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명칭 : 경패(經牌) 국적/시대 :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 나무 크기 : 길이 15cm : 폭 13cm 지정구분 :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호 용도기능 : 종교신앙(宗敎信仰) / 불교(佛敎) / 장엄(莊嚴) / 경패(經牌) 출토(소)지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松廣寺) 문양장식 : 복합문(復合文) / 운학문(雲鶴文), 소장기관 : 송광사(松廣寺) 박물관(성보각)
경패란 불경을 넣은 목함(木函) 곁에 달아서 내용물을 표시하는 데 사용하던 것이다. 표면에는 액(額)을 만들어 경명(經名)과 번호를 새기고, 둘레에는 연주문 (連珠紋) 당초문 (唐草紋) 뇌문(雷紋) 학문(鶴紋) 등 다양한 무늬로 장식하였다. 밑에는 여러 형식의 만개한 연꽃을, 위에는 삼각형 또는 원주형으로 만개된 꽃을 조각하였다. 좌우에 여러 번 굴곡을 둔 보주형(寶珠形) 안에 용 혹은 봉황을 마주 보게 양각 또는 투각(透刻)하였다. 뒷면은 연주문 뇌문 학문 등으로 윤곽을 잡고 보살 나한(羅漢) 신장(神將) 등의 상을 양각하였으며, 밑에는 ‘貞(정)’ ‘周(주)’ ‘晋(진)’ ‘何(하)’ 등의 기호를 새겼다. 이들 경패는 장식무늬나 불교상(像)들의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불교의 유품이다. |
사천왕상
사찰에 들어서게 되면 일주문 다음으로 통과해야하는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이러한 사천왕상이 안치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사찰의 내부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천왕의 다른 이름으로는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상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만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사천왕이라 한다. 사천왕상의 부하로는 견수(堅手),지만(持鬘),항교(恒憍)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의 아래쪽에 있다. 또한 사천왕은 이들 외에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쌍산(持雙山) 등 일곱 겹의 산맥과 태양과 달 등도 지배하고 있다. 사천왕상이 우리나라에 조성된 유래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출발한다. 통일신라시기에는 사천왕상신앙이 최전성기에 달했고, 이와 더불어 사천왕상의 조성활동이 활발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고려시대에도 사천왕신앙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주춤하다가, 임진왜란 이후로는 많은 사찰들의 재건과 더불어 다시 사천왕신앙이 이어지게 된다. 사천왕상의 모습은 삼국시대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탑이나 사리장엄구에 부조되어 있는 모습, 또는 벽면에서 분리된 단독 조각상, 불교회화에서 주존불을 수호하고 있는 모습, 사천왕문에 안치되어 있는 거대한 모습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천왕문에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1462년 후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중창을 거치게 된다. 사천왕상은 1628(인조 6)년에 중조(重造)되어 1720(숙종 46)년에 1차 중수개채(重修改彩)된 후 6차례의 중수개채를 거쳤다. 2003년도에는 남방천왕의 왼쪽 팔이 절단되어 2004년에 복구 작업을 실시하였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나무로 만든 틀 위에 진흙을 덧붙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이다. 조선후기 특히 인조(1624~1649)대에 조성된 거의 모든 사천왕상의 재료가 흙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후반까지는 사천왕상의 재료로 주로 흙을 사용한다. 이러한 현상은 흙이라는 재료가 지니고 있는 경제성과 비교적 큰 상(像)도 손쉽게 빚어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송광사와 같이 소조로 제작된 사천왕상이 봉안된 사찰로는 직지사, 법주사, 화엄사, 선운사, 흥국사 등이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인근 전남지역의 사천왕상들과 비슷한 양식을 지닌다. 특히 1649년에 제작된 구례 화엄사의 사천왕상과 친근성이 짙다. 송광사 사천왕상이 1628년에 중조된 것으로 보아 구례 화엄사의 사천왕상과 제작시기가 비교적 가깝고, 지리적으로도 가장 인접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화엄사와 송광사 사천왕상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싶다. 송광사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2004년도에 보수 작업을 실시하였다. 불안정하게 보이던 천왕문을 해체 보수하여 바로 잡고, 떨어져나간 팔을 붙이는 보수 작업, 사천왕상의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건식클리닉 등의 작업을 실시하였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의 보수작업 이전에 사천왕상의 복장을 확인하였는데, 뜻밖에도 귀중한 전적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전적은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복각(復刻)한 전적으로 모두 12종 14책이다.
사천왕상 복장 전적
송광사에 들어서서 일주문과 우화각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대기하고 있다. 우화각과의 적당한 거리감도 없이 바로 맞닥뜨리는 사천왕의 모습이 진지하기만 한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지나면 비로소 불국의 세계로 들어 갈 수가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1628(인조 6)년에 중조(重造)되어 1720(숙종 46)년에 1차 중수개채(重修改彩)된 후 6차례의 중수개채를 거쳤다. 2003년도에는 남방천왕의 왼쪽 팔이 절단되어 2004년에 복구 작업을 실시하였다. 복구 작업을 실시하기 전에 사천왕상의 복장조사를 먼저 실시하였다. 복장(腹藏)이란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 안에 봉안하는 여러 가지 유물을 말하는데, 중국은 8세기부터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때부터 봉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장 유물로는 사리와 사리통, 후령통, 오곡과 오색실 또는 오색 천, 불경류, 의복, 다라니, 만다라, 복장기(腹藏記)나 조성기(造成記)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불상의 배와 머리 부분에 가득 채워지게 된다. 송광사 사천왕의 복장 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로는 12종 14책의 전적, 후령통, 다라니와 그 밖에 상태를 알 수 없는 잔재들이 출토되었다. 전적이외의 유물은 발견된 종류가 많지 않다. 그러나 출토된 경전은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것들로 여겨져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전적을 보면 북방천왕에서 9종10책이 발견되었는데, 그 종류로는 금강비현성록(金剛錍顯性錄)권3·4, 대위덕경다라니(大威德經陀羅尼)권4,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纘述)권5·6, 법화경현찬회고통금신초(法華經玄贊會古通今新抄)권1·2,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권5·6,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권7·8,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권6, 성유식론요의등초(成唯識論了義燈抄) 권3·4, 원각경대소석의초(圓覺經大疏釋義抄)권13,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仁王護國般若經疏法衡抄)권5·6이 있다. 서방천왕에서는 1종1책 과주 묘법연화경([科註] 妙法蓮華經)권7이 발견되었다. 남방천왕에서는 2종2책이 발견되었는데,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권3·4,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권19가 그것이다. 동방천왕에서는 1종1책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권12가 발견되었다.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12종 14책의 책들 중에서 대장경 종류는 대위덕경다리니 권4 한권뿐이고 모두 연구서의 일종인 교장(敎藏)계통이다. 이들 교장 중에서 과주모법연화경권7은 고려의 전래본이고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 권5·6과 성유식론술기 권6은 모두 사찰본계통이다. 금강비현성록 권3·4는 조선 세조 때 불경의 국역과 간행을 맡았던 기관인 간경도감에서 번각한 것이고, 묘법연화경찬술 권5·6, 성유식론요의등초 권3·4, 원각경대소석의초 권13, 묘법연화경현의 권3·4, 성유식론의경초 권 12와 19는 고려 때 속장경(續藏經)을 간경하였던 기관인 교장도감본을 번각한 것이다. 이들 중에서 묘법연화경찬술 권5·6은 현재 송광사박물관에 소장중인 묘법연화경찬술 권1·2(보물 제206호)와 연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음 법화경현찬회고통금신초 권1·2는 요(遼)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하여 교장도감에서 필사한 것을 번각한 것이며, 법화문구기 권5·6·7·8은 간경도감에서 번각한 것이다. 특히 법화경현찬회고통금신초 권1·2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으로 밝혀져 그 중요성이 대단해졌다. 이렇게 발견된 사천왕상의 복장 전적들은 발굴당시부터 현재까지 관련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2005년도에 서지학회(書誌學會)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되어 연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또한 그 중요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현재 사천왕상과 더불어 보물 지정 심사과정에 있다.
약사전
송광사 종고루 밑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보전이 보인다. 장엄하고 거대한 송광사의 중심법당이다. 정면의 대웅보전으로 눈요기를 하고 오른쪽으로 눈길과 발길을 돌리면 꽃 향이 천리까지 간다고 하는 금목서, 은목서가 차례로 보인다. 이들 나무들과 눈 맞춤하며 가다보면 다다르는 곳! 눈에 띠게 작은 전각 앞에 서게 된다. 바로 약사전이다.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스님 홀로 단촐히 예불하기에 딱 좋은 크기의 법당인 것이다. 이런 작은 법당 안에는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경전에서는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란 뜻으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약사여래는 과거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12가지 서원(誓願)을 세웠는데, 이를 이른바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라고 한다. 즉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재난을 소멸시키며 의복과 음식을 만족케 하고 부처님의 행을 닦아 지극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서원한 부처이다. 약사전은 건물의 네 면이 모두 단칸으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간결한 전각이다. 그러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기둥사이에 두 개의 공포(지붕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에 짜 맞추어 댄 나무 부재)를 둔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송광사 약사전과 같은 정방형 평면 구조는 사모정자나 목탑, 산신각 등에서 가끔 볼 수 있지만 일반 불교 전각에서는 흔하지 않다고 한다. 대구 북지장사 대웅전, 청도 운문사 작압전(鵲鴨殿)과 관음전 등이 송광사 약사전과 같은 예이다. 송광사 약사전은 대들보가 없이 공포만으로 지붕을 받친 색다른 양식으로 유명하다. 즉 평방 위에 공포를 올려서 도리와 서까래를 통해 내려온 지붕의 하중을 분담하였다. 측면에도 서까래가 있는 팔작지붕의 특성상 네 귀기둥 위에 모두 공포를 배열하였다. 그리고 네 귀기둥의 공포 사이에 다시 공간포를 두개씩 둔 것이다. 이러한 공포들은 전각 내부의 천장을 특이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약사전은 전각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귀공포와 공간포의 끝이 전각 안에서 맞닿을 정도이다. 이러한 공포들의 내출목 끝을 결구하여 연장시켰다. 이렇게 맞닿은 중앙 부분에는 당초(唐草)를 조각한 부재를 교차 결구시켜 매우 장식적으로 꾸몄다. 이와 같은 작은 법당안의 화려한 천장 처리는 참배객의 시선을 천장으로 쏠리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 또 공포의 내출목만으로 만든 천장은 어느 전각보다 화려한 대목(大木)의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약사전 전각의 기둥은 베흘림이나 볼륨감이 매우 약하여 민흘림기둥으로 보인다. 전각의 전면에는 띠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따로 출입문을 냈다. 전각의 바닥은 어느 전각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마루바닥을 깔았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송광사 약사전 건물은 규모에 비하여 장식적인 요소가 화려하다. 또한 기둥이나 평방과 같은 부재들도 건물의 규모에 비해 굵직한 목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건물의 장식적인 화려함과 굵직한 부재들의 사용은 약사전 건물의 품격과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나 할까? 송광사 약사전의 연혁은 1974년 중수 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약사전은 조선 인조 9년(1631) 중건 되었고, 5년 뒤 병자호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 직후에 중건되었다. 그 후 조선 영조 27년(1751)에는 공포와 지붕을 고치는 등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현재 약사전은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
송광사에는 나란히 앉아 형님 아우 하는 전각(殿閣)이 있다. 아우 전각은 약사전(藥師殿)이고, 형님 전각은 영산전(靈山殿)이다. 영산전이 약사전에 비해 규모가 다소 크기에 본인이 붙인 별칭이다. 영산전(靈山殿)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해 놓은 전각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또는 5백 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하기도 한다. 송광사 영산전에는 영산회상도와 팔상도를 봉안하였다. 영산회상도는 전각의 중앙에 모셔진 석가모니부처님의 바로 뒤 벽면에, 팔상도는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좌우 벽면에 배치하였다. 송광사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전각이다. 전각의 전면은 기둥사이를 3칸으로 분할하고 있으나 그 길이는 합쳐서 21자[尺] 밖에 되지 않는다. 전각의 기단(基壇)은 전면 3단, 양 측면과 후면 1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의 기단이 다소 높은 것은 약사전과 연속된 석축(石築)을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초석(礎石)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덤벙주초로 하였다. 전각의 기둥은 민흘림 원기둥을 사용하였는데, 부분적으로 배흘림이 약하게 적용된 곳도 있다. 기둥머리의 결구방식은 다포계(多包系) 법식을 사용하였다. 송광사 영산전은 소규모의 전각이다. 그러나 처마 밑의 공포는 과중하게 3출목(出目)으로 짜 올렸다. 소규모의 전각이 공포를 과중하게 짜 올린 것은 공포대를 화려하게 꾸미면서 처마를 높고 길게 내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공포는 내부에서 오히려 2출목(出目)으로 감축되었다. 그 이유는 중첩되는 공포의 부피 때문에 천정의 공간면적이 협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내부의 공포가 외부에 비해 감축된 것이 송광사 영산전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다포계 형식의 공포는 조선중기 이전에는 내외출목수가 같은 것이 일반적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내부를 화려하게 꾸미려는 의장적 고려에서 내출목수를 외출목수보다 1~2개 더 많게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송광사 영산전 공포는 오히려 외3출목, 내2출목으로 외출목을 하나 더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전각의 창호(窓戶)는 전면과 좌측면 앞 칸에만 구성하고 나머지는 벽체를 만들었다. 현재의 창호는 최근의 보수 시에 변경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1958년에 찍은 현황사진을 보면 전면 어칸에는 빗살문을 두고 협칸과 측면에는 띠살문을 사용한 것이었다. 띠살도 상·중·하단 모두 3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중앙 후면에 불단을 조성하였다. 불단이 조성된 어칸 천장에는 운궁형(雲宮形) 닫집을 설치하였다. 천장은 층급이 있는 우물천장인데 상단천장은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렇게 층급천장을 꾸민 것은 운궁형 닫집과 함께 본존불이 있는 어칸에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부여하면서 또한 내부 공간을 크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은 인조 17년(1639)에 창건하였고, 영조 13년(1737)과 1973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티베트文法旨
어느 박물관이나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의문을 들게 하는 유물이 있다. 송광사 박물관에도 이러한 의문을 생기게 하는 “진기한 글씨”로 쓰인 문서가 하나 있다. 13세기 이래 조계산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티베트文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는 綺山 錫珍(기산 석진) 스님의『大乘禪宗曹溪山 松廣寺誌』(1965년)에서 사진과 더불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송광사에서는 이 문서에 대해서「원감국사가 몽고에서 귀국할 때 그 신분을 보장하던 여행증」이라고 口傳되어 왔다. 圓鑑國師(1226~1292년)는 송광사 제6세 국사이다. 국사는 당시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元 世祖 쿠빌라이 황제에게서 이 문서를 받아온 것이라 한다. 이러한 티베트文 문서는 오랫동안 글씨의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단지 신분보장의 여행증이라는 막연한 정도의 지식이었다. 그러나 1998년도에 이르러 본 문서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2001년 3월에 문서의 보다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 티베트文 문서는 元나라 황제의 국가적 명령문서의 한 종류인 법지(法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원나라는 율령(律令)같은 성문법(成文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 이하 각급 권력 담당자가 그때그때 마다 내리는 명령문이 입각해야 할 법의 근원으로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잘를릭’이라는 황제의 성지(聖旨)가 있는데, 이것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다음으로는 기타 남성 황족(皇族)이 내리는 영지(令旨), 비자(妃子) · 공주가 내리는 의지(懿旨), 부마(駙馬)나 고급 관인이 내리는 균지(鈞旨)등이 있다. 이들을 총칭하여 ‘우게’라고 한다. 법지(法旨)도 ‘우게’의 한 종류이다. 즉 원 황제의 통치하에서 불교의 최고 권위자는 제사(帝師)였다. 이러한 불교의 최고 권위자가 내리는 명령 문서를 법지(法旨)라고 한다. 이러한 법지가 고려에 발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광사 티베트文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확인되었다. ‘구실을 붙인 호소를 일으키는 것’, ‘위해를 가하는 것’, ‘힘을 미치는 것을 금지’ 한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구는 사원(寺院)이나 사산(寺産)에 대한 보호를 명시할 때만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즉 본 문서는 제사(帝師)가 발령한 사원보호를 위한 특허장이었다는 것이다. 송광사에서 구전되어 오던 막연한 신분보장 여행증의 차원을 넘어선 대단한 문서로 확인 된 것이다. 또한 본 문서는 원나라에 관한 1차 자료로서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사 결과로 인한 문서의 정확한 규명으로 2003년에 ‘티베트文 法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376호로 지정되었다. 문서의 크기는 가로 51㎝, 세로 77㎝인데, 두께 0.2㎜의 종이 4장을 합쳐 붙여서 배접하였다.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중이다.
* 2001년 송광사 원대 티베트문서 규명 국제학술대회에 발표된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說法殿
지금 송광사에는 번와(飜瓦) 작업이 한창인 전각이 있다. 대웅보전 뒤편 상단에 위치한 설법전이 바로 그곳이다. 나이가 들어 수염이 자란 것처럼 어느새 이끼가 자란 기와들을 새것으로 교체해주고 있다. 본래 새 것이였을 기와에 용케도 알고 덮기 시작한 이끼들을 보면 신통하다. 설법전은 대중을 모아 놓고 법회를 하기 위한 대강당이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꽤 규모 있는 건물이다. 또 해인사본장경 (海印寺本藏經)을 봉안하였던 전각이기도 하였다. 설법전의 연혁(沿革)은 송광사고(松廣寺庫)와 송광사지(松廣寺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간략하게나마 연혁을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설법전은 1210년 이전부터 존재한 건물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설법처(說法處)였다. 그리고 1210년 3월 27일에는 보조국사께서 최후 법문 후에 좌탈입멸(坐脫入滅)한 곳이기도 하다. 스님께서 입적 하신 3년 후인 1213년에는 전계상(前階上)에 보조국사비(普照國師碑)가 건립되었다. 또한 1458년 4월에는 해인사본장경이 봉안되었다. 이 후 설법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치게 된다. 1765년 12월에는 지장탱(地藏幀)이 조성되어 설법전에 봉안된다. 1854년 태풍으로 인한 약간의 파손이 있는 부분을 이듬해 5월에 중수를 하게 된다. 또 1899년는 해인사본장경 1부를 다시 봉안하게 되고, 1902년 5월에는 단청불사를 하게 된다. 또한 1907년 4월에는 독성탱(獨聖幀)을 조성하여 봉안하게 된다. 설법전은 수차례의 중수와 단청 등의 불사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1210년 이전부터 전해져 오는 송광사의 고(古)전각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1951년 5월 6·25전쟁 중에 일어난 방화로 인하여 소실(燒失)되고 만다. 이때에 해인사본 장경과 지장탱 등이 함께 소실되게 된다. 전쟁의 어수선함과 사회 혼란, 전쟁이 끝난 후에 따르는 궁핍으로 설법전은 바로 중건되지 못하다가 1968년 4월에 비로소 중건된다. 그리고 1975년에 단청 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설법전은 번와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번와 작업이 한창인 설법전에서 명문(銘文)이 존재하는 기와들이 4점 발견되었다. 그 중 3점은 같은 내용의 명문이고, 나머지 한 점은 다른 내용이다. 명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庚午年四月 甘露寺瓦□ 盖瓦大施主蔡存後 供養大施主李貴万 布施大施主崔從浩 施主崔永浩施主信和 幕沙大施主仅敏比丘施主勝梅
施主從祥 上坦爲主韓乭屎 富勝哲 化主海祖 供養主學稔比丘
위의 내용은 3점의 기와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우선 첫 번째에 나오는 경오년(庚午年)은 1630년을 말한다. 그리고 감로사(甘露寺)는 구례 천은사(泉隱寺)의 옛 이름이다. 1673년에 조성한 천은사 괘불(掛佛) 화기(畵記)에 감로사로 기록되어 있다. 천은사는 828년 인도의 덕운(德雲)스님이 감로사로 창건한 것을, 1679년 단유선사(袒裕禪師)께서 중수 후 ‘천은사’로 절 이름을 바꾼 것이다. 또한 시주자 최영호(崔永浩)는 1633년 7월 송광사 천자암(天子庵) 중건 시에도 시주한 인물로 송광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위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는 기와들은 지금의 천은사 기와들로 추정된다. 즉 1630년 4월에 천은사에서 어떤 전각의 번와(飜瓦) 작업이 있었을 시에 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기와를 송광사의 설법전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최영호가 1630년 감로사와 1633년 천자암의 시주자로 등장한 것도 묘한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명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正德三 年戊辰 五月日 大施主 李■■ □■■ □■■ 說■■ 兩■■ 今立■■ 供養主 隱峯 化主□雄
위의 기와는 양각 된 명문 부분이 결락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정덕삼년무진오월일(正德三年戊辰五月日)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508년 5월임을 알 수 있다. 또한 ‘說■■’은 ‘說法殿’으로 보인다. 즉 1508년 당시에도 설법전이 중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 3월 3일 설법전에서 명문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설법전의 역사를 다시 살피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아울러 1630년 감로사(현재의 천은사)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사용한 것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더욱 알아보아야 할 의문으로 남았다. 1210년 이전부터 보조국사의 설법처로 이용되었고, 해인사본장경이 보관되었던 설법전. 그렇게도 위풍당당해 보였던 이유가 송광사와 함께한 긴 호흡 때문 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송광사 박물관장이신 고경스님께서 설법전의 연혁 정리와, 기와 명문 판독을 해주셨습니다
관음전
송광사 대웅전(大雄殿)을 정면으로 왼쪽에 위치한 승보전(僧寶殿) 앞에 관음전(觀音殿)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고색의 단청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 전각에 관한 기록은「송광사지(松廣寺誌)」에 자세히 나와 있다. 즉 고종 황제의 51세 생일을 맞아 황실과 국가의 안녕 ·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원당의 필요성을 기로소(耆老所)에서 제기하면서 건립이 추진된 것이다. 또한 건립이 추진되기까지는 대한제국 황실의 통치권 약화와 국가의 어려운 재정 사정으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04년 전패를 봉안한 다음부터 1908년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례의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수전은 1957년 송광사 경내의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황실의 위패를 봉안하였던 성수전에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옮겨 봉안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성수전이 관음전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관음전은 건물의 구조나 구성, 내부에 그려진 벽화 모두 화려하고 예사롭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성수전이였기에 일반적인 사찰의 건물들과는 그 성격자체가 틀리기 때문이다. 관음전의 처마 끝에는 海와 水자가 교대로 쓰여 있고, 내부 천장에는 연화문 반자를 중심으로 물고기, 사호문양, 용들의 머리와 꼬리가 뒤엉켜 있는 형상이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불(火)의 기운에 해당되는 송광사로부터 전각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전각의 중앙 석축 앞에 있는 계단의 계단석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어 성수전은 용궁 그 자체를 상징하다고 볼 수 있다. 관음전이 특수한 목적으로 인해 건립된 전각이니 만큼 외벽과 내벽에는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훼와 화조 벽화이다. 우선 건물의 외벽의 벽화를 보면 비·바람에 의한 훼손 정도가 심하여 형태의 일부만이 확인되는 괴석, 파초, 소나무, 매화, 모란, 석류나무, 청둥오리, 백로 등이 그려져 있다. 이상의 소재는 부귀와 번영, 장수, 자손번창, 부부화합 등의 의미를 지닌다. 다음으로 내벽에도 같은 의미를 지닌 화훼와 화조도가 그려져 있다. 화훼와 화조도의 소재와 함께 그 의미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모란·목련은 부귀를, 괴석·소나무·매화는 장수를, 포도와 석류는 자손의 번창을, 파랑새·까치·청둥오리·황조와 같은 한 쌍의 새는 부부의 화합이나 금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전에 표현된 화훼와 화조는 원당을 지으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황실의 자손도 번창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눈에 띄는 벽화로는 내벽에 그려진 신하들의 그림이다. 중앙 감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위패를 향해 공손히 몸을 숙이고 있는 14명의 신하가 그려져 있다. 이 신하들은 왕에 대한 공경심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하마다 적혀있는 품계를 보면 정1품, 종1품, 정2품의 신하들로 구분되는데, 이는 ‘정2품 이상의 문관 가운데 70세 이상’이라는 기로소 입소 규정에 따라 그려진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신하들은 1902년 고종과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던 기로신(耆老臣)들을 재현한 것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중앙 감실 벽에 그려진 해와 달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각각 상징하기도 하여 공간에 대한 신성함을 더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옛 영광과 함께 관음기도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세월각 · 척주각
송광사에는 눈이 많이 내리면 눈으로 다 덮여져 버릴 것 같은 작은 전각 2개가 있다. 굴러 내린 눈이 박힌 눈을 차낼 정도로 지붕이 소박한 그런 작은 전각이다. 송광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무지 속 우뚝 서있는 고향수 나무 뒤로 전각이 보인다. 지눌스님의 손맛 배인 고향수. 그 끝에 걸린 하늘을 한숨 들이마시고 바라보는 세월각(洗月閣)과 척주각(滌珠閣). 세월각과 척주각은 송광사의 다른 전각들에 비하여 매우 작은 단칸 구조의 전각이다. 전각의 내부는 어떠한 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빈 공간이다. 두 전각은 ㄱ자 모양으로 서로 엇 비켜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 전각은 죽은 자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죽은 자의 혼을 실은 가마인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로 사용되는 특이한 전각이다. 즉 영가가 사찰에 들어오기 위해서 남자의 영가는 척주각에, 여자의 영가는 세월각에 모셔진다. 남자의 영가를 모시는 척주각(滌珠閣)의 주(珠)는 남자를 상징하고, 세월각(洗月閣)의 월(月)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셔진 영가들의 속세의 욕망과 허물을 벗는 목욕을 행하는 곳이 바로 이들 전각이다. 전각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속세의 때를 벗은 영가는 푸른 내에 잠긴 우화각(羽化閣)을 건너야만 사찰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속세와의 인연을 마감하고 불국토(佛國土)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즉 우화각이 속세와 불국토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화각은 세월각과 척주각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으며, 사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꼭 건너야 하는 교각(橋閣)이다. 1938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가 지은 송광사 내팔경(內八景) 한시가 있다. 내팔경 중에는 ‘우화각의 맑은 바람’이 7언 절구로 표현되어 있다. 그 중 마지막 절구에 ‘불이층공가관선(不羡層空駕鸛仙) 학을 타고 하늘가는 신선이 안 부럽네.’ 라고 표현하였다. 송광사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우화각에 앉아 애끓는 옥퉁소 부는 나그네는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이고, 우화각 건널 제 속세와의 인연을 맑은 바람에 맡겨 홀연히 씻어버리는 선승(禪僧)의 발심(發心) 또한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이고, 속세의 허물 벗고 우화각 들어 설 때 마중 나온 학의 깃털 밟고 불국토로 향하는 영가들도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세월각과 척주각에서 관욕을 마치고, 우화각을 건너 사찰 안으로 들어선 영가들은 지장전(地藏殿)으로 다시 모셔지게 된다. 지장전에서 본격적인 영가천도의 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월각과 척주각의 창건 년도는 1804년경으로, 조계산송광사지(曹溪山松廣寺誌)에 약간의 기록이 나와 있다. 송광사지 제2편 사원(寺院) 부분에 보면 ‘대재시영혼관욕실(大齋時靈魂灌浴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러한 기능의 전각의 예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또 단칸의 건축적인 구성에 있어서나 종교적인 기능에 있어서나 세월각과 척주각은 송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부분이다. 현재 세월각과 척주각은 영가들의 관욕처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지장전에서 관욕(灌浴)과 재(齋)를 모두 하고 있기 때문이다.
能見難思(능견난사)
송광사는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닌 유물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能見難思는 붙여준 이름만큼이나 오묘한 특징을 갖고 있다.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접시들! 그러나 무지한 상태에서 보고 있으면 과연 이것이 접시로 보일런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佛家에서 보는 보통의 접시들하고는 그 모양새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견난사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만한 비밀이 있다. 그래서 이름도 ‘能見難思’인 것이다. 능견난사는 중국의 金나라(1126~1233)의 章宗皇帝(1188~1208)가 普照國師(1158~1210)께 보내온 접시이다. 당시 금나라의 皇后는 疾厄에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이 때에 보조국사는 定中에서 이를 관찰하고, 즉시 신통으로 공중으로 날아서 金나라에 다다른다. 金나라에 도착한 보조국사는 藥施와 法施로 황후를 낫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감탄한 장종황제가 감사함의 표시로 능견난사와 함께 그의 셋째 아들을 딸려 보내게 된다. 장종황제의 셋째아들이 바로 송광사 16국사 중 제9세국사인 湛堂國師이다. 金나라에서 능견난사의 용도는 황후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던 의식에 사용되었던 접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화려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그저 평범하기만 한 능견난사가 왜 중요한 의식에 사용되었을까? 그것은 제작기법의 특이함 때문이다. 즉 수백여 개의 접시들의 순서를 바꿔 위로 올려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신기하게 딱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시의 신비함이 황후의 병이 낫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그 만큼 중요한 접시였기에 장종황제가 보조국사께 선물 했을 것이다. 송광사에서 능견난사는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을 담아 부처님께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一說에서는 과자를 담았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단순히 과자를 담은 것보다는, 과자를 담아 부처님께 올렸을 것이다. 능견난사는 초기에는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능견난사의 명칭은 원래 ‘能見難思’가 아닌 應器(응기)라고 불렀다. 능견난사로 명칭이 바뀌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능견난사의 신비함을 전해들은 조선 숙종(1674~1720) 임금은 匠人들에게 명하여 이와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수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주조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임금이 ‘능히 보고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능히 보고도 만들지 못한다)’는 뜻의 ‘能見難思’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이러한 능견난사의 이름이 전해서 지금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능견난사는 처음에는 500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28년에는 50점, 현재는 30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500점 모두가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능견난사의 재료는 동철이고, 크기는 지름 16.7cm(1착)이다. 능견난사는 1972년 1월에 전남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또 현재는 천자암의 쌍향수, 비사리구시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중의 하나에 꼽힌다.
송광사 노비첩
송광사에는 고려문서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이고, 다른 하나는 노비첩(奴婢帖)이다. 수선사형지기는 사천대(司天臺)의 관리가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의 실태를 조사한 기록이다. 그 내용은 수선사의 창건연혁과 가람의 배치상황을 적은 다음, 복전기(福田記)라 하여 승려수와 재산목록,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비명을 실었다. 이는 당시 사찰의 규모와 건축 상황, 재산 상태 등을 규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다른 고려문서는 노비첩이다. 노비첩! 양반들의 전통 있는 족보와는 상극에 달하는 단어다. 그러나 송광사에 전하는 노비첩은 내 노라 하는 많은 족보들도 얻기 어려운 보물 감투를 달았다. 즉 수선사형지기와 함께 보물 제572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송광사 노비첩은 1281년(충렬왕 7)에 좌승지(左承旨) 조인규(趙仁規)가 수선사 주지 내로(乃老)에게 발급한 것이다. 수선사 주지 내로...... 송광사 16국사 중 제5세 국사이신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을 말한다. 원오국사(1215~1286)는 고종 2년(1215) 6월에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태어나셨다. 국사는 15살 때에 송광사 2세 국사이신 진각국사(眞覺國師)께 나아가 출가 인연의 길을 걷게 된다. 노비첩은 국가문서를 담당하는 밀직사(密直司)의 좌승지가 왕의 명령(王旨)을 받들어 작성한 것이다. 즉 국왕문서의 하나인 선전소식(宣傳消息)이다. 선전소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충렬왕 원년(1275) 때 이다. 만들어진 이유는 빈번한 왕의 어명으로 인한 행정절차의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송광사 노비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54년 갑인년(甲寅年)에 국가에서는 처형 또는 유배형에 처한 관노와 장군가의 노비를 개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예빈경(禮賓卿)이였던 원오국사의 생부 양택춘(梁宅椿)에게도 최씨 가문에 의해 처형당한 노비가 급여되었다. 이에 예빈경(禮賓卿) 양택춘(梁宅椿)은 급여 받은 노비 건삼(巾三)과 그의 자녀를 원오국사에게도 물려주었다. 원오국사는 이들을 수선사의 거란본대장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절에 받치고, 이에 향후 다투고 원망하는 경우가 있거든 금지하고 영구히 수선사에 속하도록 하게 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뜻을 올린 것에 대해 조인규가 왕의 허락명령을 받들어 인증해 준 것이 노비첩이다. 이런 노비첩은 세속의 아버지가 출가한 자식에게도 노비를 상속한 증거가 되는 문서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세속의 아버지로부터 상속 된 노비를 원오국사는 개인적인 것으로 취하지 않고 수선사에 부속시켰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항은 고려시대 사회상과 노예 제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하겠다. 또 700년을 뛰어 넘는 시간도 모자라 왕이 허락한 속 깊은 역사도 그 중요성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송광사 노비첩은 닥나무 종이에 묵서로 명기 되어 있다. 문서의 크기는 59㎝ × 66㎝이고 관인이 5개 찍혀있다. 현재 문서 끝에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보인다. 문서 상태는 하단의 몇 자만이 결락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하다. 2004년도에 문서의 보존수리가 완료되어 현재 송광사 박물관 전시실에 전시 중이다
송광사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
보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이른 아침 모후산으로 몰락하는 달의 투명한 마지막 모습이 그러하고, 새벽 예불 오가는 길 까만 하늘에 박혀 있는 무수한 별들이 그러하고, 관음전에 참배 차 들르시는 스님들의 눈 묻은 신을 바르게 놓는 보살님의 언 두 손이 그러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 하나! 책상 앞 벽에 붙여 놓은 부처님의 모습이 그러하다. 수년째 보고 있어도 매번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것은 바로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이다. 영산전 영산회상탱 처럼 가을 단풍 같은 화려한 멋도 없고, 등장 인물수로도 상당히 딸린다. 그러나 조촐한 다섯 식구가 모여 있는 모습은 가슴을 두 근 반 세근 반 뛰게 하는 매력이 있다. 송광사 응진전(應眞殿)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은 진경시대(眞景時代) 불화계의 거장 의겸(義謙) 화사(畵師)가 주도한 작품이다. 작품이 모셔진 응진전은 석가모니부처님과 16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가진 전각이다. 2000년 응진전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 도리의 기록에 의하면 1504년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로써 응진전은 국사전, 하사당과 함께 송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응진전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는 16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불상과 나한상 뒤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은 172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송광사 불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작품의 중앙에는 불단(佛壇) 위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풍만한 2중 원광을 갖춘 석가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第一에 보면「기첩상(其疊上)에 세존(世尊)의 상(像)을 그린다. 몸은 진금색(眞金色)으로 적가사(赤袈裟)를 입고………칠보장엄(七寶莊嚴)의 연화좌상(蓮華座上)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다라니집경에서 말한 석가여래의 도상은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의 본존불 모습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문수 ․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다시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第一을 보면「좌변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을 화작(畵作)한다. 몸은 모두 백색으로 항배(項背)에 광이 있고 칠보영락(七寶瓔珞) 보관천의종종(寶冠天衣種種)으로 장엄(莊嚴)한다. 우변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화작(畵作)하는데 장엄여전(莊嚴如前)하고 백상(白象)을 탄다」라고 되어 있다.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에 그려져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보면 경전에 나와 있는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칠보영락의 관을 쓴 목 뒤 주변으로 두광이 있고, 화려한 천의 묘사와 장신구들의 화려한 장엄은 두보살의 육감적인 몸매와 잘 어울린다. 단 보현보살은 ‘백상을 탄다’라고 되어있으나 본 작품에서는 문수보살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와 각 보살들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가 표현되어 있다. 아난은 석가여래의 신광에 오른손을 짚고 왼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있고, 가섭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검지 손가락을 세운 자세를 하고 있다. 석가여래의 신광 뒤로 보이는 두 제자의 익살스러운 자세는 화면에 동감을 연출하는 센스를 느끼게 한다. 본 작품의 필선은 힘 있고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대신 전면에 드러난 인물들의 묘사가 얼굴에서 손발 끝에 이르기까지 섬세하다. 특히 화면 전체적으로 배여 있는 담채적인 색채는 진지한 발심(發心)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태은 보물 제13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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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