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러리맨/최명숙
봄뜻 아직 이른데
마음은 벌써 초록을 싹 틔우며
아옹한 생각속에
궁핍한 햇살이 흩어지고 있다
어쭙잖은 아침노을 밉살스레
문밖에서 기웃거려도
서걱서걱 눈 밟는 소리
허공을 달려와 심장을 매만지고 있다
오망한 가슴으로 드는
또 하루를 꿰어 손에 들고 등에 지고
오천 (午天) 안에 쌓고 싶은 탑
그럴듯이 청사진을 그려본다
*아부지 마음 이었다 /최명숙
열무밭에 아부지 땀방울이 그윽히 고였다
땀에 발아한 작은 연둣빛 소망이 산고를 겪고
온몸을 뒤틀며 빛을 만나겠다고
어둠을 털어 내고 있다
작은 텃밭은 그야말로 축제 한마당
삐죽이 고개 들고 먼저 일어서겠다고
서로 키를 다툰다
노안에 기쁨 들이마시는 숨소리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일 때 그 깊은 안도감이
흙 묻은 면장갑에서 발효되고 있었다
아부지 굵어진 손끝으로
한 톨 낙오 없이 달려나온 파릇한 감동 소나타
짬짬이 솎아낸 다섯 마디 돌림 노래로
식탁에 풍요로운 시간을 버무려
아부지 사랑을 차려낸다
탈이 많은 자식들도
텃밭에서 자란 열무들 이었다
*마스크 해제/최명숙
낯설었던 평범한 나날
드디어 찾아와 옷을 갈아 입는다
유려한 맵씨 아니어도
봄스럽게 차려 입고 나서니
유행 지난 옷붙이도
남겨두길 잘했구나
허공에 팽개쳐져 만질수 없었던
시퍼렇게 오염된 시간들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데
뛰어온 스마트폰 벨이 가슴 적시며
저물어가는 거리에 피어나는
납빛 잎사귀 서서히 조명을 흡입한다
우울하게 스미는 안개 터뜨리고
새벽 노을 한 삽 떠내어
봄놀던 뜰에 하양 노랑꽃 분홍
가지런히 씨 뿌려 볼까
날염된 세상에서 피워낸 사연들이
얼마나 향그러울지 몰라도
은빛 윤슬 살랑살랑 익은 한낮
햇살이 자신만만 하다
*금계국/최명숙
한닥이는 언덕을 껴안고
허리 굽혀 서로 얼굴 부비며
몽그작거리는 노랑, 송그리고 앉아
까르르 웃음을 흩뿌리고 있다
그저 오르는 땅내음에 숨통이 트여
하늘을 잡아당길 수 있다고
꽃빛발 뻗치는 한적한 복판으로
흐믓한 눈길이 흠뻑 젖는다
이윽한 오솔길에 누워 동당거리는 향기
뻐꾸기 제이름 부르는 한낮이면
눈 흘기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드러눕는 투정쯤은 괜찮다
오보록한 미소 여름마음을
온통 너에게 맡기고 싶은 까닭이다
*내 안에 들어온 시월 /최명숙
여름을 낳고 몸을 푼 바람이
가을의 첫 발을 디딘다
거칠고 사나운 장마에 쓰러진 마당의 감나무
내 안에서 지친 여름이 빠져나가고
가을을 품었다
무덥던 체온이 내려가고 서늘한 바람 껴안으며
에어컨을 끄고 한 사흘 지났다
건들팔월 구겨진 치맛자락에
그만 속내 펴보이며 내딛은 발걸음
이제 풀벌레 소리도 제법 살이 올랐다
머리 맡으로 달려드는 풀벌레소리
뒷곁 호두나무도 껍질이 단단해지고
달빛에 샤워 한 감나무 잎에 선홍빛이 감돈다
창문으로 들어온 수척해진 볕뉘
푸른 이파리가 몸살을 앓는다
서늘해진 달빛 한조각 책갈피에 눌러 놓고
서서히 분 바를 준비 해야겠다
두근두근 옥죄어오는 당신을 기다리는 맘
곱게 단풍든 시월이 빈가슴을 꽉 채운다
*약력:2018년 '한국시원' 봄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청시 시인회 회원
2022년시원문학상 작품상 수상
시집 '라온제나'
*시인의 말: 계절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마음
서툴지만 시 한편으로 나를 벼리고 다독인다
올해도 어여쁜 가을에 흠뻑 젖어들고 싶다
첫댓글 참 예쁘십니다^^ 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