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이 가고 싶었다.
비록 촌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자란 산골촌놈이라 산이 가까이 있었지만, 등산이라는 개념으로 처음 산을 접한 나에게 도봉산
다음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이 소백산이다. 봄의 철쭉, 여름의 풋풋함, 가을날 알록달록 계곡 단풍, 그리고 무엇보다
고유명사화 된 겨울의 '소백산칼바람'을 한두번 맞지 않으면 그 겨울에 나는 몸살이 난다.
풍기와 영주 그리고 단양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나를 그곳으로 끌어당기는 한 요소임은 부인 할 수 없다. 풍기의 금계지역은
십승지 중의 제1승지답게 사람이 스며들어 살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풍기의 특산물인 풍기사과, 풍기인삼, 풍기인견 .. 그
어느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명품들이다.
나는 이제 갓 서리를 맞고 따기 시작할 '부사'가 붉게 빛나는 사과밭을 다시 보고 싶었고, 희방계곡의 가을 풍광을 제대로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컸다.
어둠을 달려 삼가주차장으로 향했다. 하늘에는 별들이 수없이 떠 있었지만 그 시간에는 단풍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쿵'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침 차에서 내려 순간 마주친 소백산의 가을 눈빛은은 내가 충격을 받고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지를 정도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2자락길은 삼가주차장 인근에서 시작해 금계호를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지만, 곰넘이재를 넘어서 유석사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가는 자락길도 있다. 금계호를 따라 풍기역을 거쳐 희방사역으로 가는 길은 전에 걸어본 지라, 오늘은 곰넘이재를
넘어 가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곰넘이재로 가는 자락길은 완전한 산길이다. 유석사를 지나 산길을 벗어날 때까지 단 한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오직 짙은 가을만 자리한 길이었다. 산하나를 내가 통째로 차지한 느낌이 이런 것이다.
민가가 두어채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길은 조용히, 하지만 무척이나 소근소근 바스락거리며 조금씩 위로 나를 이끌었다.
산 한가운데에 섰다. 그냥 자연림이다. 사람들의 손길이란 길을 안내하기 위한 자락길 표지와 곰넘이재 정상에 있는 안내판과
나무 의자 정도였다.
사람의 흔적이 하나 더 있었다. 누군가 멋진 단풍모자를 씌어 놓은 돌무더기... 대단한 예능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인 것 같다.
앞쪽에서 보면 영락없이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소품이 기가 막히다. 작은 나무토막 하나, 붉은 단풍잎이 매달린 가지 하나.
아무곳이나 들여다 보는대로 신이 만든 걸작이다. 마음껏 감탄사를 터트리며 한껏 즐겼다. 사람도 민가도 없는 오직 희미한 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길옆에서 겨울나기를 준비하려고 도토리를 찾아 나선 다람쥐 한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산길을 벗어나니 사과 과수원들이 연이어졌다. 서리를 맞았지만 아직은 기운이 남아있는 꽃들도 보인다.
사과를 따는 분들이 있는 과수원을 몇개 지나쳤는데, 세군데에서 가다가 먹으라면서 사과를 두어개씩 주셨다. 혼자 걷는 길이
외로울수도 있지만, 오늘 같은 경우를 전에도 여러번 경험해 본지라 결코 외롭지 않고, 오히려 시골의 인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을은 길옆 옹벽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절정의 가을속에 투영된 사과들을 보고 싶었었다. 오늘 그런 모습을 마음껏 보고 담았다. 그냥 즐겁고 기분이 좋다는 것은
오늘 같은 날 내게 딱 맞는 말이다.
그분들이 주신 사과를 농장별로 하나 하나 다 맛보았다. 마침 집에 과일이 떨어졌는데 한박스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왕이면 나에게 베푼 분들중 구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다 입맛이 다르겠지만, 내 입맛에 맞는 사과를 찾았다.
아직도 도라지 꽃이 피어 있다.
길옆 작은 집 내 어깨보다도 낮은 담위에 조금은 메마른 머루포도 열매가 달려 있었다. 슬쩍 마음속에 욕심껏 담아왔다.
가을은 담쟁이 넝쿨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들의 색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왜 마음이 서늘해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전 도로에 나락을 널어놓은 곳(상당히 양이 많아 일하시는 분에게 몇섬이냐 되는지 여쭸더니 250섬 정도 된다고 하셨다.
대충 계산하고 1000만원 정도 되겠네요 했더니 더 된다고 하신다. 길 바닥위에 노란 돈이 널려 있었다고 웃으면서 왔다)을
지났는데, 이 논은 이제야 추수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노란 가을 국화들이 벌들과 놀고 있었다. 향기가 그윽하니 자연스럽게 나를 유혹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슬며시
훔쳐왔다. 갑자기 곡차가 고파 길옆 가게에서 소백산막걸리를 샀다. 그러고 보면 나도 술꾼이다.
"국향과 사과안주 그리고 나를 둘러싼 가을빛들.. 그안에서 한잔 막걸리 ~~" 이태백의 술상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희방사역.. 역시 가을이 들었다. 소백산 자락에서 가을이면 가장 아름다운 곳중의 하나가 희방계곡이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무쇠골이라 했다. 희방사역 옆에 무쇠 달다방이 있다.
죽령옛길로 가는 이정표가 큼직하니 가을색 안에 묻혀 있었다. 이제 길은 제3자락에 들어서게 된다. 한가락 한가락 넘을때마다
구성된 노래 한가락 들어야 하는데... 그냥 흥얼흥얼 내 마음대로 한곡조 뽑는다.
이곳 영주 풍기에는 장승이 많다. 죽령주막 부근에서는 매년 봄 장승축제가 열린다. 희방사역에도 당연히(?) 장승들이
지나는 과객들을 맞아준다.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죽령터널 부근의 풍광을 만나면서 내 웃음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큰 웃음이 안나올 수가 없는 풍광들이었다.
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길위에 머무른 세월...' 이란 글에서 여러가지 만감이 교차했다. 이 길은 옛날 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이
한양을 향해 가는 과거길이고, 장사치들이 넘나드는 상업길이었고,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서로 전략적 요충지로 차지하려고
전쟁을 불사했던 곳이다.
나도 그런대로 긴 세월을 길에서 보냈다. 뭐 인생이란 것이 길 자체이니 굳이 나만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언젠가 딸아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는 나이들어도 걸을 수 있을때까지 걸으러 다닐거야~'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과수원이 딸린 집 앞에 모과나무가 한그루 있었고 탐스러운 모과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산수유 열매도 붉게 물들었다. 작년에 산수유마을에 산수유 열매를 담으러 갔던 기억이 났다. 올해는 언제쯤 가볼꺼나.
작년 같은 행운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계곡이 깊어서일까. 오후가 아님에도 빛이 옆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시장끼가 돌았다. 나무의자에 앉아 죽령옛길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황홀한 오찬을 즐겼다. 이런 식탁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여기 옛길도 그냥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길 그대로이다. 그래서인지 그냥 자연스러운 보통의
풍경이 더 친근하고 좋아 보인다.
가을끼가 철철 넘치는 후덕진 육덕의 단풍나무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참을 이렇게 저렇게 보고 즐겼다.
"오메! 단풍들었네~'
나무등치에 넝쿨들이 올라가 있는 풍경이 무척 자연스럽다. 오늘은 자연스럽다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된다.
죽령주막.. 죽령마루에 올랐으니 흘린 땀을 닦고 컬컬한 막걸리라도 한잔 하면 좋을텐데. 아까 마신 막걸리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 괜한 신트림만 한번 해보고 지나쳤다.
죽령마루는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의 경계이고, 소백산에 정상에 가장 근접한 곳중의 하나이다.
예의 장승들이 한바탕 웃음으로 맞이해준다.
죽령마루에는 꽤 오래된 가게들이 여러개 있었으나, 몇해전 크리스마스 전날 불이 나 전소가 되었고, 지금은 전혀 다른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죽령마루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단양쪽 3자락길을 이어갔다. 도경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여전히
좋은 길들이 나타난다. 길은 길을 나누지 않는다. 사람들이 길을 나누면서 마음도 나누고 내편 네편을 만든다.
그러보 보니 이곳은 노란색 계열의 가을빛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보국사지... 머리는 어디론가 없어진 석불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많이 걷지는 않은 것 같지만, 여유롭게 귀경하고자 마침 길가에 있던 분에게 길을 물었다. 풍기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니,
그분이 마침 본인도 풍기쪽으로 갈 거라며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신다. 죽령마루에서 전에 가게를 하시던 한분의
집에서 사과를 사셨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사과를 세알 선물로 받았다.
무척 산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차박을 즐겨하신단다. 트렁크가 열려진 사이로 차량 3열 좌석에 매트리스 등 차박 장비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역시나 등산과 무박 여행이 취미란다. 덕분에 삼가주차장까지 편안히 갔다. 미안함과 감사함의 말을 표하니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받았던 호의를 다른 분에게 갚은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대신 다른 분에게
돌려주세요" 라고 말한다. 죽령마루에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가을이 황홀했다.
......
차를 회수하고 세번째 사과를 얻었던 농장을 되짚어 찾아가 사과 한박스를 구해 차에 실었다. 부석사에 들릴 요량이었으나,
시간이 어중간해 다음 번으로 미뤘다.
다음에는 아예 부석사 주차장에서 머무르다가 새벽에 산문을 들어가야겠다. 이 가을이 다 떠나기전에~ 햇살이 무량수전
앞산 너머로 넘어가는 모습은 여러번 보았지만 새벽이 스며드는 무량수전은 어떤 모습일까 사뭇 궁금하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시간까지, 하루종일 경탄스러운 절경의 선물부터 사과밭의 인연들, 그리고 초면인 분의 호의까지
하루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받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과한 선물이 넘친 날이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다음 길이 벌써부터 기다려짐은 길과 인연의 소중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