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2리(慶尙北道 榮州市 浮石面 甘谷2里)에 있는 안영유의 묘갈이다.
1559년(명종 14년)에 세워진 이 비는 후손인 안위(安瑋)가 비문을 짓고, 생원(生員) 금축(琴軸)이 글씨를 쓴 것이다.
안영유(생몰년미상)는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할아버지로, 추밀원부사 상호군(樞密院副使 上護軍)에 추봉(追封)되었다.
비문에는 따르면 후손인 안상(安瑺)이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부임하여 안영유의 묘소에 참배하였다가, 묘역을 개수하면서 영모암(永慕菴)이라는 12칸의 재사(齋舍)를 세워 관리하였다고 한다.
追封樞密院副使 安永儒 墓碣銘幷序
公姓安氏 諱永儒 順興人 追封樞密院副使上護軍 考曰子美 追封神虎衛上護軍 子曰孚 中議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 追封守太師門下侍中 皆以太師公子文成公珦貴顯也 諺傳 太師公幼時 遇一術士 愛公英秀 指智藏山中一麓言 葬此必世貴 遂葬公 文成在高麗 入冠百僚 配食文廟 道德政事 垂範萬世 厥後子孫 貂蟬相繼 將三百年于玆 今之立於朝者 繼姓 則有舜佐 以進士 歷淮陽府使 公信再登文科 奉常副正 於公十一代孫 瑋玹同登正德辛巳科 瑋以承政院右承旨 陞兵曹參判 玹以議政府左贊成 陞左議政 瑺以吏幹顯由刑曹正郞 再轉爲榮川郡守 景嵂以蔭 翊衛司衛率 寬登科 承文正字 吾兄弟三人 與景嵂寬 皆十二代孫 景嵂之子宗道 登科 選入藝文檢閱 若外孫 則靑紫滿朝 卿相布列 豈非先祖積善裕慶之應歟 瑺到榮 先訪內外諸族 則居豐榮醴者甚蕃 相率而拜于廟 墓乃辛坐乙向 歲久頹毁 傍有偸葬 相與嘆曰 先祖墓至此極 我輩之罪 修墳墓 立刹守之 必免此患 共擇子孫之尤勤幹者 主其事 去偸葬之穢建立菴之議者 進士李玠李克儉文明凱其人也 參奉權鎰 又其次也 蕫工役 構小菴者 李檃也 於是 名率其鄕之內外孫 輪材瓦 出財力以相助 派別之族 亦有效之者 爲屋十二間 菴以永慕爲名 取終身慕之之義 而又期後世子孫之無窮矣 時則嘉靖戊午孟夏也 嗚呼 世以吾門 咸稱孝友 今內外諸孫 各盡心力 猶恐不濟 又相怡怡若在一家 此其孝友之情 愈遠而愈篤也 後之子孫毋忘今日之心 則先祖之墓 永有依歸矣 銘曰 道講之墟 山名智藏 卜云其吉 終焉允藏 安我先祖 協于休祥 積善于躬 子孫寖昌 偉哉文成 事高麗王 追崇樞副 不顯其光 世漸之遠 三百年强 先墓未修 孰無衋傷 默佑後昆 來守傍鄕 訪求雲仍 幾十其良 相率展拜 牲醴馨香 修其塋域 立菴其傍 子孫世守 曰篤不忘 惟孝惟友 慕切羹墻 諸孫之賢 祖德之彰不失靑氈 厥慶應長 竹溪沄沄 小白蒼蒼 吾門之興 與之無彊 牧老有言 豈爲我誑
後孫嘉善大夫兵曹參判瑋撰
生員琴軸書 嘉靖三十八年十月日
後孫通訓大夫行榮川郡守 瑺立石
추봉추밀원부사 안영유 묘갈명(追封樞密院副使 安永儒 墓碣銘)서문도 아울러서
공의 성은 안씨(安氏)요, 이름은 영유(永儒)이며 순흥인(順興人)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에 추봉(追封)되었다. 아버지는 자미(子美)인데,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아들은 부(孚)인데 중의대부밀직부사(中議大夫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봉되었으니 이는 모두 태사공의 아들인 문성공(文成公) 향(珦)이 귀하고 현달했기 때문이다.
속담에 전해오기를 태사공이 어릴 때에 한 술사(術士)를 만났는데 공의 영특하고 빼어남을 사랑해서 지장산(智藏山)의 한 기슭을 가리키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반드시 대대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마침내 공의 장지를 그곳으로 정하였다. 그 결과 문성공은 고려조에 지위가 신하들 중에 으뜸이었고 문묘에 배향되어 도덕과 정사가 만세에 모범이 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은 고관대작이 서로 이어져 지금에 거의 3백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을 살펴보면 직계손으로는 순좌(舜佐)가 진사에 합격해서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고 있으며, 공신(公信)은 두 번 문과에 급제해서 봉상시(奉常寺) 부정(副正)으로 있으니 공의 11대손이 된다. 그리고 위(瑋)와 현(玹)은 함께 정덕(正德) 신사(辛巳, 1521)년의 문과에 급제해서 위는 승문원(承文院) 우승지(右承旨)로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고, 현은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좌의정(左議政)에 승진되었으며 상(瑺)은 관리로서 사무 능력이 뛰어나 형조정랑을 거쳐 다시 전보되어 영천 군수가 되었고, 경률(景嵂)은 문음으로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을 지냈으며, 관(寬)은 문과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있는데 우리 형제 세 사람과 경률과 관은 모두 12대손이다. 경률의 아들 종도(宗道)는 문과에 급제해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선발되었다.
외손으로 말하면 푸르고 붉은 관복을 입은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경대부와 정승이 줄지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조께서 선행을 쌓아서 얻은 남은 경사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상(瑺)이 영천(榮川)에 부임해서 먼저 내외의 여러 집안들을 방문해 보니 풍기, 영천, 예천에 거주하는 자손이 가장 많았다. 이들을 함께 데리고 선조의 묘소에 참배했는데, 묘는 신좌(辛坐) 을향(乙向)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무너졌으며 옆에는 몰래 쓴 무덤도 있었다.
내외의 자손들은 서로 탄식하기를 “선조의 묘가 이처럼 형편없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들의 책임이다. 묘소를 다시 개수하고 재사를 세워 지키게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병폐를 면하게 될 것이다.” 하고 내외의 자손 중에 부지런하고 일을 주선할만한 자를 뽑아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몰래 쓴 묘소를 제거하고 재사를 세우자고 주장한 자는 이개(李玠), 이극검(李克儉), 문명개(文明凱)였으며, 참봉 권일(權鎰)이 또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공사를 담당해서 작은 암자를 지은 자는 이은(李檃)이었다. 이에 각기 그 지방의 내외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재목과 기와를 운반했으며 재력을 내어 서로 돕도록 하였다. 이에 다른 파의 집안들도 또한 이것을 본받아 도운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12칸의 집을 짓고는 ‘영모암(永慕菴)’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무궁하기를 기대하는 뜻에서였다. 때는 가정(嘉靖) 무오(1558)년 초여름이었다.
아! 우리 안씨는 모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내외의 여러 후손들은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행여 이 역사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며, 또 서로 화순하여 한 집안에서 사는듯하니 이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이 멀면 멀수록 더욱 돈독한 것이다. 후세의 자손들은 오늘의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선조의 묘소를 영원히 수호 보존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도를 강론하던 옛터는 지장산이라 이름하였네.
이곳에 묘(墓)를 쓰면 길하다 하더니 참으로 좋도다.
우리 선조를 이곳에 모시어 아름다운 상서 내렸으며
몸에 선행을 쌓아 자손들이 점점 번창하였네.
거룩하신 문성공은 고려 왕조를 섬겼으며
추밀부사에 추봉되신 선조는 그 빛이 더욱 드러나셨네.
세대가 점점 멀어져 300년이 지났는데
선대의 묘소 수리하지 못하니 그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선조께서 묵묵히 후손들을 도우시어 와서 이웃 고을 맡게 하셨네.
그리하여 마침내 후손들을 찾아보니 훌륭한 분이 수십 명이었네.
함께 와서 성묘하고는 향기로운 제수(祭需) 올리며
묘역(墓域)을 정화(渟化)하고 그 옆에 재사(齋舍)를 세워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며 영원히 잊지 않으려 하네.
효도와 우애로 이어온 가문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 언제나 간절하네.
여러 후손들이 어짊은 조상의 덕이 드러남이니
가업을 잃지 아니하여 그 경사가 영원하리라.
죽계의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소백산은 아득히 높으니
우리 문중의 흥성함은 저와 함께 무궁하리라.
목은(牧隱) 노인의 하던 말이 우리를 어찌 헛되게 하리요.
후손이며 가선대부로 병조참판인 위(瑋)가 글을 짓고, 생원 금축(琴軸)이 글씨를 쓰다.
가정38년(1559) 10월 후손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천군수(榮川郡守)인 상(瑺)이 비석을 세움.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