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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말(2024) / 김민홍 제 7시집 (3)
제2부
26. 가을에
평생 골목에서 살았네
나의 산책도
골목길을 벗어날 수 없었지
들판을 꿈꾸었지만 한 번도
들판과 맞서 보진 못했네
바람을 사랑했지만, 제대로
바람을 거슬러 걸어보지 못했네
비를 사랑했지만 알몸으로
비를 맞아보진 못 했지
들판도, 바람도, 구경만 했네,
내 조그만 창밖으로 골목을 구경하듯 .
구경만 하다 가는 생도
과분한 생이라고?
내 사는 골목길, 늙지도 않는 은행잎만
버석버석 밟히고 있네
27. 겨울비
오래 숨어있던 기억을 깨우며
겨울비 내린다.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몰고 오는 바람 끝에
묻어있던 비.
세상에 떠도는 소외 한쪽을
어깨에 메고
인사동 한 골목으로 들어서는
무명가수의 낡은 기타 위로
시방 겨울비 내린다.
28. 왜냐하면
내가 보내는 엽서는 당신에게 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겐 관심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
사는 일은 부질이 없어서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이유가 없을 때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풀꽃 한 잎도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부질없지만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들만
사랑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외에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29. 비 雨
비를 끌어안고 종일 헤맸어,
“헤매, 헤매, 헤매, 그리고 몽땅 잊어버려!”
종일 되풀이 노래하는 비
잊을 수 없는 걸 잊어주는 게
사랑이라고 비가 노래하진 않았지만
내 몫의 세상은
그저 잊어주는 거라고 노래하고 있는
비속을 종일 헤맸어.
30. 바람 한 점 없는 오후
해만 쨍쨍 내리쬐는 그곳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렸네
그늘 속엔 늘
눈치와 동작이 굼뜬 자의
자리는 없지
나는 조그만 초대장을 들고
그곳에 갔지
초대장을 보낸 이는
누구든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인 듯
정신없이 바쁘더군
나는 뙤약볕 속에 잠시
소품처럼 서 있다
돌아서는 데,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불렀네
맹하니 돌아보니
바람 한 점 없는 오후만
덩그러니!
그곳에 놓여 있었네
31. 결심
언제 나무가 부러지려고 결심하고 부러집니까
언제 바람이 태풍이 되려고 작정하고 불어옵니까
언제 우리가 헤어지려고 마음먹고 헤어집니까
만남은 헤어짐의 전조
언제 당신이 날 사랑하려고 결심하고 사랑했습니까
언제 당신이 날 버리려고 작정하고 버렸습니까
당신은 날 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일종의 오해입니다
우린 이미 서로 버린 지 오래되었지요
서로에게 자신을 버리고
서로에게 서로를 버리고
그리고 당연히 시간이 우리를 떠났습니다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는 게 사는 일이라고
시간이 우리를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당신은 할 만큼 했다고 자위하겠지만
당신이 할 수 없어서
시간이 한 것들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때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32. 판피린
공연이 있는 저녁이면 습관처럼 처들어오는 적막. 녀석은 판피린을 마신다. 판피린이 감기약이 아닌 녀석, 두 병의 판피린을 마시고 연주하러 무대에 올라간다. 대마초 흡연이 범죄인 나라에 산다는 것이 녀석에겐 무슨 의미일까 잠시 생각했다 .
대마초를 피우다 구속되기 전날 밤에도 폭격하듯 드럼을 두드리던, 아직 아이였던 녀석.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그 아이의 드럼을 들었다.
죽었다는 말도 들리고, 공사판을 떠돌며 노동을 한다는 소문도 들리고, 나이 많은 여자와 눈이 맞아 강원도로 갔다는 풍문을 뿌리고 사라진 녀석, 이젠 아이가 아니겠지만, 초겨울 어느 날 면회 가서 만났던 투명한 얼굴, 갑자기 눈물겨운 **고등학교 3학년 4반 내 학생이었던 그 녀석.
33.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시는 해설만 읽힌다
그의 수상 경력, 평판에 의지해
혹시 내가 놓치는 게 있을까 해서
몇 번 다시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명불허전? 그의 명성만 귀에 들어온다
내 귀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몇 번 다시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제안은 수용하기 어렵다
그래도 머뭇거린다
예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3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후
하늘, 흐리고
안개, 산자락 사이 자욱하다.
등 뒤 어딘가에서 숨어
숨을 고르고 있는
익숙하고 오래된 슬픔.
쓸쓸하고
위(胃)가 아프다.
이유 없이 너를 생각했기 때문일까
너 때문에 헤매던 거리 들은
늘 눈물겨웠다
시외버스를 타고 떠나던
네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어디로 갔는지도.
희미하게 창 쪽으로 흔들던 손,
까마득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후다.
35. 그저 냄새나 풍기며
우리는 모두 여자의 몸을 통해 나왔다.
그곳이 계곡이다.
인人 옆에 곡谷을 놓으면
속俗이 되는 인간의 계곡,
우리는 모두 냄새나는 곳을 통과해
세상에 왔으므로
속俗은 온통 냄새투성이라던
늙은 행위예술가의 말이 생각났다.
오늘 안개 내리고
난 종일 속俗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것도 정리되진 않았다.
그저 냄새나 풍기며
사는 날까지 살면 되는 것이다.
36. 당신은
당신은 거리의 정부(情婦)
수시로 모욕과 치욕이 굴러다니는
거리의 똘마니
거리가 조롱하고 거리가 비웃는
당신이 걸어가는 길마다 가로등이
꺼지고, 낙엽도 떨어지다 멈춘다.
그러니까 당신은 가로등과
낙엽의 남편,
거리에 나서면 늘 당신이 있다.
당신을 만나러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선다.
37. 퇴고
어젯밤 써 놓은 시를
아침에 퇴고하다 보면
시간도 퇴고하고 싶다
인생도 퇴고하고 싶은 걸까
내가 퇴고를 잘 안 하는 것은
건방져서가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니고
시간인 인생은 도저히
퇴고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 내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난 거의
즉흥시를 써 온 셈이 된다
늘 순간의 현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 뜨면 습관처럼
혈압약을 삼키고
오늘 하루 뇌출혈 따위는 없길
기대하는 것이다
38. 그렇게들 모였다가
다음에 또 봐요, 안녕, 건강하세요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 중 하나인
사내*가
갓길에 차를 대고 깜빡이를 켠 채
심장이 멎었다
새벽에 행인에 의해 확인되었다
흩어졌던 사람들은 차를 끌고
먼 길을 다시 달려 조문을 갔다
"날 풀리면 또 만나요
詩가 있고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사내에게 받은 마지막 문자였다
*공연 마치고 귀갓길 차 속에서 세상을 버린 싱어송라이터.<보헤미안>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다.(2023)
39. 암전 暗電
암전 暗電 되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본디 소리가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숲도 본디 소리가 없다는 걸
바람이 일러준다
내가 그리움을 꺼도
네가 날 외면해도
결코 꺼지지 않는 소리가
슬그머니 얼굴을 디민다.
40. 양평 가는 길목
양평 가는 길목에 있던
<개성만두집 >이 <투썸플레이스 >로
몸을 바꿨고
개성만두를 사 주시던
황명걸 시인께서는 돌아가셨다
늘 그리워하던 시인의 고향
평양으로 가시진 못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마음 한켠이 쓸쓸해지곤 해서
<개성만두집 >만큼 오래된
고인의 시집 <한국의 아이 >를
다시 읽었다
양수리 가는 길목
마현리 정약용 생가 근처
연근 밭은 올해도 연근을 캐지 않는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다
이맘때면 연근을 사서
한 해 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우송해주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양수대교 건너기 직전
돌미나리밭 주인은
미나리 전집을 내서 대박 난 후
물려받은 돌미나리 농사는 짓지 않고
서울 경동 시장에서 사 온다고 한다
맛이 예전 같지 않아
돌미나리 좋아하던 사람들과
함께 사 먹으러 가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젊었을 때부터
그곳 풍광에 매료된 난
몇 번이나 그 근처에 집을 짓고 살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늙기만 했다
핑계는 병원 옵션을 대고 있지만
전원주택을 관리하며 살 자신이 없어서이다
다만 그곳과 인연이 깊어
스물여덟, 나의 첫 학교 부임지가
양평이었고
요즘은 두물머리 근처
이 나라의 밴드 음악의 전설인
팔순의 원로 기타리스트 스튜디오에
공부하듯 놀러 가곤 한다
41. 전성기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세월이 흘러갔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청년처럼
연주하고 작곡도 하는
팔순의 원로 기타리스트
내게도 전성기가 있었을까?
평생 골목길을 헤매다 보니
노안이 왔고 ,
기저 질환자가 되었고
수시로 병원이었다
이마는 점점 넓어지고
주름이 깊어졌다
머리칼과 수염은 점점 허술해지고
탈색되어 갔다
도피처럼 산사를 기웃거리고
도피처럼 교회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도피처럼 명상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시를 다 읽겠다고 덤벼들기도
했지만, 황당한 일들이었다
그저, 전성기 한번 없이 흘러간
한 인생이 사소하게 저물고 있다
42. 편두통
오른쪽 뇌가 아파요
오른쪽 뇌의 혈관이 아픈 걸까요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어요
편두통을 앓아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시달려본 사람은 말 좀 해주세요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건지
타이레놀도 듣지 않아요
어쩌지요? 병원에 가
M.R.A. 찍어 보라고 쉽게 말하진 마세요.
의료보험이 있긴 하지만요
편두통에도 돈에도
많이 시달리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평생 변두리 회색 동네에서 살았지만
왼쪽 동네로 이사 가면 나을까요?
아니면 오른쪽 동네?
여기저기 치이며 살아서 그렇다구요?
왼쪽 뇌가 아프면 오른쪽 뇌는
괜찮아질까요?
43. 힘
아주 짧은 순간
잡목 숲 틈새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잡목들 스치고 온 햇살
땅이 꿈틀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
곧 싹이 돋을 것이다
여린 살 디밀고, 음지 식물들도
슬그머니 부활할 것이다
44. 그의 유언
첼로를 들으며 임종하고 싶다.
통증은 없길
가능한 강한 마약이라도 써서
일그러진 얼굴로 세상을 마감하지 않길
누가 내게 이런
자비를 베풀어주기 바란다.
만날 사람을 다 만나지 못하고 갈지라도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다.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난 이곳이 아팠다.
음악이 아프고, 커피가 아프고, 나무도 아프고,
강도 아프고, 노을도 아프고, 바람도 아팠다.
그리고 당신, 혹독하게 아픈 당신 때문에
생애 대부분을 울며 지냈지만
겉으론 활기차게 웃었다.
내출혈처럼 소리 죽여 운 내 울음을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곳엔 내가 좋아하는 당신도 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
음악을 들으며 임종하고 싶다.
통증은 없길
강력한 마약이라도 주사해 다오.
부디 흉측한 얼굴로 떠나진 않길!
그리고 날 위해 누구도 울지 말길
누가 이런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란다.
45. 문자 통신
악몽을 꾸었어요
아직 거기 계신 거죠?
잠을 이룰 수 없어요
덜컥 불안해요
시선 둘 데가 없어요
산으로나 가야 할까 봐요
허름한 산장이나 하나 세내어
라면과 봉지 커피나 끓여 팔아볼까요?
산 허리 노을 걸리면
당신 생각이 나겠지만
악몽은 안 꾸겠지요?
별일 없으신 거죠?
악몽으로는 오지 마세요!
46. 트럼펫만 분 여자
공유할 수 없는 감성이
꿈틀대며 옷을 입는다
맞는 옷이 하나도 없다
열아홉 살 때부터
트럼펫 연주자인 그녀는
남미 출신, 국적을 물으면
"똑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세상을 모두
똑같이 읽고 싶었을까
점점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을 연주했고
똑같다는 그녀의 말이
적막하다는 말로 들리기 시작하자
훌쩍 삼십 년이 지나갔다
그녀는 폭삭 늙어서도
트럼펫만 불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47. 당신은 대체 누구?
새벽
내 작은 방에 들어와
낡은 스탠드를 켜면
당신의 얼굴이 잠시 보였다
사라지곤 했다
일기처럼 쓰는 詩
행간 사이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시를 읽고 갈 것이
분명한 당신,
사랑한다고 썼다가 지운다
사랑이란 단어 속에
내 사랑이
허망하게 갇히기 때문에
노래할 때도
힐끔 날 쳐다보곤
사라지던 당신
병상에 누울 때마다
내 옆에 와서 앉아있던
당신은 대체 누구?
하지만, 당신 때문에
중증의 암에서 일어났고
새벽이면 시를 썼다
낮이면 일하고 틈만 나면
혹시 어디선가 당신이 들어줄까
노래를 부르러 다닌다.
48. 어색한 어조(toun)로
그가 무대에 올랐고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는
어색한 어조로
샹송과 팝송을 섞어 불렀다
기타를 치는 그의
손가락이 자꾸 꼬였다
눈을 감았다
여기저기 음정을 벗어났다
강렬한 조명이
그가 쓴 캡 위로 쏟아졌고
챙에 가려진 그의 감은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 공연을 위해 큰맘 먹고
고가의 새 자켓를 사 입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그들이 늦게 도착한 것을 모르는 채
그는 무대에 올랐다
노래하는 내내
아직 도착하지 못한 그들이 떠올랐고
기운이 빠진 그의 목소리는
노래에 집중하지 못했다
쓸쓸한 박수 소리를 들으며
그는 망쳤다는 확신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잘 할 수 있었는데 ---)
하지만, 누구의 탓도 아니다
타고난 성향이 허약했을 뿐!
49. 횡성장
제 이름은 진고동씨여유. 고향은 충청도유. 열여섯에 강원도로 시집 왔슈. 일흔아홉 먹었슈. 첫 서방은유 의용군 갔다 돌아온 후 술만 퍼마시다 행방불명 됐슈. 벼 이삭 누렇게 패던 가을이었쥬. 내 싫어 갔겠지유, 뭐. 집 나간 서방 십 년을 기다리다 친정 엄니가 얻어 준 두 번째 서방은유, 떠돌이 머슴이었는디유, 아들 하나 덜컥 심어 놓고 늦장마에 떠내려 갔슈. 그핸, 유독 농사가 잘되더니만 액이 꼈나봐유. 그러고 보니 서방 둘 다 가슴에 묻었네유. 무덤은 없슈. 다 팔자지유, 생떼 같던 아들놈은 스무 살 때 군대 나가 죽었슈. 지뢰를 밟았다나 봐유. 양구 근처였다는디, 지랄 같은 팔자쥬. 참 애비 얼굴도 모르는 딸년 하나 서울서 공장 다니다 서방 얻어 잘 살아유. 에미 보러 온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유. 내 이름은 진고동씨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정 부친이 지어 주셨겠지유. 아들놈 잃은 후 장돌뱅이로 살아유. 오늘은 내 첫 서방과 국밥 사 먹던 횡성장이유.
50. 속내
나무는 속내를 드러내도 나무다
강은 속내를 드러내도 강이다
하늘의 깊은 속내는 보지 못했지만
하늘이겠지
우리 집 강아지 똘이는 겁돌이지만
면도날 같은 야성 하나 숨기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속내는 가늠할 수 없다
때론 너무 얕아 물고기도 살 수 없고
때론 너무 깊어 누구나 들어가면 익사한다
사랑한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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