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선 禪·차 茶·범패 音의 성지
섬진강이 품은 하동 벚꽃길
겨우내 눈꽃 피웠던 신해사 주변 나무 가지 위로 새순이 돋는 봄소식을 들으면 마음은 이미 섬진강이 품어 낸 아름다운 하동의 풍광과 수 킬로미터 이어진 벚꽃길로 나아갑니다.
봄이 오는 소식을 듣기 전에, 겨우내 움츠려왔던 몸과 마음이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여야 하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들뜨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수행과 기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떠남을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봄기운이 남해 물결 가득히 신해사를 품으면, 저는 사찰의 대중들과 함께 쌍계사로 향합니다.
봄이면 지리산의 맑은 물줄기가 쌍계사를 사이에 두고 흘러내리는 절경과 기암괴석 사이로 하동지방의 많은 비로 곧게 자란 사철 푸른 대나무 숲과 화사한 벚꽃길이 장관을 이룹니다.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약 6㎞ 구간 ‘화개10리 벚꽃길’은 매년 4월 중순이면 벚꽃이 장관을 이루지요. 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활짝 피어있어 천천히 걷거나 차를 몰며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봄소식을 맞으러 쌍계사로 내려오지요.
매년 봄소식이 올 때면, 섬진강이 품은 하동 벚꽃 길로 그리운 사람 보듯 먼저 나섭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쌍계사 품은 벚꽃 구름터널은 봄소식을 기다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벚꽃 길을 걷다가 환한 꽃비를 맞으면 행복에 잠깁니다.
떠남은 그저 설렘만으로도 좋습니다. 그저 한발 디뎌 잠시 벗어나도, 떠난다는 그 마음 하나로 설레지요. 특히 겨울내내 절에서, 기도하고 돌아서면 불자님들 상담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봄의 숨결을 맞는 이 시간이 더욱 싱그럽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우린 우리 자신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살아왔습니다. 한창 꿈이 많은 청소년들은 아직 살아가야 할 수 십년의 인생이 남았고, 혹은 장년들은 반백 년을 살고, 이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우리 자신만의 무대에서, 정말 멋지게 최선을 다해 주인공으로 살아왔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말을 하지만, 제가 보면 우리 불자님들은 정말 멋진 주인공으로 사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더러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지 못해 안타까워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더 늦지 않게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육조혜능 스님의 머리가 봉안된 쌍계사
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쌍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데 중국 육조혜능 스님의 정상(頂相, 머리)이 금당 육조정상탑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722년 11월, 당나라의 절강성 항주를 떠난 신라의 두 스님이 서해안의 당포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이때 대비 스님과 선백 스님이 혜능 스님의 정상을 모셔 왔습니다.
신라 성덕왕 때 영광군 운암사에서 의상 대사 제자인 삼법 스님은 중국에서 선풍을 휘날리던 육조혜능 스님의 선법을 배우리라 발원했습니다. 삼법 스님은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했는데, 당시 당나라에는 육조혜능이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스님은 혜능 스님이 입멸한 지 6년이 지난 뒤, 금마(지금의 익산) 미륵사의 규창 스님이 당에서 가져온 혜능 스님의 <법보단경>을 보고 감동하게 됩니다. 스님은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붙이는데, “내가 입적한 뒤 5∼6년 지나서 한 사람이 내 머리를 가지러 올 것이다.”라는 대목에 눈을 뜨고는‘내가 마땅히 힘써 도모하여 우리나라에 만대의 복밭을 지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을 꾸고 육조혜능 대사의 정상을 모시고 온다고 해도 첫째 도둑질이 되고 둘째 부처님과 같은 큰 대사의 몸에 피를 내는 오역죄를 범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면 지옥에 스스로 가리라 생각하고, 법정 비구니(김유신의 부인)에게 금 2만 냥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으로 가서 육조 대사를 모신 소주 보림사를 찾아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를 올리자, 육조 대사로부터 감응이 있었지요. 하지만 보림사의 경비가 삼엄해 홍주의개원사에 머물렀습니다. 그 곳에서 신라 백율사의 대비 스님과 선백 스님을 만나, 자신의 꿈을 설명하고 보림사를 지키고 있던 사람에게 금 2만 냥을 주고 육조혜능 선사의 정상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뒤 귀국하여 법정 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에서 날마다 육조혜능 선사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꿈에 혜능 스님이 나타나서 자신이 인연한 터가 지리산 아래 눈 속에 칡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말에, 지리산 명소를 찾다가 호랑이의 인도로 사찰을 창건합니다. 엄동설한에 꽃이 필 정도로 상서로운 곳에 쌍계사가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삼법 스님은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육조혜능 선사의 정상을 깊이 봉안한 뒤 선정을 닦기에 힘썼습니다. 스님은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 목욕하고 <법보단경>을 염송하다가 앉아서 입적하였습니다.
중국 선종의 맥을 이은 쌍계사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 가운데 서 있는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에 따르면, 진감혜소 스님은 금마 사람으로 774년(혜공왕 10)에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최창원은 재가신도이면서 출가한 스님과 같이 수행할 정도로 불법에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어머니 고씨가 어느 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인도 승려가 찾아와“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는 유리 항아리를 주고 갔으며, 그 후 태어났다고 합니다.
진감 선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1세 되던 804년(애장왕 5)에 뱃사공이 되어 당으로 갔습니다. 혜능 스님의 법손인 신감 대사를 은사로 810년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종남산에서 수행정진하다 57세 되던 해에 귀국한 뒤, 상주 노악산 남장사에 주석하였습니다. 이때 불법을 묻기 위해 대중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와서 스님은 수행하기 좋은 경계를 찾아 지리산에서 국사암 터에 자리를 잡고, 선문을 열었습니다. 국사암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삼법 화상이 남긴 절터를 발견하고 옥천사를 세우고 남종선을 신라에 처음 전하고 범패를 널리 보급했습니다. 이 터에 절을 짓고 대나무 통으로 물을 끌어와 집 둘레 사방에 물을 대어 옥천사(玉泉寺)라 이름 붙였으며, 곧 쌍계사의 중창이 이루어졌습니다.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라는 사람이 당나라에서 차나무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후 진감 스님이 쌍계사 근처와 하동 화개에 차밭을 조성하여, 쌍계사는 우리 차 시배지로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매표소가 나오고 조금 올라가면 쌍계사 도량 입구를 상징하는 큰 바위 두 개가 석문처럼 솟아있고, 그 사이로 길이 나 있습니다. 바위 위에는 각각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이라는 범상치 않은 네 글자가 쌍계사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로 그렇게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 후, 쌍계사는 1466년(세조 12)에 선비 대사의 팔상전 중수, 1506년(중종 1) 진주목사 한사개의 중수에 이어 1543년(중종 38)에 운수승 혜수가 중창하여 대웅전과 금당과 동서방장을 지어 낙성했습니다. 1549년(명종 4) 서산 대사의 중수가 이어졌으며, 1628년(인조 6)∼1644년(인조 22)에 벽암각성, 소요태능 스님 등이 지금의 자리에 중창했습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인계 스님이, 1695년(숙종 21)에 백암성총 스님이, 1735년(영조 11년)에 법훈 스님이 쌍계사를 중수했습니다. 1864년(고종 1) 봄에 담월 스님과 용담 스님의 원력으로 육조정상 탑전의 칠층 보탑을 건립하게 됐습니다. 이후에도 전각이나 불상 등의 보수가 계속되었고, 1975년을 전후하여 고산혜원 스님에 의해 현재 사찰의 모든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지리산 쌍계사는 육조의 정상을 모신 금당 영역과 대웅전 영역의 두 공간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가람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금당영역은 남북의 축선을, 대웅전 영역은 동서의 축선을 갖게 되어 두 영역이 서로 교차하는 가람 배치입니다. 쌍계사 도량이 좁다는 지리적 조건에 의한 배치입니다. 금당 영역은 국사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여 가람 조성을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 보물 제380호인 부도, 보물 제925호인 팔상전영산회상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인 불경책판이 있습니다. 대공탑비는 887년(진성여왕 1)에 진성여왕이 진감 국사의 도덕과 법력을 흠모하여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이를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비문은 최치원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첫째로 꼽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