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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문의 유적(遺蹟)-관향지 이외의 유적(2)
여기에서는 순흥안씨 선조들의 얼과 고귀한 숨결이 살아 있는 관향지(貫鄕地) 이외의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정자나 사당을 알아본다.
8. 무첨재(無添齋)
무첨재는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세운 서당으로 충북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558-1번지에 있다.
조선 중종 17년(1522년) 왕가의 외손자 순흥안씨 안요가 후학을 교육하고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후학들이 세상을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라는 뜻에서 ‘무첨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1872년 화재로 일부가 타버려 고쳐지었고 1911년, 1948년에도 수리하였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994년에 고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하여 짜 맞추는 수법(익공 양식)을 이용하였다.
가운데 2칸에 널따란 마루를 두어 대청으로 꾸몄고 양쪽 끝방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무첨재는 조선 후기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9. 청대사(靑垈祠)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에 위치한 청대사는 1994년 9월에 건립된 사당으로 순흥안씨 문중 출신 애국지사 4명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홍주의병 안창식 선생과 병찬. 병림 부자, 안항식 선생의 곧은 뜻을 기리는 청대사(靑垈祠)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홍주의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네 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해마다 청양군수, 홍성보훈지청장, 청양문화원장 등이 봉행에 참석하며 순흥안씨 유족대표와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다.
홍주의병 활동으로 안창식 선생 3부자는 옥고를 치렀으며 3·1운동 당시 유림들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파리장서 사건까지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성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으로 1906년 5월에는 단일 전투로는 최대 희생자를 낸 홍주성 전투를 치르다 일본군에게 300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순흥안씨 충의효행 기적비 "비문 중에서" 보면
-전략- ....창식께서는 종제인 화농 항식과 그 아들이자 증조이신 규당. 병찬 그리고 증증조 병림과 함께 홍주의병 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우국충정 누라서 따르겠는가 한 가족이 다함께 생명을 초개같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일 전선에 뛰어드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길이 빛나는 나라사랑 충절의 표상으로 이는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충효에 바탕한 문중의 기상이자 자랑으로서 우리 모두가 몸둘바를 모르게 하는 바이다.
의병운동이 세 불리하여 왜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옥살이를 당하셨는가 하면 증고조 항식어른께서는 대마도에 유배되시는 욕을 당하셨다.
충효절의와 애국정신에 투철한 가문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0. 취우정(聚友亭)
취우정(聚友亭)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음리 사락동(자시락골)에 소재하고 있다.
취우정(聚友亭) 안관(安灌) 선생은 조선조 성종 22년(1491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는 해 갑자사화가 일어나 김굉필, 정여창 등이 화를 입게 되자 크게 통탄하고 벼슬길을 멀리 하였다.
20세에 돈녕부 참봉, 47세(1537년)때엔 사직(司直)이란 벼슬이 내려졌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족질(族姪) 안명세(安名世)가 간신들의 죄를 고하다가 도리어 극형을 받게 되니 이 곳 함안에 내려와 자사락골에 은거하여 학문탐구와 후배양성에 힘썼다.
취우정이란 안관(安灌)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이며 선생이 공부하시던 곳인데 지금은 재실로 이용되고 있다. 취우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가 팔작지붕으로서 『함주지』의 정사조(亭사條)에는 ‘우곡리에 있고 충의 안관의 별장이다.’ 라고 하였으며 중건기는 진성 사람 이가순(李家淳)이 썼다.
이곳에 경남 유형문화재 173호인 근재집(謹薺集)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11. 악양루(岳陽樓)
경남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122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경남도 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고 순흥안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악양 마을 북쪽 절벽에 있는 정자로, 조선 철종 8년(1857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악양루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자 아래로는 남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였으며, 1963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기두헌’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청남 오재봉이 쓴 ‘악양루(岳陽樓)’라는 현판만 남아 있다.
12. 진주 도통사(道統祠)
진주 도통사는 경남도 문화재 제63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1973년에 세운 건물로 공자를 중심으로 주자와 안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에 있는 사묘재실로 순흥안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래 대평면 하촌리 547-2번지에 있었는데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1995년 이곳으로 옮겼다.
민국(民國) 계축년(癸丑年)에 창설하여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주자(朱子)를 배향하고 안자(安子)를 종향(從享)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매년 공자탄신일인 8월 27일에 제향한다.
도통사·동문당·연산재·광명각이 있고 계동문·태극문이 있다. 진주 도통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13. 음성 도통사(道統祠)
도통사의 기원은 고려시대에 아직 문묘가 없을 때 회헌(晦軒)문성공 안향(安珦)선생이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의 영정을 사저의 후원 별당에 봉안하고 받들었는데 이때 원(元)의 사신이 문묘를 배알코자 하니 나라에서는 급히 별당으로 안내하여 그곳을 문묘 대신 배알케 했던 것이다.
이후로 송도에 있는 안향(安珦)선생의 저택이 사후에 그 수제자인 국재 권보(菊齋 權溥)에게로 이어지고 또한 그 자리에 한천사(寒泉祠)를 세워 공자를 주벽으로 하고 주자와 안문성공을 배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한천사가 중도에 폐철되자, 조선시대 영조 10년(1734년)에 충주 지방 유림들이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건립 하였던 것으로 일제 때인 1928년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낸 안경렬(安璟烈)등 지역 유림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3성6현(三聖六賢)을 봉향하던 종래의 규모에 더해 3성9현(三聖九賢)을 제향하는 한편 이곳이 민족정기를 되찾는 유림의 집회 와 항일(抗日)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집합 장소의 역할까지 하게 되자 일제는 강제 철거하였다.
해방후 도통사를 중수하였으나 수난은 계속되어 그곳이 군용지로 책정되면서 사우(祠宇)가 철거당하였다.
그 후 문민시대(文民時代)가 열리면서 복원추진운동이 시작되어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중의 양촌권가3대묘소(陽村權家三代墓所)내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도통사를 유치하여 복원하자는 필요성에 따라 안동권씨 문중에서 필요한 대지 907.5㎡(300평)을 제공하여 정면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형태로 평삼문의 정문이 있고 가운데 담을 쌓고 솟을 삼문을 설치한 총 41평의 규모로서 199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주자(朱子)와 안향(安珦)선생 및 국재 권보(菊齋 權溥), 동암 이진(東庵 李瑱),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덕재 신천(德齋 辛蕆), 노당 추적(露堂 秋適), 근재 안축(謹齋 安軸), 경재 안보(敬齋 安輔)를 봉안하고 있다.
14. 여수 충민사(忠愍祠)
충민사(국가사적 제381호)는 마래산(385.2m)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조 34년(1601)체찰사 이항복(1556~1618) 이 왕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민심을 살펴본 후 통제사 이시언(?~1624)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다.
충민사(忠愍祠)를 세우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임금께 이 사우(祠宇)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여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받음으로써 이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당이 되었는데, 함께 충무공을 기리는 통영의 충열사보다는 62년,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전의일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먼저 제사를 모시는 분으로 하고 당항포 등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칠천량에서 전사한 의민공 이덕기, 충현공 안홍국이 좌우로 배향 되었으며 영조 8년(1732)에 사우를 중수하였다.
안홍국(安弘國)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전관으로서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하고, 정유년에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되어 이순신의 선봉장으로서 통영 중군(統營中軍)이 되어 주사(舟師)를 총괄하여 다스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서서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안골포(安骨浦)와 가덕도해전에서 승리하고, 6월에 다시 왜적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배 한 척의 군졸을 거느리고 수십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는,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충열이 이순신과 다름이 없었으며 공의 사적(事蹟)이 중국의 《황명통기(皇明通紀)》 및 《종신록(從信錄)》·《만력동정기(萬曆東征紀)》에 실려 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충민단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나, 고종 10년(1873) 지역 유림들의 진정으로 건물을 다시 세우고 판서 윤용술이 쓴 충민사 현판을 걸었다. 191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후, 1947년 2칸 집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지역 주민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 1993년 6월 1일 국가 사적 제 381호로 지정되었다.
충민사 하마비 : 충민사 입구에 높이 1.4m, 너비 42cm, 두께 10cm 크기의 작은 비가 하나 서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라 쓰여져 있다. 주로 궁궐, 종묘, 문묘, 성현의 탄생지나 묘 앞에 세워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한 하마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충민사가 그만큼 중요한 곳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 비는 원래 동산동 벅수에서 충민사 쪽으로 약 100m 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으나 우회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15. 영사정(永思亭)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內基)마을 언덕에 위치한 영사정(永思亭)은 사제당(思齊당) 안처순(安處順)의 아들 안전은 명종 8년(1553) 송동면 신평리 백령에 있는 부친 사제당 묘소를 자주 찾아볼 수가 없어 이곳에서 망배하기 위해 영사정을 지었다.
이곳은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양팽손(梁彭孫), 송순(宋純) 등(等)이 교류(交遊)하던 곳이며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안위(安瑋), 이후백(李後白), 안정(安珽), 양사형(梁士衡), 한준겸(韓浚謙) 임제(林悌) 등 많은 제현(諸賢)이 찾아와 과거 사화(士禍)를 회상(回想)하며 가영(歌詠)한 곳으로 명사(明使)인 주지번(朱之蕃)의 글씨 또한 이들 제현(諸賢)의 글씨와 함께 편액(篇額)되어 있다.
죽암처사(竹巖處士)로 불리는 그는 정자 이름을 부친을 오래도록 사모한다는 뜻으로 영사정이라 하였다.
1590년 중수 이후에 서당으로 사용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의 장소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1994년 보수한 것으로 모두 21개의 현판이 있으며 분실을 염려하여 안씨 재실에 많은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중국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藩)의 글씨로 정자 이름을 편액할 만큼 유서 깊은 정자이다.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다.
『용성지』「기문」편에 안전의 아들 안창국이 정자를 중수한 뒤 최철견(崔鐵堅)이 쓴 영사정 중수기가 있다.
최철견은 선조 9년(1576)에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관찰사 이광이 패주하자 전주를 수호하였다. 황해도관찰사·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판서 안위(安瑋)를 비롯한 많은 현인들이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글로써 효심을 노래했다.
판서 안위(判書 安瑋)
나무를 붙잡고 더욱 비통해 하더니(포수증비감 抱樹增悲感)
좋은 정자 지어 효심을 더하는구나(명정기효사 名亭寄孝思)
어버이를 따름은 응당 할 일이니(리정당일사 鯉庭當日事)
예를 배우고 또한 시로써 읊는다(학례우언시 學禮又言詩)
언덕에 서서 나무를 붙잡고 망배하던 효심이 이제 정자를 지어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구나.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은 당연한 일이거늘 돌아가도 그 도리는 변함이 없다. 예를 다하고 마음으로 사모하는 깊은 효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백진(伯珍) 안위는 중종 16년(15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명종 13년(1558) 5월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김인후(金麟厚)
선조에게 효덕을 다하고자(효덕전전세 孝德傳前世)
현판을 영사정이라 걸었구나(정명 영사 亭名 永思)
몹시 취해 정신이 흐릿하니(취광혼부성 醉狂渾不省)
여흥 중에 시작은 거두고저(각작흥중시 却作興中詩)
선조에게 효를 다하고자 현판 이름을 영사정이라 걸었구나. 술이 취해 정신이 맑지 않아 여흥을 즐기며 시를 읊는 것은 사양해야겠구나.
김인후는 오대정에 시가 있어 그곳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사대수(査大受)
영사정의 붉은 문을 열고 들어가(영사정상계주비 永思亭上啓朱扉)
앉고 보니 고아한 효성이 영롱하다(입좌령롱상 룡 入座玲瓏爽 龍)
바위 아래 칠송은 저녁 푸름 깃들고(암하칠송응만취 巖下七松凝晩翠)
뜰 앞의 성긴 달이 석양빛에 들어오네(정전소월침여휘 庭前疎月浸餘輝)
왕조의 창업은 스러졌다 다시 서건만(청성 업잔환부 靑城 業殘還復)
명가의 왕손은 가면 다시 아니 오네(방초왕손거불귀 芳草王孫去不歸)
천고에 흥망은 한도 많은데(천고흥망다소한 千古興亡多少恨)
석양에 화락한 눈물은 옷깃을 적시네(석양화루습인의 夕陽和淚濕人衣)
영사정은 어버이를 사모하며 지은 집이다. 그 효성이 너무나 맑고 지극하여 분위기가 경외롭기 한량없다. 바위 아래 일곱 그루 소나무에 푸른 저녁 안개가 스며들고, 뜰 앞에는 7월 초승달이 황혼 빛에 서둘러 모습을 나타낸다. 한 나라의 왕업은 달처럼 차면 스러지기를 반복하건만, 왕손은 한번 끊어지면 다시 잇지 못한다. 오랜 세월 흥망의 한은 많고 많은데 늙어서 흘리는 지극한 효성의 눈물은 남의 옷깃을 젖게 한다.
1593년 7월 6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남원에 왔던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영사정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시를 지었는데 효에 대한 경외감이 잘 나타나 있다. 전란 중에도 시를 짓는 선비의 품위와 풍류적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당장 오종도(唐將 吳宗道)
만리 정벌을 앞두고 잠깐 누대에 의지하여(만리정인잠의루 萬里征人暫倚樓)
황혼에 홀로 앉아 가을 저녁 바람 쐬는구나(황혼독좌만풍추 黃昏獨坐晩風秋)
천산의 푸르름은 어느 해에 다할 것인가(천산창취하년진 千山蒼翠何年盡)
도처에 포화 연기 이 땅에서 거두는구나(사벽연화차지수 四壁煙花此地收)
황제가 계시는 궁궐은 바다 건너 멀리 있고(단봉제성료해활 丹鳳帝城遼海闊)
아득한 고향생각에 산너머 구름만 바라보네(망운친사월산유 望雲親舍越山幽)
복받치는 이 슬픔 견딜 수 없어 시를 짓는데(불감포수증비운 不堪抱樹增悲韻)
앉아서 나라를 걱정하니 흰머리만 느는구나(소수중화좌백두 搔首中華坐白頭)
만리 타국에 왜를 정벌하러 왔다가 잠시 누각에 앉았다. 황혼에 홀로 앉아 가을 바람을 쐬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루한 전쟁은 끝나지 않고 세월은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도처에는 전쟁의 포화소리 가득하니 어서 빨리 싸움을 끝내고 나라를 지켜야지. 황제의 궁궐은 황해 바다 건너 멀리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어버이 생각. 머나먼 고향 쪽 뜬구름만 바라보네. 환국과 향수와 밀려오는 어버이 생각을 시로써 달래보고자 하나 마음만 심란하여 흰머리만 더하는구나. 오종도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이다.
생전에 못다한 일을 슬퍼하는 사모하는 깊은 효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또한 바로 근처에 있는‘사제당 기념관’에는 안처순의 유품을 모아놓았는데 보물(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이 있으며 한석봉이 표제를 쓴 글씨와 조광조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16. 만수사(萬壽祠)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있는 사묘재실로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시대의 성리학자 문성공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지은 사당이다. 안원형·안면·안정생·주세붕·안중목을 배향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를 배향한 해동사를 별도로 마련하여 놓았다.
안향은 고려시대 유학자로 고려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합격한 후 교서당, 국자사업, 도첨의중찬 등 많은 벼슬을 지냈으며, 후진양성과 유학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안원형은 밀직사, 평장사 등을 지냈으며 안면은 사간원정언, 정당문학 등을 지냈고 안정생은 직제학을 지냈다.
재실내에는 만수사, 내삼문, 강당, 외삼문, 해동사 등이 있는데 만수사는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내삼문 경모문은 3칸이며 외삼문은 3칸, 직사는 5칸이다. 강당인 여경재는 1925년 지은 건물로 5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해동명월’이란 글씨가 걸린 해동사는 안중근을 배향하는 사당인데 현판 글씨는 전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고 전한다.
계담서원(桂潭書院)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에 있다.
을사(乙巳) 명신(名臣) 안명세(安名世) 선생의 춘추정필(春秋正筆)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계담 중원향교유림(中原鄕校儒林)에서 건원통문(建院通文)을 발의(發議) 계담사를 건수세사(建竪歲祀)를 모셨으나 1865년 대원군(大院君)에 의해서 훼철(毁撤)되었다. 현재는 문성공(안향), 문의공(안문개), 문정공(안축), 문간공(안종원), 문숙공(안숭선), 문민공(주세붕), 문순공(이황), 문강공(이석형), 문민공(김일손), 문강공(이지함), 한림공(안명세), 문성공(이이), 사촌공(안덕린), 세마공(안술), 최익현, 홍범식, 김구, 연병호 등 18명현(名賢)을 배향하고 있다.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1009
이안세덕사(鯉安世德祠)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계담서원(桂潭書院)내에 있다.
이안 세덕사는 순흥안씨 양도공파의 선조를 모신 재실이다.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계담서원 內에 있는 이안(鯉安) 세덕사(世德祠)는 순흥안씨 양도공파의 선조를 모신 사당이다.
순흥안씨3파 선조이신 밀직제학공(密直提學公) 휘 석(碩), 정숙공(靖肅公) 휘 순(純), 문숙공(文肅公) 휘 숭선(崇善), 소윤공(少尹公) 휘 숭신(崇信), 감사공(監司公) 휘 숭효(崇孝), 참의공(參議公) 휘 훈(訓), 참판공(參判公) 휘 의(誼), 판서공(判書公) 휘 우하(友夏), 사과공(司果公) 휘 훈(燻), 부사공(府事公) 휘 충세(忠世), 직제학공(直提學公) 휘 명세(名世), 부호군공(副護軍公) 휘 총(聰), 농애공(農厓公) 휘 지(志), 사촌공(沙村公) 휘 덕린(德麟), 호군공(護軍公) 휘 덕룡(德龍), 충의공(忠義公) 휘 덕창(德昌), 악정공(樂正公) 휘 덕선(德宣), 운계공(雲溪公)휘 德鳳(덕봉), 거사공(居士公) 휘 덕붕(德鵬), 세마공(洗馬公) 휘 술(述) 등 20선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60cm 높이의 다듬돌 기단위에 원형 인공 초석을 놓고 원형 민홀림 기둥을 세우고, 이익공 형식의 건축양식으로 마감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맛배 지붕 기와집인데 정면의 주간 거리는 각 150cm이며, 측면은 퇴간부가 140cm, 나머지는 270cm며, 벽은 흙벽으로 막음을 했고, 출입문의 3칸은 각 ‘쌍여닫이 띠 살창’의 ‘들어 열개’형식이며, 오른쪽 끝은 문이 없어 벽으로 마감했다.
처마는 겹처마로 그 깊이는 80cm이며, 각각의 주심포는 이익공 계통의 장혀가 외출목만 있도록 마감했으며, 기둥의 공포는 창방과 주두가 1단계로 되어 있고, 간단한 부재를 건물 내외부에 돌출시켜 대량의 하중을 끝 부분에서 지지하는 형식이다.
내부는 통칸으로 하여 장마루를 깔았으며 외부로 공기창을 만들고, 외곽 담장도 강돌로 막쌓기를 하여 보기에 편하며, 높이도 적당히 낮아 안정감이 있다.
비산단(飛山壇)-나래이션 있음 경북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 산1번지에 있는 비산단(飛山壇)은 11세 휘 전(詮) 통정대부 승지공, 12세 휘 식(湜) 통정대부 참의공, 13세 휘 영보(永保) 가선대부 참판공 등 삼대위(三代位)의 세사단世祀壇이다. 무첨재(無忝齋)-나래이션 있음 충북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558-1번지에 있는 무첨재는 충북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안요(安燿:1481∼1546) 선생이 지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정교한 기법의 건물이다. 1872년 화재로 일부가 타버려 고쳐지었고 1911년, 1948년, 1994년 및 2010년 12월에 중수하였다. 신암서원(新巖書院)-나래이션 있음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에 있는 신암서원은 안관(安灌)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에서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93년 10월 복원되었다. ☞ 본 자료는 순흥안씨3파대종회에서 제작한 것을 편집하였습니다.
계담서원(桂潭書院)-나래이션 있음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에 있는 계담서원은 1824(순조 24)년에 창건했으며, 1865년(고종 2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0년에 순흥안씨 양도공파 종회 고 안동준 회장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현재는 문성공(안향), 문의공(안문개), 문정공(안축), 문간공(안종원), 문숙공(안숭선), 문민공(주세붕), 문순공(이황), 문강공(이석형), 문민공(김일손), 문강공(이지함), 한림공(안명세), 문성공(이이), 사촌공(안덕린), 세마공(안술), 최익현, 홍범식, 김구, 연병호 등 18명현(名賢)을 배향하고 있다. ☞ 본 자료는 순흥안씨3파대종회에서 제작한 것을 편집하였습니다.
☞ 본 자료는 순흥안씨3파대종회에서 제작한 것을 편집하였습니다.
☞ 본 자료는 순흥안씨3파대종회에서 제작한 것을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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