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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묘·신도비-창녕성씨-
향토유적 제22호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30
[성석린(成石璘) 묘도]
성석린[成石璘, 충숙왕 복위 7년(1338)∼세종 5년(1423)],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창녕(昌寧), 증조는 전객서부령 성공필(成公弼), 조부는 성군미(成君美),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 어머니는 나천부(羅天富)의 따님 나주나씨, 배위는 안향(安珦)의 증손으로 군부판서진현관 안원숭(安元崇)의 따님 순흥안씨이다.
[고일리 입구 창녕성씨 묘소 입구 표석]
[성석린(成石璘) 묘역]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 사관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항상 그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성균관사성·삼사좌윤·밀직사좌부대언·지신사·제학 등을 지냈다.
[성석린(成石璘) 묘]
우왕 6년(1380) 여름 왜구가 승천부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어 부장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적을 무찔렀다. 그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에 봉해지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문하부평리와 대사헌을 지냈다.
[성석린(成石璘) 봉분과 장명등]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충의군에 봉하여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고, 태조 1년(1392) 개성부판사를 거쳐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도절제사·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고, 익대공신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태종 3년(1403)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화숙택주 순흥군 안씨 묘비]
[성석린(成石璘) 묘비]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에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무니,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성석린은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 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묘역은 전면에 자연석으로 3m 가량의 석축을 쌓았으며, 묘 둘레는 삼각형에 가까운 호석으로 둘렀다. 봉분의 높이는 150cm, 지름은 300cm이다.
묘는 부인 화숙택주 순흥군 안씨와 합장묘로 묘앞에는 상석 2개, 장명등 그리고 좌우에는 신·구 묘비와 문인석이 2개씩 배치되어 있다.
[성석린(成石璘) 묘 후경]
오른쪽의 화강암으로 된 묘비는 옥개와 대좌를 갖추었으며, 앞면에는 ‘창녕부원군 시 문경공 성공의 묘’이라 하였으며, 뒷면에는 ‘아들은 검교와 호조참의를 지낸 지도(志道)와 의정부참찬을 지내고 시호가 경숙공인 발도(發道)가 있다. 영락(永樂) 21년인 계묘년(1423, 세종 5) 3월 일에 세우다.’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158cm×61cm×17cm이다. 왼쪽의 ‘화숙택주순흥군안씨(和肅宅主順興郡安氏)’라 음각된 부인의 묘비는 구비의 마멸로 ‘병자11월’에 새로 세운 것인데 규모는 170cm×54cm×23cm이다.
[(우)성석린(成石璘) 신도비 (중)성여완(成汝完) 유허비 (좌)성여완 신도비]
[성석린(成石璘) 신도비]
찾아가는 방법은 87번 도로에서 고일2리 새마을교를 건너 100m 지점에 ‘창녕성씨 묘소입구’표석과 성여완, 성석린 신도비가 있다. 이곳에서 새마을회관을 지나면 마을길 삼거리가 있는데 우측 시멘트 포장길로 700m쯤 가면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비포장도로 소로를 500m쯤 더 가면 성석린 묘역이 나온다. 성석린 묘하에는 차량을 회차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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