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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說
中觀論理와 廻諍論
圖南 金星喆
1. 中觀論理의 宗敎性
'論理를 통해 종교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까?' 이 의문언 대한 해답이 中觀論理에 있다. <中觀論理>, 또는 <空의 論理>란, 인간의 논리적 사유의 타당성을 비판하는 <反論理>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구사하는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을 해체시키는 <涅槃의 論理>이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들로 이루어진 생각과 언어를 통해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며,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자기 나름대로의 世界理解에 토대를 두고 삶을 영위한다. '나의 영혼은 몸 속 어딘가에 있어서 나를 움직인다', '나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귀로 소리를 듣는다', 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죽으면 이 세상 밖 어딘가로 떠나간다', '나와 남은 다르다', '이 세상은 조물주가 만들었다.'‥‥ 이런 관점들은 은연중에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고, 각 時代精神의 교육을 통해 구성된 것일 수도 있으며, 특정 종교에서 주입하는 神話構造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관점들이 누적됨으로써 형성된 한 개인의 人生觀이나 世界觀[=見 : drsti]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一生을 살아가게 해 주는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다른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를 끝없는 윤회의 浮沈 속에 얽어매는 속박의 사슬인 것이다.
또, 우리는 언어와 생각을 이용하여 인생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한다. '나는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찬란한 이 삶은 어째서 소멸해 버려야 하는 것일까?' 有史以來 수많은 종교가와 철학자들은 이런 형이상학적 고민[=難問]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해답은 각양각색[[=戱論]이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해답의 차이로 인해 새로운 갈등을 야기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대부분의 갈등은 각 개인들의 세계관의 차이에 起因하는 것이며, 각 세계관들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형성함으로써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그런 종합 역시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갈등의 因子를 胚胎하고 있는 것이다.
<중관논리>에서는, 갈등하는 양측을 위해 제3의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거나, 다양한 철학적 물음에 토대를 두고 그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 그런 세계관과 철학적 고민을 만들어 낸 우리의 생각에 내재하는 본질적 모순을 지적해 줌으로써 갈등과 고민 자체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즉 제시된 문제에 토대를 두고 그긧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문제 자체가 거짓되게 구성된 것이었음을 자각케 하여 그 문제 자체를 해소 시킨다[=戱論寂滅]. 즉, 해체시켜 열반에 들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계관[=邪見]의 갈등과 철학적 고민[=難問]에 대한 진정한 해결법이며, 불교적 방법의 본질이기도 하다.
2. 中觀論理의 構造
우리는 논리에 의해 사유하며, 논리는 <개념>과 <판단>과 <추리>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이 설정되면, 그런 <개념>들을 연결하여, '무엇이 어떠하다'는 하나의 <판단>이 작성되고 그런 판단들을 조리 있게 배열하면, 三段論法(syllogism)과 같은 <추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논리를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한 합당한 결론이나 이론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反ㅡ 論理인 <中觀論理>에서는 <개념>의독립적 실재성[=有自性, 法有]을 비판하고, 그런 개념들을 결합하여 構成해 내는 <판단>에 내재하는 본질적모순[=二邊]을 지적하며, 그런 판단들에 의해 築造된 <추론>의 부당성을 力說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反論理的 비판 과정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는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中論」에서는 특히 아비달마(Abhidharma) 불교의 衒學的 哲學體系에서 實體視하던 갖가지 개념들[=法數]을 대상으로 삼아 반논리적 비판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런 비판 작업의 토대는 初期佛典에 등장하는 緣起說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公式으로 표현되는 연기설의 還滅門이다. 이를 통해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이 해체되기에, 그런 <개념>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는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가 도출될 수 있다.
緣起公式에서 말하는 <이것>과 <저것>에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과 같은 價値개념은 물론이고, <연료>와 <불>과 같은 存在개념,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認識개념, <주체>와 <작용>과 같은 體用개념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개념쌍들이 대입될 수 있다. <더러운 것>이 없으면 <깨끗한 것>도 없으며, <연료>가 없으면 <불>도 없고, <눈>이 없으면 <시각대상>도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작용>도 없다. 따라서, <더러운 것>이나 <불>, <눈> <주체> 등은 결코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空의 이치이다. <더러운 것>은 항구불변하는 실체가 없기에[=無自性 : mihsvabhave] 空(sunya)하고, <불>도 독립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空하며, <눈>도 空하고 <주체>도 空하다. 五蘊이나 六界, 涅槃과 如來등 敎學的 개념들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그 독립적 實體[=自性 : svabhava]가 없기에 空하다.
따라서, 이런 空한 <개념>들을 결합하여 구성하는 갖가지 <판단>들 역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卑近한 예를 들어보자. '비가 내린다'는 體用판단의 경우, <비(主體)>가 없으면 <내림(作用)>도 없으며, <내림>이 없으면 <비>도 없는 것이기에 [=還滅緣起的 토대], '비'라는 主語와 '내린다'는 述語를 분할[=分別 : vikalpa]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 즉, <비> 속에 <내림>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없고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없다.
먼저, '비'라는 주어에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면 '비가 내린다'는 말은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고 만다. 즉, '비'라고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내리고 있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다시 '내린다'는 술어를 부가 하여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하게 되니, 내리는 것이 두 개인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第1句的 이해 비판, 因中有果論的 常見 비판], 그렇다고 해서, '비'라는 主語에 '내린다'는 述語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고 보게 되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는데, 이 세상 어디에도 내리지 않는 비는 없다. '비'라고 말을 하면 내리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第2句的 이해 비판, 因中無果論的 斷見 비판].
서구논리학에서는 <개념>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판단>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그것이다. 주어의 의미 속에 술어의 어미가 내포되어 있는 판단이 분석판단이며, 그렇지 않은 판단이 종합판단이다. 그러나 중관논리에서는 판단에 대한 그런 구분의 타당성을 모두 비판한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을 분석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위엣· 말했듯이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종합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분할 불가능한[=不二] 사태를 두 개의 개념으로 분할한 후, 그 개념쌍을 연결하여 구성되는 인간의 모든 판단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판단들의 사실성은 해체된다.
마지막으로 <추리론>의 경우, 중관논리에서는 적대자가 추로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적대자가 구성한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내세운 추론식을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空 사상을 비판하는 적대자가 '모든 것이 空하다면 四聖諦는 없다'라고 한다면 假言推理 형식의 추론을 구성하는 경우, 龍樹는 '모든 것이 空하지 않다면 四聖諦는 없다'고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의 주장을 논파한다[「中論」 第24 觀四諦品]
그러면 중관논리에서 이렇게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적 대응성과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자기 나름의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형이상학적 고민을 하며, 우리의 언어와 생각은 <개념>과 <판단>과 <추론>을 이용해 논리적 방식으로 구사된다. 따라서, 그런 고민들을 야기한 논리적 방식의 본질적 허구성이 폭로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가장 간단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고민을 야기한 세계관 자체가 허구였음이 판명되면 그로 인해 야기된 형이상학적 고민 역시 허구로 귀결될 것이다. 中觀的 反一論理에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시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들었던 철학적 고민들 중,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찬란한 이 삶은 언젠가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라는 판단이 야기하는 비장한 느낌은, 체험할 수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는, 死後의 <無>를 임의로 설정함으로써 발생되는 거짓된 實存感일 뿐이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판단은, 인생을 떠나 <내>가 실재한다는 착각에 토대를 둔 그릇된 感傷이다. 또, '나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판단은 <보이는 대상>과 관계없이 <보는 작용>인 눈이 실재한다는 세계관에 토대를 둔 실재론적 陣述인 것이다. 즉, 그런 의문들과 관점들은 사물의 眞相에 토대를 두고 구성된것이 아니라, 우리의 思考가 世界를 제멋대로 裁斷[=分別]한 후 조작해 낸 허구적 의문이고 관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허구성을 자각하게 되면 문제 자체가 해소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다. 그 결과 '현실의 이삶이 새삼스럽게 찬란할 것도 없고['.' <無>가 없으면 <有>도 없기에], 이 세상에 태어날 주체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며['.' <세상>이 없으면 <나>도 없기에], 눈이 따로 있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대상>이 없으면 <눈>도 없기에]라는 實相을 자각하게된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은 無相의 實相이다. 無라는 相이 無한 實相이란 말이다. 그런 모든 感傷과 疑問들은 우주와 인생의 정연한 이치인 <緣起實相>을 위배하고 우리의 생각에 의해 문제가 되는 事態를 분할[=分別]했기 때문에 발생된 거짓 판단들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事態건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不二]. 왜냐하면 '모든 것은 緣起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적 고민이나 갈등이 있는 경우, 中觀論理的 분석 과정을 통해 그런 고민과 갈등을 야기한 갖가지 세계관을 하나 하나 해체함으로써 [=苦의 止滅, 澤滅(無爲)] 우리는 마음의 平安을 얻게 된다. 初期佛典의 <無記說>의 취지는 붓다(Buddha)가 14가지(혹은 10가지) 철학적문제 [=難問]에 대해 침묵을 한 후, 四諦나 五蘊, 十二緣起등을 說示함으로써 애초의 그런 의문을 구성한 사고 방식을 치료한다는 데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서도 14難問이나 62見등의 邪見을 일으킨 癡心에 대한 치료법으로 緣起觀法을 제시한다. 그리고 邪見에 대한 이런 치료 과정을, 붓다의 교법을 대하는 一部 아비달마 논사들의 實在論的 태도(realistic attitude)에 적응하여 보다 정밀하게 재현해 낸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3. 中觀論理의 正當性에 대한 解明 · 「廻諍論」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중관논리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還滅 緣起에 토대를 두고, 우리의 思惟의 도누인 <개념>의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성, <추리>의 타당성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사물은 自性(svabhava)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성에 대해 그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中觀論師 역시 개념을 이용하여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판단을 작성해 내야 하고, 어떤 <이유>를 들어 그런 판단을 주장하는 추론을 구성해야 하며, <언어>를 통해 이를 표출한 후,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와 <이유>와 <인식>의 실재성, 즉 自性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튼 自性이 없다'는 판단은 진리로서의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자성이 없는 모든 사물의 범위 중에서 <언어>와 <이유>와 <인식> 등은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廻諍論」에서 적대자인 실재론자(realist)는 空思想이 봉착하게 되는, 바로 이러한 自家潼着을 지적하고 있다. 실재론자가 제시하는 논박들을 유사한 성격끼리 묶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말소리도 공해야 하기에자가당착에 빠진다(제1, 2송).
②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사실을 아는 인식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기당착에 빠진다(제5, 6송).
③ 모든 것이 공허하다면 공이라는 이름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기당착에 빠진다(제9송).
④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부정의 대상은 존재해야 하기에 자기당착에 빠진다(제11, 12송).
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에 대한 이유도 공해야 하기에 그런 주장은 부당하다(제17, 18, 19송).
이에 대한 용수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自性이 없다'거나 '空하다'는 언명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먼저 용수는 空사상이 봉착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적대자가 말하듯이, 용수는 '모든것이 자성이 없다'는 <말>도 자성이 없으며, <인식>이나 <이름>, <부정의 대상>, <이유> 모두가 그 자성이 없다는 점을 시인한다.
서구논리학에서도 역설의 발생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럿셀(Rusdell)의 階型理論(type)이나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이들은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는 말은 제2계의 언어라거나 메타ㅡ언어(meta-language)라는 규정을 가함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편타당성을 상실한 恣意的인 해결일 뿐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나 럿셀이나 타르스키와 같은 방식의 대처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 란 글귀를 예로 들어 보자. 이는 역설적 상황이다. 낙서금지라는 낙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형이론이나 이종언어에서는, '일반적인 낙서'와 '낙서금이라는 낙서' 사이에 선을 그음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을 긋는다고 하여 '낙서금지'라는 글씨에 더럽혀진 담벼락이 깨끗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낙서금지라는 말은 결코 쓸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서금지라는 말이 쓰여지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첫째는 깨끗한 담벼락에 그 어느 누구도 낙서를 하지 않는 상황인데 집 주인이 다짜고짜 낙서금지라는 글을 큼직하게 써 놓은 경우이고, 둘째는 낙서가 잘못된 것이라는 죄의식 없이 동네 아이들이 낙서를 하는 경우 집주인이 그것을 막기 위해 한 구석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써 놓은 경우이다. 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집주인의 행위는 분명 자가당착적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낙서금지'라는 글귀는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다른 낙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다른 낙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할 수 있기에 그 가치가 인정된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空의 敎說>이 빠지게 되는 역설에 대한 「廻諍論」의 해명 역시 그 구조가 이와 동일하다. 幻覺의 女人을 진짜 여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붓다의 神通力으로 만들어진 환각의 사람이 그런 착각을 제거해 주듯이, 또 집에 데와닷따(Devdatta)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집에 데와닷딱· 없다'고 밀해 줌으로써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듯이,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自性이 있다'고 착각하기에, 空한 <空의 敎說>을 통해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고 말하며 사물의 진상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自家撞着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先行하는 잘못이 있는 경우에 그에 대응하여 發話되는 것이 空 사상의 言明이다. 이는 應病與樂의 구조이다. 病이라는 先行條件이있기에 樂을 주는 것이다. 成道 후 梵天 勸請의 神話가 이를 대변하듯이 붓다의 교설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응병여약적 구조를 갖는다.
龍樹는 「廻諍論」을 통해 불교적 교설의 응병여약적 성격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말이 단순한 주장이라면 이는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진상에 대해 無知한 사람이'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 이를 시정해 주기 위해 그 말이 발화된 것이라면 이는 정당할 수 있다. 마치 죄책감 없이 낙서가 자행되고 있던 담벼작 한 쪽에 쓰여지는 <낙서금지>라는 낙서와 같이‥‥.
4. 「廻諍論」에 대해
(1) 題目
본 논서의 산스끄리뜨 제목인 「Vigrahavyavartani」는 '분리, 싸움, 논쟁'을 뜻하는 'vigraha'와 '제거, 배제, 차단'을 뜻하는 'vyavrtani'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인데, 그 성격에 따라 두 가지가 해석이 가능하다. 병렬복합어(Dandva)로 해석할 경우에는 <논쟁과 차단>이라는 의미가 되며, 격한정 복합어 (Tatpunusa)로 해석하면 <논쟁의 차단>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제1송에서 제 20송까지는 실재론자인 적대자가 龍樹에게 퍼부은 <논쟁> 부분에 속하고 제 21송에서 제70송까지는 적대자의 논쟁에 대한 龍樹의 <차단> 부분이 된다. 한역본에서는 「廻諍論」, 즉, <논쟁을 되돌리는 논서>라고 번역되고 티베트역본에서는 「rtsod-pabzlog-pahi hgrel-pa」, 즉 <논쟁을 차단한ㄴ 논서>라고 번역된다.
(2) 著者와 그 著述
한역본 「廻諍論」은 그 저자를 龍樹(Nagarjuna : 150~250 CE)로 明記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산스끄리뜨 本 「中論」 註釋書인 「淨明句論(Prasaannapada)」의 저자인 明稱(Candrakirti : 560~640 CE) 역시 그 詩頌과 주석 모두가 龍樹의 眞撰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龍樹菩薩傳」에 의거하여 龍樹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인도 바라문 가계에서 태어난 龍樹는 천성이 총명하여 어린나이에 베다(Veda), 天文, 地理, 道術등의 학문을 모두 익히게 된다. 長成하자 인생 최고의 즐거움은 異性에 대한 탐닉이라고 생각하고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隠身術을 터득하여 왕궁에 잠입한 후 궁녀들을 농락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왕에게 발각되어 친구들은 모두 살해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龍樹는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욕망임을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 수계한 후 90일만에 소승의 經 · 律 · 論 三藏을 모두 익힌다. 그 후 雪山에 들어가 대승경전을 얻어 讀誦, 硏究했으나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만심을 내어 자기 나름의 교단을 만들어 服裝과 戒律을 새롭게 制定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 때 이를 불쌍히 여긴 大龍菩薩이 그를 데리고 바다 밑 龍宮 속으로 들어가 七寶로 된 함을 열어 심오하고 무량한 대승경전 중의 일부를 보여준다. 龍樹는 90일에 걸쳐 경전을 독송하여 利他의 진실을 체득하고, 我空과 法空의 이치를 깨달은 후 남인도로 돌아와 수많은 저술괻 토론을 통해, 外道와 小乘을 굴복 시킴으로써 대승의 교의를 널리 펼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말년에 小乘法師의 시기를 받자 스스로 조용한 방에 들어가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入寂한다. 그의 이름을 龍樹, 즉 나가르주나(Nagarjuna)라고 하는 이유는 龍(Naga)의 인도를 받아 깨달음을 얻고, 어머니가 아르주나(Arjuna)라는 나무 아래에서 그를 출산하였기 때문이다.
龍樹의 저술로 포장되어 있는 논서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中論頌(Madhyamika)」
2. 「廻諍論(Vigrahavyavartani)」
3. 「六十頌如理論(Yuktisastika)」
4. 「空七十論(Sunyatasaptati)」
5. 「廣破論(Vaidalyaprakarana)」
6. 「因緣心頌(Pratityasamutpada-hrdaya-karika)」
7. 「堡行王正論(Ratnavali)」
8. 「勸誡王頌(Surllehkha)」
9. 「大乘二十頌論(Mahyanavimsika)」
10. 「十二門論(Dvadasamukhasastra)」
11. 「大智度論(Mahaprajnaparamitasastra)」
12. 「菩提資量論(Bodhisambhara)」
13. 「十住毘婆沙論(Dasabhumikavibhasasastra)」
14. 「四讚歌(Catustava)」
15. 「方偏心論(Upayahrdaysastra)」
물론 이 모두가 龍樹의 眞撰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龍樹가 비단 中觀的 空 사상뿐만 아니라, 아비달마 교하꽈 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華嚴의 十地 思想 역시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因緣心論頌」이나 「寶行王正論」, 「勸誡王頌」, 또 「中論」 第26品등에서 보듯이 龍樹는 결코 아비말마 교학의 效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비달마적 法數들을 대하는 실재론적인 태도를 비판할 뿐이다. 이것이 空 사상의 요점이다. 그래서 「中論」과 「空七十論」, 「十二門論」등에서 龍樹는 정교한 空의 논리, 즉 中觀論理를 구사하여 갖가지 法數들을 實體視할 때 발생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 후 空 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그에 대한 실재론자들의 그릇된 비판이 제기되자 龍樹는 「廻諍論」을 저술하여 空 사상의 정당성을 변호하였던 것이다.
(3) 詩形式
산스끄리뜨 시인의 작품(Kavya)에는 散文(Gadya : prose)과 韻文(Padya : verse)이 있으며, 韻文은 네 개의 句(Pada : quarter)로 이루어져 있다. 각 句의 길이는 拍子(Matra : syllabic instant, mora)의 수나 音節(Vama : syllable)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운문의 韻律(Vrtta : verse rhythm)은 크게 拍子韻(Matravrtta=Jati)과 音節韻(Vamavrtta=Vrtta)ㄹ드 나누어지는데, 拍子란 하나의 음절을 발음할 때 걸리는 시간을 나타낸다. 'a, i, u, r, l'는 短音(hasva : short)이기에 오직 한 拍子만을 가지며 'a, i, u, r, l, e, ai, o, au'는 長音(dirgha : long)이기에 두 拍子를 갖는다. 또 둘 이상의 자음이 겹치는 경우어는 그 앞의 모음을 장음으로 보며, 필요한 경우 句의 末尾에서는 단음을 장음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산스끄리뜨 운문들 중 龍樹의 저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슐로까(Sloka)와 아르야(Arya)이다. 슐로까 는 「베다(Veda)」의 아누스트브(Anustbh : 4×4調)에서 발달한 敍事詩 형식인데, 8음절 짜리 句(Pada) 넷으로 이루어져 있는 총 32음절의 韻文이며, 아르야는, 첫째 句와 셋째 句는 13박자, 둘째 句는 18박자, 넷째 句는 15박자로 이루어져 있는 총 57박자의 韻汶이다. 약 450여수에 이르는 「中論頌(Madhymaka Karika)」은 32음절의 슐로까(Sloka)형식으로 쓰여진 반면, 「廻諍論」의 71首의 詩頌들은 모두 57박자의 ㅇㄴ르야(Arya)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廻諍論」 시송들에 대한 주석문은, 현존하는 龍樹의 산스끄리뜨문 저술들 중 산문체로 쓰여진 유일한 것이다.
또, 過去의 譯經家들은 經論의 의미뿐만 아니라 韻律까지 再現하고자 하였기에, 「廻諍論」 本頌에 대한 티베트譯文은 7×7調로, 漢譯文은 古體의 五言詩로 音節韻을 맞추어 번역되어 있다.
(4) 對論自者의 정체
古來로 인도의 왕들은 각 종파의 논사들을 초청하여 철학적 토론을 벌이게 하고 이를 감상한 후 승리자에게 포사을 하며 여가를 보냈다. 그런 토론의 場을 빠리샤드(parisad)라고 부른다. 古代 인도는 전 세계 어느 문화권보다 철학적 토론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비단 불교 문헌들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저술된 수많은 철학적 논서들이 對論 形式으로 기술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廻諍論」 역시 고대 인도의 이러한 토론 문화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면 「廻諍論」에서, 空 思想이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龍樹를 공격하는 적대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밧타차리야(K. Bhattacharya)와 梶山雄一 모두 제1송에서 제5송까지에 등장하는 對論者가 니가야 논사(Naiyayika)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디론자는 니야야 학파의 소의경전인 「니야야 수뜨라(Nyaya Sutra)」에서와 같이, <현량>과 <비량>과 <비유량>과 <성언량>의 네 가지를 정당한 인시방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廻諍論」에 등장하는 '인식방법의 실재성에 대한 토론'의 상당량이, 입장을 달리하여 「니야야 수뜨라」 에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부분에 등장하는 대론자의 정체에 대해 이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梶山雄一은, 法의 自性을 주장하는 대론자의 게송에 나열되어 있는 119가지의 法數들은 모두 불교적인 것이기어 제6송에서 제20송까지는 소속미상의 아비달마 불교도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 밧타차리야는 이 부분 역시 나야야 논삭· 불교도의 입장을 빌려 용수를 비판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論旨 중, 네 가지 인식방법을 근거로 대론자의 정체를 나야야 논사로 확정한 것에는 문제가 있다. 흔히, 불교에서는 <현량>과 <비량>의 두 가지만을 정당한 인식방법으로 인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陳那(Dignaga : 400~480 CE)와 法稱(Dhamakirti : 634~673 CE)등 후대의 불교 논리가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方偏心論」이나 「中論」 靑目疏 등 그 이전의 불교 논서들에서는 네 가지 인식방법을 모두 정당한 인식방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 龍樹 당시에 니야야 학파가 학파로서의 독립성을 갖고 활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니야야 수뜨라」에는 龍樹의 제자인 阿利耶 提婆(Arya Deva : 170~270 C.E)와 니야야 논사(Naiyayika) 간에 이루어진 후대의 토론도 등장하며, 니야야라는 명칭도 訶利跋摩(Harivarman : 250~350 CE)에 의해 저술된 논서인 「成實論」의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이다. 「廻諍論」 성립 당시에 니야야 학파가 독립성을 갖고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굳이 대론자의 정체를 말하라면,119가지法數를 自派의 교의로 갖고 있던 특정 불교 부파 내의異端者들 중 논리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니야야(Nyaya) 학파가 독립한 후, 「니야야 수뜨라(Nyaya Sutra)의 편집 과정에서 인식방법의 실재서을 둘러싼 龍樹와의 토론 내용이 經文으로 채택된 것일 뿐이다.
(5) 硏究 略史
① 1929년 山口益이 漢譯本, 티베트譯本에 토대를 두고 佛語로 飜譯함(G. Yamaguchi, Traite de Nagarjuna pour ecar ter les vaines discussions, Vigrahavyavartani, traduit et annote, J.A. 1929, pp. 1~86)
② 1929년 G. Tucci가 漢譯本에서 英譯을 한 후, 티베트譯本의 로마字교정본과 함께 발표함(G. Tucci, pre-Dinnaga Buddhist Text on Logic from Chinese Sources, GOS. XLIX, 1929)
③ 1934년 池田澄達과 遠藤二平에 의한 日本語 譯, 티베트譯本을 참조하면서 漢譯에서 日譯함(國譯一切經, 池田澄達譯, 廻諍論, 1934)
④ 1936년 7월 티베트 샬루의 僧院에서 티베트 文字로 기록된 산스끄리뜨 寫本이 발견되고, 이듬해 Sankrtyayana에 의해 교정본이 出刊됨(K. P. Jayaswal & Rahu Sankrtyayana, Vigrahavyavartani by Acharya Nagarjuna with Author's Commentary, Journal of the Bihar and Orissa Research Society. 23, 1927)
⑤1949년 山口益의 註釋的 연구(廻諍論について, 密敎文化7, 1949: 廻諍論の註譯的硏究, 密敎文化8~10, 12, 1950)
⑥1951년 E. H. Johnston과 Amold Kunst에 의한 산스끄리뜨文 교정본이 出刊됨(E. H. Johnston & Amold Kunst, The Vigrahavyavartani of Nagarjuna with the Author's Comm entary, Melange Chinois et Buddhiques, Nr. 9).
⑦ 1957년 S. Mookerjee의 산스끄리뜨文 교정本 出刊(Nava Nalanda Mahavihara Research Pubication I, 1957).
⑧ 1959년 P. L. Vaidy가 Sankrtyayana本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出刊함(Buddhist Sans krit Text No.10, pp. 313~333)
⑨ 1971년 Kamaleswar Bhattacharya가 E. H. Johnston & Arnold Kunst의 교정本을 英譯함(Joumal of Indian Philosophy, Vol. l, 1971).
⑩ 1974년 梶山雄一이 E. H. Johnston & Amold Kunst의 교정본을 日本語로 번역함(廻諍論(廻諍の超超), 大乘佛典14-龍樹論集, 中央公論社, 東京, 1974).
⑪ 1978년 Kamaleswar Bhattacharya가 과거 자신의 번역에 수정을 가한 후 E. H. Johnston & Amold kUNST의 교정본과 함께 묶어 출간함(The Dialectical Method of Nagajuna(Vigrahavyavartani), Motilal Banarsidass,1978).
사경자 종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