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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리버 크루즈 낭만 여행
-중세 동유럽 문화 탐방-
-제2화 암스텔담 관광-
2016년 6월 13일-
오늘은 암스텔담의 문화관광으로 고흐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그리고 시내 관광으로 계획하였다
우린 정각 9시 고흐미술관 앞에서 이곳에 유학왔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줄 곧 이곳에서 생활해 온 현지 가이드 정인숙을 만나 오늘의
관광을 시작하였다
우린 미리 준비해 둔 뮤지움 입장권을 이용하여 기다림 없이 고흐 미술관
으로 들어가 고흐의 일생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1853년에
목사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목사가 되고져 하였으나
16세때에는 헤아그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으며 1873년부터 2년간
런던에서, 1876년에는 파리의 구필화랑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수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당시 유명한 프랑스 화가 밀레를 존경하고
화풍도 밀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878년 그는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1879년 겨울 성직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인 위기를
겪었으며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0년간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으나 결국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하고 1890년 37세의 나이로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반 고흐는 너무나 가난한 화가였기에 돈이 없어 대형 작품을 그릴 수
없었으며 파리에서 화상을 하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생활비와
화구를 구입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1885-6년도에는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1885년 제작된“감자 먹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사회성과 대담성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알려 지고 있었으며
특히 정신병원에 있으면서도 1889년 그린 아이리스(붓꽃)은 540만
딸러에 팔리기도 한 유명한 작품이며
ㅡ1888년 아를르에 온 고호는‘아를르의 침실’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이 작품의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
"이 그림은 아를르의 내 침실이야 이번 그림은 원근법과 밝은 색상으로
방을 꾸미고 노란색과 하늘색을 강조하였어
창문과 침대 의자등의 배치도 잘 정돈된 느낌이며 허전한 곳은
액자를 넣어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표현하였어
나는 고갱을 기다리면서 이 그림을 그렸으며 맨날 나를 정신병자라고
말하면서 내 그림을 사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 좋아
할 것같아 입주 선물로 고갱에게 주면 부족한 점을 충고 해 주겠지
고갱은 유명한 화가이니까 아니면 이를 너에게 주면 내 방이 잘
정돈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거야 ----- "
고호는 매번 그림을 그리고 나면 동생 테오에게 그림과 함께 그린
동기와 특징을 편지로 보내주고 하였다고 하며 960여통이 넘는 편지가
지금까지도 보전되어 있으며 살아 생전 전시회 한번 가지지 못한
고호를 위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고호를 상품화 한 것은
고호가 죽고 나서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Johanna Gezina Van
Gogh-Bonger 1862-1925) 가 고호를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밥”이란 이 그림은 고호의 미 완성작으로
먹구름의 음난한 색채와 검은 까마귀떼는 그의 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암시를 하고 있으며 이 밀밥에서 권총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고흐는 노랑색을 좋아하여 여러종류의 노랑색 화폭을 그려 냈다고한다
우리 가이드의 수준높은 설명을 듣고 나니 그림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2시간 동안 고호 미술관을 관람 후 국립 미술관으로 갔다
국립 미술관은 1885년 개관하였으나 10년간 리모텔링하여 2013년에
재 오픈한 미술관으로 800년의 네델란드 마술사를 맛볼 수 있으며
8,000여점의 전시품이 있다고 한다
이 미술관에는 램브란트를 비롯하여 네델란드의 대표화가 베르메이르와
생명력이 넘치는 초상화의 대가 할스등의 그림을 볼수 있다
빛과 어둠의 화가인 렘브란트(1606~1669)은 네덜란드 레이든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의 최대 번성기인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성공한 상인과 관리,
지식인들을 스폰서로 두고 전성기를 맞은 렘브란트는 경제적인 성공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화가로써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 난 렘브란트는 화가로서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삶은 평탄치 않는 삶이 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일찍 잃어야 했든
우울함과 외로운 삶은 빙탕한 생활로 이어져 화가로서의 명성도 함께 사라지면서
말년에는 파산 선고를 할 만큼 고통스런 삶을 살아 가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세속을 원망하면서 성화에 대한 열정과 예술에 대한 패기는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화상을 제일 많이 그린 화가이며 나이가 들수록 그 어둡고
수심에 찬 자화상은 그의 삶을 그대로 예술로 표현 하였으며 성화에서도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존경받는 화가였다
1668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 마저 죽자 이듬해 자신도 유태인 가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램브란트의 대표작<야경>을 감상하기 위하여 우린 몇분을 기다려야 했다
이 그림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빌렘 반 뤼텐부르흐 소위가
이끄는 중대'를 묘사하고 있으며 코크 중대가 램브란트에게 이
그림을 의뢰한 것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640년경이었다.
이 그림을 위해 열여섯 명의 대원들은 비싼 값을 내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각자 위치한 자리에 따라 그림 값을 내는 데 코크대위와
빌렘 반 소위는 더 많이 지불해야 했고 중경에 있는 키가 작은
여인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한다.
빛을 이용하여 두 명의 지휘관과 그 옆에 있는 한 여인과 왼쪽에 있는
빨간 옷을 입은 사수와 기수, 그리고 고수를 부각시키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상을 서로 교차시켜 유동적이고 조밀한 구도를
표현했다고 한다 . ‘야경’은 원래 밤풍경이 아니라 대낮을 그린 것입니다.
군대나 경찰이 야간순찰을 하던 18세기에 이르러 어둡게 변한
그림을 보고 추측하여 야경이라고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버밀리온’이라는 물감을 사용했는데 그 성분이
황화납 성분이라 공기 중에서 흑변현상이 일어나 어두운 그림으로
변했다고 하며 이 그림은 아직도 해외에 한번도 나가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을 AI기술로 300년만에 원본과 같이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몇해전 이 자리에서 관람하든 일본인이 갑자기 이 그림을
칼로 훼손시킨 일이 있어 이 그림에만 양편에 감시원을 두고
있으며 왼쪽 아래 부분에 개가 한 마리 앉아 있는 원본이 훼손되어
그 부분을 어둡게 처리되어 있었다
훼손되기 전 원본 시진은 바로 옆에 전시되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또 다른 유명한 성화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이다
성경 요한복음 19장 38-41절을 표현 한 성화로써
이 성화에는 예수님의 몸을 안고 내려오는 요셥과 두려워 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요한과 무궁한 사랑을 표현하며
기절하는 성모마리아님과 예수님의 윈편에서 팔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라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수는 나를 위해 죽으셨다.“
고 외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렘브란트는. 빛의 마술사로 빛을 이용하여 그림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
위대한 화가임에 틀림없었다
프란스 할스의 기분 좋은 술꾼
프란스 할스(Frans Hals)는 1580년경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면서 하를럼에 있는 조합들의 회원들과 군인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한 집단 혹은 개인 추상화를 그렸다
할스는 1616년 집단 초상화 “성조지 민병대의 연회”로 명성을 얻었으며
즉흥적인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할스의 초상화는 여느
작품과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1640년 이후 생동감이 줄고 색조도 어두워지고 대중의 인기도 사라져
어려운 생을 살아가야 했고 1666년 하를럼의 한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할스의 양식은 19세기 후반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8)
델프트 지방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 얀 베르메르는 평생에 걸쳐 40여 점 안팎의 적은 작품을
남겼지만 이 명화는 화면을 반으로 나누어 빛과 어둠의 감각적인 대비는 엄숙함을 화면 가득 풍기게 하고
회칠한 벽과 금속 주전자, 흙으로 구워 만든 우유 항아리, 탁자 위 빵 조각 등의 구성 요소들의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는 시각적이고 평면적인 그림에서 촉각적인 세심함을 느끼게 하는 명작이라고 한다
베르메르는 헤아그 미술관에 소장된 유명한 그림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화가이다
우린 1시간 30분간 국립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와서 간단한
센드위치로 점심을 떼우고 오후 관광을 나섰다
트랩을 타고 렘브란트 광장에서 내렸다
베레모와 망토차림의 렘브란트 동상이 1876년부터 버터 시장이 열리든
이곳에 세워 졌으며 그 앞에는 그의 명작 “야경”을 연상시키는 군경들이
조각되어 있어 야경을 야외에서 실감있게 보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중년의 여인들이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고 즐거운
왈쯔를 춤 추고 있었다
이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클럽,레스토랑들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토요일 오후면 이곳은 젊음이들의 거리로 변하여 불야성을
이룬다고 하며 근처의 카페에서는 마리화나를 판매하고 있어서
항상 광란의 밤이 계속된다고 한다
마리화나는 이 나라에서는 합법화되어 있다고 한다
거리를 돌아 나오니 뮌트 탑(Munttoren)이 보인다
1490년에 처음 건설된 뮌트 탑은 원래 두 개의 탑이 있어
암스텔담으로 들러오는 문의 역할을하고 있었다고 하나 뮌트의
뜻은 화페 주조를 의미함으로 1672년 전쟁 당시 화페 주조소로써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한 개의 탑만 그대로 남아 있으며
F 헤모니가 설계한 시계탑이 매15분마다 시간을 알려준다고 한다
계속해서 우린 워킹투어를 하며 싱겔(Singel)강을 지나 가니 꽃시장이 나타난다
꽃시장(Bloemenmarkt)은 형형색색의 꽃들과 재료들이 잘 정돈된
상태의 시장으로 꽃의 왕국처럼 화려하였다
운하를 따라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튜립 뿐만 아니라 씨앗과 모종도
여러 종류별로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화홰의 나라 처럼 년간 50억유로를 수출하는 네델란드는 전국적으로
허브 튜립 장미등을 여러 가지 색상을 개발하여 생산함으로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4-5월이면 튜립을 비롯하여 허브 분꽃등 다양하고 화려한 꽃잔치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여행시기를 4-5월로 조정하여 다시 오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만약 4-5월 여행시에는 세계의 정원이라고 알려진 코이겐 호프를
추천하고 싶다 도시 전체가 이런 꽃들로 정원을 만들고 있어
세계의 정원사들이 필수적으로 관광하는 코스이라고 한다
조금 걸었드니 촐촐하여 근처의 감자 튀김 전문점을 찾아갔다
가이드의 안내로 골목길에 있는 벨레민크스(Vleminckx)는 1887년
이곳에서 영업을 시작히여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는 전문점이란다
우린 이곳에서 가이드와 함께 길거리에서 맛있는 튀김 감자을 먹으며
다음 관광코스로 향했다
네델란드 특유의 음식으로 프리트(Frites) 파타토(Patatos)라 하여
감자를 굵게 썰어 즉석에서 두 번 튀겨 내어 겉은 바싹 바싹하고
속은 부드러운 튀김을 프리트소스를 발라 먹으면 일품이라고 한다
이젠 이 튀김집들이 많이 생겨 났고 그 중에서도 만네켄 피스
(Manneken Pis)라는 현대화 된 튀김집도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베긴회수도원 (Begjnhof)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과부나 미혼모들이 모여 종교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노인들을 보살피는 수녀들의 모임을 배긴회라
하였으며 암스텔담에서는 14세기에 이 수도원을 지어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며 1970년 마지막
배긴회 수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암스텔담에서 최고로 오래된 목조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내부는 조용하고 숲과 넓은 정원이 있어 그 주의에 목조 건물을
지어 수녀들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불우한 여성들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도심 속의 넓은 정원과 엄숙한 수도원의 교회당은 불우한 자신을
위로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려는 신앙의 힘이 생겨난다고 한다
입구에는 조그마한 알림판이 있는데 “여러 명의 관광객 팀은
환영하지 않으나 혼자 온 관광객은 환영한다.
그리고 사진은 찍지 안았음 좋겠고 조용히 다녀가시오” 라고 써 있었다.
속세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의 함축된 마음의 글이라고나 할까
암스텔담 역사 박물관
우린 수녀원과 맞붙어있는 암스텔담 역사 박물관을 10분만에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박물관은 13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네델란드의 역사를 시대별로 분류하여 놓았으며
특히 암스텔담의 지형을 수위와
견주어 놓은 자료들은 네델란드의 고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16-7세기 자료들은 네델란드가 해상 왕국으로 번성하든 시기의
자료들로써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네델란드는 지금의 뉴욕에 뉴
암스텔담을 건설하고 네델란드의 부유촌인 할렘을 만들어 집단
거주하며 살았는데 보스톤에 안착한 영국의 군함들이 뉴욕을 점령함
으로 네델란드인은 뉴 암스텔담의 부유촌 할렘을 버리고 네델란드로
돌아왔다고 한다
부유촌인 할렘은 네델란드인이 떠나고 나자 영국의 이민자들 차지
하면서 슬램가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상은 조물주가 창조했지만 내델란드는 네델란드인이 창조하였다”
는 슬로간은 네델란드인의 자부심을 한 대목으로 나타내는 말인 것 같았다
박물관에는 현지 학생들의 단체 관람객이 많았는데 화려한 역사와
부끄러운 역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라고 한다
입구를 나오는데 암스델담의 심볼이 눈에 띈다
XXX는 암스텔담의 상징이라고 라는데 ‘질병이 없고 홍수가 없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트리플 X가 의미하는것은 자비심 MERCY , 결단력 RESOLUTION, 용기 VALOR을
의미하며 오래된 무역 상업 도시로써의 상징이다 트리플 X는 성앤드류 (ST. ANDREW)
의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트리플 X가 암스텔담의 상징이 된것은 1975년 2월 부터이라고 한다
서둘러 이 박물관을 나오니 바로 담광장과 연결된다
담락 거리의 담 광장은 중앙역과 연결되어 있고 암스텔담의 최대
번화한 광장이다 중앙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왕궁과 신교회, 밀랍 인형관인 마담로소, 유명 백화점인
베이엔 코르프(Bijenkorf) 등의 건물등에 둘러싸고 있다.
또한 여기가 암스테르담 여행의 중심지이다
이 백화점은 크리스마스의 특수를 위하여 11월부터 년말까지는
야간 개장을 하면서 빛의 축제를 함께 하고 있어 이곳의
아름다움을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왕궁과 마담루소의 담 광장은 15일 자유 투어때
다시 보기로 하고 구 교회를 찾아 갔다
벌써 6시가 넘어 교회 관람이 불가능하였다 우리는 다음 날로 미루고
근처의 홍등가를 보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하였다
7시가 넘었는데도 해는 중천에 있다 보통 9시가 되어야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만큼 여름은 낮 동안이 길다고 한다
운하 옆에 붉은색으로 칠한 건물들이 홍등가이다
이 일대가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는 홍등가이며 색스 숍도 함께
영업하고 있으며 낮이나 밤이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엄청난
숫자이며 밤에는 지나 가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온다고 한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직업인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세금도 내고
출퇴근하면서 가정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옛부터 이곳은 항구 도시로 많은 뱃사람들과 이민자, 관광객등이
모이는 곳으로 마약과 도박 여자 등 범죄의 온실이었으나 2000년부터
이를 합법화 하여 관광자원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300여개의 독립된 방에서 독자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EU 시민권자라
하며 허가를 득하여 영업을 하며 세금을 내고 있으며 75% 동유럽에서
건너온 시민권자라고 한다
우린 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하여 음미해 보다가 하나의 직업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이곳은
퇴페적인 장소가 아니고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을 느끼고 가이드와
헤어져 오늘의일정을 마쳤다
우린 중앙역근처가 숙소임으로 거리를 구경하면서 호텔로 돌아와
내일을 일정을 위하여 피로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