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巧言令色이 鮮矣仁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말을 교묘히 하며, 얼굴빛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고 하셨다.
巧, 好. 令, 善也. 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 務以悅人, 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聖人辭不迫切, 專言鮮, 則絶無可知, 學者所當深戒也. 巧는 좋다는 말이고, 令은 잘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색을 보기 좋게 하여, 밖으로 꾸밈을 지극히 하고 남을 기쁘게 하려 애쓴다면, 인욕이 방자해지고 본심의 덕이 사라질 것이다. 성인의 말은 박절하지 않기에 오로지(그저) 드물다고 말했다면, 곧 절대로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新安陳氏曰 此章仁字 以心之德言 乃專言之仁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 仁자는 마음의 덕으로써 말한 것이니, 곧바로 오로지 말한 仁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巧言亦不專爲譽人過實 凡辭色間務爲華藻以悅人視聽者皆是 주자가 말하길, “巧言이란 또한 오로지 사람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무릇 말하고 얼굴빛을 짓는 사이에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힘씀으로써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이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只爭一箇爲己爲人 若動容貌正 顔色是合當 如此亦何害 但做這樣務以悅人 則不可 단지 자신을 위하느냐 아니면 남을 위하느냐, 이 하나만을 다투는 것일 뿐이니, 만약 행동거지가 바르고 안색이 합당하다면, 이처럼 하여도 역시 무슨 해가 되겠는가? 다만 이렇게 하여 남을 기쁘게 함에 힘쓴다면, 그것은 안 되는 것이다.
只是心在時 便是仁 若巧言令色一向逐外 則心便不在 安得謂之仁 단지 마음이 보존되어 있을 때가 곧바로 仁이다. 만약 교언영색으로써 줄곧 밖으로만 쫓아다니면, 마음은 그 즉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어찌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巧言令色求以說人 則失其本心之德矣 不待利己害人 然後爲不仁也 교언영색으로 남을 기쁘게 하기를 구한다면, 그 본심의 덕을 잃게 될 것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해치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 비로소 不仁이 되는 것이 아니다.
人有此心 以其有是德也 此心不在便不是仁 巧言令色 此雖未是大段姦惡底人 然心已務外 只求人悅 便到惡處亦不難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이런 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없다면 곧바로 仁이 아니다. 巧言令色을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비록 대단히 간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은 이미 밖에 힘쓰고 그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만 추구하니, 곧바로 악한 곳에 이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은 일이다.
容貌辭氣之間 正學者持養用力之地 然有意於巧令以悅人之觀聽 則心馳於外而鮮仁矣 若是就此持養 發禁躁妄 動必溫恭 只要體當 自家直內方外之實事 乃是爲己之功 求仁之要 復何病乎 又曰 小人訐以爲直 色厲內荏 則雖與巧言令色者不同 然考其矯情飾僞之心 實巧言令色之尤者 故聖人惡之 용모와 말하는 기운 사이는 바로 배우는 자가 수양을 유지하고 힘써야 할 곳이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얼굴로 다른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을 기쁘게 하는 데에 뜻이 있다면, 마음은 밖으로 치달려서 仁한 자가 드물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에 나아가 수양하기를 유지하여, 드러냄을 조급하게 하거나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한다면, 행동은 반드시 온화하고 공손해질 것이니, 그저 體에 합당하기만 하면, 스스로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바르게 하는 실제적 일들은 곧 자신을 위한 功이 될 것인데, 仁을 추구하는 요체를 왜 또다시 걱정할 것인가? 또 말하길, “소인은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고, 얼굴빛은 엄하게 하지만 속마음이 나약하니, 그렇다면 비록 교언영색을 하는 자와 더불어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實情을 왜곡하고 거짓을 꾸미는 그 마음을 고찰해본다면, 사실은 교언영색을 하는 자가 더욱 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께서 이를 미워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修省言辭 誠所以立也 修飾言辭 僞所以增也 發原處甚不同 夫子所謂巧令鮮仁 推原而察巧令之病所從來 止是有所爲而然 如未同而言 以言餂人 脅肩諂笑 以喜隨人之類 皆有所爲也 曰有所爲之說甚善 누군가 묻기를, “言辭를 닦아 성찰하는 것은 정성이 이로써 서는 길이고, 言辭를 닦아 꾸미는 것은 거짓이 이로써 늘어나는 길이니, 발원하는 곳이 매우 다른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교언영색이면 仁한 자가 드물다는 말에 대하여, 교언영색의 병폐가 유래한 곳의 그 근원을 미루어 살펴보면, 그저 무엇인가 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에 그칠 뿐입니다. 예컨대 아직 같이할 수 없음에도 말하는 것은 말로써 사람을 낚는 것이고, 어깨를 웅크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기쁘게 함으로써 남을 따르는 부류이니, 모두 무언가 위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무언가 위하는 바가 있다는 말은 대단히 좋다.”라고 하였다. |
2 | ○ 程子曰: “知巧言令色之非仁, 則知仁矣.” 정자왈, “교언영색이 인이 아님을 알았다면, 곧 인을 안 것이다.” 라고 하였다.
問夫子言鮮仁 程子直言非仁 何也 朱子曰 夫子之言 辭不迫切而意已獨至者也 程子懼讀者之不察 而於巧令之中 求少許之仁 是以 直斷以不仁 以解害辭之惑也 누군가 묻기를, “공자께서는 仁이 드물다고 말씀하셨고, 정자는 仁이 아니라고곧장 말하였는데,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공자님의 말씀은 말이 박절하지 않지만, 뜻은 이미 獨至(홀로 지극함)의 경지였던 것이다. 정자는 읽는 자들이 잘 살피지 않아서 교언영색 안에서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仁을 추구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어질지 않다고 곧장 단언함으로써 말을 해치는 의혹을 풀어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聖門之學 以求仁爲要 語其所以爲之者 必以孝弟爲先 論其所以賊之者 必以巧言令色爲甚 記語者所以引二者於首章之次而 其序如此 欲學者知仁之急 而識其所以當務與其所可戒也 聖門의 학문은 仁을 추구함을 요체로 한다. 그것을 행하는 수단을 말한다면, 반드시 효제를 우선으로 하고, 그것을 해치는 것을 논한다면, 반드시 교언영색을 제일 심한 것으로 여긴다. 논어를 기록한 사람이 이 2가지를 첫 장의 다음에다 인용하되 그 순서를 이렇게 한 까닭은, 배우는 자가 仁이 시급한 것임을 알아서 마땅히 힘써야 할 까닭과 경계해야 할 바를 기억하기를 바란 것이다.
勉齋黃氏曰 苟知心馳於外務以悅人者之非仁 則反而求之 心存於內而無私當理者 卽仁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진실로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고 남을 기쁘게 함에 힘쓰는 것이 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곧 거꾸로 하여 그것을 구해야 한다. 마음이 안에 보전되어 있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고 이치에 합당한 것이 곧 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上章好犯上作亂 是剛惡 此是柔惡 聖賢深惡焉 운봉호씨가 말하길, “윗 장의 윗사람을 범하고 난리를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剛惡이고, 여기의 것은 柔惡이니, 성현들께서 이를 깊이 미워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胡氏曰 此章大意似聖人觀人 然未嘗不警省學者 觀其辭甚嚴 蓋警省學者之意爲多 동양호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의 큰 뜻은 성인께서 사람을 관찰하시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배우는 자를 警省(경계하고 반성함)하도록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말씀이 매우 엄한 것을 살펴보면, 대체로 배우는 사람을 警省하게 하려는 뜻이 많다.”라고 하였다.
知巧言令色之非仁 只就此句飜轉看 則知直言正色之爲仁 然此只就言色上論 蓋仁是心之德 延平先生所謂當理而無私心者也 凡欲動於中 則心私矣 其接於事不當於理者 皆非仁也 夫致飾於外 不當理也 務以悅人 皆私心也 推此類而言之 則非禮之視聽言動 心私違理 皆非仁 本註人欲肆而本心之德亡 雖就言色上言而 所包者甚廣 又恐學者止於言色上致察 故著程子之說於圈外 使人隨事致察而立心以公也 교언영색이 仁이 아님을 알고서, 그저 이 구절에 나아가 뒤집어서 살펴본다면, 直言(정직한 말)과 正色(바른 낯빛)이 仁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말과 낯빛 위에 나아가 논한 것이다. 대체로 仁은 마음의 덕이니, 延平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이치에 합당하면서 사심이 없는 것이다. 무릇 욕심이 가운데서 동요하면, 곧 마음은 사사롭게 되는 것이다. 일에 접하여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仁이 아니다. 무릇 밖에서 꾸미는 것을 지극히 하는 것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남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는 것도 모두 사심이다. 이러한 부류를 미루어서 말한다면, 禮가 아님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마음이 사사롭고 이치에 어긋난 것으로서 모두 仁이 아니다. 본 주석에서 ‘인욕이 방자해져 본심의 덕이 사라진다’고 한 것은, 비록 말과 낯빛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지만, 포함하고 있는 바가 대단히 넓은 것이다. 그런데 또 배우는 사람들이 말과 낯빛 위에 살피는 것을 지극히 하는 것에 그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정자의 말을 동그라미 밖에다 붙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일에 따라 살피기를 지극히 함으로써 공정함으로 마음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