으로 도리통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끝 1칸씩은 온돌방이며, 양통 앞 반칸은 전퇴(前退)가 된다.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나 온돌방의 네귓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머리에 주두는 놓이지 않았으나 보아지를 익공형태로 초각하여 마치 초익공계의 짜임처럼 보인다. 자연석 기단에 벽체는 회벽으로 처리하였고, 가구는 3량가이다.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양동마을의 동구 초입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조선 숙종 21년(1695년)경에 건축된 ‘ㅁ'자형 주택이다. 온양군수를 지낸 이범중(李範中)공과 그의 맏아들로 담양부사를 지낸 이헌유(李憲儒)공이 살던 집이며, 이향정(二香亭)은 이범중 공의 호이다.
ㄱ자형으로 된 본채를 제외하고 나머지 건물은 홑처마 맞배집으로 전체구성은 튼 ㅁ자형으로 조리 있게 배치되어있다. 사랑채를 구조면에서 안채와 불리 시키고 있는 점은 이동기씨 가옥의 경우와 공동이나 이향정의 경우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두 채가 다각적으로 배치를 보이는 점에서 중부지방의 大家들이나 서울집의 大家들이 지니는 평면배치와 양식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채의 부엌 뒤편에는 방앗간 채가 있는데 방앗간을 뒤꼍에 둔 것은 서백당의 경우와 같다.
안채는 평면이 ㄱ자형에 그쳤으나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관계는 이 지역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부엌을 3칸이나 배정한 점도 이 마을 큰 집들과 공통되는 격식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큰방 뒤로는 부엌과 툇마루가 있는 서실(書室)을 꾸며서 기능상의 변화를 꾀하였고 사랑건넌방의 전면과 측면 마루는 넓게 확장한 위에 마루 글에는 亞자 난간을 돌려서 다소나마 누마루의 정취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나지막한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상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고 있다. 안채 역시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상에 방주를 세웠는데 유독 대청의 중앙 전면 기둥만이 방주가 아닌 두리기둥이다.
처마는 모두 홑처마이며 전체적으로 맞배지붕이나 부엌칸 상부에서 용마루를 높여 뒷면에서 합각(合閣)이 조금 형성되도록 하였다.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조선 고종 4년(1867년) 경에 지족당 이연상공(李挻祥公, 1819년)이 세운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매우 안정감이 있고 소박하다. 인접한 초가와 함께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고종(高宗) 7년(1870)에 세운 여강 이씨(驪江李氏)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안락정(安樂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李淵祥)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건너편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지금 양동마을에는 이씨 문중의 서당이 두 채가 되는데, 이는 1970년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경산서당(景山書堂)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대문과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ㄱ'자 건물로 각기 맞배집을 붙인 것이다. 오른쪽 본채에는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왼쪽에 온돌 안방, 오른쪽에 온돌 건넌방이 있다. 대청 앞으로 마루방과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대청과 마루방은 여름에, 온돌방은 겨울에 대비한 것이다.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 서당 공부에 맞는 구성을 하였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는 남부지방의 백성들 집으로 하나의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 이언괄(李彦适)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며, 큰 고목들이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우측 성주봉 등성이 큰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맞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에 딸린 정자이다.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聾齎) 이언괄(李彦适)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 하였다고 한다.
심수정은 정자와 관리사로 구분된다. 정자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으며 ㄱ자로 겪인 모서리가 북촌을 향했으므로 대각남향(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좌측에 담장을 따로 쌓고 건축하였는데 ㄱ자형 평면 양측으로 대청을 놓고 그 옆에 방을 두었다. 좌측으로의 대청에 붙은 방앞에는 후마루를 두어 양동마을 전체를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우측 대청옆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이 정자를 지키는 관리사로서 행랑채는 고격(古格)있는 소가(小家)로서 굵은 각주(角柱)와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러한 방, 마루 부엌으로 연속되는 一자형 구성은 남부지방 민가의 한 기본형으로 가장 흔한 유형 이지만 이 집은 부엌을 전면으로 연장하였기 때문에 ㄱ자형이 된 것이다.
무첨당(無?堂)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로써,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堂) 해 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이다. 별당건물이기는 하지만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큰 사랑채 격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별당이 외부인의 눈에 잘띄지 않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반해 무첨당은 대문 옆에 자리잡고 있어 큰 사랑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요즈음도 제사를 지내거나 문중의 큰 일이 있을때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사당의 위치는 가옥의 오른편 뒤 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의 사당은 왼편 뒤쪽에 세워져 있는점도 특이한 점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 자형으로 중앙에 6칸짜리 대청을 두고 양옆에 2칸방을 하나씩 두었으며 왼편 앞쪽에 2칸짜리 누마루를 설치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였다. 높직하게 달아낸 누마루는 바깥쪽으로는 널문을 달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반면 안쪽 마당으로는 난칸을 달고 개방적으로 만들어 내부를 향해 열린 공간을 만들었다.
오른편 방의 바깥쪽에는 툇마루방을 덧붙여 달고 부섭지붕을 붙였는데 영남지방의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무첨당은 막돌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삼량(三樑)구조로 되어 있고 대청 전면(前面)에는 아무런 창호(窓戶)가 없으나 뒷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벽체를 쳤는데 창방과 장혀 사이의 소로받침을 한 사이사이에는 벽체없이 터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대성헌(對聖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조선 영조 8년(1732년)에 건립되었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공이 살던 집이다. 대성헌(玳聖軒)이라는 당호(堂號)는 앞산 성주봉(聖主峰)을 마주 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쉬며 상념에 잠겨 볼 만하다.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월성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189)에 있다. 18세기 중엽에 세운 목조 가옥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집 형태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일자형이며, 3동의 건물이 모여서 전체적으로는 ㅁ자집이다.
무첨당 서북측에 있는 주택으로 조선 영조 8년(1732년)에 건립되었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공이 살던 집이다. 대성헌(玳聖軒)이라는 당호(堂號)는 앞산 성주봉(聖主峰)을 마주 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의 중앙 산등성이의 서북방에 자리잡고 있다. 평면은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 一자형 문간채가 합하여 튼 ㅁ자형이 되었다.
안채는 북측 꺽임부에 부엌을 두고 동측으로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 마루 1칸이 배열되어 정면이 7칸이 되었다. 부엌 서측 아래쪽으로는 광과 축사가 1칸씩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이고,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막돌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막돌바른층쌓기의 낮은 기단에 막돌조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역시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모두 한식기와 집으로 안채는 98년도에 사랑채와 대문채는 99년도에 실시된 양동정비공사 때 보수 정비하였으며, 화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외부는 목조이나 내부는 조적조로 2000년도에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2001년도에 전면쪽에 담장을 세로 설치하였다.
물봉고개
넓은 안강들과 안락천을 내려다 보며 그림같이 서 있는 전형적인 초가삼간이 자립잡고 있는 곳인데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인기가 높다.
이 초가집에서부터 물봉동산까지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절로 느끼게 되는 마치 소설 속의 초가마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물봉동산
그지없이 정겹고 서정적인 곳으로 나무울타리와 초가의 흙담 뒤로 난 산등성이 황토길은 산책하기에 멋지고, 초가의 처마 밑 길가에는 화사하게 야생화가 피어 있다.
물봉동산에 고요하게 위치한 낮게 선 초가와 울타리, 그리고 황토길을 따라 거니는 상상만으로도 풍요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끔 하는 곳이다.
영귀정(詠歸亭) 향토문화재
이 정자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젊은 시절 이곳에 모옥(茅屋)을 지어놓고 학문을 수학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정자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건물의 정교함과 솟을대문이 특징이기도 하다.
설천정사(雪川亭舍) 향토문화재
산 언덕 숲 속에 위치한 이 건물은 조선 선조 35년(1602년)에 동방5현의 한 분이신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 元公 晦齋 李彦迪)의 셋째 손자로 설천정 이의활(雪川亭 李宜活 1573~1627)공이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생시(生時)지은 정자이다. 공은 1612년 사마(司馬), 16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 현감 (縣監), 도사(都事), 흥해군수(興海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문중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지산 조호익(芝山 曺好益)선생의 문인으로 저서로는 설천집(雪川集) 등이 있다. 옆으로 'ㄷ'자 형태의 살림집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