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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완 전남 고흥 출생(1945), 수필가, 서울대 언어학과 졸(1974),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죠지타운 대학원 졸(이슬람문학 및 중동관계 전공)(1984∼1986), 주 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근무(20년),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1992∼2012), 《한강문학》(2020) 추대등단, 한강문학 편집위원, 저서:《사하라》(김영사, 1987), 현)향토사연구 및 SNS 블로거, 발표작품:〈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어우당 유몽인〉, 〈오리정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 미술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외 |
어네스트 헤밍웨이(Ⅰ∼Ⅱ)
Ⅰ. Key West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 주 마이아미 Key West섬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를 추모해 본다.
뉴욕행 비행기가 마이아미 공항을 이륙한지 약 1시간이 흘렀다. 로컬 현지 시간으로 아침 6시 30분에 날아올랐으니 지금 현재는 2016년 8월 26일(금) 7시 30분이다. 이 비행기에서, 좀 전에 흑인 스튜어디스가 음료 한 컵과 땅콩 한 봉지를 냅다 쥐어주고 지나간다. 비행 중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주전부리 하라나보다.
비행기가 제법 안정감을 찾아 고공을 활공하며 기운차게 잘 날아 가고 있다. 이륙에 대한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 제끼고, 안전벨트도 활짝 풀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가방에서 쑥 꺼내서 앞좌석 등에 달라붙은 선반을 식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여행 중에 느꼈던 감정이 식기 전에 기록을 남기려고 독수리 타법을 노트북의 문자판 위에 펼쳐본다.
그러니까 꼭 일주일 전인 2016년 8월 20일,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Southwest 항공편으로 이륙하였다. 나와 집 사람 AK, 그리고 작은 딸내외, 샤이니(가명)와 제이닥(가명) 이렇게 넷이서 아틀란트를 경유해서 약 4시간 비행 끝에 마이애미 공항에 도착하였고 렌트한 승용차에 4 개의 여행가방을 차 트렁크에 꾸겨 싣고 예약된 하얏트하우스 호텔에 체크인하고 첫 1박을 했다.
예약된 호텔 방은 802호실, 두 개의 룸에 부엌이 딸린 고급 콘도형 호텔이었다. 작은 딸 내외인 샤이니와 제이닥 커플과 우리 내외가 각각 한 방씩을 차지했다.
집 사람인 AK여사가 전기밥솥, 커피 폿, 라면, 쌀, 김, 부추김치, 파김치, 쌈장, 양념장, 유부초밥 등을 몽땅 챙겨와 그 후 7일간의 여정은 전혀 외식을 하지 않고도 끼니를 때웠다. 물론 몇 끼의 아침 식사는 무료로 서비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그야말로 알뜰살뜰한 가족여행이었다.
사위인 제이닥이 마이아미에서 소형 승용차를 렌트하여 ‘키 웨스트’에서 3박 4일과 ‘마이아미’에서 3박 4일간 침착하고 능숙하게 네이비를 활용하여 안전 운전과 목적지 찾기에 헤매는 일이 없이 교통 문제를 잘 해 결해 주었다.
때마침 ‘지카’ 모기로 마이애미와 키 웨스트 섬은 미국 TV뉴스에서 관심의 대상이 돼 있었다. 한두 명 환자가 발생, 사망하였음에도, 지카 환자의 사망을 크게 보도하며 이 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각별한 충고와 경고를 뉴스 시간마다 중요 잇슈로 내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겁도 없이 6박 7일간의 긴 여정을 마쳤고, 뉴욕으로 귀환하는 비행편에 탑승할 수 있었다.
물론 작은 딸 샤이니가 모기에 두 방을 쏘였지만 별로 주눅이 들지 않고 겁없이 행동하며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작년에 결혼했기에 지카 모기를 조심하고 경계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우리 내외는 겉으로는 괜찮다는 딸의 표정에 동조하며 태연한척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임신 중인 여인의 경우, 지카 모기에 물려 지카 바이러스가 옮겨오면 출산 아기는 머리가 왜소하게 변하여 태어난다는, 이른바 이름도 웃기는 ‘소두병’에 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뉴스 시간 마다 요란했는데, 그저 태평하니 우리 내외도 최소한 겉으로는 태평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 곳 주민들은 관계 보건당국이나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가는 과장 보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예 경고를 무시하고 다니는 양 싶었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주민들에게는 과장된 지카 모기에 대한 뉴스가 너무 역겨운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숲속을 거닐거나, 야간에 산책은 삼가 조심했고, 주로 낮 시간에 대부분 차를 타고 다니며 거리를 구경했다.
헤밍웨이 집이나 리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숲속 정원을 지날 때는 발걸음을 급히 재촉했고,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혹시 몰라서 지카 모기를 쫓는 스프레이를 한 통 사서 외출할 때, 사전에 호텔 룸에서 팔과 다리, 얼굴 등 노출된 부분에 서로가 서로에게 잔뜩 스프레이를 뿌려주었다. 밖으로 나오면 아열대의 햇볕에 반사되어 스프레
이 액이 발라진 각자의 피부가 눈부시게 반짝반짝 거렸다.
그래도 작은 딸은 모기에 두 번 물렸지만 14일 후에 고열 등 발병 징후가 없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며 여전히 태연하려고 애썼다.
모처럼의 부모와의 여행이라 부모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려는 효심으로 보고 우리 내외는 그래서 더 모른 척 했다.
사실상, 여기에 와 보니, 여행 중에 여행객들이나 주민들도 전혀 모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활보를 하고 있었다.
그저 ‘키 웨스트’는 매우 평온하고 캬리반 해海의 바다 물결도 잔잔히 넘실거리는 평화로운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이곳 보건 당국도 모기를 퇴치하기 위해서 흰 소독 연기를 내뿜는 방역차를 어느 구석에도 싸다니게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마이아미 공항 출입 시에도 열감지기를 설치해 두기는커녕, 어디에도 모기 물림에 조심하라는 포스터 한 장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경고 방송 한 마디도 없었다. 현지에서는 조용한데 괜히 타 지역인 밖에서 오히려 지카 모기에 대한 공포가 요란했던 것으로 보였다.
지카 바이러스 발상지인 브라질에서 리오 올림픽이 있었기에 더욱 지카소동이 전 세계적으로 그 공포가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간주하는 듯이 보였다. 옆집에서 불이 났는데 자기 집에서 불이 났다고 헛소문이 났다는 듯 잘 들 쏘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작은 딸을 쏜 모기는 나쁜 지카 모기가 아니고 착한 모기가 물었을 것이라고 우리 내외는 순진하게 믿어야만 했다.
하기야 키 웨스트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해변 쪽 유리창을 보니, 유리에 지카 모기로 보이는 검은 모기들이 여러 마리가 달라 붙어있어서 문만 열면 호시탐탐 호텔 룸으로의 침투를 노리고 있어 일순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래서 핸드폰 카메라에 기념으로 찍어 보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왜 Key West 섬에 갔나? ‘우리’라기 보다는 내가 가장 그 곳을 가고 싶어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왜 키 웨스트를 좋아했을까?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그 다음에는 천경자 화가도 키 웨스트를 좋아하여, 1983년 6월에는 키 웨스트를 직접 찾아가서 그림도 몇 장 그려왔는데, 그저 그림을 그리려고 찾아 갔을까? 그 점도 궁금했다. 그리고 또 하나, 6.25 전쟁 당시에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만은 왜 하필, 키 웨스트 섬에서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 총 사령관을 해임시키는 결정을 했을까? 하는 것도 궁금했다. 그리고 43개 섬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길다는 연육교를 보고 싶었다. 아니 해상 고속도로(Oversea Highway)니, 하는 하늘 고속도로니 하는 그 연육교를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 보고 싶었다. 특히 내 고향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연육교인 고흥∽여수 간에 11개 섬을 잇는 연육교 공사를 현재 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 둘을 비교도 해 볼 겸 한 번 꼭 가보려고 작심하고 있었던 차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키 웨스트는 생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 |
▲키 웨스트 호텔 룸 유리창에 붙어 있는 자카 모기 (2016.8.23.촬영) |
헤밍웨이는 누구인가!
그가 《노인과 바다》라는 단편소설을 썼고, 그 작품을 계기로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여러 사진이 인터넷에도 널려있다. 그러나 수집한 기록물을 짜깁기 한 것이 아닌, 현장감이 살아있는, 현지에서 파악한 사실과 정보를 풍부하게 채집 (?)하여, ‘ 헤밍웨이에 관 한 한 모 든 것 ’을 자세하고 알기 쉽게 기록물로 남기기로 했다.
우선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키 웨스트 섬에는 헤밍웨이가 주옥같은 소설 4편을 썼던 그의 저택과 집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집은 현재는 그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기도 하다. 나는 그 집과 박물관을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천경자’ 화가가 그렸다는 헤밍웨이의 집은 물론이고, 육손이, 아니 여섯 개의 발톱이 달렸다는 고양이들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변두리 지역인 〈참나무 골〉에서 태어났다. 참나무 골! 영어 지명은 물론 오크 파크(Oak Park)이다. ‘오크 파크’면 ‘참나무 공원 마을’이라고? 아무려면 어떠냐? 오크(Oak)는 참나무이니까 그렇다 치자. 파크(Park)는 자동차가 머물면 주차장도 되고, 사람들이 자주 잠깐씩 머물며 쉬거나 놀면 공원이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몇 년이나 머물면 마을이 되기도 하고, 더 오래 살면 고향이 된다는 그런 뜻일까.
아무튼 헤밍웨이는 참나무가 많은 숲속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헤밍웨이는 숲속에서 사냥을 즐겼다 한다. 그의 아버지도 사냥 그리고 낚시 광이었다. 헤밍웨이가 세 살 되던 해부터 호수에 나가 낚시질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열 살 때는 벌써 사냥이랍시고 총 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하고, 총을 쓰면 총으로 망한다는 동양의 속담을 그들은 몰랐었나 보다. 아버지와 아들! 이 둘은 결국 총으로 생명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을 했고,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살을 했다.
헤밍웨이의 일생을 연대기로 요약을 해 본다.
헤밍웨이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외곽지인 오크파크(Oak Park)에서 1899년에 출생했다. 아버지는 사냥,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성악, 첼로 연주를 좋아하는 음악가였다. 따라서 비교적 다복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리하여 부모의 서로 다른 취향과 취미가 헤밍웨이에게 융합되어 나타나기도 하여, 향후 헤밍웨이의 문학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모의 너무 잦은 언쟁 등 가정불화 속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를 편애하였다. 어머니는 외적으로 사교적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동시에 세속적인 관습도 추구했다.
그녀는 생활력이 남편보다 더 강했다. 어떤 면에서 어머니는 남자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남편도 집에서는 주부처럼 가사를 같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활동적이어서 남편인 의사 수입보다 그녀가 운영하는 음악 학원이나 성악 렛슨비에서 얻어지는 돈 벌이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불면증이 심했고, 항상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밖에서나 남을 대할 때는 무척 사교적으로 보였으나 남편에 대해서는 자주 신경질을 부렸다. 말하자면 헤밍웨이 집안은 어머니 주도형으로 가계를 이끌어 나갔고, 아버지는 틈만 나면 집을 벗어나 숲속이나 호수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것이 낚시이고 사냥이고 불리어지는 것은 그에게 둘째 문제였다. 헨리 쏘로우나 에머슨처럼 자연의 옷을 입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자연을 경외 하는 초월주의 사상가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 준비, 요리하기, 세탁하기, 야채 과일 등 시장 보기 등은 대부분 아버지가 전업 주부처럼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그저 침대에 늦게까지 누워있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여가 시간에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서 낚시와 사냥에 몰두, 탐닉하는 생활을 했다. 이것 역시, 어머니와의 주된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집안 분위기는 늘 싸늘하고 냉랭했다.
어머니는 남자 아이에게 어려서 여자 옷을 입혀 키우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따라 헤밍웨이에게도 여자 옷을 입혀 키웠고,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 여자애처럼 단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어머니의 이러한 취급을 늘 못 마땅하게 여기고 아주 싫어했다. 어떤 의미에서 헤밍웨이는 잠재의식 속에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이 쌓이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낚시와 사냥 길에 자주 따라 다녔다.
아버지는 헤밍웨이가 3살 때부터 호숫가에 데리고 나가 낚시질을 가르쳤고, 10살 때에는 사냥용 엽총도 사 주면서 사냥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인근 삼림이나 미시간 왈룬 호수의 주변 숲 속을 마음대로 혼자서 헤치고 다니게 했다.
이 이야기는 그 시절에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하루는 헤밍웨이가 아버지와 함께 해질 무렵까지 숲 속에 있는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호수의 건너편 숲 속에는 인디안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인디안 마을 쪽에서 쪽배 한 척이 어스름 속에서 다가 왔다. 배는 헤밍웨이 부자가 낚시하는 호숫가로 다가오더나, 한 인디안 중년 남자가 소리쳤다.
“여보시오! 혹시 당신 오크 파크에 사는 의사 선생이시지요?”
“왜, 그러시오. 그렇소, 난 의사요”
헤밍웨이 아버지는 낚시 줄을 거두며 그 인디안을 향해 응답했다. 그 인디안은 배가 뭍에 접안하기도 전에 덤벙 뛰어들며 허겁지겁 물을 튀기며 다가와 헤밍웨이 아버지의 두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털썩 무릎을 땅에 꿇은 채 헤밍웨이 아버지에게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 제발 좀, 저- 저- 제 마누라가 죽어가요. 시방 아기를 낳고 있는데, 어- 어- 하루 종일 애기가 나오지 못해서 기진맥진 죽어가고 있소이다. 마침 친구 한사람이 당신이 의사인 것을 알고 있다면서, 낮에 호숫가에 나왔다가 의사 선생님을 봤다고 해서, 흑 흑 흑! 하느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집에 안 가고, 지금까지 여기에 계시다니! 제발, 의사 선생님 제 마누라를 구해주세요”
그는 애걸복걸하며 연거푸 하소연을 해댔다.
“그만 우세요. 그런데 보세요. 지금 낚시 도구밖에 없는데, 난 지금은 의사가 아니고 그저 고기 낚시꾼이요. 빈손인데 어떻게 의사 구실을 할 수 있겠소?”
헤밍웨이 아버지가 딱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한 숨을 지었다.
“의사 선생님! 죽어도 좋으니 일단은 산모의 상태를 진단이라도 해 주세요”
인디안의 하소연에 못 이겨 헤밍웨이 부자는 인디안의 쪽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의 계곡 숲속에 있는 인디안 마을로 안내되어 갔다.
전형적인 인디안의 원두막 같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한 인디안 집 문간에 있는 개 한마리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낯선 백인을 보고 요란하게 짖어댔다.
인디안 집 출입문에는 위에서 아래로 가리개가 걸쳐 있었다. 가리개를 쳐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인디안 부인이 함지박같이 큰 검붉은 배를 반 누드 상태로 들러내 놓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출산을 그냥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출산이 어렵다고 판단한 헤밍웨이 아버지는 다행히 그가 외과 의사였고, 오크 파크 병원에서는 산부인과도 겸하고 있었기에 비상수단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는 전에 제왕절개 수술을 두세 번 경험한 적도 있었는데, 이 인디안 부인의 경우도 당장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만 산모나 아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긴박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제왕절개 수술에 필요한 마취제도, 수술 칼도, 수술 후에 꿰맬 실도, 주사기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데, 그 때 어린 헤밍웨이가 말했다.
“아빠, 이 째크 나이프로 수술 안 되나요?”
그 때 이 말은 아버지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래, 이런 경우, 그 칼을 잘 갈아서 최소한 아기라도 살려보자!”
이렇게 수술을 결심하고 헤밍웨이 아버지는 그 인디안 남편에게 칼을 갈 수 있는 쇳돌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날이 서게 잘 갈도록 했다. 그리고 구경하러 온 한 인디안 부인에게는 양재기나 솥에 물을 팔팔 끓이라고 명령하듯이 지시하고 재촉을 했다.
드디어 재크 나이프, 손칼이 수술 칼로 둔갑되어 대령하였다. 소독용 알콜 대신에 끓인 물도 대령되었다. 그는 그 칼을 뜨거운 물속에 넣어 소독을 하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인디안 산모의 복부에도 소독하듯이 세척을 한 후에 아들과 인디안 남편 그리고 구경나온 인디안 부인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당신들은 각자가 팔 하나, 다리 하나를 꽉 붙잡아요. 마취 없이 배를 가를 터이니, 산모가 아파서 소리치고 발버둥을 칠거요. 다들 눈을 감고 인정사정없이 자기가 맡은 팔과 다리를 흔들리지 않게 죽을힘을 다해 꽉붙잡으시오. 자! 지금 배를 가릅니다”
모두가 긴장을 하며 산모의 팔과 다리를 죽어라고 붙잡고 눌렀다.
“으악! 웨메 나 죽어욧! 아- 아- 아파요!”
기진맥진하여 죽은 듯이 누워있던 산모가 발악하며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그러나 헤밍웨이 아버지는 잽싸게 산모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피를 닦아냈다.
“응아-!”
드디어 아기 탄생! 이 때 어린 헤밍웨이는 그 생명의 탄생을 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아버지는 가는 낚싯줄로 수술로 베어낸 상처를 대충 꿰매고 다음날 그 산모와 아기를 시카고 큰 병원으로 이송케 하였다.
아무튼 수술 도중에 어린 헤밍웨이는 두 눈을 뜨고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지켜보았다. 부전자전이라고 헤밍웨이는 그런 극한 상황에도 그 끔찍한 광경을 잘도 참고 관찰하는 인내심과 대담성을 어려서부터 보여주었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인디안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충격이 심하여 그 후에 정신착란 정신병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자살을 해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이 때 겪은 경험은 헤밍웨이가 성장해서 잔인한 투우를 즐기거나 숲에서 사슴을 사냥해서 목을 베고 박제를 만드는 등 그런 대담성과 잔인성을 동시에 즐기는 캐릭터로 나타났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도 이 때부터 싹이 튼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 부자의 권총이나 엽총에 의한 자살 행위도 이런 경험을 통하여 동기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밍웨이는 이 같은 상황에서처럼 잔혹함과 연민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성격 탓인지 헤밍웨이가 29세였던 1928년에 그의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실을 했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무척 애통해하며 연민성을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 때문에 57세의 나이로 스스로 삶을 단축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내심 무척 괴로워했다. 그 후부터는 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쌓인 채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 별세 때에는 장례비만 보내고, 집필 마감을 핑계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냉혹함을 보였다.
헤밍웨이 아버지 이름은 ‘크레런스 헤밍웨이’이다.
어머니는 ‘그레이스 홀’이다.
앞서 얘기한데로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다.
위로는 누나 한명과 밑으로는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키가 180cm여서 큰 편이었으나, 어머니는 165cm여서 작달막한 키였다. 게다가 몸은 뚱뚱한 편이고, 얼굴의 윤곽이 커서 여장부 모습을 띄고 있었다.
외모에 있어서 헤밍웨이는 윤곽은 어머니를 닮았지만 부리부리한 눈과 코, 입 등은 아버지를 더 닮았었다.
헤밍웨이 아버지도 턱 수염과 콧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40대에 촬영된 사진에는 백발은 전혀 보이지 않고 숱이 많은 검은 수염을 보인다.
헤밍웨이는 1917년 고교를 졸업했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학교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미식축구를 좋아하여 고교 풋볼 대표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고교 시절 한 때 권투를 배우기도 했다. 그는 5년제인 리버 포레스트 고교(River Forrest High School)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매일 첼로 연주를 한 시간씩 가르쳤으나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그는 첼로보다 엽총을 좋아 했었다. | ||
▲ 여아 복장을 한 아기 헤밍웨이와 소년시절 모습 |
헤밍웨이는 고교시절 사춘기에 댄스파티에 가는 것이나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 친구 보다는 남자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나 어떤 면에서 혼자 있고 사색하기를 훨씬 더 좋아했다. 그저 글쓰기를 좋아했다. 이런 성격은 부모의 상반된 성격과 그로 인한 부모의 잦은 언쟁과 불화의 탓도 있었다. | |
▲헤밍웨이 고교시절 모습 (1917년 : 18세) |
그렇게 냉랭한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고교 시절에 두 번이나 가출을 하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고교를 다니던 해인 1917년 봄에 미국은 세계 1차대전 참전을 선언했다. 그 때 헤밍웨이는 대학 진학보다는 지원 입대하여 참전 경험도 하고 유럽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친은 극구 반대하여 이를 좌절시켰다. 그는 이에 반항하여 대학 진학을 거부를 하고 이웃 지역 지방신문인 〈캔사스 시티스타〉에 인턴기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1차세계대전의 전황기사를 접하고, 부모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미국 적십자사 앰블란스 구급차 운전병으로 기어코 자원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우려한대로 오스트리아-이태리 간 전투에서 적인 오스트리아군이 쏜 박격포에 200여개의 작은 파편을 맞고 밀라노 병원에 후송되어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포격을 받았을 때, 몸 전신에 많은 파편이 박혔었다. 그러나 그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파편을 맞아 자기보다 심각한 전우들을 먼저 구급차에 태워 보내는 용기와 전우애를 보였다. 이러한 용감성과 전우애가 알려져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사실은 미국 국내 신문에서도 세계1차대전에서 첫 부상자로 부각되 어 그의 전우애가 영웅 스토리가 되어 신문마다 제법 큰 뉴스로 게재되 었다.
이 뉴스는 인턴기자를 경험했던 그에게 그의 참전 취지와 소영웅심을 만족시켜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밀라노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기를 극진히 간호해 주었던 금발머리 간호사이며 미국인 아가씨인 애그네스와 연애에 빠졌다. 그래서 그녀는 사실상, 헤밍웨이에게는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6살 연상이었다.
헤밍웨이가 결혼을 전제로 계속 사귀자고 하였으나 그녀의 거절에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만다. 이로 인해 헤밍웨이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그에게 첫사랑이었지만 그 결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경험은 그의 명작 중의 하나인 《무기여 잘 있거라》의 탄생 배경이 된다.
▲세계1차대전 참전 지원병 모집 포스터, 자원입대한 헤밍웨이도 이 포스터를 보고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 ▲세계1차대전 참전 중 부상을 당한 헤밍웨이 모습(1918년) |
헤밍웨이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군의 박격포 파편을 맞은 것은 1918년 7월 8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구급차 운전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귀국 명령을 받았다. 즉 귀향 조치를 받았다.
고향인 오크 파크에 돌아오자 이일 저일 허드레 일을 하면서도 소설을 써 보겠다는 욕망은 늘 버리지 못 했다. 우선 그는 이웃 지역 신문인 〈시카고 스타〉지의 신문기자로 채용되었고, 그 때 만난 8세 연상인 해들리와 서둘러 결혼을 했다. 웬 일인지 헤밍웨이는 연상의 여인을 좋아했다. 이것은 아마도 어릴 때 성장 과정에서 부족했던 어머니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동했는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연상의 여인에게서 애정을 충족하고픈 욕망이 스스럼없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
▲헤밍웨이의 첫사랑 애그네스(Agnes) |
어쨌든 그는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을 하였는데 그 신문사에서는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제1차 전쟁의 기사를 보도하기 위해서 특파원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참전 경험과 은성무공훈장을 타서 용맹성을 발휘한 신입기자에게 파리 특파원 자리를 추천하자, 그는 얼씨구나 좋다하고 이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는 갓 결혼을 해 신부가 된 해들리를 데리고 부랴부랴 파리로 출발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유럽의 중심 도시인 화려한 파리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리차드슨
헤밍웨이는 파리에 있는 동안에 이태리, 스페인,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그리고 취재차 이태리의 뭇솔리니도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큰 행운은 당시 파리에 몰려들어 살던 영국과 미국의 유명한 시인, 소설가 등 작가들과의 친교였다.
그가 알게 된 영국, 미국 작가들 중에는 대선배들 예컨대 ‘에즈라 파운드’, ‘스콧 피츠제랄드’, ‘제임스 조이스’가 있었고, 동갑 나이의 또래는 ‘T.S. 엘리엇’이 있었다.
특히 스콧 피츠제랄드는 헤밍웨이의 간결하고 하드 보일드한 독특한 문 체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유명한 출판사에서 출간되도록 소개까지 해주었다. 그는 파리에서 먹고 사는 생활에 쪼들렸다. 매월 방세 100 달라를 지불하지 못 해서 쩔쩔 매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술값과 유럽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느라 여행경비 지출이 심했다. | |
▲해들리 리차드슨, 결혼생활(1921-1927) |
그래서 비교적 알뜰한 연상의 부인 해들러와 불화가 잦았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부인의 간섭이 자기를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녀로부터 얼른 스스로 벗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 시기에 부인의 친구이며 제법 부잣집 딸인 폴린이 패션잡지 《보그》의 기자 신분으로 파리에 왔었는데, 자기 집에도 초대하여 알게 되었고, 그 후에 두 사람의 눈이 맞았다.
헤밍웨이는 여자 문제에는 속임이 없었다. 자기는 헤들리의 간섭이 싫다고 하면서 지금 폴린을 사랑하고 있으니 이혼을 하자고 먼저 제의를 했다.
해들리도 헤밍웨이는 작가로서는 전망은 있으나, 결코 자기와 짝을 이루는 좋은 남편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혼을 쉽게 받아들여서 둘이는 쉽사리 이혼을 했다.
헤밍웨이는 성깔이 급한 사람이다. 사실상 이혼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서둘러 폴린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28년, 사냥하기 좋고, 낚시하기 좋은 풀로리다의 키 웨스트 섬에서 살기 위하여 파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첫 부인인 해들리(1891~1979)와는 1921년에 결혼하여 1927년까지 약 7년간 함께 산 셈이다. 이것은 그저 지나가는 여담인데, 해들리는 1922년에 파리의 기차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가 담긴 여행 가방을 분실한 적이 있었다. 이 원고는 90년 동안이 넘도록 행방을 묘연했었다. 그래서 이 분실 사건 자체를 다룬 소설도 여러 편이 나왔었다. 다이앤 길버트 매드슨이 쓴 《잃어버린 헤밍웨이를 찾아서》가 바로 이 소재를 다룬 소설이다. 이런 소설과 영화에서 첫 부인인 해들러가 겨우 그저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 |
▲폴린 파이퍼(1895~1951), 결혼생활(1927~40년) | |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첫 부인과 결혼생활을 할 때 집필하여 1926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헤밍웨이와 그녀 사이에는 아들 한명이 있었다. |
◆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
폴린과는 첫 번 째 부인 해들러와 이혼한지 16일 만에 결혼했다. 폴린은 《보그》의 패션 작가였다. 1927년 헤밍웨이와 결혼하고, 그 다음해인 1928년에 플로리다 키 웨스트에 정착, 거주했다. 아버지가 외제 화장품 점포를 운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삼춘도 부자였다. 삼촌은 헤밍웨이의 열렬한 팬이어서 키 웨스트에 주택을 매입하여, 폴린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다. | |
▲마사 겔혼(1908~1998), 결혼생활(1940~45년) | |
1938년에 2만 달라의 거금을 들여 헤밍웨이가 낚시나 술에 너무 탐닉하지 않고, 오로지 가정과 소설 집필에만 정신을 쏟도록 하려고 폴린은 주택 내에 야외 수영장을 만들기도 했다. |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를 붙잡지 못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13년 만에 이혼했는데, 헤밍웨이와 그녀의 사이에 아들 두 명이 있었다. 그녀는 1940년 헤밍웨이와 이혼한 후에도 키 웨스트 주택에서 두아들과 함께 계속 살다가 1951년에 타계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소설은 헤밍웨이가 폴린과 결혼생활을 할 때 바로 키 웨스트 주택에서 집필한 소설이다.
◆ 세 번째 부인 마사 겔혼
헤밍웨이는 바하마의 한 술집에서 기자인 마사 겔혼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1936~1929)을 함께 취재하며 헤어질 수없는 관계에 이른다.
드디어 둘째 부인 폴린과도 이혼한 후, 1940년 해를 넘기지 않고 마사 겔혼과 헤밍웨이는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기자였지만 소설도 썼다. 그녀와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함께 종군기자 생활을 하면서 깊은 사랑에 빠졌다. 헤밍웨이는 폴린에게 이혼을 당하기 전에, 먼저 이혼을 요청하였고 결국은 이혼을 한다.
2012년 HBO에서 헤밍웨이와 겔혼, 이 두 사람을 소재로 한 TV영화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타이틀은 《헤밍웨이와 겔혼》(Hemingway & Gellhorn)이었고, 클라이브 오언이 헤밍웨이를, 니콜 키드먼이 겔혼의 역을 각각 맡아서 연기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은 헤밍웨이가 1940년 셋째 부인 겔혼과 결혼하여 살면서 집필했던 소설이다.
◆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
메리 웰시는 세계 2차대전 때 〈타임〉과 〈라이프〉의 종군기자였다.
1946년에 헤밍웨이와 결혼하여 헤밍웨이가 엽총으로 자살을 할 때까지 15년간 가장 오래 같이 살았던 네 번째 부인이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1951년,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썼고 이 작품으로 사실상 1952년에 퓰리처상을, 이어서 1554년에 상금 20만 달라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헤밍웨이에게 주어진 영광과 기쁨을 함께 공유한 행운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쿠바에서 1960년 혁명 전까지 살다가 출국을 당한 후에는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우울증과 과대망상으로 괴로워하는 헤밍웨이를 달래고 보살피는 일을 감수해야만 했고, 남편이 엽총으로 자살을 했을 때는 그 순간의 경악과 아픔도 겪어야만 했다. | |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결혼생활(1946~1961) | |
1961년 헤밍웨이가 자살했을 때, 그녀는 모든 뒷수습을 다 했고, 헤밍웨 이의 장례식도 그녀가 다 치렀다. |
◆ 헤밍웨이 4대 작품과 네 명의 부인들과의 기간 정리
-.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1926) - 해들리 리차드슨(첫째 부인)
-. 《무기여 잘 있거라》(1929 ) - 폴린 파이퍼(둘째 부인)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 마사 겔혼(셋째 부인)
-. 《노인과 바다》(1951) - 메리 웰시(넷째 부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 ▲제임스 죠이스(1882~1941),(율리시스의 작가-영국인) |
◆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친교를 했던 영미 유명 문학인들
미국 출신의 시인이며 비평가이다. 그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영국런던에 거주하면서 시집 《황무지》를 쓴 영국인 시인 T.S. 엘리엇과 소설 《율리시즈》를 쓴 영국인 작가 제임스 죠이스를 미국과 전 세계의 문단에 알린 명 평론가였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이태리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방송을 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전후 전범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1958년까지 미국의 한 정신병원에 억류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영국 문단 문화의 한 측면을 정교하게 묘사한 시 작품인 〈초상〉이, 20세기에 가장 찬사를 받는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를 받았던 시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청년 기자시절에 파리의 서점에서 우연히 에즈라파운드를 알게 되어 그와 가까이 친교했다.
에즈라 파운드는 14살 연상이었다. 그를 통해서 많은 문인들을 소개받았고, 이로 인하여 소설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명 평론가인 에즈라 파운드가 그의 간단하고 힘 있는 그리고 하드 보일드한 문체를 격찬해 주었는데 이것이 작가 되는데 큰 격려가 되었다.
뒷 날 헤밍웨이는 이렇게 후술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파리에 살았던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쉽게 말해 이 말은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우리 말 속담처럼, 큰물에서 놀아야 큰 고기를 만나고, 큰 먹이도 얻어먹고 그리고 크게 자랄 수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된다.
헤밍웨이가 기자의 신분으로 체류했던 시기인 1920년대의 파리는 대 문호들과 예술가들이 득실거렸다.
청년 헤밍웨이는 당시 문학의 대모로 통했던 여걸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에서 추상화의 거성 ‘파카소’도 소개받았다. 그리고 T. S. 엘리엇도 사귀게 되었다. 그 때 엘리엇은 가난한 은행 말단 직원이었다.
기자였던 헤밍웨이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성금을 모아 그가 시만 쓰도록 도와주었다. 엘리엇과는 나이 도 비슷했다. 엘리엇이 헤밍웨이보다 한 살 더 위였다. 그리고 ‘스콧 피츠제랄드’와는 죽이 맞아서 자주 함께 술도 마셨다. 그와는 절친했는데 이런 에피소드도 전 해 온다. 하루는 술집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헴! 나는 고민이 하나 있소. 이것을 말해도 좋을는지” 그는 헤밍웨이를 줄여서 ‘헴’이라고 불렀다. “아따- 스콧, 싸게 말해 보시요” | |
▲T. S. 엘리엇(1888~1965), (장편시 〈황무지〉의 작가, 영국인) | |
“헤밍웨이는 통이 큰 사람이요 어떤 악담도 어떤 농담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요” 이렇게 헤밍웨이가 뒷말을 독촉하자 쑥스러워 하면서 이런 고민을 털어 놓았다. “저- 남자들- 그러니까 저- 거시기” 이렇게 더듬거리자 성깔 급한 헤밍웨이가 술 한 컵을 그에게 권하며 재차 독촉을 했다. “답답하게- 거시기가 뭐요? 거시기를 빨리 말해 보시오” |
이런 재촉에 스콧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옹색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뒷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거시기가 뭐냐하면- 거, 남성의 심볼 거시기, 그것 말이요”
이 말을 들은 헤밍웨이는 흥미를 곤두세우고 알았다는 듯이 더욱 재촉을 해댔다.
“아, 남자의 거시기! 그런데 당신의 거시기가 어떻단 말이요?”
“뭐가 문제가 있소?”
성깔이 급한 헤밍웨이가 돌직구를 냅다 던졌다.
“나- 참! 이런 말, 하기가 쑥스럽구먼- 에라, 모르겄다! 다 말 할께요. 술 취한 기분에- 그러니까 내 거시기기 너무 작단 말이요”
이 말을 듣자마자 헤밍웨이는 너무 우스워 크크 하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며 술 한 컵을 다시 단 숨에 들이 마시며 또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당신 거시기가 작아서,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요. 빳빳하면 그만이지- 귀가 가려울 때 전봇대가 좋소? 아니면 작은 귀 쑤시개가 더 좋소?”
“귀 쑤시개는 작아도 귀를 더 시원하게 해 주지 않던가요? ㅋㅋㅋ”
이 말을 듣고 스콧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 거시기가 너무 작다고 생각해서 여자를 대할 때마다 주눅이 든단 말이요. 그래서 일을 제대로 치르지를 못 한단 말이요. 당신은 기자니까 사람도 많이 접했을 것이고 무슨 대책이 없겠소?”
그의 질문이 너무나 진지하자 헤밍웨이는 웃음을 뚝 그치고 잠깐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번뜩 스치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스콧, 해결책이 하나 있소. 다음 주말에 시간을 내 주시오. 나랑 어디에 가보면 고칠 곳이 있소”
그래서 다음 주말에 두 사람이 만났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스콧을 데리고 간 곳은 생뚱맞게도 ‘루불박물관’이었다.
황당하게 생각한 스콧이 헤밍웨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거시기 작은 것과 그 대책에 이 박물관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날 여기에 데리고 왔소?”
이렇게 스콧이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를 끌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 로마시대의 남성들의 나체 조각상 앞에 세우고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보시요! 저 당대의 미남들, 그 시절 모든 여성이 탐냈던 육체! 그리고 특히 저 거시기를 보시오. 설마 당신의 거시기는 저것 보다 작지는 않겠지요?”
이 말을 들은 스콧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낄낄대며 좋아라고 웃었다.
“그럼요. 내 거시기는 저것 보다야 더 크지요”
그러자 헤밍웨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됐소. 자신을 가지시요. 괜히 여성 앞에서 거시기가 작다고 쫄거나 움츠리지 마시오. 핫 핫 핫”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루불박물관’을 나왔다.
그 때 그 조각상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웬 두 미친 놈(?)들이 천하의 제일가는 조각상을 보고 웃고 가는 꼴이 우스워 보였는지 모두가 멋모르고 덩달아 함께 웃었다 한다.
이 처럼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랄드’는 절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스콧이 소개하여 헤밍웨이의 첫 작품이 뉴욕에서 출판되어 헤밍웨이가 문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파리 루불박물관 인물 조각상 전시실(그리스 로마시대 남녀 누드 조각상) |
앞서 말했듯이 세계 1차 대전 후, 특히 1920년대에 미국 문학인들, 그리고 예술인들은 파리로 많이 몰려들었다. 미국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에즈라 파운드’나 《위대한 게츠비》를 발표하여 히트 친 스콧 피츠제럴드도 파리로 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미국 돈 달라의 환 시세가 엄청나게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 화폐인 달라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 가치가 치솟았다.
미국 돈 1000 달라면 파리에서는 한 달간 떵떵거리며 호화판으로 살 수가 있었다. 영국의 파운드, 프랑스의 프랑은 화폐가치가 전쟁을 겪으면서 너무 찍어 내어 그 가치가 형편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특히, 독일 화폐인 마르크는 그 화폐 가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똥값이 되었다. 빵 한 개를 사려면 마르크 지폐를 한 가방 넣어서 들고 가야 했다.
독일 어린이들은 화폐 뭉치를 가지고 벽돌 쌓기 놀이의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일부 독일인은 돈을 세기기 귀찮아서 아예 저울에 무게를 달아서 거래를 하였다. 마르크 화폐 가치가 벽지 보다 싸서 어떤 이는 아예 벽지를 지폐로 바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들은 가치가 없는 돈에 화가 나서 난로에 불쏘시개나 아예 땔감으로 사용을 해버렸다. 오죽 화폐 가치가 없어서 그랬을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헤밍웨이 이야기에서 잠깐 샛길로 들어가 다음 인증 사진들을 일단 구경해 보고 지나가 보자!
세계 1차 대전 후 X값으로 가치가 떨어진 유럽 화폐들! 어디 이뿐이랴!
우리나라도 1900년 초, 구한말 로일전쟁 때 시작되고 있었다.
1904년 로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신문기자는 취재 체류 경비로 쓰기위해서 150달라로 조선의 화폐인 엽전으로 바꾸었는데, 그 무개가 무려 4천Kg(4톤)이나 되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대형 트럭 한 대가 실을 수 있는 무게였기 때문이다.
▲돈, 화폐 뭉치로 벽돌쌓기 놀이를 하고 있는 유럽 어린이들(1920년대) | ▲돈(지폐)이 휴지보다 못하자 화가 나서 아예 땔감으로 사용하는 유럽 아줌마(1920년대) |
그는 도저히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 일부만 자루에 넣어 가고, 나머지는 조선인 두어 명에게 취재를 하고 올 때까지 잘 보관해주고 지켜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취재가 끝난 후에 잘 보관해 준데 대하여 감사의 표시로 수고료로 엽전 한 발씩, 자기 욕심 것 지게에 싣고 지고 가도록 했다.
최근 입수된 인증 사진도 아울러 구경해 보자. 이 사진은 당시 미국 콜리어스(Collier's) 신문사 동양 특파원이었던 로버트 돈(Robert Don) 기자가 1904년 6월 4일 서울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지폐(돈) 세기가 힘들어 아예 무게로 계산하는 유럽사람들(1920년대) | ▲150 달라로 바꾼 조선 엽전들(무게 4톤), 1904 년 촬영 |
당시 미국 돈 1센트와 조선 엽전은 15~30량에 교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 달라에 엽전은 1500개~ 3000개가 해당되었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미 선교사들 월급이 한 달에 600~1000 달라였었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첫 부인과 이혼, 패션 잡지 편집인 폴린과 결혼하고 마이애미 Key West에서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했다. 파리에서 신문사 특파원의 봉급으로는 신혼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도 빠듯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헤밍웨이는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하느라 지출이 많았고, 술도 너무 좋아해서 거주하는 주택의 월세를 제때에 내는 일도 버거워서 한 때는 집 월세 값이 파리보다 저렴한 스위스로 이사를 가서 살기도 했다. | |
▲약 1 달라에 상당하는 조선 화폐 엽전 |
그 와중에서 부인의 친구인 폴린 파이퍼라는 패션 잡지 《보그》의 여기자와 사랑에 빠졌다. 이를 눈치 챈 부인이 시비를 걸고 이혼을 요구해 오기 전에 자기가 먼저 두 사람 관계를 실토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부인 해들리도 헤밍웨이를 생활력이 무능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이혼에 빨리 응하여 두 사람은 서로 쉽게 헤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죤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첫 부인과 살면서 다음과 같은 소설 작품들을 써서 발표하고 발간했다. -. 최초 작품,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詩》(Three Stories and Ten Poems), 1923년(23세) -. 《우리의 시대에서》(In our Times), 1925년(26세) 이 작품은 뉴욕에서 발간되었다. 헤밍웨이는 비로소 이 장편 소설 작품으로 미국 문단에 데뷰하였다. -.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1926년(27세) | |
▲Robert Don 미국 신문기자 (1904년 내한 로일전쟁 취재) |
이 작품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체류하는 망명자들의 생활을 다루었다.
이 소설의 서문에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이라는 말을 써서 전 세계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젊은이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들입니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고 처음으로 언급했었다.
원래 이 말을 가투루드 스타인, 여성 평론가가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제대로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자신들의 희망과 꿈도 좌절된 지식인 청년들과 젊은 예술인들을 측은하게 여겨서 일컬었던 말이다.
그 후에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죽어가거나 부상을 입거나 또는 후방에서 방황하며 살았던 당대의 모든 세계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시대를 ‘째즈의 시대’, 또는 ‘광란의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헤밍웨이에게 문학에 관하여 조언을 많이 해 주었던 인물, 전후 세대를 ‘길잃은 세대’라고 맨 처음 지칭했던 사람이다. ◆ 헤밍웨이 박물관 헤밍웨이는 첫 번째 부인 헤들리와는 1921년에 결혼하여 파리로 온 후에 7년간 파리에서 함께 살다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인 폴린과는 1928년부터 플로리다 주에 있는 키 웨스트 섬 에서 12년간 살았다. | |
▲거트루드 스타인(미국 여류소설가, 비평가, 1874-1946),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 |
처음 3년간은 월세 집에서 살았고, 1931년부터는 폴린의 삼촌이 결혼 선물로 정원이 딸린 스페인 스타일 2층 집을 사 주었다. 바로 그 집이 키 웨스트 섬에서 현재 관광 명소가 된 〈헤밍웨이 하우스 겸 박물관〉이다.
폴린은 이 집에서는 1940년 이혼할 때가지 살았다. 말하자면 두 부부는 약 10년간을 그 집에서 함께 살았다. 이혼을 한 후에도 폴린은 1951년 사망할 때가지 약 11년간을 더 계속해서 이 집에서 살았다.
그 후 이 집은 10여 년간 월세 집으로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다가 한 여자 사업가가 이 집을 매입해서 국가 사적지로 지정을 받고 이제는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집은 두 채로 되어 있다.
본채는 거실과 침실 식당이 있고, 별채는 헤밍웨이의 창작 집필실로 사용 했었다. 별채 앞에는 잘 꾸며진 수영장이 있다. 이 층은 집필실이었고, 아래층은 현재 헤밍웨이와 관련된 책자나 기념품을 판매하는 기프트 숍이다.
이 집은 정원을 포함한 대지는 약 3천평 규모로 저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큰 집이다. 이 집에 딸린 수영장은 폴린이 이 집을 매입한 후에 당시 2만 달라의 비용을 들여서 만들었다. 지금 화폐 가치로는 약 25만 달라에 상당한 돈이라고 한다. 이 수영장은 당시 이 섬에서는 유일한 개인 수영장이었다.
헤밍웨이 집은 키 웨스트 섬의 동북쪽인 화이트헤드 거리 907번지였다.
원래 이 집은 선주였던 아스 티프트(As Tift)라는 부자가 1851년에 전형적인 식민지 시대의 스페인풍으로 건축했었다.
그 동안 여러 번의 허리케인에도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있다가 1931년에 헤밍웨이 부부에게 매매되고 양도되었다. 〈헤밍웨이 박물관〉 입장료는 어른 13달라, 아동은 5달라를 받았다. 그것도 카드는 안 되고 꼭 현금만 받았다. 미국에서 현금만 받는다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인인 나로서는 아니! 탈세를 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탈세란 어림도 없지! 아무튼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관 바로 뒤에 있는 본채 건물에는 1층과 2층이 모두 헤밍웨이와 관련된 유물로 가득 채워진 채 전시되고 있었다. | |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버 |
그러나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했을 때 선전했던 광고 포스터들이 더 요란하게 벽면의 대부분 장식하고 있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등.
본채 뒤에는 2층으로 된 별채가 있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위층은 집필실이고, 그 아래층은 기념품 판매점이었다.
2층 집필실에는 헤밍웨이가 사용하던 ‘공병우’식 구닥다리 타자기가 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벽에는 박제된 사슴의 머리도 걸려있고, 상당량의 책들은 코너에 얌전하게 자리 잡은 채 장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헤밍웨이는 매일 아침 6경에 일어나 이 집필실에 들려서 글을 6시간 정도 쓰고 나면, 곧장 단골 카페인 〈슬로피 죠 바〉(Sloppy Joe’s Bar)에 가서 간단한 커피와 식사를 때웠다. 오후에는 바다에 나가 줄 곧 낚시를 즐겼다. 저녁에는 다시 ‘슬로피 죠 바’에 와서 맥주나 램을 취할 때까지 마시며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
별채 뒤에는 별도의 고양이들의 집이 있었다.
이 고양이 집은 2층 다가구형 타운 하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수십 마리가 집단으로 살 수 있는 고양이 집이었다.
그런데 관리인 이외는 고양이 타운 하우스 구역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경고문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때마침, 십여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기네 타운 하우스 주변 뒤로 펼쳐져 있는 넓은 정원에 미로처럼 난 오솔길을 느릿느릿 완보하며 마음껏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그저 길 가운데 발랑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 고양이 관리인의 연봉이 4~5만 달라고 한다.
고양이 타운 하우스 앞 경고문에는 “이 고양이들은 건강 체크를 위해서 정기 건강 진단을 받고 있다”는 글도 맨 아래에 쓰여 있었다.
아마도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어도 좋다는 의미로 보였다.
이 고양이들은 특이하게도 앞 발, 아니 앞 발톱이 여섯 개나 된다.
말하자면 6손이 고양이들이다. 이것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래서 애완용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헤밍웨이 집 구경 보다는 6손이 고양이를 보러 오기도 한다. 보통 고양이들은 앞발가락, 아니 발톱이 5개인데 요놈들은 6손이 였다. 이처럼 정상보다도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더 많은 것을 다지증(Polydocty) 이라고 하던가? 이들 고양이들이 누워있을 때 나는 그들 앞발톱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오 마이 갓! 정말로 6손이 고양이였다. 나는 이 모습을 캠코더에 담았다.
이 요상한 고양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어떤 선장이 외국에서 구해 와서 헤밍웨이에게 선물로 기증을 했다고 한다. 그 후 헤밍웨이는 60여 마리로 늘어 날 때까지 애완용으로 계속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고양이는 정원 코너에 〈고양이 공동묘지〉까지 만들어 주고 각 고양이의 이름이 새겨진 묘지석도 만들어 주었다.
헤밍웨이는 첫 번째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1921년에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폴린 파이퍼(1927), 마서 겔혼(1940), 메리 웰시(1946)까지 네 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헤밍웨이는 20대 초반에 전장에서 만난 애그너스와의 사랑에 실패한 후 평생 ‘배신과 외로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헤밍웨이는 해들리를 만나고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완성했으며, 폴린을 만난 뒤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겔혼와 웰시를 만나고 있을 때 각각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썼다.
헤밍웨이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을 때 대작이 나온다는 피츠제럴드의 견해는 그 당시의 헤밍웨이에게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사람들에게 받은 도움을 원수로 갚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라면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헤밍웨이, 어떠한 전후 사정을 갖다 붙이더라도 그에게서 정당성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헤밍웨이가 그토록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한 이유는 그가 느낀 ‘죄의식’ 때문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누구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식이 눈앞에 닥치면,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다.
헤밍웨이가 숱하게 관계를 파괴해 나간 것은 불안에 빠진 자신을 원치 않는 결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기에 그것은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헤밍웨이를 연구했던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자신의 육체를 위험 상황에 스스로 내던지고 때로는 부상으로 고통 받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냈을 것으로 보았다.
스스로도 “고통이 없으면 정말로 편하지 않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육체적 고통이 죄의식에 대한 일종의 자기 징벌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헤밍웨이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사람이 쓴 《헤밍웨이에 대한 회고록》에서 그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언제나 잘 때 불을 밝혔어요. 어둠 속에서는 잠을 이룰 수 가 없었죠. 그는 무엇에 늘 쫓기는 듯했죠. 아마도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1962년 6월 24일에 내가 받은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지요”
‘아프리카 사냥 여행 중에 나는 사냥 안내자로부터 나미비아 사막에 있다는 ‘여우제비 선인장’이라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네. 나미비아 사막에는 일 년에 단 한 차례의 비가 내리지. 그것도 단 몇 시간 동안만 짧게 내리지. 그런데 이 여우제비 선인장은 바로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잽싸게 부랴부랴 꽃을 피워 생식을 하고는 곧장 시들어 져버린다네. 단 한 번의 우기雨期에, 단 한 번의 사랑과 단 한 번의 죽음! 그렇게 1년을 보낸다네. 우리 인간들은 한참 멀었네. 그 선인장은 내게 이렇게 암시하네. 여기가 끝이다. 더는 없다! 라고, 나는 사랑을 그 선인장처럼 짧고 뜨겁게 하지를 못했네. 나에겐 한 번도 소낙비 오는 계절이 없었네. 이제 나는 그 소낙비 오는 땅으로 가고 싶네. 나의 마지막 모험을 박수쳐주고 응원해주게’
“그때 내가 여행 중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편지를 받는 즉시 헤밍웨이에게 날라 갔겠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엽총으로 아이다호 주, 캐첨 마을에서 자신의 삶을 종쳤다. 그 때 그 곳에서는 소낙비가 오고 있었다 한다.
그렇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왕성했을 때의 작품 활동은 1924년 한 해에만 무려 7편의 단편을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 말하기도 했다. 그가 부인에게 쓴 편지에는
‘3주째 잠을 안자고 있다. 글을 쓸 때에는 잠을 잘 수 없는데, 머리 속에서 밤새 달리는 느낌이다. 아침이 오면, 머리 속에 있는 걸 다 끄집어내 써야하는데, 그 때가 되면 모든 게 끝난다’
그가 좋아하던 사냥이나 낚시, 투우 등의 활동도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조급증으로 인한 행동보다는 워낙 위험이 따르는 행동을 선호하는데 기인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술을 애호했다. 그는 평생을 술과 함께 살았다.
청소년기에 처음 술을 마셨는데 독한 술을 즐겼다. 심지어 전쟁에 참여 하여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병실 침대에 꼬냑병을 숨겨 들키기도 할 정도였다.
음주운전으로 여러 차례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수차례 다치기도 했다.
이러한 음주벽은 첫 결혼이 실패한 1920년대 초부터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가 엉망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점점 심해졌다.
결국 간이 많이 상했고 술을 끊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들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알코올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양극성장애를 악화시켰고 기분증상을 악화시켰다.
헤밍웨이는 신변에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는데, 사고에 매우 취약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술 때문에 그런 경향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천장에 난 채광창 개폐용 줄을 화장실 변기 줄로 알고 당겨 천장 유리가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린 일도 있었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머리를 수차례 다쳤고, 아프리카 여행 중에는 비행기 추락으로 인한 손상도 있었다. 뇌척수 액이 귀를 통해 나올 정도로 중상을 입고서도 그는 술을 계속 마셨다.
이러한 반복적인 손상은 그의 노년기에 그가 가진 기분증상을 악화시키기도 했으며,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정신병적 증상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는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자살과 폭력적인 주제들뿐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없는 많은 일들로 인해 자살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며 자살에 대해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위험에 자신을 맡기고는 했는데 스스로의 목숨을 죽음과 맞닥뜨리기 위해 마치 계획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전쟁을 찾아다녔다. 1, 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에까지 참전했다. 투우의 광팬이었는데 보는 것 뿐 아니라 직접 참여해 위험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낚시, 사냥을 무모할 정도로 다니는 등 항상 죽음을 불러 들이는 행동을 이어갔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이러한 죽음이, 아버지처럼 자살하는 것보다는 더 깔끔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종합해서 살펴보면, 헤밍웨이도 자신의 인격문제, 가족, 정신과적 증상으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것들로 인한 고통을 덜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알코홀을 마시고, 글 쓰는 일에 매달리는 문학 활동도 그렇다. 고통스러운 기분과 끊임없는 자살충동을 오히려 전략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수단으로 글쓰기로 승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기분과 대인관계 등을 글에 표현하기도 했으며 소원성취의 환타지나 복수에 대한 환타지 등도 소설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문학적으로 노벨상도 받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살까지는 막지 못했다.
헤밍웨이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지속적인 치료를 권했지만 그는 평생 치료받기를 거부했다. 사회적 낙인 때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방어는 사실 부적응적이었고 부분적으로만 효과에 그쳤다.
1960년부터 그는 우울과 자살에 대한 싸움에서 지기 시작했다.
피해망상(paranoid delusion)이 동반된 정신병적 우울증(psychotic depression)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친구나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죽이려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의 우울증은 이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
여기에는 만성 알콜중독과 잦은 머리의 외상으로 인한 영향도 있다.
또 고혈압 약으로 reserpine(우울증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포함)을 복용했는데 이 또한 우울증을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결국 헤밍웨이는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마요 클리닉에 입원하였었다. 전기경련치료(ECT) 등을 받으며 2개월간 치료받았다. 그러나 그의 망상과 자살 시도는 지속되었고 퇴원 후 어느 날 아침 부인이 잠든 사이 자살을 해버렸다.
헤밍웨이는 미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문학은 그에게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절한 치료를 열심히 받았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는지, 그의 문학은 어떤 변화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세계문학의 위대한 전설이자 미국 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길 잃은 세대’를 경험했고 그 특유의 허무주의적 감성을 바탕으로 절제된 문체, 강인한 남성성, 참신한 소재가 돋보이는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 중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지나간 삶과 고독한 현재의 모습을 그린 《킬리만자로의 눈》이 그의 운명을 예견해 주는데 압권이다. 전쟁의 심리적인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송어 낚시에 몰두하는 ‘닉’의 이야기 《두 심장을 지닌 큰 강》(1, 2부)을 비롯하여, 《살인 청부업자들》, 《어느 다른 나라에서》, 《깨끗하고 환한 곳》까지, 헤밍웨이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전쟁을 겪은 후 삶의 방향을 잃은 인간의 방황과 고뇌의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그 배경에는 작가 스스로가 직면했던 전쟁의 비극적 경험이 내재되어 있으며, 작품 속에서 그 불안감과 상실감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에서 출생하였다.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였으나, 학교 문예지의 편집인 되어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 〈스타〉(Star) 지紙 기자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 지원병으로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 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 휴전이 되어 1919년 귀국하였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다시 유럽에 건너가 각지를 여행하였고,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G.스타인, E.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작가로서 성장해간다.
1923년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詩》(Three Stories and Ten Poems)를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1924년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In Our T ime), 1926년 《봄의 분류奔流》(The Torrents of Spring), 밝은 남국의 햇빛 아래 전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메마른 허무감을 그린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를 발표했다.
1929년 전쟁의 허무와 비련을 테마로 한 전쟁문학의 걸작이라 평가 받는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를 완성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일생 동안 헤밍웨이가 몰두했던 주제는 전쟁이나 야생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의 선천적인 존재 조건의 비극과, 그 운명에 맞닥뜨린 개인의 승리와 패배 등이었다.
본인의 삶 또한 그러한 상황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에 경험한 세계 1차 대전을 비롯하여 그는 스페인 내전과 터키 내전에도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쿠바 북부 해안경계 근무에 자원했다.
이런 그의 경험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밀라노 병원에서 한 간호사와 나눈 사랑은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의 소재가 되었으며, 1936년 스페인 내란 발발과 함께 그는 공화정부군에 가담하여 활약, 그 체험에서 스파이 활동을 다룬 희곡 《제5열第五列》(The Fifth Column, 1938)이 탄생되었다.
다시 1940년에 에스파냐 내란을 배경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썼다.
이처럼 전쟁을 소재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통과 단절된 젊은 세대들을 일컫는 〈잃어버린 세대〉를 대변코자 하였다.〈37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