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墓所) ; 장단부 대덕산 구정리 자좌(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경기도(京畿道) 장단부 남쪽 송림의 폐지된 고을 동쪽
대덕산 북쪽 자좌(子坐)오향(午向)의 산에 있다.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京畿道 長湍郡 津西面 訥木里 口井洞 大德山) 자좌지원(子坐之原) 이다.

長湍 松林縣 大德山 圖

보위사(寶位寺)
묘 아래 밭 10결(結)을 두었는데 관아에서 이의 부세를 면제하였고, 또한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승려에게 지키게 하니
곧 ‘보위사(寶位寺)’이다.











황명(皇命) 건문(建文)
4년(1402) 임오 (태종대왕 2년)
8월에 왕이 친히 성묘(聖廟)를 찾아가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명하기를, “후손은 영원히 천역(賤役)를 면제하고 적손을 대대로 등용하라.“ 하였다.
교지(敎旨)에「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은 학교를 일으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많은 왕의 모범이 되었다.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이 의당 후손에 미쳐야 할 것이다. 그의 자손은 비록 서자(庶子)일지라도 영원히 천역에 소속시키지 말고 적손(嫡孫)은 대대로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동서반(東西班)에 등용하라.」 하였다.
그 당시 각 관사의 여종을 가려 궁중에 바칠 때에 관비(館婢)1) 2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데, 왕이 명하여 다시 내보내도록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옛사람은 노비를 바치기도 했는데 나는 그러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선현은 선성(先聖)을 위해서 바쳤는데 궁중으로 뽑아 올리는 것은 선현의 뜻에 크게 어긋나니, 원적(元籍)으로 돌려보내고 이후로는 영원히 관비를 뽑아 들이지 말라.」 하였다.
9년(1636) 병자 (인조대왕 14년)
겨울. 묘지(墓誌)가 이루어지다.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짓다. [글은 4권에 보인다.]
12년(1639) 기묘 (인조대왕 17년)
겨울 신도비(神道碑)가 이루어지다.
대사성(大司成) 지제교(知製敎)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짓다. [글은 4권에 보인다.]
예전에 묘표(墓表)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로 마멸되었다. 이에 후손 응창(應昌)이 비석을 다시 세우고 옛 비석은 무덤의 남쪽에 묻었다. 당시 경기관찰사 이행원(李行遠)이 도내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소로 돌을 운반하게 하고 군졸을 보내어 일을 감독하고 또한 제수(祭需)를 도왔다. 감사(監司) 민성후(閔聖徽), 유수(留守) 김남중(金南重)과 고을 수령인 김휼(金?), 황??(黃??), 이응시(李應蓍) 등 수십 명도 이 소식을 듣고 일을 도왔으며, 관학유생(館學儒生) 심황(沈榥), 조시형(趙時馨), 김우명(金佑明) 또한 인근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일을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묘 아래 밭 10결(結)을 두었는데 관아에서 이의 부세를 면제하였고, 또한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승려에게 지키게 하니 곧 ‘보위사(寶位寺)’이다. 임진왜란 후 모두 황폐해졌는데, 이해에 이르러 재사를 중건하니, 관아에서 옛법에 따라 묘지기 군사를 배치하고 제물을 보냈다. 후손 응창이 매년 10월 1일에 제사를 올리고 양전록(量田錄)을 개정하여 비치하였다.]
겨울에 행장이 이루어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짓다. [행장은 아래에 보인다.]
효종(孝宗) 2년(1651) 신묘 (숭정의 연호는 갑신년(1644)에 끝나 우리의 연기로 쓴다.)
송경(松京)에 유기비(遺基碑)를 세우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미수(眉?) 허목(許穆)이 짓다.
영종(英宗) 16년(1740) 갑술
가을 왕이 송경에 거둥하여 선생의 사당에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제사드리다. [제문은 4권에 보인다.]
순종(純宗) 3년(1909) 기유
윤2월 27일 지방관을 보내 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은 4권에 보인다.]
정월 28 왕이 서도(西道)로 거둥할 적에 특별히 하교(下校) 하기를,「성학을 숭상하고 유풍을 진작하여 지금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누구의. 공이겠는가. 가는 길에 멀리 바라보니 묘소가 보인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묘소에 지방관을 보내 제사를 올리라」 하였다.
임자(1912)
9월에 묘에 비석을 새로 세우다.
옛날 비석은 오랜 세월로 마멸되어 증거할 수 없기에 후손 병용(秉鎔)이 경향(京鄕)의 모든 일가와 상의하여 무덤을 개축하고 병석(屛石), 상석(床石), 갈석(碣石)을 다시 세웠다. 침랑 송병화(宋炳華)가 묘갈명을 짓다. [묘갈명은 4권에 보인다.]
계축(1913)
4월 송경의 유기비각(遺基碑閣)을 중건하다.
오랜 세월로 비각이 무너졌고 또한 철도 부근이 되었는데, 선생을 높이는 일본 경관들이 비각을 피해서 철로를 부설하고 비각을 개수하였다. 이에 사손(嗣孫) 종영(鍾永)이 많은 일가와 함께 힘을 합하여 중건하였다.
정사(1917)
7월 신도비(神道碑)를 중건하다.
묘 앞에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멸되었다. 국내 사림과 본손이 합의하여 묘지기가 있는 동리에 다시 큰 비석을 세웠으며 연성공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신도비의 글은 4권에 보인다.]

문성공 회헌 선조묘 (소재지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동 대덕산)
안자묘 (소재지:황해도 연백군 화성군 송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