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밤
목요일 오후.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는데도 술친구로부터는 연락이 없다.
월요일에 같이 마신 이후 화요일을 거쳐, 수, 목요일이면
맨 정신으로 생활한 지 사흘째다.
술꾼들에게 있어서 금주 사흘이면 목구멍이 탈대로 타는,
경상도말로 ‘목구중에 엉그름이 생기는’ 장구(長久)한 인터발이다.
카톨릭 신자인 술친구의 레지오 모임은 수요일이다.
목요일 오후까지 전화가 없다는 것은
레지오 단원들과 술을 진하게 마신 것을 뜻한다.
소주파가 대부분인 레지오 단원들과는 되도록 술자리를 피하는 법인데
어쩐지 불길하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건다.
‘방송국 사정이 우떻습니까?’
여기서 ‘방송국 사정’이란 우리 술꾼들끼리 주고받는 전문용어로서
술자리가 가능한지를 타진해보는 은어다.
기정사실로 공약해놓은 방송 프로그램도 흔히 ‘방송국 사정’에 의해
빈번하게 변경되는 사례를 인용한 것이다.
‘오후에 치루(痔漏) 수술을 받고 조금 전에 입원실로 옮겨왔다.
당분간 맥주는 마시기 힘들것다.’
이런 세상에!
웬 난데없는 수술이람.......
월요일,
맥주 첫잔을 들이 키고 난 후,
으스스 한기가 든다며 감기기운이 있다더니
그게 엉덩이 깊숙한 곳에 한창 무르익던 농양 때문이었던가?
이쯤 되면 사소한 ‘방송국 사정’을 넘어서는, 암담한 지경이다.
보통 술자리에 응하지 못할 방송국 사정이래야
집안 제삿날이거나 급히 출장을 가서 밤늦게 도착하는 정도인데
소위 항문 부위를 절개하고 입원했다면
술하곤 아예 담을 쌓고 보름정도는 너끈하게 기다려야 한다.
이러니 암담한 정도가 아니다.
유일한 술친구가 입원했으니
덩달아 내 생활도 당분간은 큰 변화를 겪게 생겼다.
술을 끊으려면 인맥을 끊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술은 음식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전제되는 일종의 ‘사회적 의식(儀式)’이다.
고로 술자리가 잦다는 것은 사람을 자주 만난다는 뜻이며
금주하는 생활은 사람을 안 만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축복인지..... 아니면 저주일까?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로 초등학교 동기생인 술친구가 이사를 왔다.
대학에 근무하는지라 퇴근시간이 나와 비슷하고
또한 퇴근길마저 우리 아파트를 거쳐 가게 되어 있다.
게다가 술은 공교롭게도 맥주밖에 못 마시는 체질이어서
소주나 양주를 요인 암살용 독극물쯤으로 여기는 나하고 일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래취향이 동일하다.
우리는 밀폐된 노래방보다 청중이 있는 무대라야 비로소 노래가 터져나온다.
일찍이 성악을 전공하려했던 친구였다.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이공계로 진학했지만 아직도 음악적 열정은 여전하여
청중이 있는 곳이면 어느 새 무대에 올라가
‘시월의 마지막 밤’을 열창하는 친구다.
나 역시 교사 중창단원으로서 뒤늦게 화음의 매력에 빠져있는 처지라
맥주로 불콰해진 둘은 곧장 ‘내 생애 봄날은 간다’를 합창함으로써
온 몸의 음악적 열정을 알코올과 함께 단번에 증발시켜 버린다.
이러니 우리가 주로 누비는 부산의 ㅅ로터리 일대에선
‘환상의 술콤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고로 술 마시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뭇 남편들은 아내보다 술을 좋아한다.
집사람과 친구의 부인은 불행히도 이런 뭇 남편의 아내로서
일주일의 절반은 남편이 아니라 술내 풍기는 웬수인
남정네들과 함께 살기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아무리 술을 즐기기로서니 우린들 이런 아내들의 고충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을 포기하기엔
맥주에 얼룩진 우정이 너무 깊고, 알코올성 음악적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내가 퇴근하면 주로 친구가 먼저 아파트 입구에다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잽싸게 주차장에 차를 집어놓고 집사람에게
가방과 자동차 키를 맡긴다.
가방은 퇴근신고의 의미를 지니며 자동차 키는 집사람이 걱정해마지않는
음주운전 내지는 대리운전의 후유증을 원천봉쇄 시키는 효력을 발생한다.
거기다가 아파트 입구에서 사주경계를 보고 있던 친구는
내가 현관문을 여는 타이밍에 맞춰서 전화를 건다.
‘요 앞에 와 있다. 나온나’
이미 웬수들의 술 사이클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집사람인지라
휴대폰을 통해 울리는 친구의 목소리를 확인하고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체념어린 한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인자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알아서 잡수소이’
어쩌겠는가.
남편의 고향 친구가 술 마시자고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이로써 술을 마셔도 된다는 허가는 잠정적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야말로 ‘알아서 잡숫는’, 적당히 마시는 일만 남았다.
아무렴. 적당히 마셔야지..........
이 순간만큼은 적당히 마실 의지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그러나 보통 5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3차, 4차를 거치는 동안에
어느 덧 인생관이 바뀌어서 ‘살면 얼마나 산다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친구 역시
우리 아파트에서 5분 떨어진 곳인 자신의 아파트에다
차를 주차시키는 즉시로 휴대폰을 꺼내어 마나님한테 신고를 한다.
베란다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친구 부인 역시
우리 집사람과 같은 유형의 체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도 사탄끼리 만났구만............알아서 잡수소이!
그래도 알아서 마시라는 당부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이성과 자제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일정부분 남편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우린 알아서 마신다.
그러나 시각은 오후 5시.
12시경에 점심을 먹었으니 술 마시기엔 최적의 공복상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첫잔의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혹자는,
빈속에 술이 넘어갈 때 유독 짜릿한 까닭을
알코올 성분에 실핏줄이 파열되는 현상이라 갈파하였다.
우리 역시 제 몸의 실핏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빈속 구석구석을 찾아가며 짜릿짜릿한 인사를 나누는
첫잔의 쾌감을 또한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오후 5시경에 문을 연 맥주집이 흔하지 않은 데 있다.
술 생각이 간절한 공복상태의 50대가
셔트가 내려져 있거나 커다란 자물통이 내다걸린 맥주집을 쳐다보면서
감당해야 할 절망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몇 군데 맥주집의 주인 마담을 꼬드겨서
4시에, 늦어도 5시까지는 문을 열어놓도록 세뇌를 시켜놓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쪼을 수 있다’
동서고금의 격언 중에서 만고의 진리를 품고 있는 이 속담이
단골 맥주집의 오픈시각을 앞당기는데 전용되고 있는 것이다.
술이나 음식이나 구미가 당겨야 한다.
음식은 배가 고프면 저절로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공복이라도 술의 경우에는
첫 한 두 잔에는 구미가 아니라 온몸이 당기지만
그 다음부턴 어떤 안주와 곁들이느냐가 구미를 당기게 하는 관건이다.
우리가 맥주를 마실 때는 주로 순대를 땡고추와 함께 먹는다.
순대와 맥주? 게다가 땡고추?
술에 일가견이 있는 술꾼들은 소주 안주가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맥주에는 단연 땡고추이다.
어설픈 이론으로 들리겠지만
뜨거운 소주보다 찬 맥주를 좋아하는 우리 소양인들은
속이 열이 많아 항상 맥주로 냉각을 시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연거푸 들이마시는 맥주로 속이 너무 식었을 경우엔
땡고추를 한 입 베어 물면 이내 속은 불길이 일어 과열상태가 되고
우린 그 불길을 잡기 위해 또 다시 맥주를 속에다 붓는 것이다.
그렇지만 멋대가리 없이 어찌 맨입에 땡고추만 씹을 수 있겠는가?
각종 실험을 거친 결과 땡고추의 안주는 순대였다.
그러니까 순대는 땡고추의 맛을 즐기기 위한 전희(前戱)로서
공복 상태인 술꾼들의 식사대용으로서의 역할도 암암리에 해내는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출출한 공복 상태의 술꾼이 맥주를 한 잔 들이킨 후 짜릿함을 만끽한다.
안주(按酒)로 고소한 순대를 한 토막 입에 넣는다.
그 안주로 땡고추를 한 입 베어 문다.
당장 입안이 화득화득해진다.
그 땡고추가 질러놓은 불길을 잡기위해 맥주를 얼른 한 잔 마신다.
그 안주로 순대, 또 그 안주로 땡고추........
이렇게 해서 즐거운(?) 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순대와 땡고추를 내놓는 호프집은 없다.
이것은 가족처럼 느껴지는 단골손님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메뉴이다.
갓 문을 연 이른 시각에 들이닥친 낯선 첫손님이
메뉴판에도 없는 순대와 땡고추를 찾는다면 쫓겨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재래시장까지 한달음에 뛰어가서
순대와 땡고추를 사다주는 주모의 넉넉한 인정은 또한 그대로
술맛을 돋구는, 또 다른 차원의 ‘고급 안주’인 것이다.
‘타던 말도 갈아보자!’
술이 거나해지면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구호다.
소위 ‘순찰’을 돌자는 신호다.
ㅅ로터리 일대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맥주집이 즐비하다.
최소한 서너 군데는 인정상 방문해야 한다.
순찰을 돌다보면 어느 덧 목구멍까지 노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성악가가 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심신을 정화한 후 ‘아리아’를 부르는 가수가 있고,
술을 마셔서 심신을 승화(?)시킨 후 ‘망부석’을 부르는 술꾼이 있다.
우린 단연코 후자에 속하는 독특한 성악가이다.
따라서 우리가 잘 가는 실내포장센타의 밴드마스터는
우리가 곡목을 선택하기 전에 벌써 스스로 알아서 곡을 짚어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채은옥의 빗물’을,
분위기가 무거운 날이면 ‘빛과 그림자’를,
이미 반 술이 넘은 날이면 ‘영일만 친구’부터 반주를 넣어준다.
우리의 노래가 끝나면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지고 ‘앵콜’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면 우리는 ‘신해철의 재즈카페’를 불러제껴서
홀 안의 손님들을 경악시킨 후 거들먹거리면서 자리로 돌아와
여기저기서 건네주는 맥주를 받아 마시기에 바쁘다.
이제 10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친구의 18번,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다.
해마다 10월 마지막 날이면 우린 엄숙한 기분으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주인공이 항문을 절개하고 입원했으니
올 10월 ‘노래농사’는 글러버렸다.
2005. 10. 28.
술친구의 쾌유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