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 화살
고구려의 만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한데는 화살의 영향도 크다.
전쟁에서 화살은 소모품으로 대량으로 발사할 경우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화살 100개 중에서 99개를 피한다고 해도 한 개가 몸에 맞으면 전투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화살의 궤도를 정확하게 유지하면서도 파괴력을 높이도록 화살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길이와 무게의 화살을 제작했다.
평양시에 있는 고산동 7호 무덤의 활촉은 도끼날식(끌날식)으로 불리는데 밑이 좁고 끝으로 가면서 점차로 벌어지고 그 끝의 날이 직선형태이다. 도끼날식 활촉의 두께는 끝이 예리하고 뿌리 부분의 무게는 12그램, 촉의 평면의 면적은 19제곱센티미터인데 이런 도끼날식 활촉은 고구려 초기무덤에서 많이 발견된다.
도끼날식 활촉 일반 화살의 2배 거리 날아
도끼날식 활촉의 장점은 평면이 거의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날아가므로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화살 뒤쪽에는 큰 날개가 달려 있으므로 이 화살은 앞뒤에 각각 날개를 갖고 있는 비행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현대 비행기에서 앞뒤에 날개를 갖고 있는 이른바 오리형 비행체와 유사한데 이런 구조는 앞뒤 날개에 각각 양력이 생기면서 원거리 비행이 가능하다. 실험에 의하면 일반 화살보다 2배 정도 더 멀리 날아간다.
물론 고구려가 도끼날식 활촉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도끼날식은 상처를 크게 낼 수는 있지만 송곳과 같이 끝이 뾰족한 활촉에 비해 상처를 깊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명중률에서도 끝이 뾰족한 활촉보다 못하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가야의 화살촉 역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진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 화살촉은 화살이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현대의 총열에 강선을 넣어 총알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적들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때 도끼날 식 활촉을 사용하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좁은 활촉을 사용하였다고 추정한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1930년대 촬영).
화살 뒤쪽에 큰 날개를 다는 것은 화살은 구조상 날아가면서 자연적으로 회전하므로 이것을 더욱 빠르게 회전시키기 위해 깃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국궁용 화살의 경우 왼손으로 활을 밀고 오른손으로 활줄을 당기는 우궁이 사용하는 화살과 오른손으로 활을 밀면서 왼손으로 줄을 당기는 좌궁이 사용하는 화살은 다르게 제작된다. 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완만한 곡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화살깃을 부착할 때, 좌ㆍ우궁용 화살을 구분해 반대방향으로 붙인다. 화살을 만드는 장인들은 좌궁의 화살깃은 꿩의 오른쪽 날개 깃털을 사용하고, 우궁의 화살깃은 왼쪽 날개 깃털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무용총의 기사가 발사하는 화살에 큰 소리를 내는 명적(鳴鏑)도 보인다는 점이다. 명적은 형식상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촉신 부분과 명향(鳴響) 부분으로 나뉘는 것으로 명적부의 크기는 3~4센티미터 폭 2센티미터 정도이다. 경산남도 양산 부부총과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된 것이 이 종류로 시베리아에서도 같은 류가 발견된다.
간단히 말해 명적은 화살촉 아래에 짐승 뼈나 뿔로 만든 조그만 화살통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날아갈 때 소리를 내는 화살로 향전도 있지만 명적이 향전과 다른 것은 명적의 끝에 화살촉이 달려있기 때문에 살상력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태조가 명적 쏘기를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 환조 앞에서 명적으로 노루 일곱 마리를 연달아 쏘아 잡았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명적 끝에 화살촉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명적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므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하였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흉노를 공격하는 한고조 유방의 기병대, 유방은 40만 명을 동원해 흉노를 공격했으나 백등산에서 1주일간이나 고립되는 등 철저하게 패배하고 화친을 맺었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기원전 209~174),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어다. ‘탱리(撑犂)’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의 흉노의 왕을 뜻하며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임)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다음과 같은 화친의 골자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증가되었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그렇다).
흉노의 세력권, 흉노는 전성기에 오환ㆍ선비ㆍ서역ㆍ한반도 북부 등을 점령하여 중국보다 3배나 큰 대제국을 건설했다.
묵특은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이다. 흉노의 선우 즉 묵특의 아버지는 두만(頭曼)이었다. 그런데 두만의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가 아들을 낳자 두만은 묵특을 폐하고 연지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두만은 묵특을 인질로 월지에 보냈고 곧바로 월지를 급습했다. 참고적으로 월지는 중국의 현 감숙성의 돈황에 있던 나라로 흉노에 쫓겨 간다라 지역에 정착하여 대월지국을 세운 후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켜 동아시아의 불교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예로 보면 서로 예를 갖춰 인질을 교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이면 인질을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다. 묵특은 아버지 두만의 기대와는 달리 월지에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두만은 묵특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대범한 것을 알고 만인대(萬人隊)로 구성된 기병군단의 지휘권을 주었다.
여기에서 유명한 ‘명적(鳴鏑)’의 고사가 나타난다. 묵특은 명적 즉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만들고 부하들에게 철저하게 사격훈련을 시켰다. 그는 자신이 명적을 쏘면 다같이 그곳을 향해 쏘라고 명령하면서 화살을 쏘지 않는 사람들을 참형에 처했다. 훈련의 도를 점점 올려 자신의 명마, 애첩을 향해 명적을 쏘았는데 뒤따라서 화살을 쏘지 않는 장병들을 참형할 정도였다.
전투개시 의미한 소리나는 화살
그 후 부하들은 묵특이 명적을 쏘면 일사불란하게 화살을 쏘았다. 전쟁터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 명적을 한 발 공중으로 발사하는데 이 소리 나는 화살은 전투개시 신호를 의미하며 효시(嚆矢)는 이때부터 나온 말이다.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을 확신한 묵특은 아버지 두만이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두만을 향해 쏘았다. 묵특의 부하들이 따라서 두만이 있는 곳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두만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묵특은 곧바로 계모와 동생 등을 모조리 제거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묵특이 명적으로 부하들을 훈련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있었다. 묵특은 명적을 쏘아 부친을 교묘하게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했다는 ‘아버지 시해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신의 부하들 모두가 화살을 쏘게 하여 그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후 자신들의 공범자 즉 부하들과 하나로 연결하여 권력을 나누었다. 공범자인 부하들은 묵특의 예상대로 묵특과 누구보다도 밀착된 결속력을 가지고 주변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무용총의 가무도의 남녀 복식, 저고리와 두루마기의 여밈, 끝단, 수구에는 선이 둘러져 있으며 허리에는 띠를 매고 있다. 고구려 복식은 평상시에 입으면 평상복이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복이 된다.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 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000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는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되었는데 묵특은 자신의 치세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6)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 당시 흉노의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할 만큼 대제국이다.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 법종 교수가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하여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한다고 적은 것도 이 부분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계속하여 연장선에서 한반도로 한(漢)이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적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호, 2004)를 참조하기 바란다.
천마총 마구 전시물(중앙이 등자),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김 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된 동호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 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명적은 무용총의 고분뿐만 아니라 약수리와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보인다. 학자들은 고구려에서 동물을 사냥할 때 명적을 사용한 것은 소리가 크게 나므로 동물들을 사냥하는데 오히려 적합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유럽의 경우 몽골군의 침입 당시에 처음으로 명적을 접했기 때문에 명적의 날카로운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이를 ‘악마의 화살(devil arrow)'이라고 불렀다.
명적쏘는 무인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
③ 파르티안 기사법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서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이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 평복 차림의 인물이 3명이 있고 표적은 5개이다. 그림의 오른 쪽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 외에도 마장(馬場) 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에 ‘사희주기인(사희를 기록하는 것을 주재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말 탄 무인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선수는 4명이다. 2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겨누고 있다. 나머지 2사람은 한 순을 돌아 나왔거나 아니면 준비 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과녁은 5개의 장대 위에 송판을 붙인 것 같은데 2개는 누가 쏘아 맞혔는지 두 동강이 난 채 땅위에 떨어져 있다. 이 그림에서도 과녁을 겨눈 채 말을 달려 나가는 왼쪽 무인은 완전한 형태의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명적과 향전, 명적과 향전은 모두 날아갈 때 소리를 내는 화살이지만, 명적은 그 끝에 화살촉이 달려 있기 때문에 살상력이 있다(자료 민승기).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좌우간 이 기술 덕분에 기병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서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말 타는 솜씨가 수준급이상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병은 상대방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활쏘기 편하게 말 안장 안교 똑바로 세워
고구려가 승마를 생활해 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복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복식의 특징은 북방기마민족이 입던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이다. 호복은 양팔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소매통의 웃옷인 습(褶)과 양다리를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좁은 바지인 고(袴)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 타고 사냥하는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들 고구려 복식은 평상시에 입으면 평상복이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복이 된다. 또 말 위에서 의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띠를 매었는데 그 띠에는 금구를 달았다. 신발도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는 등 모든 것이 승마에 적합한 복장이다. 말에 얹은 안장은 서양식처럼 안교가 낮고 평면적이며 여유 있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안교가 똑바로 세워져 있어 입체적이며 앉기에는 좁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신체를 말의 탄성으로부터 피하게 하여 상하의 진동을 적게 하고 표적을 쏘아 맞추기 위해 말 등으로부터 허리를 띄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채택한 방법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데 능하다’고 적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에도 적혀 있다. 온달도 평강공주가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했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사육하는 실제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생활화했음을 알 수 있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백제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마수렵인물상과 경주 사정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문양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제금동향로의 수렵인물상은 백제의 수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일본 정창원 소장의 은제선조수렵문과 연관해서 일본 문화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기사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는데 히도미의 『한객수구록』에는 1681~1684년 사이에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절단과의 수담(手談)이 적혀있다.
“비장 정태석, 형서정 홍금의 전복을 입고 말을 달린다. 안장에서 일어나고 혹은 물구나무서며 안장을 붙들고 땅에 닿을 듯 매달리며, 혹은 누어서 말을 힘차게 몬다. 말을 몰며 서로 웨치는데 그 소리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을 달리면서 웨치는 소리는 웃는 것인가, 꾸짖는 것인가?’ 물으니 ‘이것은 포효니 기(氣)를 돋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따라간 무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材)의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18세기에 이세정장이 쓴 『정장잡기』에서는 “마장(馬長)이 처음부터 끝까지 웨치듯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쏜다”고 했으며 이런 일이 일본의 고대는 없었다고 했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http://www.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