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本貫)과 시조(始祖) -②-
▶ 시조(始祖);
시조(始祖)라 함은 <한 겨레와 씨족(氏族)의 맨 처음 되는 조상>으로서 아버지, 조부(祖父), 증(曾)조부, 고(高)조부, 5, 6, 7, 8대조 등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가문(家門)의 최초의 할아버지가 바로 시조(始祖)이다. 곧 가문의 뿌리(1世) 이신 분이다.
△ 성씨와 본관 제도의 유래.
우리나라의 성씨와 본관제도는 중국의 것을 수용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로 생각된다.
중국은 문헌상 황제(皇帝) 이래 역대의 제왕이 봉후(封侯) 건국할 때, 출생과 동시에 성(姓)을 주고 채지(采地-영토 및 경작지)를 봉해 씨(氏)를 명명해준 데서 성씨는 계속 분화되어,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고, 동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혹은 부성(父姓)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성을 모방하거나 변화시키고 스스로 칭하기도 하였다. 삼대(三代- 하 은 주 시대) 이전에는 남자는 씨(氏)를, 여자는 성(姓)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姓氏)가 합일 되었으며, 씨는 귀천(貴賤)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뒤에 진(秦). 한(漢)시대를 거쳐 조(曹). 위(魏) 때 9품 중정법(中正法) 실시를 계기로 문벌 귀족사회가 확립됨에 따라 각 군(郡) 별로 성의 지벌(地閥)을 나타내는 ※군망(郡望)이 형성되어갔고 수(隋). 당(唐) 시대에는 군망에 따라 사해대성(四海大姓-최씨. 정씨. 왕씨. 시씨). 군성(郡姓). 주성(州姓). 현성(縣姓)이 있었다.
※ 군망(郡望)- 중국에서는 본관(本貫)이라 지칭하지 않고 ‘郡望(군망)’이라고 지칭을 한다. 쉽게 말하면 어느 지방의 명망 있는 가문이란 뜻이다.
△ 우리의 성씨 제도는 신라의 한화(漢化) 정책에 따른 중국수입품이다.
이와 같은 중국 성의 제도가 한반도와 중국과의 활발한 문물교류와 신라의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에 의하여 수용된 것이다. 즉, 한식(漢式) 지명으로의 개정과 함께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입하게 되면서부터 신라의 왕성 3성, 박(朴). 석(昔). 김(金)과, 6두품계층 6성,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을 비롯하여 진골(眞骨)과 6두품계층이 신라 건국 초부터 비로소 성을 가지게 되었다.
△ 고려에서는 효과적인 징세를 위해서 본관과 사성(賜姓) 제도를 실시하였다.
고려 초기에 와서는 지배층 일반에게 성이 보급되는 동시에 본관제도가 정착되었다 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전국의 군현(郡縣) 명칭을 바꾸고 각 읍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함과 동시에 유. 이민을 정착시켜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효과적인 징세. 조역(調役)을 위해서 본관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좁고 폐쇄적인 골품제도를 청산하면서 신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신분제도를 확립하고 일정한 지역에 씨족을 정착시켜 효과적인 지방통치와 농민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필요에서 본관제도가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 확립된 성씨와 본관제도는 당(唐)대의 제도를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며, 신라 말의 최치원 및 고려 시대 문사들이 본관을 표기할 때 당대의 군망(郡望)을 즐겨 쓰고 있었다는 데서도 그러한 주장이 뒷받침된다. 또한 고려 성종 11년(992년) 군현의 별호(別號)를 정한 것도 당(唐)의 군망을 모방해서 본관명을 미화하였던 것이다.
△ 본관은 국가로부터 주어졌는가? 스스로 칭하였는가?
고려초기에는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관제도가 정착된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양수척(揚水尺)과 같은 특수한 천인을 제외하고는 양민과 천민의 구별 없이 모두 본관을 갖고 있었다. 당초에는 본관과 거주지가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지방 토성(土姓)의 상경종사(上京從仕)와 국가적인 사민(徙民) 및 유 이민의 발생으로 인해 일치하지 않는 계층이 증가해갔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과 관료층은 대체로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았다.
△ 본관과 성씨 없는 사람 없다.
15세기 초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항에 의하면, 당시 성의 수는 250 내외이며, 본관 수는 현(縣)이상만 하더라도 530여 개, 촌락(村落) 이하를 본관으로 하는 것까지 합하면 1.500개가 넘었다. 15세기 이후부터는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적은 반면, 본관을 변경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조선왕조의 양반지배체제가 존속하는 동안 성과 본관을 갖지 못한 천인이 있었으나, 한말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된 뒤부터 모두 성과 함께 본관을 가지게 되었다.
△ 성씨와 본관의 관계.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처음이름이 삼능산(三能山)으로 곡성사람이었지만, 고려 태조와 함께 평산(平山)으로 놀러가 그 곳이 좋았으므로 평산을 하사 받았으며, 배현경(裵玄慶)은 처음 이름이 백옥삼(白玉衫)이 었으나, 태조로부터 배현경(裵玄慶)으로 사성명(賜姓名) 받고, 경주(慶州)로 사관(賜貫) 받았다 한다. 한편, 하동 쌍계사 비문에 진감선사의 본관이 황룡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선사가 황룡사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따라서 성씨만이 같다고 해서 전부 같은 혈족(血族)이 아니며, 본관까지 같아야 같은 혈족으로 불 수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